2004년2월2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4:1-31
예수의 이름의 권세
상대적 가치관을 표명하는 그러한 사회에서 한 가지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이 있다고 할 때에 이러한 점도 생각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즉 사람이 보기에 옳은 말이라고 하여도 항상 납득되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알면서도 용납되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악이라고 하는 구조적인 측면의 병폐를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의 인식의 자체적 온전치 못함을 나타내는 것에 기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적 개념에서 기원이라고 하는 것을 자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면서도 자체적 정당함이 있는 기독교적 입장의 인식규정에 대하여서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의 허사라고 함에 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의 근거라고 함 즉 옳고 그름에 대한 당위성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 성도들의 중심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함을 싫어함과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다가 이튿날에 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병이 난 자를 고치신 권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부활하는 도를 전함에 대한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당시에서는 다 경험한 바가 되어지고 또한 현실적으로 그러한 권세가 있음에 대한 객관적 증거라고 하는 것으로 병이 나은 자의 모습이 있으니 반박하지 못하고 다시는 그러한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며 놓아주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따르는 것을 택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이 그러한 자리에서 놓이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이루어졌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서 29절이하 31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들에게 질문되어진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들 족속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에도 질문되어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질문은 권위에서 파생되어지는 그 행함의 당위성 옳다고 납득되어질 정당함이 있는가에 따른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성경에 대하여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놓고 힐문하기 위한 것이지 객관성이 있는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비웃는 자리에서의 사도들을 판단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 때 당시에 있었던 제사장들과 성전맡은 이들과 사두개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납득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싫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그러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성이 있다는 것과 또한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받아들이기를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주님이 오심에 따른 구약적인 성전의 개념이 이미 건물자체가 대행하게 되어지는 실재로써의 실제적 당위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참 성전이기 때문에 그러한 장소적 개념의 성전은 구별적인 것일뿐 실재적인 장소적 거룩함이 예수님과 동일시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에는 성전에 나와야만 한다 또는 그곳에서 구약대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적 당위성이 없게 되어지며 제사장의 직분도 전혀 달라지는 가운데서 그 제사장과 성전맡은 자들의 받게 되어지는 세상적 수입자체가 줄어들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서 그 실재를 말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싫었던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의 권위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함과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음에 대한 증거를 함에 대하여서 그들이 더 이상 힐문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도들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였음을 인용하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 인용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진정으로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시는데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누가 상대적이지 않다고 임의로 규정함에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며 또한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이름의 증거적 차원에서 파생되어진 이름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기뻐하심에서 나타내신 이름입니다.
그렇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예수의 이름은 자존의 절대자 상대적인 판단에서부터 상관없이 자존하시는 자로서 절대의 권위로 기름부으신 메시아이심의 자체적 정당함을 취하신 이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해주시기를 구하며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구함과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잠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8)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라고 함이 예수님의 세례 받으실 때에 또한 변화산에서 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 안에서 화목의 실제를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그 원수와도 화목케 하며 하나님의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받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증거가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들의 기쁨의 증거였으며 그 증거의 힘이었음을 주목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죄악 가운데서 세상의 상대성을 취하는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서 선하게만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또한 그러한 것의 당위성이 부인되어질 수 있다는 여러 가지 상황적 강요에 우리 성도들이 놓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리에 나가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원수라도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것의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부여하는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믿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예수님의 마음에 꼭드는 종들의 자리를 사모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지며 힘 있게 주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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