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5월 31, 2004

보물이 있는 곳에

2004년5월3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2:13-34
보물이 있는 곳에

주위의 가게나 팬시점에 들리게 되면 한 코너에 작은 보석상자, 보석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지만 나의 소중했던 것을 담아 두거나 연인 간에 사랑을 표현할 때에 일시적으로도 사용하기도 하는 작고 예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아마도 그러한 보석함 보다는 금궤(金櫃)를 선호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도 모양과 크기 그리고 열쇠와 잠금과 같은 기호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들을 고려하여서 말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현실적인 측면에서 말할 때에는 은행을 생각하게 되어지는데 부정적 입장에서 말할 수도 있는 금궤적 보관함을 말하는 그야말로 보물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보물인가 하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다면 그 보석함이나 이미 그러한 보물함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 의미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별이라고 하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는 보물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을 놓고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즉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하신 말씀의 뜻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주목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자기 증거를 듣고 있던 무리 중에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명하여 유업을 동생인 자신과 나누게 해달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에 주께서는 책망하심과 소유와 영혼의 상관성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음에 대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먹고 살아야 할 자기 존재에 대한 걱정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심과 그 나라를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 보물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전체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어떤 것이 보물의 실제적 실재이냐는 것입니다. (실제라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재라는 것은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하심을 듣던 자가 주님의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실제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현안적인 실제로서 자신의 재산관리를 위해 주의 말씀하심의 권위라고 하는 것이 사용적 실제를 가질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이 방법적 개념에서 의미가 있을 뿐 실제의 보물은 자신의 육신을 위한 자신의 안락을 책임져줄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주님은 첫 단락에서는 직접적인 측면에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있고 실제적인 것의 분별적 의미와 그것보다도 주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서의 실제와 실재 그리고 그것을 부인하는 성령모독에 대한 이해도 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에는 우리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을 위한 먹고 산다는 개념에서 의식되어질 수밖에 없는 귀한 실재로써의 재물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함에 모순적인 입장으로 괴로워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서 주의 신실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태어났는가? 살기 위해서 먹는가? 그러한 속된 논쟁이라고 하는 것에서 중요한 재물이라고 하는 것에는 우리의 존재를 위한 마음이 다 그곳에 머물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보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시며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종노릇된 자들의 모습인데 우리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그러한 종노릇하는 것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오신 분이심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히 2:15)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고 우리에게 그것이 실재라고 함과 우리의 존재를 위한 것으로써 참된 실제로서의 보물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둠이 합당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부여하신 분이 절대자로서 우리에게 창조주로서 주의 지으신 이 꽃 하나가 솔로몬이 입은 모든 영광만큼의 은혜를 입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 하나님의 언약하심과 그 신실하심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보석이 되어지며 진정한 보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에서 우리의 존재를 위한 보물로써 우리의 마음을 두게 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보물을 주께 드림으로써 하나님나라에 쌓게 되어지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게 하시는 선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부족해서 헌물을 드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경건으로써의 유익의 실제를 위해 그 사랑의, 믿음의, 증거들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 주 예수님 안에서 선포되어지는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의 실제의식과 그에 따른 법적 질서라고 하는 것을 인(印)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고 실재를 규정하신 것을 더럽다 부정하다 여기지 말라고 하심이 베드로에게 주신 환상이시며 다른 사도들에게도 그 실제로 이방인 되었던 헬라인들에게도 주의 복음을 전함에 실제적인 법적 질서를 받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법적 질서이기 때문에 그것을 상황적 상대적 여지가 있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성령모독죄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둡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음에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정당함을 자신의 물질적 소유의 많고 적음에서 찾는다는 것도 어리석은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실재의식을 가지도록 함을 물질적 유익을 위한 수단적 개념으로써만 취급하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하심의 실재를 필요적 개념에서 말할 뿐이지 존재적 개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즉 예수의 이름으로 돈벌이 하는 자들의 중심이 바로 이러한 죄악에서 이미 정죄 받은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주의 말씀을 임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도 동일한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내 존재와 삶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과 그 실제를 분별하여 받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내 존재를 위해서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함은 하나님의 재가적인 차원에서 물질을 구함이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땀을 흘려 땅을 갈고 우리의 존재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타락이후에 주께서 말씀하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허용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를 위한 보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보물은 나를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보물이라고 함을 기억함이 진정한 실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작은 보석함 우리의 중심에 있는 마음에 주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담아내어 주의 사랑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주의 구원하심의 사랑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종들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하여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의 법적 질서의 새로운 실제의 증거자들로서 주의 구원하심과 사랑을 증거하시는 귀한 종들로써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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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2004년5월28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42:1-17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부모의 심정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읽기를 잊어버린 모습을 지적해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자식사랑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창조주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중심의 증거를 받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자녀들을 바라볼 때에 참 그만큼 소위 ‘익어가는 인생’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며 배우며.. 그러한 자녀들이 잠시 어디 나갔다가 다시 품에 안겼을 때에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정적인 의미에서 말하지만 실제적인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정도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속하심의 그 뜻하심의 깊이를 알게 하시는 마지막 본문인 욥기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의 중심에서부터의 진정한 회개가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을 다하신 후에 엘리바스를 비롯한 두 친구에게 책망하심에 대한 것과 욥에게 제물을 가지고 가서 욥이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도록 하라고 하심과 그들이 순종함과 하나님이 욥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선 세 친구들의 조문이 아닌 다른 이들의 조문과 위로가 이어졌고, 하나님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심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아들 일곱과 아름다운 딸들 셋을 주셨음과 욥이 그의 나이 다하도록 향수하였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맥락적으로 볼 때에는 욥의 회개라고 하는 것과 그에 따른 모년 즉 말년에 복을 누림에 대한 것이 주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년’은 ‘아하리트’(tyrIj}a')라는 말로써 종말(eschatology)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특징적인 것은 개인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이 전반적인 또는 일반종말론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의 한 족장의 미래를 통해 그 후손적 개념이라고 하는 자들의 정해진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형태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진정한 실제적 의미를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좀더 주목되어지는 것은 이 조문객들로 온 엘리바스를 비롯한 두 친구들을 위해 욥이 번제를 드리도록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과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 오늘 본문에서는 욥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음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이 메시아 안에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자들로서의 증거적 의미를 가지게 되어지는 것으로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을 증거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욥도 예표적 실제이면서도 실제로 그 구성원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구태여 그 세 친구들이 정당하지 못한 합리성으로 욥을 넘어지게 하는 가운데서 욥에게 권한 적 종속적 자리에 섬이라고 하는 것을 공식화시키심을 보는데 이는 이들이 욥의 종과 같은 자리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 때에 셈과 야벳에게 주어지는 언약의 실체는 셈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야벳족속이 창대하여 셈족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언에서는 함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구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처럼 혈통적으로는 함의 족속적 의미로 보기 어려운 에서의 족속으로 이루어진 세 친구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언약하심의 새 질서 가운데서 함의 족속의 자리에 서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함의 족속으로써 애굽에 속한 자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자손들로서 셈의 족속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출애굽하는 가운데서의 자기 정체성의 확신을 가지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 안에서 새로운 질서로써의 하나님나라의 법이 이미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시행되어지고 있음에 대한 예표적인 실제로서 실제적 증거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합당한 조문객들로부터 그 위로를 받게 하시고 금조각과 금고리 등을 받게 하심은 그러한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사람들로부터 취한 물품에 비교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녀들을 낳음에 있어서도 믿음의 기업들의 아름다움과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의 실재를 예표하는 실제적인 그들의 아들이었음과 그 영광이라고 함 남자의 영광이 되어질 수 있는 그 딸들의 모습은 주의 몸된 교회의 영광의 온전함을 나타내는 예표적 실제의 증거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과 메시아 예수님이 자신과 관련되어진 것임에 대한 증거를 우리 성도들이 또한 증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택한 백성들이 마치 숲에서 길을 잃은 자들이 부모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지는 자의 모습으로써의 욥의 존재적 증거에서 나타나고 있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스 땅의 욥’ 그 뜻은 우스 ‘숲이 우거진(Wooded)’이란 뜻이고 욥이란 뜻은 ‘미움 받는(hated)’, ‘원하는’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러한 중심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이 없는 길에서 그 실제를 알지 못하고 숲이 우거진 곳에서 길을 잃고 그 곳 족속의 시민이 아니므로 미움을 받는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출애굽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곳에서 나오게 되어지는 그 하나님의 실재를 의지하여서 실제를 분별하는 정당한 합리적 지식이 있음으로 지식 없어 망하는 자들의 자리에 서지 않게 되어질 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합리적인 것만을 생각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합당함을 입은 것들을 불의하다고하는 것에 동조하여서 하나님이 없는 그러한 짐승과 같은 자리에 서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를 받은 자들로서 주님의 말씀과 같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자들로서, 욥과 같이 하나님의 기뻐 받으신 바가 되어지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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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5월 27, 2004

그리스도인

2004년5월26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11:1-30
그리스도인

질서를 나타내는 또한 그것을 위한 것으로써 법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연법과 같은 인륜적 개념에서 이해되어지는 불문법적인 측면을 말하거나 인륜적 개념의 법적 개념도 있지만 그러한 것이 성문화되어진 가운데서 일상적인 유익을 위한 규제라고 하는 것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을 잘 알아두지 않는다면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의 법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을 말씀드리게 되어지는데 이는 주의 몸된 교회에 있어서 기본적인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법적인 근거에서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어짐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9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7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단적으로 베드로의 긴 변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때 당시에 있어왔던 유대인들의 관례라는 그러한 측면의 법적인 것의 위반적인 논란이 있어 보이는 새로운 법적 질서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의 기도 중에 있게 되어지는 그 환상 중에 하나님이 깨끗케 하심을 더럽다 하지 말라고 하심에 대한 말씀하심이 그 성도들의 교제라고 하는 것이 유대적인 측면의 법적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의 실제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에 스데반으로 인한 환란으로 흩어진 자들이 유대인에게 주의 말씀하심을 전하고 있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들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옴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권위자라는 존재적 증거자로서 증거되어지는 바나바가 사도 바울을 안디옥에 데려와서 일년가 가르침과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약적 개념에서 있었던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 예언의 내용으로써 흉년을 예고하고 그것이 이루어짐에 있어서 바나바와 사울이 유대교회를 돕는 자리에 파송되어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베드로의 긴 변론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주의 계시로써 주어진 환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과 그 증거를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법적 실제와 그 실제적 상황의 이루어짐과 그것이 베드로에게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들의 여러 가지 삶에서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 가정에 주의 성령이 임하시는 구약적 증표적 증거를 앞서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증거로서의 실제적 성도의 교제를 말씀하심이 베드로의 기도 중에 보여주신 환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후에도 계속 몇 번 더 주목하도록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법적 실제라고 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법은 인간의 족속적 개념을 통해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것에 본래적으로 종속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족속적인 실존의 정당함을 부여하는 언약적 주체로서 나타나고 예언되어져 왔음에 대한 것을 알게 하시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앞서 말씀하심에 대한 것을 위해 한 족속으로써 이스라엘을 주의 기뻐하시는 가운데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러한 개인적 개체적 족속의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종말론적 실재를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심의 것은 이것입니다.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4)

이러한 깨끗케 하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우리의 허물을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서 살아나심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존재의 깨끗함과 의롭다 하심의 실존적 재가를 받은 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의 부르심에서 주의 말씀을 받게 되어지는 자에게서 그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성도들이 받게 하셨는데 이는 안디옥이라는 말이 ‘병거’라는 말의 뜻이 있는 것과 같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으며 그 존재의 거룩함과 정체성을 말하는 자들이 또한 주의 증거자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살게 되어지며 그러한 자리로 성도들이 교제를 하게 되어진다는 점을 마음에 두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의 간다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서 그 마차로 나아감이라고 하는 것과 그곳에 올라서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쳐 알게 하고 믿게 하였던 그러한 모습의 증거적 의미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안디옥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모임과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입게 하시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법이 선포되어지고 있고 받고 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뜻하심이 이미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이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시다 예수께서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자이시며 기름 부어 성별케 하시는 가운데서의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 가운데서의 자신의 교회를 세우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예고되어진 가운데서의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면서도 그리스도의 구별적 질서라는 것의 온전히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전혀 새로운 법적 질서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주의 말씀하심에서 신비적 요소라고 해서 베드로와 같은 체험적인 것이 있으면 형태적으로 동일하게 보인다는 개념만으로 새로운 질서를 말하는 것같이 말한다면 이미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재가적인 차원의 완성이라고 함의 정당함을 입지못하는 가운데서의 정체성 없는 헛된 신비주의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법적 질서를 말씀하시는 특별영감으로써의 베드로의 환상은 일반적인 재가로 인하여서 얻게 되어지는 오늘날 일반성도들의 영적 감동과는 분명한 실제적 구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법적질서를 말씀하심의 계시가 온전히 나타났는데 또 다른 사람을 통한 계시적 모습으로 새로운 질서를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흉내 내는 자의 모습으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법적 질서는 그리스도의 구별하심의 성별적인 정체성에서 얻게 되어진다는 믿음의 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한시적으로 예언해왔던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새로운 법적 질서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죽음에 내어주신 것과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심(롬 4:25)에 대한 것을 믿고 그것에서 우리의 존재와 삶의 정당함을 찾아내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며 또한 안디옥에서 그러한 이름이 주어진 것은 종들로서의 아름다운 고백이 있게 하심인데 그것은 주의 병거에 올라온 자들 즉 믿음의 선한 싸움에 협력하고 힘쓰는 종들의 모습 속에서 이루실 하나님 앞에서의 종들의 사역적인 중심과 고백이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이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예수께서 구주이심을 믿는 자들이 참으로 그러한 가르침에 자기 정체성을 찾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의자로서의 바나바와 같이 그리고 이방의 그릇으로써의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심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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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24, 2004

성령을 모독하는 자의 죄

2004년5월2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2:1-12
성령을 모독하는 자의 죄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순수함을 말하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또한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그러한 것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인륜적으로나 그 가운데 나타내게 되어지는 신앙의 모습은 그렇게 때묻지 않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야곱도 아주 현실적인 방법으로 주의 언약하심을 나타내었고 그것을 사모하는 것으로 팥죽하나로 형의 장자권을 사게 되었던 모습들이 그러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보면 진정 경건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그리고 그러한 것의 여러 가지 논쟁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데, 불경건의 모습으로써 ‘성령을 모독하는 자의 죄’를 지적하심을 깨닫게 됨으로써 좀더 그와는 달리 경건이라고 함이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맹렬한 합리성의 논쟁에 따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바리새인들 자신들의 합리적 언급이 기각되었음에 대한 항소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추인 것이 숨긴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몸과 영혼까지 죽이시는 그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의 말씀이 참새보다도 더 귀한 자로서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관심과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인자되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그를 부인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하게 될 것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 즉 외식과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동일시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현적 귀결적인 언급으로 성령의 모독이라고 함이 무엇인지 그것을 주목함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받을 수 있고 진정한 경건으로써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모독’(blasfhmevw)(블라스페메오)(blasphemy)이라는 말은 ‘말이나 행동으로 더럽혀 욕되게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성령을 모독하다’라는 것은 ‘말이나 행동으로 성령 하나님을 더렵혀 욕되게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령 거룩한 영을 모독하는 것은 그러한 어원적 의미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실제적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기름부으심 성별케하심의 주체적 자기 증거를 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절대자의 재가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그것을 거룩하고 그 존재의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적인 측면의 사역을 말이나 행동으로 부정하다고 함을 말하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인위적인 정당함을 말할 수도 있다는 측면으로 절대자의 재가라고 함을 나타내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절대자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모독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써 그 죄의 실제성이 그의 머리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말로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연약함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받으심 안에서 용서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실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표현적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그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잘못을 할 수 있음이 그러한 잘못을 해도 된다는 당위성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한 당위성을 핑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입장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알면서 자존의 하나님을 알면서도 믿지 않고 외적인 하나님의 이름만 빙자하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착복,(embezzle),횡령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12절에 이르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대한 그 정당함의 따른 가르침을 가지고 세상에 증거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건은 그러한 형태만 취하여서 신비적으로 자기 기호적인 순간적인 판단력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역시 앞서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모독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그 거룩케 하심을 상대적인 평가절하로 인식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정당함을 따른 실제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을 떠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팔아서 자신들의 특정적인 입장과 집단의 정당함을 말하는 거짓됨을 벗어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뜻하신바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정당함을 따라서 말씀하심의 실제를 배우고 증거하는 가운데,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같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리에 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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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를 볼지어다

2004년5월21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40:1-24
하마를 볼지어다

동양 고례(古例)로 보면, 사람의 몸의 형태를 살펴서 사람의 체질을 구분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사람에게 맞는 처방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경향이 있어왔고 요즘도 한방에서는 그러한 전통적인 방법으로 치료하고 처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체형의 사람은 열이 많은 사람이다 또는 어떤 사람의 체형은 어떻다 그래서 식이요법을 통한 건강과 치료를 겸할 수 있다는 그러한 의료적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방적인 근거가 있는 사람의 형태를 보고 판단함이 있지만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그러한 사람의 형태를 보고 판단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견해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 남자인 경우 배가 나온 사람의 모습은 사람들이 보기에 ‘후덕하다’, ‘인심이 좋을 것 같다’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허기진 사람이라고 할 때에 그러한 입장에서 남에게 베푸는 그러한 온정을 말하기 어렵고 그러한 측면에서는 인자함이라는 평판을 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배가 나온 사람이라면 그만큼의 착복이라는 평판과 함께 그가 베풀 때에는 인자함이라는 평판을 받을 수 있고 그 능력이 되어진다는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비만적인 요소와 또한 현대인에게 있어서의 기피적인 입장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시대적으로 맞지 않은 발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의, 비상식적인 사람의 외모판단에 대한, 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인생을 판단하는 것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고 그 욥 자신의 완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도록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주목하며 주의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는 말씀과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하라고 하심에 욥이 자신은 미천하여 입을 가릴 뿐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자기가 한두 번 말하였은즉 대답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음과 그에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욥에 대한 책망을 더하시고 있고 있음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제 ‘하마’를 주목하라고 하시면서 그 특징들에 대한 것을 비교하시면서 책망하시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적 중요성과 그 본문이해라고 하는 것이 유의해야 할 것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음을 말하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반적인 흐름에서 오해되어질 수 있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욥의 대답지 않겠다고 한 말은 강변의 뜻으로 의도적인 주의 말씀하심에 대한 자기 합리성의 외적인 대답이 되어지는 것으로 회개에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중심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예의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써 실제적으로는 자신의 강변된 입장을 못 버리겠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미 회개한 자에게 다시 비유적 책망의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의미없는 것이 되며 또한 욥기서 38장 1절과 3절에서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도 6절과 7절에서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폭풍 중에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과 욥에게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네가 내게 대답할지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하마의 특성이 그 힘이 허리를 비롯한 힘줄에 있음에 대한 것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하마의 모습임을 비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욥 40:16)

욥에 대한 하나님의 일인칭적인 책망은 38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과 40절에서 41절까지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적 전계는 놀랍게도 성경의 순서적 의미를 따라서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 다니엘서의 예언이 나타나고 있는 다니엘서 4장의 내용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짐승과 같이 처함에 대한 것을 욥에게 적용되어진 것으로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다 라는 그 하나님의 판단하심의 주재권의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하늘에서 지혜가 오지 않는 가운데 짐승과 같이 처하게 되어지는 인간의 형상적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으로써의 짐승과 같이 풀을 먹는 그 때의 모습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자기 연민(憐愍)에서 자기 판단의 부당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욥의 모습이 마치 들짐승과 같이 있게 되어지는 자로서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어짐에 따라서 채식동물인 하마의 위용이라고 함을 보고 깨닫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서 39장에서는 독수리 비유에 있어서 정점의 말씀을 하시고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욥 자신의 짐승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 힘의 기원과 기력의 정당함을 인정하지 못한 가운데서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아님에 대한 심판의 판단말씀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의미적 측면에서, 좀더 주목해보면 욥이 하마에 비교되어지는 것은 그 자존적 힘이라고 하는 자기변명의 기본이 하마와 같이 허리와 배에 있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지 못한 존재로서의 동물적 개념에서의 힘 있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식 없어 망하는 자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은 상대적인 합리성으로 다 합리화하는 그 총족성을 말하는 것으로써의 그것이 아니며 상대적 우위에서의 그 실제를 말하는 것에 비로소 기초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 함께 했던 세친구들의 합리성을 꺾어서 힐문하지 못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으로 오히려 그들에게 자신도 상대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에서 동의함으로 실제를 말하지 못하고 지게 된 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자신은 합리적으로 그 승리의 입장에서 옳다고 하는 정당함을 찾지만 그것은 하마와 같은 합리성의 충족성이라는 개념으로 말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의 이유라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절대자의 자존적 정당함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심이 욥의 힘의 근원으로 비교되어지는 하마의 허리와 배의 힘줄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힘의 근원이 굳이 비교되어진다면 앞쪽이 있는 팔이라는 개념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흑암 중에 말씀하신다는 것과 같이 합리성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자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상대적 정당함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개념의 합리성의 충족성 즉 하마와 같은 힘이라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합리성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으로 ‘엘리후’를 통하여 이미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욥 35:2~3)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판단하심은 상대적으로 나타내심에 있어서도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신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을 취하여 말씀하심에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의 형태적인 것만 생각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 판단하심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많은 합리성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하는 죄에 빠진 자기 연민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하마’라는 동물은 문자적인 개념에서만 본다면 ‘공룡’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게 되어지며 지질학적인 개념과 또한 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그러한 과학적 시도로 그 시대를 말하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해석적 가능성에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과학적 연대에 대한 무분별한 적용을 말하는 것보다는 오늘 개역성경 본문에서 주목하는 하마와 같이 그 힘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의 차별성과 그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한 가운데서의 모습들이 합리성만 추구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게 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이 본문에서 실제적인 합당함의 증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합리적인 것만 따르는 가운데 시험에 들지 않고 그러한 시험에 들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책망을 받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욥과 같은 귀한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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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17, 2004

오늘날에 여호와 닛시

2004년5월16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17:1-16
오늘날에 여호와 닛시

금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의 기성세대에 있어서 그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교육의 한 과목으로써 ‘교련’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학교마다 교련 사열을 하기도 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교련복이 학생복과는 별도로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옷을 착용하고 학습을 받을 때에 기본적인 제식훈련과 총검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이 둘 다 모두 기본적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디를 기준으로 ‘삼열 종대 헤쳐모여’ 그러한 명령이 있게 되어지면 그 기준을 알지 못하면 상당히 곤혹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군사정권에 있어서 있었던 기억들로써 지금에는 의미 없게 되어진 것이지만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생존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경우에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개인적으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사적 행동으로 극기 훈련을 스스로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역시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군사 되어진 자들로서의 행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신앙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여호와 닛시’로써 받으며 또한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신 광야를 떠나 그 노정에서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음으로 인해서 모세를 원망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 상황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세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치라고 하심과 그 순종하심에서 반석에서 물이 날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자손들의 시험함의 그 중심은 여호와께서 자신들 중에 계신가 하는 악한 인식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르비딤에서 아멜렉과 싸움을 하게 되어지는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으며 특이한 것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하는 그러한 상황이었는데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승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단을 쌓아 이르기를 ‘여호와 닛시’라고 함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아멜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실 것에 대한 말씀도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 닛시’라고 하심의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모세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이해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신앙의 지표가 된다는 사실에서도 더욱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것은 그 뜻이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심에 있어서 특히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의 기본과 기초를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르비딤에서 있었던 이 두 가지 사건이라고 하는 것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 실제인가 현실적 현안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라고 하는 그러한 기득권적인 판단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 여호와 그 이름에서 그 실제를 찾는 가운데서의 신앙의 표준과 신앙의 실제를 말하는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르비딤에서 물이 없음에 대한 현실적인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의 여부가 판단되어질 것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써 반석에서 물을 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물의 스며듦’이라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가운데서의 반석에서 물을 나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위한 배려하심의 생명의 주가 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반석은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에서 현실처럼 꽉 막혀서 요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이 바위에 견주어진다고 하여도 주님이 함께하심에서는 그 실제의 삶의 인도하심의 실제를 말할 수 있게 하심으로 생명수 강가에 심겨진 복된 자의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써의 아멜렉과의 싸움에서는 아멜렉 족속이라고 하는 존재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의 아들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서가 팥죽이라고 하는 현안적인 실제를 하나님의 언약하심에서의 실제보다도 더 본질적인 실제로 알고 있는 가운데서 언약적 실제의 자리에 그 축복의 자리에서지 못함에 대한 것을 기억할 때에 그의 손자인 아멜렉도 그의 어머니 딤나 정해진 분깃의 아들이라고 하는 역시 현실적인 실제의 분깃을 그들의 존재의 연결선에서 이해하는 족속들의 실제관과 하나님께서는 싸우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러한 선하심과 그러한 선하심을 이루는 것은 형제들의 연합함과 동거함으로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안식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의 실제적인 것은 현안적 상태의 충족성이라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르비딤’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평야’ ‘쉬는 장소’로 표현되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것으로 그러한 장소에서 있게 되어지는 것은 현안적인 개념에서의 본질적 쉼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쩜 모래도 아니고 도저히 물의 스며듦이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숨막힌 바위라고 하더라도 주님이 함께하신 가운데서의 모습이라고 하면 주님이 주시는 생수로서 그 참된 쉼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형제들의 연합함과 동거함의 아름다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그곳에 복을 명하심으로 영생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실제라고 하는 것 쉼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삶의 실제를 말하는 기준이 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함이 오늘날에 있어서 ‘여호와 닛시’임을 말하며 또한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기준에서 그 정당함을 따라서 실제를 분별하는 가운데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의 승리하심을 따르는 승리하신 주님을 따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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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씻는 바리새인들

2004년5월1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1:37-54
손을 씻는 바리새인들

반적인, 일상적인 삶 속에서 위생관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생각하게 될 때에는 여러 가지 고칠 점도 있고 좀 지나친 모습에서 가정의 건강과 관계를 헤치는 경우까지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요리할 때에 계란 껍질을 만진 손으로 씻지 않고 다른 음식을 손으로 만지게 되면 껍질에 있는 복통을 일으킬 수 있는 세균이 묻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음주문화에서 소위 ‘술잔 돌리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고 또 한 그릇의 음식을 여러 사람이 같이 먹게 되어지는 경우도 그러한 위생적 관념의 재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에 긍정적 요소나 편리나 정적인 관계라는 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반론도 많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 구체적인 것을 모두 언급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위생관념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위생관념이라는 점 정신건강, 정신위생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라고 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그러한 사람들의 말에서 육체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을 말하는 가운데 외적인 위생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면서도 정신건강을 위한 것으로써 제한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손을 씻지 않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바리새인들의 손을 씻는 즉 결례에 관한 논쟁은 외적인 위생적 개념보다도 내적인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논쟁적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냐는 것과 그 결과적인 판단을 보겠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의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 외적인 결례로써의 손 씻음의 논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본문을 통하여 주의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7절에서 4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5절에서 5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7절에서 4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과 귀신의 왕의 힘을 입고 있다는 중상모략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음식 잡수실 때에 손을 씻지 않으심에 대한 것을 보는 바리새인들의 ‘결례’(潔例)에 관한, ‘정결케 하는 예식’에 대한 불이행이라는 그들의 이상히 여김과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은 겉은 깨끗하나 속에는 악독(惡毒)이 가득하다고 함을 지적하심을 평토장(平土葬)에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5절에서 5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말씀하심에 대하여서 자신들을 모독한다는 율법사의 볼멘소리와 주님께서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자들로서 화가 있을 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하심의 분명함과 구체적인 말씀하심은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고 하시면서 이 과연 이러한 자들의 세대가 담당할 것과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막았음에 대한 말씀을 하심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맹렬한 합리적 반론만이 무성히 있음에 대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면서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은 외적 위생적 문제에 국한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행하는 중심실제의식의 비교와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실제인가 하는 문제는 타락한 아담이후의 인류역사의 항상 질문되어진 것이며 실제적으로 답변하지 못한 문제의식입니다. 그래서 최선의 노력으로 그래도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것의 실제를 말하는 수준이며 하나님의 뜻하심 마저도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하고 인위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잘 정리하여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음식을 먹을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해낸 바의 결과적인 것으로 손을 씻는다는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신앙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임의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이 아닌 입장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이입시켜서 합리성으로 꾸며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판단으로 그러한 기득권적인 측면에서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을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인위적인 개념으로 말하는 것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러한 자들의 모습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상관이 없다면 그들의 존재라는 개념과 그들이 말하는 지식의 실존의 정당함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본문에서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라는 말씀을 이 세대가 감당하리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증거자들로서의 선지자들의 죽음을 예비하는 악함을 말하는 전형적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구주로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심은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증거적 실제를 의롭다고 하시는 합당하시다고 하시는 것의 주체가 나타났는데 그것에 반대하고 있는 자들로써의 그들의 모습은 대표적 실제로서 심판을 받은 자로서의 모습이라고 함을 규정하심에서 너무도 합당한 심판의 판단을 하신 것입니다.

절대 자존의 하나님의 상대적 표현은 절대 자존적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상대적 합리성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겨우 상대적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의 논쟁에서는 이미 실제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의 모든 맹렬한 합리적 판단이라고 함이 이미 기각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 답변함의 의미적 실제가 없는 가운데 주님은 그곳을 나오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을 씻는다는 개념의 정결함에서 그 정결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존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그 정결함의 실제를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적인 상대적인 것으로 부인할 수 있다는 자들의 상대적 우위에서의 정결의 실제를 말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자들을 상대적으로 부인하는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신원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심’(롬 4:25)을 믿는 가운데서 주어지는 그 의롭다하심을 믿는 자들로써 우리의 삶과 존재와 증거의 실제를 말하는 자들로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인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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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가 거기 있느니라

2004년5월14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9:1-30
독수리가 거기 있느니라

떤 방송프로그램 중에서 최고 오래한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 동물들을 소재로 한 퀴즈 프로그램이었다고 합니다. 야생 동물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의 나름대로의 삶이라고 함과 법칙적인 측면을 주목할 수 있고 그만큼 ‘신비’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룰 소재가 많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고 그러한 덕분으로 소위 ‘최장수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직접적인 측면에서의 그러한 소재를 다루는 것은 아니면서도 비유적 실제로써의 동물들의 생태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함에 대한 질문으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책망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심의 증거와 그 종말론적인 증거를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여러 본문으로 나눌 수 있으면서도 사실 한 본문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고 또한 사실은 오늘 본문이 욥기서 38장과 한 단락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일차적으로 말씀하심의 한 단락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맥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서 주목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비유적 개체로써의 동물들 일일이 다루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외적으로 그러한 것의 총괄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심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마지막에 언급되어지는 독수리의 경우가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동물들의 특징들은 모두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아니라 들짐승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은 사육되어지는 것인데 가축의 우리 보다는 방목적인 개념으로 거의 야생적 개념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직접 경험하여 알 수 있어야 하는 전문가적인 지식이 있느냐는 질문하심의 하나님의 뜻하심은 그만큼 많은 상대적 경험적 지식의 충족성을 말하느냐는 말씀도 되시면서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욥기서 38장과 39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인칭으로 욥에게 말씀하시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3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성경의 흐름을 따라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을 말씀하심으로 경험적 실제를 의식해서 말하고 있는 욥의 기득권적인 해석이라고 함보다도 앞서는 상대적인 취득시효(取得時效)적인 개념으로도 욥의 자기 연민에서 분별없는 자신의 판단의 주권적 입장의 변호라는 개념의 합리성이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때를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 그리고 홍해바다를 건넌 것에 대한 것과 요나의 고기뱃속에서의 스올의 고통을 당한 것에 비교되어지는 질문과 하늘의 법도와 말씀창조에 대한 모방적 입장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성경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다니엘서의 예언을 따르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다니엘서 4장에 나타나고 있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이상 중에 꿈을 해석한 것동일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즉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를 받지 못하여서 느부갓네살의 모습이 들짐승과 같이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단 4:22~37) 그후에 벨사살 왕의 모습 때에 그 나라가 망하게 되어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저울에 달아보고 달아보니 모자라다는 말씀을 하심의 내용이 있어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써 망하게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자로서 그러한 바벨론 그 이름의 뜻으로 ‘혼돈’, ‘흩어짐’의 왕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심인데 그것이 그들의 주검, 시체를 의식해서 독수리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식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욥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총명 지혜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상대적 정황적 자기 연민에 따른 합리성으로 이치를 바꾸고 있는 것에 있어서 그러한 상대적 혼돈(混沌)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하늘의 법도적인 지혜가 그에게 있지 않아서 들짐승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써의 욥 자신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하도록 들짐승들의 생태적인 것을 경험한 지식의 습득을 의식하도록 질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주검이 있는 곳이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신 말씀’(눅 17:37)을 기억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바로 상대적 지혜라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눅 17:37)

말씀을 맺습니다.

리 성도들은 상대적 지혜의 충족성이라는 지혜가 많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배척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많고 적음의 충족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상관관계라고 함의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 믿어지는 것이 지식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존하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도 믿음으로 허용되어지는 범위에서의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가운데서 성숙한 자리에 서며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자리에 서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지혜의 많고 적음이라고 함의 실제를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지혜의 혼돈 음녀 바벨론의 영향권에서, 독수리가 모이는 그곳에서의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으며,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합당한 지혜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욥과 같은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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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10, 2004

만나와 안식

2004년5월9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16:13-36
만나와 안식

어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이름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자신이 누구냐는 반문을 하는 가운데서 별명처럼 자신의 이름이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되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CIA by Jacky chan)

그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는 ‘만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하여서 그 백성들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히브리음역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우리 성도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 기본적 영육적 양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비슷한 것을 말하면서도 그 분명한 차이는 그 인위적인 각색에 따른 영화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판단으로써의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만나와 안식의 상관성을 읽게 하시는 문맥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이해는 구약의 율법주의와 오늘날 안식에 대하여서 바르게 그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자들과의 분명한 차이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1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1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선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시며 그 백성들을 시험하시겠다고 하심에 내용적 의미와 그 구체적인 말씀하심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되어지고 있습니다.

즉 메추라기와 만나가 내림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메추라기보다 처음 보게 되어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을 하게 되어짐을 봅니다. 그리고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둠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충족성이 있었음과 모세를 통한 증거를 어기고 아침까지 남겨둔 자들의 불순종에서 그 자의적으로 준비한 것에 벌레가 생기고 모세의 노(怒)를 발함의 형식의 책망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각기 허락되어진 식량을 거둠을 말씀하시면서 제 칠일 안식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제 칠일 째에는 그 허락되어진 만나와 메추라기를 얻게 하시지 않으셨음에 대한 것과 그 백성들이 제 칠일에 안식하였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1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그들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과 같이 그 음을 그대로 사용하여서 ‘만나’라고 이르게 되었음을 말씀하시고 있고 아론에게 일러 만나 한 오멜을 담아 항아리에 간수하라고 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었음과 또한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먹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만나라고 하는 것과 안식의 그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먹이심의 초자연적 은혜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 자연적인 측면에서의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막을 선택하시고 경험적인 개념에서의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넘어설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실제의 삶과 상관성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동시에 주셨던 선하심을 읽게 하시고 있음에 찬양하게 되어지며 그 합당함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 만나와 안식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만나라는 것이 안식이라고 함에 종속적 의미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 만나를 구하여야 하는 그러한 것, 우리 인생의 쉼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안식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문맥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시험하심의 그 주체적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적 의미에서의 실제적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그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음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어지는 죄악으로 그들이 인식하였던 것입니다.(겔 23:38) 이러한 것은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있게 되었고 이것은 신약 메시야가 오신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를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마치 중요한 인식의 기준인 것같이 쓸데없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면 만나와 안식을 말하는 앞선 1절에서 12절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시험하신다는 주권적 판단과 제정적 그 정당함에서 만나와 안식의 형식적인 실존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해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법적 질서를 자신의 주권적 측면에서 새롭게 하심과 그 실제 의식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주님이 주권적 제정적 정당함에서 안식을 규정하심을 마음에 두게 됨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의롭다 하심은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판단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에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룸에 대한 주권적 권한이라고 함을 부여하는 것까지 주의 부활하심에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 부활하심에서 진정한 구속의 완성과 우리의 존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로서의 영생을 법적으로 이미 취한 자리에 서게 하신 그 날.. 그날이 바로 진정한 안식을 말할 수 있으며 진정한 안식을 주권적으로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제정되어질 하나님나라의 법적 질서는 이미 성경에서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예언되어진 것으로 그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 자신되어진 자로서의 안식의 실제적 주권적 제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안식을 지킨다고 지금의 주일을 의미 없게 실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며 이들은 이미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을 주의 부활하심에서 의롭다 하심을 찾는 자들이 아닌 거짓된 자들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심의 그 말씀하심과 가르치심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심과 진정한 주의 구원하심에서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으며 그러한 것이 일상적인 삶에서의 증거되어지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라고 함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 성도를 사랑하시고 기르시는 목자 되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하고 우리가 날마다 주의 뜻하심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주의 주시는 은혜로써의 영적 양식과 우리의 육신적 양식을 위해 힘쓰며 주님의 주시는 은혜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이르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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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옳으니라

2004년5월9일 소망교회 어버이주일낮예배설교
엡6:1-4
이것이 옳으니라

오늘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어버이주일로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러한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서 인륜의 기본적인 가정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주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주목하도록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서 인식되어지는 가정의 문제들에 대하여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하여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판단되어지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진정한 가정의 소중함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으로 찾을 수 있음과 그 합당함을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의 말씀으로 나누어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써 부모들께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정적인 말씀하심과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약속 있는 첫계명이요 이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에 대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 말씀에서는 아비들에게 자녀들에게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을 주목하면서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이 모두 받아야 할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부모 없는 자식이 없고 자식 된 자녀들로서 그의 후손을 마음에 두며 또한 그러한 삶의 연장선에서 주의 말씀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상대적으로 부모 자식 어느 한편을 위한 말씀으로 남용되어지는 잘못을 주의하여야 함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버이날 어린이날이 이분적인 개념에서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강조적 개념이 오히려 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역할적인 증거의 개체적인 소중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선한 뜻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먼저 부모를 공경함이 옳다고 하심에 대한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부모의 학대적인 입장이라고 함에 있어서 도저히 공경함의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그러한 질문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요즘에 나타나고 있는 악한 현실적 문제로써 자식을 버린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그 자식이 과연 부모를 공경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때에 어떻게 그 답변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인 이론적인 경우도 있고 체험적인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론적인 생각에서도 다 고려하는 합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러한 합리적인 것 경험적인 것에 답변할 수 있는 정도의 납득적인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서 그 여지를 남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여지라고 하는 것에 필요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곤혹스러울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합리성의 여지라는 것 자체에서 비롯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는 그러한 곤혹스러운 질문조차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으로 말씀하시고 그 질서를 세우심에 있어서는, 그 가르침의 입장을 상대적 여지로써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그 의미를 실제로 말할 수 있느냐는 그러한 반문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중심에서 말씀하심으로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두려워하는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써는 부모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그 존재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라고 함에서 부모의 존재와 권위를 인정하고 귀하게 또 그 질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부모로써 자녀들에게 대하여 취할 바 옳은 것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들이 모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부모 없는 자식이 없고 자식은 부모로서의 모습으로 서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의 삶의 모습을 또한 배워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써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배워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세상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그 실제를 말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소위 부모의 실제도 모르고 패역한 자들로써 서야 하는 그들의 노함을 가르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실제인지 가르치지 않으면서 부모의 실재를 말할 수 있는 것같이 주장하면 제대로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다 상대적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는 무엇이 실제인지 모르고 교만하고 순종하기를 배우지 못하는 가운데서 패역의 세대를 잉태하는 고통을 모두가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서를 상대적으로 환경적으로 그것에서 발생하는 합리적 판단으로 부인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동 학대와 버림과 그 부모를 모르는 자식들로써의 악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함이 옳은 것이며 또한 약속 있는 첫째 계명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사실 이 첫째라는 개념은 인륜적인 개념에서 첫째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십계명에서는 제 1계명에서 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되어진 계명이고 5계명에서 6계명은 인륜적인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구별적인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전체적인 개념에서 정의되어지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서의 인륜적 개념의 첫 계명이라고 하는 것을 제 5계명으로써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 언급되어지는 어떤 율법사가 질문한 첫째 되는 계명의 질문(막 12:28)과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함의 상관성에 대한 언급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의도하시며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막 12:29~34)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러한 첫째라는 개념에 대한 의식이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그러한 인식이 비록 죄악 가운데서 남아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러한 인식의 실제를 상황적으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그 고민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통으로 악함이 자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들에게 주 하나님으로부터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실제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양육하여서 그들이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질서적인 실제를 배워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로서 일할 수 있도록 귀하게 받고 가르쳐야 하며 그러한 것을 배우고 자라도록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음이 또한 아비들 된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자녀 된 세대를 사랑하고 바르게 양육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비를 둔 자들로서 아비 된 자들로서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정한 사랑의 실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실제를 찾을 수 있는 그러한 가르침에서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그 실제의 순종을 배워나가며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인 열매를 맺히게 되어지는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부모 된 자들로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자들로 알아서 귀하게 여기고 그 분명한 실제를 바르게 가르치는 일을 잘 하여서 부모공경으로 하나님 앞에서 큰 일들을 바르게 실제적으로 세울 수 있게 하고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마땅한 것도 실제적으로 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주 안에서 옳은 자리에 서며 옳게 가르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실제를 드러내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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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5월 06, 2004

다비다야 일어나라

2004년5월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9:32-43
다비다야 일어나라

‘물질 만능주의’라는 그러한 말들은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인지상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실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서 생각할 때에는 필요개념에 매이게 되어지는 경우로써 그러한 가치관은 앞서 말한 그러한 개념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살기위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메이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모습 죽음의 종노릇이라고 함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좀 알려진 말을 한다면 생존경쟁이라고 하는 개념은 앞서 말한 것에 대한 현실적인 언급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존세계에서의 우리 성도들의 모습과 그 정체성 그리고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증거되어짐을 받으며 또한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6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가서 중풍병자로 8년동안 고생하던 ‘애니아’를 고쳐줌에 있어서 그 룻다와 사론에 있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6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하는, 여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구제와 선행이 있었음과 그녀의 죽음에 이어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나라’라는 말과 함께 다시 하나님께서 살리심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며 온 욥바의 사람들이 많이 주를 믿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하나님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도바울을 부르시고 그렇게 특출하지 않은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주의 피로 주의 가르치시는 겸손으로 그릇을 씻으시고 또한 그 교제 속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심에 따라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써 전하게 하심과 그러한 가운데 주의 성령의 위로로 교회가 든든해져가고 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음과 연결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성격은 그러한 하나님께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함에 대한 그 실제적인 사례(事例)들과 구체적인 그 내용적 증거로서의 본문과 그 문맥적 흐름을 통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두 본문은 형식적인 두 이야기로 나눠지면서도 동일한 한 증거로서 주의 몸된 교회의 성장과 주의 위로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증거적인 실제를 우리 성도들로서의 교회가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지기 전 과도기적인 측면에서 신구약적인 성격의 교차적 측면을 생각하게 되어집니다. 이것은 계시하시는 말씀하심이 구약의 성례전적인 측면의 성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것으로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은 다비다를 주의 몸된 교회의 선한 교제과 섬김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나라의 법과 질서 속에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존재로서 언급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먼저 지명 ‘룻다’라고 하는 곳의 지명은 ‘장식’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름은 아브라함과 같이 화란에서 나온 조카 ‘롯’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론’이라는 뜻은 ‘평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베드로가 치료하게 되어진 중풍병자는 ‘애니아’라는 자인데 그의 이름의 뜻은 ‘난산’ 또는 ‘투쟁’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지명과 인명들을 살펴보면서 그리고 그러한 자들과의 상관성에서 애니아를 고치심은 물질적인 개념의 판단에서 비롯되어지는 그러한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의 고질적인 것을 고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조카 롯에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브라함의 언약의 백성임을 나타내시기 위한 뜻하심이 있었는데 그것의 현실적인 측면의 발단을 주목하게 되면 그것은 그 아브라함의 소유와 조카 롯의 소유가 많아짐에 따라서 종들 가운데서 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롯은 심판전에 하나님의 동산과 같았던 소돔과 고모라 평지를 먼저 선택하였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앞에서 그 기업을 말하는 것과 상황적 개념에서 선택적 기업을 말하는 것의 상관성을 놓고 고민하게 되어지는 모습에서 진정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서 그 기업을 선택하는 가운데 주의 뜻하심을 따르게 될 것을 말씀하심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따르는 자의 모습의 당위성을 말씀하시고 있음이 그 난산을 의미하는 애니아를 고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더욱 구체적인 정체성과 삶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는데 그것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욥바’라는 뜻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욥바라는 지역은 특성상 ‘단’이라는 지역과 ‘에브라임’이라는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즉 ‘단’이라는 지역은 ‘재판장’이라는 뜻이요 ‘에브라임’의 뜻은 ‘열매가 많은’이라는 뜻입니다. 즉 실리를 놓고 겨루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아름다운 선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놓고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의 여제자로서 ‘다비다’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하는 여인의 구제라고 하는 것이 참 성도들에게 있어서 모범이 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자의 모습이 주목되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것은 오히려 다비다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다시 살아난 자로서의 그 모습이라고 함에서 더욱 의미를 지니게 하심을 의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전에선 죽은 자로서 한정적인 측면에서 선행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같이 죽은 자로서 또한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같이 살아난 자로서 그 행함이라고 함의 선함을 말함으로 상대적 실리논쟁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 앞에서의 하나님나라의 법적 실재적 증인으로서의 삶과 섬김과 구제라는 것으로써 아름다운 증거가 나타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이 도르가 라는 뜻은 ‘노루’라는 뜻이고 그 다비다 라는 뜻은 ‘암사슴’이라고 함을 말하는 이름을 가진 자인데 솔로몬의 아가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아 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9~13)

주님을 증거하는 실재로서의 솔로몬과 주의 몸된 교회의 실재를 증거하는 술람미 여인에 대한 언급에서 언급되어지는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다비다를 통하여서 증거되어지며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서의 그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법적 질서를 따라서 구제와 선행을 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전에 행하는 그러한 섬김들이라고 하는 것들 어쩜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일반 도덕적인 행함이라고 함과 구제라고 함의 형태를 가진 자의 모습이지만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구제로 진정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모습을 갖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도움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주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른 삶의 질서를 따라서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뜻하심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타내는 가운데서의 한 섬김과 구제라는 주님 나라의 새로운 법적 질서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나타내는 거룩한 산제사를 들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경건의 열매가 맺히는 가운데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부르셨음을 받으며 주께서 동행하시고자 함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 앞에서 주의 말씀하심의 뜻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그러한 거룩한 산제사의 한 모습들이 갖추어져가는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에 부응(副應)하는 은혜, 진정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의 성도들로서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자랑과 사랑이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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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03, 2004

내가 시험하리라

2004년5월2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16:1-12
내가 시험하리라

요즘에 초등학교에서는 소풍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현장학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자연현장체험학습이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어지는데, 그러한 학습활동을 갈 때에는 음료수와 음식을 준비해가게 되어지는 것이 기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음료수라도 준비하게 되어지는데 옛 소풍 때에는 더욱 육체적 활동이 많기 때문에 물을 가져가는 것이 참 요긴했던 것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보통 외지나 산에 가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갈증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는 엘림이라는 곳에서 시내산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는 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라고 함이 기록되어짐과 주님께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심과 하나님께서 시험하시겠다고 하심이 언급되어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좀더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봅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회중이 엘림이라는 곳을 지나 시내산사이 신 광야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을 원망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는데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심으로 일용할 것을 날마다 얻게 하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면서 제 육일에는 갑절을 거둘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 자신의 법을 준행하나 그렇지 않은가 시험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아침에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원망함이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였는데 그 말씀하신대로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며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백성의 원망을 들으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고기와 떡으로 배부를 것에 대한 말씀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리라는 말씀하심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하나의 소풍이라는 개념 또는 요즘의 자연학습이라고 함의 개념으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함에는 상당한 합리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비교되어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시는 학습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그 또한 비교되어질 수 있을 것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유희적 개념이 짙은 지난날의 소풍의 개념보다도 학습의 개념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전혀 학습을 고려하지 않음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삶에 있어서 학습되어지는 것에 그 성적을 통해 그 중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증거하도록 하심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허용하심의 시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애굽을 물품들을 취하게 하셨고 애굽 사람들의 호의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음식이라고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준비할 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마실 물에 대한 논쟁을 지나게 되어지는 마라라는 곳을 지나 물들의 샘이 있는 엘림을 출발하여서 이제 시내산으로 오고 있는 이 여정에서는 그들의 가진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다 바닥이 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그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와 아론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해안가에서 근무하는 군부대를 탐방하는 그러한 방송매체에서 그 군대에서 사용하는 ‘은어(隱語)’로서 ‘자연학습’을 언급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은어(隱語)로써 자연학습이라는 것은 나가서 바다주위에서, 보급선이 늦어지는 경우에, 자체적으로 먹을 것을 충당하는 그러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여건이 준비되어진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 모래바람과 모래지역에서의 추위와 더위라는 곳에서 습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없는 곳에서 초자연적으로 먹을 양식을 준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법과 질서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를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 안식에 대한 것을 이 주님이 주시는 만나로써의 양식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이 이후에 주님의 변화산에서 있게 되어지는 것과 같은 중심에서 주목할 수 있는 증거를 주셨던 것입니다. 즉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을 만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영광의 구름 속에서 주님만을 주목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 영광 가운데서 여호와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주님이심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심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주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심과 같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그러한 기도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광야생활과 같은 삶 속에서 상을 베푸시는 주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허락하신 그 선하신 그 시험의 때를 잘 지나시는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세토록 찬송하는 자로서의 합당한 모습으로 서도록 말씀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욥을 시험하심의 내용과 상통적인 것임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남은 유익이 무엇인가 이익이 무엇인가 그러한 합리성에서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을 잃을 수 있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불평하는 백성들의 모습과 또한 하나님의 자랑이었던 욥의 모습이 시험들었던 그러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상대적 합리성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달아본다는 것은 그 합리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걷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함에서 새로운 합리성의 질서가 세워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의 주어지는 삶에 있어서 주께서 베푸시는 상의 아름다움과 그것의 진실한 실제를 받을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와 같은 중심에서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며 시험의 때를 지나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하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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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것을 가르치라

2004년5월2일 소망교회 어린이주일낮예배설교
잠22:1-6
마땅한 것을 가르치라

오늘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어린이주일예배로 하나님께 경배드립니다. 우리 기성세대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것에 대한 회의적인 측면에서 자녀에게 올바르게 대하지 못하고 또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우리가 회개 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러한 영향력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지며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지 않은 동물들에게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동식물을 만드셨음에 대한 것을 나타내는 것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짐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면 그러한 사랑함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 지혜로 양육함이라고 하는 것은 귀결적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본문 하나님의 지혜의 실제를 받게 되어진 자로서 솔로몬이 지은 잠언의 말씀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이 재물보다도 명예를 선택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빈부가 섞여 살고 있는데 이를 지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슬기로움과 겸손이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한 보응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패역한 자의 길은 올무가 있음과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한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주목하면서 무엇이 마땅한 것인가 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상대적인 사회에서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고 하면 생각하기 나름인데, 마땅한 것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하는 생각을 함에 따른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일반적인 의식과 판단을 따름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도 그 많다는 개념이 진정 마땅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잘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에 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되고 주장하게 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패역한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패역하다는 것은 그 실제를 모르고 행하는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사실인지 말할 수 없으니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고 인륜도 저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행함의 경건도 자신의 유익을 말하는 것같이 말하는 세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대에 패역함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어린 후손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실제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어야 그 인륜적인 것과 그것의 기본이 되어지는 신앙의 경건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순종을 배우고 또한 참으로 바른 세대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제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가운데서 그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함의 실제, 그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참된 신입니다. 그러한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이십니다. 자기의 존재마저도 스스로 간수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상대적으로 능력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가짜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은 어리석은 형상 우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마땅히 가르칠 것을 가르치라고 하시는 것은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심의 실제를 가르치고 그 구원하심 안에서 세상을 실제적으로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합당하며 마땅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의 백성되었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셔서 40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태어난 자들 애굽을 나올 때 그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하였던 자들을 위해 애굽을 나오면서 재정한 유월절 의식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증거임을 가르칠 때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머리 숙여 경배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기억합니다.(출 12:26~27)

이것은 기성세대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반문적인 개념의 질문에서 그 실제로서의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친 것을 통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들이 그것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오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실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은 무엇이 실제인지 상대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그러한 불가지적 입장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으로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주관적으로 상황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동학대와 분별없는 자녀사랑으로 무엇이 실제인지를 배우지 못한 가운데서 패역한 세대를 양산하는 악함을 말할 수도 있는 때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보호받아야 하며 마땅히 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 정당함을 따라서 우리 성도들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 실제인지 모르고 있는 패역한 세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심에 대한 상대적인 실제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 이러한 마땅한 것을 배우도록 가르침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담은 씨앗과도 같은 우리의 후손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하심이 예비되어질 수 있도록 힘써 우리의 후손들을 참되게 사랑하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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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5월 01, 2004

지식 없는 말의 정체

2004년4월30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5:1-16
지식 없는 말의 정체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과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의 상황에 따른 말들이라고 하는 것에서 사람들은 종종 어찌 할 줄 모르게 되어지는 딜레마를 느끼게 되거나 또는 임의적으로 어느 한편을 택하여서 자신의 입장을 취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성경에서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심과 지식이 없으므로 이 백성이 망한다는 말씀하심의 해석을 놓고 정도면에서 타협적인 측면의 합리성을 찾게 되어지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진정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행하는, 택하는 지식에 대한 상충적인 입장을 인해 고통되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욥의 자신에 대한 입장정리라고 하는 것을 삶의 경험적 측면에서 합리적으로 변명한 것에 대하여서 엘리후는 욥이 취한 그것이 헛된 부르짖음이라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또한 지식 없는 말을 했다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후를 통하여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책망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지식 없는 말의 정체는 무엇인지 분별하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함을 사모하는 중심으로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앞서 언급한 내용들 그 중에서 구체적인 것을 지적한다면 욥기 34장 5절에서는 자신의 의를 하나님이 제하셨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과 욥기 34장 9절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고 하는 말을 함에 대한 지적들.., 욥의 언급했던 것들에 대한 이러한 것들이 합리하다고 보느냐는 반문으로써의 하나님을 믿음에 대한 유익이, 이익 무엇이냐는 반문들이 합당하지 않음에 대한 것을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나타내는 하늘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를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하늘을 만드신 것에 대한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성으로 다 말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다는 듯한 입장이 합리적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범죄함과 의로움이라는고 하는 것은 다 사람들과의 상관성을 말하는 것이지 절대자와 상관하겠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자존하심을 믿지 못하는 자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악함을 나타내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이 학대를 받는 것에 대하여서 부르짖게 되어지는데 우리의 존재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어디계신가 그것을 주목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서 말하고 있으니 첨부터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써 그들의 존재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그 악함이라고 함을 인하여서 부르짖음은 악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일의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서 떠맡아서 해결해주어야 하는 고통적인 숙제처럼 하나님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대적인 인식의 분별없음은 그의 말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지식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며 지식 있게 말하나,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함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서에서는 이러한 말씀하심을 기억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경우에 맞게 되어지는 그러한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그 실제를 말하는 것이지 상식적인 경우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그러한 지혜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과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서 상대적인 상식적인 오류라고 함을 가지고 마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합리적이냐고 할 때에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판단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연민이라는 개념에서 자기 자신의 현상적인 판단에서의 실제의식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유익과 이익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진정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실제인가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될 때에 결국 인위적인 자기 본위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실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적인 상식적 판단의 실제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상식적인 판단이 되어질 수 있다고 항상 하나님 절대자의 재가가 있지도 않는 가운데서 그 실제적인 판단이 성립된다고 우기면 그것이 합리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지식이 힘이다 아니다 라는 그러한 판단은 역시 둘 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의 여부로써 같이 생각하고 이야기 하고 상황에 따른 실제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 지혜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비록 그러한 합리적인 형태를 갖춘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지식 없는 말을 하는 자이며 지식이 없는 자들로서 망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삶에 있어서 합리적인 측면의 불공평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것에 대한 변론을 할 수 있고 합리성의 여부를 가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그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믿음으로 행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의 형태를 갖추는 지식 없는 말로써 합당한 자리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책망의 시간을 지나야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라고 함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함의 여부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지식을 말하지 못하는 지식의 형태만 갖춘 그러한 자리에 서서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어지는(호 4:6)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게 되어지는 은혜로써, 그 시험의 때를 지날 수 있고 진정으로 주 앞에서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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