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5월 06, 2004

다비다야 일어나라

2004년5월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9:32-43
다비다야 일어나라

‘물질 만능주의’라는 그러한 말들은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인지상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실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서 생각할 때에는 필요개념에 매이게 되어지는 경우로써 그러한 가치관은 앞서 말한 그러한 개념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살기위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메이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모습 죽음의 종노릇이라고 함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좀 알려진 말을 한다면 생존경쟁이라고 하는 개념은 앞서 말한 것에 대한 현실적인 언급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존세계에서의 우리 성도들의 모습과 그 정체성 그리고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증거되어짐을 받으며 또한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6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가서 중풍병자로 8년동안 고생하던 ‘애니아’를 고쳐줌에 있어서 그 룻다와 사론에 있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6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하는, 여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구제와 선행이 있었음과 그녀의 죽음에 이어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나라’라는 말과 함께 다시 하나님께서 살리심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며 온 욥바의 사람들이 많이 주를 믿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하나님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도바울을 부르시고 그렇게 특출하지 않은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주의 피로 주의 가르치시는 겸손으로 그릇을 씻으시고 또한 그 교제 속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심에 따라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써 전하게 하심과 그러한 가운데 주의 성령의 위로로 교회가 든든해져가고 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음과 연결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성격은 그러한 하나님께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함에 대한 그 실제적인 사례(事例)들과 구체적인 그 내용적 증거로서의 본문과 그 문맥적 흐름을 통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두 본문은 형식적인 두 이야기로 나눠지면서도 동일한 한 증거로서 주의 몸된 교회의 성장과 주의 위로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증거적인 실제를 우리 성도들로서의 교회가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지기 전 과도기적인 측면에서 신구약적인 성격의 교차적 측면을 생각하게 되어집니다. 이것은 계시하시는 말씀하심이 구약의 성례전적인 측면의 성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것으로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은 다비다를 주의 몸된 교회의 선한 교제과 섬김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나라의 법과 질서 속에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존재로서 언급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먼저 지명 ‘룻다’라고 하는 곳의 지명은 ‘장식’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름은 아브라함과 같이 화란에서 나온 조카 ‘롯’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론’이라는 뜻은 ‘평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베드로가 치료하게 되어진 중풍병자는 ‘애니아’라는 자인데 그의 이름의 뜻은 ‘난산’ 또는 ‘투쟁’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지명과 인명들을 살펴보면서 그리고 그러한 자들과의 상관성에서 애니아를 고치심은 물질적인 개념의 판단에서 비롯되어지는 그러한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의 고질적인 것을 고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조카 롯에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브라함의 언약의 백성임을 나타내시기 위한 뜻하심이 있었는데 그것의 현실적인 측면의 발단을 주목하게 되면 그것은 그 아브라함의 소유와 조카 롯의 소유가 많아짐에 따라서 종들 가운데서 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롯은 심판전에 하나님의 동산과 같았던 소돔과 고모라 평지를 먼저 선택하였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앞에서 그 기업을 말하는 것과 상황적 개념에서 선택적 기업을 말하는 것의 상관성을 놓고 고민하게 되어지는 모습에서 진정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서 그 기업을 선택하는 가운데 주의 뜻하심을 따르게 될 것을 말씀하심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따르는 자의 모습의 당위성을 말씀하시고 있음이 그 난산을 의미하는 애니아를 고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더욱 구체적인 정체성과 삶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는데 그것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욥바’라는 뜻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욥바라는 지역은 특성상 ‘단’이라는 지역과 ‘에브라임’이라는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즉 ‘단’이라는 지역은 ‘재판장’이라는 뜻이요 ‘에브라임’의 뜻은 ‘열매가 많은’이라는 뜻입니다. 즉 실리를 놓고 겨루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아름다운 선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놓고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의 여제자로서 ‘다비다’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하는 여인의 구제라고 하는 것이 참 성도들에게 있어서 모범이 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자의 모습이 주목되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것은 오히려 다비다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다시 살아난 자로서의 그 모습이라고 함에서 더욱 의미를 지니게 하심을 의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전에선 죽은 자로서 한정적인 측면에서 선행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같이 죽은 자로서 또한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같이 살아난 자로서 그 행함이라고 함의 선함을 말함으로 상대적 실리논쟁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 앞에서의 하나님나라의 법적 실재적 증인으로서의 삶과 섬김과 구제라는 것으로써 아름다운 증거가 나타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이 도르가 라는 뜻은 ‘노루’라는 뜻이고 그 다비다 라는 뜻은 ‘암사슴’이라고 함을 말하는 이름을 가진 자인데 솔로몬의 아가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아 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9~13)

주님을 증거하는 실재로서의 솔로몬과 주의 몸된 교회의 실재를 증거하는 술람미 여인에 대한 언급에서 언급되어지는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다비다를 통하여서 증거되어지며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서의 그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법적 질서를 따라서 구제와 선행을 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전에 행하는 그러한 섬김들이라고 하는 것들 어쩜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일반 도덕적인 행함이라고 함과 구제라고 함의 형태를 가진 자의 모습이지만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구제로 진정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모습을 갖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도움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주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른 삶의 질서를 따라서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뜻하심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타내는 가운데서의 한 섬김과 구제라는 주님 나라의 새로운 법적 질서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나타내는 거룩한 산제사를 들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경건의 열매가 맺히는 가운데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부르셨음을 받으며 주께서 동행하시고자 함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 앞에서 주의 말씀하심의 뜻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그러한 거룩한 산제사의 한 모습들이 갖추어져가는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에 부응(副應)하는 은혜, 진정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의 성도들로서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자랑과 사랑이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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