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5월 10, 2004

만나와 안식

2004년5월9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16:13-36
만나와 안식

어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이름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자신이 누구냐는 반문을 하는 가운데서 별명처럼 자신의 이름이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되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CIA by Jacky chan)

그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는 ‘만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하여서 그 백성들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히브리음역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우리 성도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 기본적 영육적 양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비슷한 것을 말하면서도 그 분명한 차이는 그 인위적인 각색에 따른 영화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판단으로써의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만나와 안식의 상관성을 읽게 하시는 문맥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이해는 구약의 율법주의와 오늘날 안식에 대하여서 바르게 그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자들과의 분명한 차이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1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1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선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시며 그 백성들을 시험하시겠다고 하심에 내용적 의미와 그 구체적인 말씀하심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되어지고 있습니다.

즉 메추라기와 만나가 내림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메추라기보다 처음 보게 되어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을 하게 되어짐을 봅니다. 그리고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둠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충족성이 있었음과 모세를 통한 증거를 어기고 아침까지 남겨둔 자들의 불순종에서 그 자의적으로 준비한 것에 벌레가 생기고 모세의 노(怒)를 발함의 형식의 책망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각기 허락되어진 식량을 거둠을 말씀하시면서 제 칠일 안식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제 칠일 째에는 그 허락되어진 만나와 메추라기를 얻게 하시지 않으셨음에 대한 것과 그 백성들이 제 칠일에 안식하였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1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그들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과 같이 그 음을 그대로 사용하여서 ‘만나’라고 이르게 되었음을 말씀하시고 있고 아론에게 일러 만나 한 오멜을 담아 항아리에 간수하라고 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었음과 또한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먹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만나라고 하는 것과 안식의 그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먹이심의 초자연적 은혜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 자연적인 측면에서의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막을 선택하시고 경험적인 개념에서의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넘어설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실제의 삶과 상관성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동시에 주셨던 선하심을 읽게 하시고 있음에 찬양하게 되어지며 그 합당함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 만나와 안식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만나라는 것이 안식이라고 함에 종속적 의미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 만나를 구하여야 하는 그러한 것, 우리 인생의 쉼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안식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문맥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시험하심의 그 주체적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적 의미에서의 실제적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그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음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어지는 죄악으로 그들이 인식하였던 것입니다.(겔 23:38) 이러한 것은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있게 되었고 이것은 신약 메시야가 오신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를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마치 중요한 인식의 기준인 것같이 쓸데없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면 만나와 안식을 말하는 앞선 1절에서 12절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시험하신다는 주권적 판단과 제정적 그 정당함에서 만나와 안식의 형식적인 실존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해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법적 질서를 자신의 주권적 측면에서 새롭게 하심과 그 실제 의식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주님이 주권적 제정적 정당함에서 안식을 규정하심을 마음에 두게 됨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의롭다 하심은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판단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에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룸에 대한 주권적 권한이라고 함을 부여하는 것까지 주의 부활하심에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 부활하심에서 진정한 구속의 완성과 우리의 존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로서의 영생을 법적으로 이미 취한 자리에 서게 하신 그 날.. 그날이 바로 진정한 안식을 말할 수 있으며 진정한 안식을 주권적으로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제정되어질 하나님나라의 법적 질서는 이미 성경에서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예언되어진 것으로 그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 자신되어진 자로서의 안식의 실제적 주권적 제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안식을 지킨다고 지금의 주일을 의미 없게 실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며 이들은 이미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을 주의 부활하심에서 의롭다 하심을 찾는 자들이 아닌 거짓된 자들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심의 그 말씀하심과 가르치심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심과 진정한 주의 구원하심에서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으며 그러한 것이 일상적인 삶에서의 증거되어지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라고 함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 성도를 사랑하시고 기르시는 목자 되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하고 우리가 날마다 주의 뜻하심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주의 주시는 은혜로써의 영적 양식과 우리의 육신적 양식을 위해 힘쓰며 주님의 주시는 은혜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이르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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