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5월 31, 2004

보물이 있는 곳에

2004년5월3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2:13-34
보물이 있는 곳에

주위의 가게나 팬시점에 들리게 되면 한 코너에 작은 보석상자, 보석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지만 나의 소중했던 것을 담아 두거나 연인 간에 사랑을 표현할 때에 일시적으로도 사용하기도 하는 작고 예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아마도 그러한 보석함 보다는 금궤(金櫃)를 선호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도 모양과 크기 그리고 열쇠와 잠금과 같은 기호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들을 고려하여서 말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현실적인 측면에서 말할 때에는 은행을 생각하게 되어지는데 부정적 입장에서 말할 수도 있는 금궤적 보관함을 말하는 그야말로 보물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보물인가 하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다면 그 보석함이나 이미 그러한 보물함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 의미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별이라고 하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는 보물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을 놓고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즉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하신 말씀의 뜻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주목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자기 증거를 듣고 있던 무리 중에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명하여 유업을 동생인 자신과 나누게 해달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에 주께서는 책망하심과 소유와 영혼의 상관성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음에 대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먹고 살아야 할 자기 존재에 대한 걱정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심과 그 나라를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 보물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전체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어떤 것이 보물의 실제적 실재이냐는 것입니다. (실제라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재라는 것은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하심을 듣던 자가 주님의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실제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현안적인 실제로서 자신의 재산관리를 위해 주의 말씀하심의 권위라고 하는 것이 사용적 실제를 가질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이 방법적 개념에서 의미가 있을 뿐 실제의 보물은 자신의 육신을 위한 자신의 안락을 책임져줄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주님은 첫 단락에서는 직접적인 측면에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있고 실제적인 것의 분별적 의미와 그것보다도 주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서의 실제와 실재 그리고 그것을 부인하는 성령모독에 대한 이해도 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에는 우리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을 위한 먹고 산다는 개념에서 의식되어질 수밖에 없는 귀한 실재로써의 재물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함에 모순적인 입장으로 괴로워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서 주의 신실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태어났는가? 살기 위해서 먹는가? 그러한 속된 논쟁이라고 하는 것에서 중요한 재물이라고 하는 것에는 우리의 존재를 위한 마음이 다 그곳에 머물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보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시며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종노릇된 자들의 모습인데 우리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그러한 종노릇하는 것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오신 분이심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히 2:15)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고 우리에게 그것이 실재라고 함과 우리의 존재를 위한 것으로써 참된 실제로서의 보물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둠이 합당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부여하신 분이 절대자로서 우리에게 창조주로서 주의 지으신 이 꽃 하나가 솔로몬이 입은 모든 영광만큼의 은혜를 입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 하나님의 언약하심과 그 신실하심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보석이 되어지며 진정한 보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에서 우리의 존재를 위한 보물로써 우리의 마음을 두게 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보물을 주께 드림으로써 하나님나라에 쌓게 되어지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게 하시는 선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부족해서 헌물을 드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경건으로써의 유익의 실제를 위해 그 사랑의, 믿음의, 증거들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 주 예수님 안에서 선포되어지는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의 실제의식과 그에 따른 법적 질서라고 하는 것을 인(印)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고 실재를 규정하신 것을 더럽다 부정하다 여기지 말라고 하심이 베드로에게 주신 환상이시며 다른 사도들에게도 그 실제로 이방인 되었던 헬라인들에게도 주의 복음을 전함에 실제적인 법적 질서를 받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법적 질서이기 때문에 그것을 상황적 상대적 여지가 있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성령모독죄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둡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음에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정당함을 자신의 물질적 소유의 많고 적음에서 찾는다는 것도 어리석은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실재의식을 가지도록 함을 물질적 유익을 위한 수단적 개념으로써만 취급하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하심의 실재를 필요적 개념에서 말할 뿐이지 존재적 개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즉 예수의 이름으로 돈벌이 하는 자들의 중심이 바로 이러한 죄악에서 이미 정죄 받은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주의 말씀을 임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도 동일한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내 존재와 삶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과 그 실제를 분별하여 받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내 존재를 위해서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함은 하나님의 재가적인 차원에서 물질을 구함이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땀을 흘려 땅을 갈고 우리의 존재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타락이후에 주께서 말씀하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허용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를 위한 보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보물은 나를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보물이라고 함을 기억함이 진정한 실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작은 보석함 우리의 중심에 있는 마음에 주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담아내어 주의 사랑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주의 구원하심의 사랑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종들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하여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의 법적 질서의 새로운 실제의 증거자들로서 주의 구원하심과 사랑을 증거하시는 귀한 종들로써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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