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26, 2006

온 세상의 구주 예수

2006년 12월25일 소망교회 성탄축하예배설교
눅 2:1-21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거룩한 이의 탄생,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온 세상이 기뻐해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실제적인 기쁨이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이 상대적인 모순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합당한 진리로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보도에 따르면, 그 보여지는 화면에서 산사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장식이 있음을 주목하면서 상생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했는데, 사실 그러한 것도 옳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라고 하는 그 뜻하심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과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오셨다고 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인류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구주이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음을 인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임을 인하여서 유대를 항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올라가는데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거기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는데 그것은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을 인함이라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기 예수님이 나신 그 지역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 천사가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는 것을 증거하고, 이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들이 자신들에게 알려진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하며 빨리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함으로 인해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지만 마리아는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게 되는 것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그 모든 것을 인하여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며 돌아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쁨과 평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주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는 가운데 분별되어지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기 예수님을 사관에 있을 곳이 없는 모습으로 영접하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주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간략하게 주목하게 된다면, 가아사 아구스도 때에 나타난 호적하도록 명한 시대적 상황과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 그리고 목자와 마리아의 사태에 대한 이해와 중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호적하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이것은 통치자 자신의 통치를 위한 인구조사에 해당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다윗의 잘못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써의 세상적 모습이면서도 주 안에서 구별되어진 주의 백성을 돌아보시며 헤아리심의 일반적인 자기계시로서의 구별되어진 증거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구조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민수기를 중심으로 보면 모세가 처음에 시내산에서 그 광야교회로서의 출발하기 전에 그 백성들을 계수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의 백성들을 계수한다는 것이 그 헤아림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약교회로서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앞두고 있는 이들을 돌아보시고 자기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마음에 두도록하시는 하나님의 헤아리심의 증거를 그 인구조사에서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으로서 발락의 저주를 위한 발람을 통한 축복이 있고 난 바로 다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으로 염병이 있어 죽게 되어지고 그 가운데서도 비느하스와 같은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하는 가운데서 평화의 언약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시험이 올 때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분별하여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받들도록하시는 것으로써의 인구조사가 행하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주의 백성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도록 그의 백성을 헤아림으로써의 본질적 성격에 따른 인구조사와 악을 선으로 이기게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위한 가운데서 그 백성을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의 정당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러한 인구조사에서는 그러한 성격의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통치자로서의 자기의 유익적 개념으로써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은 가운데서 인구조사를 행하는 가운데 그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적인 입장인데 그와 같은 세상적 입장으로써의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이 통치자의 안목과 필요에 따른 것을 위한 호적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관리되어지고 헤아리게 되는 의도와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시행하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나실 아기 예수는 그리스도 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그러한 시대라고 하는 것을 구별하여서 자신의 백성들을 헤아리신다는 증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있고 그 백성들과 같이 됨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자기 계시이시며 또한 자기 백성들을 그 시대적 악함에서도 그것에 국한되어지지 않고 그들을 헤아리시는 주님으로 오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인데,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음에 대한 증거와 그 찬송으로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그 내용입니다.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다는 것의 그 당시 그리고 오늘날의 증거적 사실에 앞서 그것에 대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주목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언이 그 당시 이후에 이루어져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정황적 사태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며 그것에 대한 정당함까지도 예언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5장에서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미 5:2~6)

본문의 예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 예수님의 나심의 장소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것과 그 아기에 대하여서 예언한 것을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시기 전부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바로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자존의 절대의 권위와 그에 따른 합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가운데서 그의 양무리를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에 가르쳐주신 주기도(마 6:9~13)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주장하시는 가운데서 사실규정을 절대 정당하게 말씀하심에 따라 구주 예수님 안에서 정당한 사실을 비로소 말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 보편을 상대적인 보편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며 그들의 중심에 주의 탄생하심 그들의 중심에 예수님의 오심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구교에서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할수 있는 한 예로써, 모 방송사 오늘 인터뷰에서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사상을 초월하여서..'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월' 또는 '초월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보편 자체나, 보편으로의 행보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서 비롯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신적인 입장을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는 경향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Catholic이란 말은 '보편'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신경에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도 동일한 기술적표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상대적인 보편 상대적인 무한개념의 임의적 설정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보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불교도들과의 연합도 취하고 있는 것이 구교의 입장입니다, 불교의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의 '다르마'라는 것은 역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보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규정을 넘어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개념이 비로소 합당한 정당함을 항상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편을 지향하기 때문에 종교를 규정하는 그러한 사상적 보편의 개체적 특성을 넘어선다는 것이 구 가톨릭교와 불교의 연합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으로 같이 활동하고 같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으로서의 제스처로써, 열린다는, 틀을 깬 보편을 지향함으로써 상식적인 보편적 입장의 인식에서는 인정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원적으로 종교라는 어떤 실재자와 연결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써의 규정되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이 그 실재자라고 하는 자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다 신을 의식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미가서 5장에 나타난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는 주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보편의 재가를 통해 사실을 규정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항상 예만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의적 보편이라는 개념과 그 틀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써의 보편을 의지하는 구교 즉 가톨릭교의 입장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의 뜻하심을 비로소 받들지 못한다는 실제적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도 마찬가지로 그 열림이라는 개념의 틀을 넘어서 다르마라는 보편을 상정하지만 그것도 임의적인 보편이요 절대의 보편의 판단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마리아의 사태인식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변경에 머물러 양을 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의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에서 당위성을 비로소 받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 온 백성에게 증거되어지는 기쁜 소식과 땅위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배경적 예언이 되어지는 것은 미가서 5장에서 주목하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미 5:8)

주의 택한 백성들이 열국중과 여러 백성들 중에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세상의 여러 민족 여러 나라에서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들을 권면하시는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이 예언의 내용이며, 그것은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의 '호적'이라는 것을 통해 아주 자연스러운 증거를 구별하셔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러한 '주 예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고후 1:19)을 읽게 되는 종들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룩함의 사실로서의 존재적 무리가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화한 사람들의 보편인식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통용되어질 수 있는 정당함이 있는 관계들과는 달리, 주의 헤아리심의 사실은 편협하다고 할 수 있는 몇몇 목자들과 마리아와 요셉들에게 온 백성에서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는 사실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의 증인적 증거를 몸소 증거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또한 우리에게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전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류와 또한 실제적인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합당한 증거를 받게되는 종들을 의미하며, 후자는 미가서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미 5:4 中)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함'(마 6:9)의 중심이 있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어서'(고후 1:19) 그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 규명을 합당하게 받으며 행하는 사람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중심적 인식과 그 표현은 보편이라고 함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의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종교의 보편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임의적인 상대적 보편의 개념의 변종인 틀을 해체시킨다는 개념에서의 열림이라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과 그 재가 있는 상대적인 보편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개념의 보편성이라고 함을 위해서 상대방의 종교적 입장에 대한 관용의 재스처를 취함으로 사람들의 인식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구걸하는 개념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눅 16:1~9)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온세상의 구주이시면서 주의 택한 백성을 실제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이해의 결핍과 정직하지 못한 모습에서는 모순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그 합리성의 정당함은 임의적인 것이요 절대적이지 못할 때에 그러한 주장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서 주 앞에서 부끄러움의 사실의 판단을 비로소 받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서에서는 그러한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가운데서도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러한 표현과 사실로서 절대적 사실을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음이 이미 예언되어진 성경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미 5:4)

온 세상의 구주이시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생들과 그들에게 주신 바된 것들이 모두 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실존적 구원과 일반적인 잘됨의 구원으로서 그들의 모든 영향력의 실존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관용의 사실도 어디까지냐는 정도적인 규범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실제적 주의 심판하실 때까지 내버려두도록 말씀하심과 또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데로 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적이지 못한 것인데 그러한 것이 마치 실존적인 신이라고 하는 전제로 상관할 사실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측면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불의한 청지기들로서의 예수님의 나심에 대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제스처로 에큐메니칼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서 나와서 오히려 들녁에 머문다고 하여도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라고 하심의 소리를 전해들은 이들 목자와 마리아와 요셉과 같이 주의 나심의 뜻하심과 증거하심을 찬양하고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시는 가운데 그 믿음대로 이 땅에서와 주의 나라 임하실 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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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2월 16, 2006

왕을 부르는 소리

2006년 12월1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23:13-26
왕을 부르는 소리

조금은 오래된 영화입니다만,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 라스트 신(the last scene) 중에 마차경주에 대한 장면이 아주 인상깊은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교적 개념의 월계수를 구별하여서 면류관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하여서 비판하기 위해서 글을 쓰다가 그 연구중에 결국 회심하여서 이 작품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신약성경을 배경하여서 쓰게된 문학작품이면서도, 이러한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오히려 영감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는 부분으로써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람이 저주하기 위해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구약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을 주목할 때에 축복하게 되는 그 모습을 통해서 복음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 핑계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한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두번째로 발락이 발람더러 다른 곳에서 저주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림이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과 그의 신하들을 기다리게 해놓고 여호와를 만나고자 하는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는 말을 받고 그것을 묻고 있는 발락과 신하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노래를 지어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다는 것과 축복의 명을 받았기 때문에 발람 자신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의 힘이 들소같다는 것과 야곱과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크냐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고 그들을 또 사자에 비교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러한 것을 본 발락은 발람을 보고 축복도 저주도 하지 말라고 하자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복음을 바르게 바라보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에서는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근거는 그들의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왕을 부르는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증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문맥적 입장에서 주목하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말에 그 행보를 세차례하게 되어지고 그 다음에 오히려 발락과 함께한 자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첫번째 축복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두번째 저주를 위해 소빔들 비스가에 이르렀지만 앞서 '그들과 같이 되기를 소원하는 자의 중심'(민 23:10)에 이어서 하나님의 식언치 않으시는 신실하심과 함께 그들이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음에 대한 근거로 더욱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회에서의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은 관점을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 것의 중요성은 말할필요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관점이라고 하는 기준이 진정으로 타당한가에 대하여서는 세상에서는 동의적 차원에서 말할뿐 '본래적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 정황적이나마, 본래성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에 그 정당함이 타당함에서도 인정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어떤 저작권이나 로열티와 같은 것 또는 인증에 대한 개념들이 바로 그러한 것을 의식하는 상식으로 우리 주위에서 읽게 되는 개념들과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락 즉 그 이름의 뜻은 '유린하는 자' 즉 '파괴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하는 가운데서 그 행보를 마음에 둘 때에 발람을 초청하게 되는데 그 발람의 뜻은 '백성이 아닌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모사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믿는 구약의 성도들의 존재적 정체성을 부정하도록 하는 합리적인 당위성을 세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속된 표현으로 '절대로 아니다, 또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등등의 절대성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반영되어지는 것입니다. 죄악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핑계할 수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죄악으로 인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의 사실을 미련하게 그와 같은 방법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발람의 저주라는 것 신의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그 확실성을 위한 노력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락이 발람을 통해 저주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자의적 인식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객관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적 정당함을 부인했다고 하는 인식의 확실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학자들의 시끄러움(pannic voices)도 바로 이러한 몸부림의 어설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발락과 발람이 이른 곳인 '소빔'이라고 하는 곳은 '파수꾼' '살펴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현상적 이해에서의 가장 높은 곳으로써의 위치를 선점하는 기득권을 유도하는 곳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장소에서 '비스가'라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절벽, 쪼개진 틈(cleft)'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의 융기나 지각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높은 낭떨어지나 구렁과 같이 벌어진 경계를 말하는 곳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와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그 백성들의 존재와 행보를 주목해서 해석한다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목한 내용중에서는 그들에게는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고 그를 부르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이 있음을 읽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즉 '임마누엘' 사상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마 6:9~13),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다는 것'(살전 2:4)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자기계시와 그것을 근거로한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성도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람은 멀리서 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왕을 부르다'라는 히브리 본문은 '터루야 멜렉흐'라고 말하고 있는데, 부르다는 말인 '터루야'라는 말은 '소리치다', 특히 '깨어지다'라는 뜻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이것은 시끄러워보이는 가운데서도 인식의 납득당위성이 비로소 없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왕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의 그들의 실존이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의 옳게 여김을 받는 그러한 가운데서의 부르다는 말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경우를 볼 수 있고 또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모습에서 주목할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어떤 놀람이라고 하는 것 당황함이라고 함에서의 묘사라고 하면 그 내용적인 것은 후자의 경우 옥합을 깨뜨림에서 읽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 그 여인이 잘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말씀하신 바로서의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여인에게는 모든 자신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새롭게 말하는 기준임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는다 산다는 그러한 상대적 개념과 판단에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주권적 정당한 자신의 증거가 자신의 기준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의 옳음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던 것인데 이것은 바로 그의 행위라고 하는 것 주님을 위해 자신의 깨트림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로부터 정당함을 입는것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정황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그 파생적 당위성을 가지고 본래성을 주장하는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엉둥한 신의 속성적 개념으로써의 임의적 절대의식을 추구한다고 하여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라고 하는 메시야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본래성의 정당함의 실존을 임의적 스스로 취하여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 22, 23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힘이 들소와 같고 그들을 해할 사술과 복술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술법들의 합리성은 있다고 하여도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현상적인 모습으로만 본다면, 여러가지 판단 가능성과 또한 속된 표현으로 만만히 볼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들소들과 같이 힘은 있지만, 다소 조절이나 어떤 이성적 개념의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판단이 있을 수 있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주님가르쳐주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삶이라고 할 때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권세와 당위성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왕을 부르는 중심이 있다고 하면 그 말씀하심 안에서 더욱 신실성의 재가를 받도록 그 말씀을 사모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고백과 같은 자리에 서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세상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현상적으로나마 받지 않도록 노력함도 갖추게 된다는 사실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만왕의 왕 내주깨서 왜 고초당했나..라는 찬송을 마음에 두게 되면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중심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되어지는 왕을 부르는 기도로서의 삶을 영위해나가면서 특히 12월 성탄의 기쁨과 감사로 오늘도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들 속에 함께하며 주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 그리고 다시 오심을 오실때까지 전하고자 하는 중심을 나누기 원합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옳게 여기심에 마음을 두며, 왕을 부르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셔서 주님의 영광을 받들어내는 담지자들로서 세상의 빛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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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1월 14, 2006

미리암의 죽음과 다툼

2006년 11월 1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20:1-13
미리암의 죽음과 다툼

젊을 때는 어떤 연락(宴樂)하는 곳이 더 호감이 갈 수도 있습니다. 젊음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성의 실제를 모두 진실인 것과 같이 받아도 된다는 그러한 호기에 찬 시절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그 시기가 지나면 그런 연락(宴樂)이라고 하는 즐김이라고 하는 것이 식상해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으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잊게 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고 그 선함이 일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현실적 상황에서 지혜를 주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락하는 곳보다도 초상집이라고 하는 곳에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갖는 것이 남은 인생을 경영하는데 한 지혜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인은 축복된 삶인데 무슨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염세적으로 빠질 수도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가 하는 반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는 가운데서 어떤 소망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인생의 소망의 문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제는 계시의 특성으로써의 죽음은 결코 아니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현실적인 삶이라는 골짜기에서 소망의 문을 열어'(호 2:15)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그 구원의 소망을 전해야 할 것은 보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습니다.

죄아래 있는 모습을 취하여 인간적인 모습으로 말한다면,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는 현실의 고통속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냥 연락(宴樂)하는 것에 대한,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것만으로는 소망을 비로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다툼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진정의 소망이 무엇이며, 과연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지는 가운데 거룩함을 말하는 것인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민 20:1)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 가데스에 와서 물이 없음으로 인해 모세와 아론을 공박함을 그 정황적 입장에서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공박의 내용은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심에 따라서 그 백성들을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심에 따라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투었음에 대한 것은 그 상관성이 역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있다는 것과 그것은 광야같은 세상길 걸을 때에 처음부터 마음에 둘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의 문을 보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구약의 성도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의 광야교회생활에서 전제되어진 소망의 문을 이곳에서 보게 하시는 거룩함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먼저 미리암의 죽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가데스에서 죽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미리암.. 그의 이름의 뜻은 '높다'라는 뜻과 동시에 '반란(rebellion)'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높다라는 고귀함과 반란이라는 이 언어적 표현이 미리암의 생애에 그대로 나타났던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먼저 그녀의 '높다'는 이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녀의 생애를 주목하면,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 누나로써 모세가 나일강에 갈대상자에 버리움을 당하였을 때에 모세의 생모에게 유모자격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로서 규정되어지는 현실적인 모세를 먹이도록 하는 아주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미리암이 없었다면 아마도 모세의 생애는 달리 규정되어질 수도 있었을 수 있는 그러한 아주 큰 공로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란'이라는 이름의 뜻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열두 지파의 두령들을 정탐꾼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탐지하려고 보냈을 때에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의견은 약속의 땅을 취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실제할 수 없는 무리한 행보라고 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식은 분노와 슬픔으로 울게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여세를 몰아서 고라일당과 함께 모세의 영도력에 대하여서 이의를 제기하고 그녀와 고라의 지도자적인 입장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고라의 일족은 땅에 삼키움을 당하고, 미리암은 그 외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애굽여자를 모세가 믿음으로 취함에 있어서 반론하다가 문둥병에 들어서 진밖에 있다가 모세가 기도함에 다시 정결하게 되어지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과연 셈족의 특성적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의 이름에서 주목되어지는 것과 같이 높음과 반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데스'(holy)에서 죽음을 본문에서는 첫번째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안에서 그 죄악된 반란이 그 존재적 상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고난이 광야생활을 떠나기 전에 그 인생의 합목적적인 뜻하심임을 헤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함을 살펴본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모세와 아론에 대한 공박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식의 연장선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써의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현실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민 20:3) 이 말은 앞서 있었던 고라의 일행과 고라의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라 모세의 신통술에 죽은 것과 같이 인식하며 반론한 자들의 염병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민 16장 참고, 민 16:41~48)

직접적으로 고라와 함께하였던 미리암과 관계되어져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의 일부에게 공정한 심판으로써의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하여서 아직도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적 입장이라고 하면서 현실적인 실제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이 해석적 실존으로 해석하여 사실로 받지 못하고 액면 그대로의 현실적 실제의식으로써 모세와 아론을 공박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는 그 되어지는 사실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현상적인 현실적 사실이해가 둘다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 정당함을 현실적인 것에서 비로소 둘 것인가 아니면 합당하게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둘 것인가의 문제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자를 택하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의 인도하심의 사실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다는 시비를 내세우는 즉 여호와 하나님과의 시비다툼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현상적 실제인식에서는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그러한 인식이 그들의 눈을 감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하지 못한 비윤리의 반란이라는 성립될 수 없는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자존적 자기 신실하심을 따라서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만되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예표하는 물을 그들이 다투어 마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 무리바의 물은 비로소 투쟁의 물이 아니라 자존자의 은혜의 생명의 은혜로서의 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현실적인 실제에서도 가늠할 수 있도록 광야시대에 그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죄의 사하심을 얻게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의 뜻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하여서 이제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종노릇되어지는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비로소의 중심을 가지지 않게 되어지는 윤리적 선한 열매를 고통속에서도 선하게 맺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언급했던 것과 비교되어 받게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3-15)

귀고리와 패물 연예하는 자의 연락을 따르다가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유하여 거친들과 괴로움을 말하는 아골골짜기 그곳으로 소망의 문을 삼으셨다는 것, 현실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말씀이 진정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사실을 마음에 둘 때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적인 괴로움의 사실의 완성인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종노릇하여 하나님께 어리석게 다투는 자리에 서지 않는 비로소 거룩한 곳에 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리암의 죽음이 게데스에서 이루어진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등지고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진정한 경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경건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심에 있어서 예수님 안에서 현실을 구별하고 이 거친들 괴로움의 골짜기, 아골골짜기를 잘 구별하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진정한 현실적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을 구별하여 현실의 거룩함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임의적인 세상을 사랑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윤리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얻게 되는 현실은 세속인들이 의미를 두는 세상보다도 더욱 합당한 실제적인 현실적 사실이라는 점을 마음에 둘 때에 우리의 작은 삶 비록 그것이 거칠고 고난이고 그로인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강을 건너야할 즈음에서도 거룩함을 말하게 되며 우리의 삶을 주께 드리는 소망의 문이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거룩함의 사실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혜와 영광을 주께 돌리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주 안에서 많은 일을 했다고 하는 지위에 세워질 때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교만하지 않고 내 자신을 쳐서 주께 복종시킴으로 죄로 인한 교만의 사실성과 그 실재를 우리 삶속에 장사시키는, 주의 뜻하심에서 진정한 사실인식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의 귀함과 사실을 따르는 가운데 현실적인 측면으로 하나님께 다투는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의 부활하신 그 뜻하심이 내 속에 이루어지도록 주의 제사장적인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것을 내 삶에서 나타나도록 힘쓸 때에, 참된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수께서 구원의 소망이심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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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06, 2006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

2006년 11월 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6:14-29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

지금 예배드리는 이시간에 마치 90여년만에 가장 따뜻했다고하는 올해 가을날씨의 마지막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듯이 컴컴해지고 비가 퍼붓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내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마치 사람의 시셈이나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심리를 반영하는 듯한 모습에 비교되어지는 것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적 판단이라는 인식의 방법도 있지만 소위 '육감'이라는 몸의 느낌적인 개념의 인식적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철학들도 애매성의 철학이라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논의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여기서 이야기 하기 보다는 소위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평범하게 범죄한 어떤 한 심리의 인식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에 따라서 헤롯이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의 하나라고 하나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임에 대한 상황적 묘사가 나타나는 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와서 춤을 추어 함께한 자들을 기쁘게 한 것으로 인해 그 여아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주겠다면서 자신에서 청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고 그 여아이는 자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함에 결국 헤롯대왕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세례요한의 주검을 그의 제자들이 장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잡히심을 시점으로 시작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적 사역을 먼저 말씀하시고 있고 이어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헤롯의 범죄심리적인 표현을 통해서 의식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 표현의 순서적 기술을 달리하도록 영감하심의 뜻하심과 그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의 이해를 통한 증거를 받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 예수님의 공생애적 시점의 차이를 일반적인 기술을 통하지 않으시고 달리, 그 표현의 순서적 기술을 달리하도록 영감하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먼저 두게 되어지는 것은 다른 복음서와 절적인 차이의 이질성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예수님의 그 사역의 구약적 정당함을 취하시고 있고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의 강조적 표현으로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마가복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그리고 구약적 정당함을 취하심으로써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 헤롯의 범죄심리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헤롯'이라는 말과 '헤로디아'라는 말의 뜻은 '영웅, 또는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과 '영웅의, 영웅의 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구약시대의 기골이 장대함을 통해 힘의 제압을 말할 수 있는 네피림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그러한 네피림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헤롯왕과 그 관계되어진 자들의 모습을 의식하도록 하신 것은 바로 출애굽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12명의 정탐꾼이 그곳을 정탐하였는데 10명이 그곳의 좋음을 보고하면서도 그곳의 네피림과 같은 자들이 있어서 비교할 때에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는 피해의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여론화되어지는 가운데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심히 울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이 그러한 인과관계적인 측면으로 해석되어지지만 이미 하나님의 자존적 선하심에서 예정하신 뜻하심의 결과임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면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출애굽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기골이 장대한 네피림들과 같은 그시대의 영웅호걸과 맞선다고 하는 것이 그만큼 현실성의 사실의 판단에서 불리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적인 위협이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세례요한이 그와 같은 모습의 성례전적인 측면을 바르게 읽을 수있는 증거있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자라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세례를 배풀었으면서 비록 그 자신이 물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의 현실적인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그를 인정하셨음에 대한 실제적인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모습을 가진자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세례의 여러 뜻이 있지만 구별되어진 사랑받는자라는 뜻으로써 받게 되어지는데 이는 다윗과 같이 사랑받는자(beloved)라는 뜻이고 구별되었다고 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재가를 받은 자로서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존재적 증거자가 되는 것이며 그 앞서 출애굽한 구약 교회의 백성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모두 대표하게 되는 성례전적인 입장의 증거를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제압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시각에 따라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현실적인 실제의 사실을 비로소 받는 어리석음에서 울게 되어지는 모습과 같이 애통함이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출애굽을 이루었던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애굽와 바로에게 말하였던(출 3:14,출 5:1-2참고,) 근거로서 자존의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하심과 비교되어지는 사실로써 동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40일동안 주리시고 시험받으실 때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비로소 사실성을 말할 수 있다는 임의성으로 예수님 자신을 부정하도록 하며 그 사역을 막으려는 대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종말의 때에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하는 것과 세례요한이 엘리야로서 구약의 뜻하심을 이루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받들도록 하셨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고 축복하심을 막으려고 시대의 영웅 호걸을 통해 현실적으로 죽임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하고 구약과 동일한 것으로써의 계시적 전진과 완성을 비로소 부인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제 그러한 것을 보시고 공식적인 나서심으로써의 공생애를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그의 사역을 담지하는 그의 자녀들이 비록 죽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며 주의 택한 백성들은 어디서든지 부르시는 가운데서 주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음모적 죄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베드로를 보내심은 주위에 널리 있는 돌맹이들을 들어서 반석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전능성을 말씀하시며 또한 사단의 주의 사역의 한정을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는 역부족이라고 하는 것도 지적하시며 상대적인 측면에서 사단의 방해가 있다고 하여도 주의 뜻하심은 계속되어지며 그의 사역을 주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음의 사역을 재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가운데서의 죽고 사는 상대적인 존재의 시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으로 더욱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정당함의 근거'(고후 1:19)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미 세례요한을 보낸 자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시킨 자로서의 위상적 동등성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본문의 인식을 다른 본문과 동일한 순서를 전제로 하시면서 기록을 귀납적으로 나타내게 하시며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의 이해를 통한 증거를 받게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세례요한의 성례전적인 증거자의 의미를 전제로 볼 때에 예수님이 그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 엘리야는 구약의 디셉사람 엘리야의 재생적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규정적 차원에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디셉사람 엘리야가 아닌 가운데서 요한을 자존적 자신의 절대 합당한 정당함을 통해서 그를 그렇게 규정하심의 당연한 사실을 근거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그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그 존재적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로 가르쳐주신 주님'(마 6:9; 눅 11:2)께서는 그러한 신앙고백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존재적 정체성을 가지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로 분별하여 받게 된다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의 사실해석이 우리 인생의 실존적 정당한 사실인 것을 받을 때에 상대적인 판단에 비로소 의미를 두는 일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죽음이라고 하여도 말입니다.

이제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자유케하신 주님'(히 2:15)을 온전히 따르게 하셔서 사단의 가장 큰 무기로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성도는 두지 않고 상대적인 판단의 평가절하라고 하는 개념에 비로소 의미를 두어 대성통곡을 하는 어리석음을 취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웅 호걸이라고 하는 자들도 감당치 못하는 자들로서의 성도들'(히 11:38)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스코틀랜드 보편상식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에 영향을 주었고 그러한 것이 미국을 통하여서 우리 한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한 거창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실 신앙도 모두 어떤 상대적인 판단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공감되어지는 아픈 모습을 본다고 하겠습니다.

즉 교회 성장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교회의 본질이 판단받는 경향이 너무나 많이 자연스러워져서 이제는 교회의 개척이 작으면 인정되지않고 상대적으로 교회의 개척이 위축되고 고사되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자든 공감하고 있는 것들과 또 하나님께 드림이 상대적으로 외형적인 어떤 특징적인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 섬김의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교회에서의 섬김. 주일학교 봉사 식당봉사 서로 다투다시피되어질 수도 있는 재정관계등 여러 모습들에서 그 작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받으신바가 된다고 하는 것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못하는 현실적 인식 강요라고 하는 것이 또한 그러한 앞선 지적과도 재고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것이라도 그 실존적 귀하고 합당하다는 것을 마음에 둘 수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둘 때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작은 것에서도 실제로 '감사로 제사적 섬김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시 50:23) 이루며 나타내는 종들로서의 영광을 주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의 이해에서 비롯되어지는 증거를 바르게 받으시는 가운데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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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11월 01, 2006

삼켜진 다원주의 지팡이

2006년 11월 1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17:1-13
주님의 지팡이

인생 경영이라는 말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용하게 되지만 어릴때부터 요령을 배우는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가운데서 본능적으로 준비되어지는 것으로서 인식하게 될 수 있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한다면, 인생에 대하여서 조금 알 것같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머리에 이슬이 내리는, 너무 많이 와버린 것과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인생경영에 있어서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선함을 말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음에 대한 것도 알게 될 때에 더욱 인생의 선함과 그 경영이라는 삶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인생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둘 때에 여러 상황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 여러가지 기원과 이해와 상황에 대한 대안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오늘날에 있어서 소위 '다원주의적 시대'라는 말로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 대안들이 있건만 어느 하나만 집착하는 듯한 접근을 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모습으로 옳지 못하다는 비난을 할 수 있는 것이 상식이라는 하는 보편적인 다원적 입장의 판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다원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특히 성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둘 때에 그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의 다원주의적 개념에서 읽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여러가지 해석적 가능성을 따라 해석하고 신앙도 마찬가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진정으로 주의 가르침은 어떤 말씀으로 나타나서 우리 인생경영의 일상적 삶에 계시적 가르치심으로 다스리시기를 기뻐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 성경해석중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가르침으로써 주의 지팡이로서 주의 백성을 안위하는 그러한 가르침과 그것을 행하는 종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각 종족을 따라 열둘 지팡이를 취하게 하고 각 지팡이에 열 두 지파의 두령들의 이름을 그 지팡에 쓰게 하고 레위 자손의 막대기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하셔서 그것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본문과 세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튿날 모세가 증거 장막 안에 들어가 보니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음과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고 기록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그들 자신이 모두 죽게 되었다고 망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말을 하고 있고,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라는 말을 하고 있음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또 앞으로 더하게 되어지는 다원주의적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것이 주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여러 '합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도 들 수 있는데 그러한 원망을 그치게 하는 말씀으로 우리를 헤이리시며 헤아리도록 하시는 말씀으로서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러 인생막대기 중에 어느 것이 주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주의 택한 백성을 위로하는 안위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시 23:4)로 받게 되는가에 대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해석은 본문 문맥적 흐름 속에서 세워지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기에 먼저 문맥적 흐름속에서 본문의 독특성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도록 하시고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탐지하라고 하였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속된 표현으로 그 땅은 '그림의 떡'이지 결코 취할 수 없다는 현실적 당위성에서 실제적 판단을 말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기까지 한 상태에 하나님의 임재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백성들이 받게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 민수기 15장의 말씀이후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합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결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힘들어도 오히려 애굽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인 것으로 인식하고 돌아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이미 출애굽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말씀하셨는데도(민 15:41), 이들은 이제 상황적 논리를 위해서 고라와 그 함께한 자들이 모세의 권위라고 하는 것이 분수에 지난다는 것을 말하면서 자신들의 레위지파적 입장에서의 합리성을 의지하는 중심으로 말함에 모세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고라 일족은 땅이 갈라져서 삼키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과 섭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합리성에 잡혀서 모세가 고라자손을 죽였다는 그러한 말로 어지럽게 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염병을 명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여서 향로에 불을 담아 향을 두어 그들에게 가서 속죄하라는 것을 말하고 그것에 순종하여 아론이 그들에게 가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적 정황속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문맥적 정황을 살피게 되는 것은 고라 자손과 그들의 연민적 정황을 읽어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염병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다원주의적 합리적 당위성을 생각하게 하는 것과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무엇이 사실인가 그것에 대한 가치관은 상대적이라고 할 때에 절대의 인증이 없는 가운데서는 임의적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러한 가치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고 지적인 판단의 이상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인생을 괴롭히는 병 중에 '간질'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염되지는 않지만 의식적 통제가 어려운 행동을 하게 되는, 생각과 달리 행동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된 표현으로 '지랄병'이라는 병으로 알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주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잘 사용되어지기 민망한 말입니다만 '지랄 염병하고 있네'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구약교회의 백성들의 실존과 생활에 대한 본질적인 판단을 지랄병과 염병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그러한 병명을 가진 자들이 교회에서 고침을 받게 되는 것으로써, 그 고침의 연속성에서 있게 되어지는 인간적인 불화적 개념의 고통이며 치료하는 몸된 교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며 성화되어지는 교회로서의 현실적인 일시적 모습일 수 있음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습이 마치 일시적으로 염병과도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섭리가 있도록 기도하며 순종하는 가운데서 그 염병을 고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개혁을 말하면서 어떤 돌을 던지고 변혁을 말하고 어떤 특단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주의 몸된 교회를 헤아리지 못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들의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주의 안위의 지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볼 때에, 이런 불소시개에 해당되어지는 것과 달리, 주의 안위의 지팡이는 어떤 것인가에 주의가 환기 되어지는데, 이것은 아론의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 창조적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써 그 직임이 레위 특히 아론의 제사장적인 입장이라고 함을 지적하셨는데, 그 앞서 아론의 성례전적인 행위에 해당하는 모습을 주목할 수 있음이 본문 말씀에서 그렇게 받게 하심에 대한 합당함을 더욱 주목하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씀하심을 주목합니다.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 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민 16:47:48)

아론이 '죽은 자와 산자 앞에 섰을 때'라는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그 뜻하심의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성례전적인 입장에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예수님이 '산다' 또는 '죽는다'와 같은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그분 자신이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 자기 절대 정당함을 합당하게 의지하셔서 상대적인 모습을 취하시는 방법으로써 자신의 절대적 계시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상대성이라고 하는 합리성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상대적인 범주에서의 다원적인 비판적 입장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이라는 것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고라 즉 기회주의적 개념에서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소위 생각이 열린다는 보편성으로 생각에 따라서는 인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을 시비함에 있어서는 그 실존적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이성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행동하는 소위 '지랄병'으로 알려지는 '간질환자'와 같이 여겨질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관점의 상대적 보편성에서 그 상대적 필연성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렇한 것은 상대적 보편의식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정당함이 임의적으로도 당연한 것같이 기만되어지기 때문에 득세할 수 있는 특징적 개념이 있고 이것은 역시 염병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성도들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는 이유'(고후 1:19)와 그 정당함을 의지할 때에 아론과 같이 창조적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는 주의 지팡이와 같은 주의 백성을 안위하는 종들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합당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라고 하는 것은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놓고 비평의 개념없이 비평하고 있음을 봅니다. 자기 합리화라는 개념의 말에는 임의성이 있어서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고 그것을 주장할 때에는 보편적인 입장에서 그 비판적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리적 비판 자체의 실존이 이미 정당함을 잃었는데 그러한 합리적인 판단의 기술이 가능하다고 해서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합리성과 정당성은 그 실존적 관계에서 합리성 자체에서 정당함을 추구하지만,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고 인증되어지는 가운데서 국한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두 상대적인 타당성이라는 정당함을 일말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존의 절대자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의 상대성은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상대적인 타당성의 실존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지팡이가 변한 뱀이 애굽의 술사의 지팡이가 변한 뱀을 삼킨 것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켰고 이러한 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못나고 세상의 간질과 같은 염병에서 자유할 수 없는 생명력없던 나무토막 같은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주의 택하심을 믿고,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은총을 받을 때에는 주의 백성을 안위하는 모세의 지팡이와 같이 또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같이 창조적 능력을 나타내어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원망을 그치게하는 종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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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0월 17, 2006

포도가 익어갈 때에

2006년 10월 1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민13:1-33
포도가 익어갈 때에

어떤 시인은 포도의 익어가는 때를 묘사하는 시를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란 말로 서정적인 시점적 묘사로 일반 시점적인 개념을 넘어 기억속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도록하는 시점으로 승화하여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가 지난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힌 시점적 포도익는 계절을 통해 시인은 그 말하고자 하는 중심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것을 논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에서 그 때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민 13:20)이라고 함을 언급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그 말씀하심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에 따라서 각 지파의 족장 된자 한 사람씩 선발하여서 모세가 이들을 가나안 땅을 탐지하려고 보냈음을 기록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거하는 땅에 대한 것을 알아보려고 보내는데 그 때가 포도가 처음 익을 때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탐지하는 가운데서 포도송이를 메어오게 되는 것과 무화과와 석류를 취함에 따라 그 곳을 에스겔 골짜기라고 불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40일동안의 보냄을 받아 정탐을 한 자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긍정적인 입장은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다녀온 족장 갈렙과는 달리 그곳을 취할 수 없는 정황임을 확신하게 되었음을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 비교하여 메뚜기 같다는 어떤 피해의식까지 나타내보이는 정황적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광야 40년의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그 계기적 입장에서의 사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족장들과 그와 함께한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러한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는 포도가 처음익을 즈음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처럼 제철과일로써의 포도의 수확을 현실적으로 하면서도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읽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그들의 당면적인 그 즈음, 그 시기, '포도가 익어가는 그 때'를 말씀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됨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때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 깨어 경성해야할 때와 그 중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주장되어지고 표현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으로써 자존의 절대자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그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 안에서 우리 성도들의 실존이 정당한 존재로서 인치심에 따라 인정되었음과 그러한 왕적 권세와 구별하는 제사장적 권세와 증거하는 선지적 증거가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의 능력의 실제와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이러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던 기도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 11:2; 눅 1:49),에서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가운데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성도들의 실존적 정당함과 권세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장들과 이어서 그들을 신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족장들의 증거를 듣고 울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라고 하는 정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안에서 그 실존을 말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살펴볼 때에 이러한 중심을 바르게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은 상식이라는 보편으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판단가능하다는 개념으로 사실화하려는 어리석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포도가 처음 익어갈 즈음에..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몰상식을 우선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성적 판단의 상식보편적 입장을 바르게 사실화하고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로서 메말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그또한 다시 땅을 기경해야하는 40년 한 세대를 지나는 광야를 수고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마 21:19~21)

즉 시기를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열매를 찾으심에 있어서는 그 때가 바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인데 그 무화과는 세상적인 일상적 시간을 통해서만 보는 가운데 그 시간관의 사실성을 알지 못하여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 열매의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정당함을 얻게 되는 시기를 믿음으로 구별하여 보아야 하는데 형식적인 시간에 따른 인식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인 민수기에서는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거두며 무화과와 석류 열매를 취하였지만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포도를 거두면서도 그 때를 말씀하시는 주의 뜻하심의 사실성을 마음에 두지 않았단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의 보편성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적인 보편성에 따라서 판단하는데 이는 에스골골자기에 마른뼈와 같이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겔 37:1,2)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생기로 들아가게 하도록 대언하게 하심에 따라서 마른뼈들이 군대를 이룸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겔 37:1~14)

말씀을 맺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 가지로서 열매를 맺어야 할 즈음에 그 때를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이 진정한 사실을 말할수 있는 자들로서 그 중심을 나타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상식적으로 교회 출석하고 그 봉사하며 그 성례전적인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열매로써 주께 드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가 익어갈 때를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선물로써 일반 상식과 인류의 사상적 입장을 잘 활용하고 사용하여야하겠지만 그것이 주의 뜻하심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주 앞에서 단호히 분명 아니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중심의 고백으로 힘써 행해 나아감이며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에스겔 선지와 같이 생기를 대언하는 은사를 입은 자들로서의 성령의 능력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가운데 그 포도가 익어갈 즈음에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어 주께 드린바 되는 종들로서 그리고 그 섬김으로써의 열매로써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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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02, 2006

구름이 머무는 곳에

2006년 10월 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 9:15-23
구름이 머무는 곳에

사람들은 어떤 덧없음에 대한 것, 또는 허상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는 것을 비교할 때에 '구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용납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든지, 정황적 어울림을 말하지 못한다고 공감할 수 있는 가운데서 표현되어진 말에 대하여서 '아니 애가 무슨 각중에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냐?'라는 말로 핀잔에 비교되어지는 표현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기독교에 대하여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도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구름에 비교되어지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묘사하기를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물론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과 기술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개념은 항상 같은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막을 설치하고 다시 걷어서 그 구름이 머무는 곳에 거하게 되는 그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이 구름따라 세월따라 헛도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지적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성경을 인용가능함을 따르는 자들에게 정작 성경이 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분명하게 사실적으로 증거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은 그러한 세상의 현상적 판단과 부당한 인용적 오용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에 따라서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그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위에 불모양과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음과 항상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모양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진행하였고 진을 쳤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보에 있어서도 그 구름이 떠오르기 전까지 그 기간이 짧든지 길든지 머물러 있었음과 떠오르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인도하심의 사실 안에서 그들의 행보를 그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구름을 따라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고,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구름의 의미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구름을 통한 증거가 그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어떤 다른 차원에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민수기 9장과 그 내용적 증거라고 함의 문맥적 증거를 간단히 살펴보고 이어지는 오늘의 민수기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민수기의 이름은 그 당시 정황적 인식 즉, 책의 첫 부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식들 따라서 '수'(numbers)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의 갯수를 세다'와 같은 전제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관심대상에 관련된 경우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관심대상에 대한 '헤아림'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이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게 하시도록 그 백성들을 먼저 헤아리심과 그들에게 적절하고 합당한 생활에 대한 기술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으로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헤아리라'(막 4:24)고 말씀하심과 사도들의 그 가르침의 연속성에서 '좋은 것을 헤아려 취하라'(살전 5:21)고 함과 같은 것은 이 민수기적인 측면에서 이미 증거되어진 것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이후 광야 시내산에서 이제 광야 여정을 출발함에 있어서 소위 인원점검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수를 파악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할 수 있는 자들로서의 공식적 비공식적 모습을 일괄적으로 읽도록 하시고 장자의 권한 대행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처음난 자들의 위치에서 행할 수 있도록 구별을 받고 처음난 자들의 속전이라고 하는 것으로 레위인들의 달란트적인 기업을 이루게 하심을 주목하고 그 성막의 기구들도 기름부어 성별하였음을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 앞에서는 유월절을 지냄에 있어서 시체로써 더러워짐을 인한 유월절 지냄에 대한 것을 여호와께 물어서 결정하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이면서도 실제의 구름의 이동을 통해 그 약속의 땅을 향한 행보를 내 뒤디고 여호와께서 맡기신 직임을 지켰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계시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실제로써 '구름'은 세상의 자연현상적 입장에서 구름에 대한 인식과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덧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것과 용납의 정당함을 같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먼저 이러한 일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구름에 대한 통념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죄 가운데서 이루어진 불가지론적 입장을 나타나는 것이고 죄로 인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하나의 인식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즉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그 실재라고 하는 것에 입각한 그 실제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사는가에 대한 답변적 입장을 아무리 헤아리려고 해도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데 그렇게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인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으나, 그러나 주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자존자의 자기 증거'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기 때문에 그 자존자의 자존적 절대 보편의 재가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성경의 특별영감은 일반적인 오늘날의 인생에 있어서 일반적인 그 영감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생각과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의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비판의 사실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재고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도, 절대라는 범주의 재가를 받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 절대에 비길 수 있는 비판과 그에 따른 부정적 규정의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기를 거절한 불순종의 모습들에서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외에는 일반적인 은총적 입장에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헛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전 1:2,3)

그러나 이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구름을 따른다는 실제의 개념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헛됨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사실이 절대의 보편적 정당함을 부여받았음을 기억할 때에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실존과 정당한 인생의 행보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이 헛됨의 비판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여도, 결코 헛됨이라는 판단의 사실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하여서 불가지적 입장에서 현실적인 사실성을 임의적으로 규정하여서 열심히 우리의 삶을 경영한다고 하여도 인생의 실존과 사실에 대하여서 절대적인 확신과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름을 잡는 헛된 인생이 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을 증거하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현실에서 누가 별볼일 없어 보이는 신앙생활에 의미를 두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러한 기우적인 개념의 판단에 의미를 비로소 부여할 필요성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오늘 본문에서 구름과 '불 모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구름과 이질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재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에서는 '구름위에 인자가 있는데 그가 낮을 휘두르니 곡식이 거두어짐'(계 14:14~20)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주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주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철장으로 심판하실 예수님의 사역적 증거를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 쓸데없이 소위 '시간죽인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용납부당함을 말할 수 있는 헛됨을 말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념화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세상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해본다면, 우리 인생이 헛되다는 측면에서 별로 특정한 장소를 말하기 보다는 인생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어떤 특별한 선민의식을 가진 것과 같이 말한다면 한마디로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미련한 웃음의 행보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자기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주 평범해보이고 헛된 삶의 연속과 별로 차이없어 보이는 신앙생활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세우셨음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헤아려 볼 때에, 우리 성도의 실존과 행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헛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생의 실존과 사실로써의 구원을 보게 되며 그 헤아림 속에서 주의 헤아리심으로 더욱 받게 되는 가운데 잘 했다 칭찬이 있는 주의 맡겨진 소임을 보게 되며 감당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모습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바르게 보며, 그 직임을 잘 감당해내시는 가운데 잘했다 칭찬함을 얻게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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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25, 2006

성도의 화평에 대하여

2006년 9월 24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하5:11-25
성도의 중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지혜를 축척해왔습니다. 고전적인 입장에서는 어떤 사회계약설을 말할 수도 있고 통속적인 측면에서는 처세술과 같은 대인관계를 비롯한 특별관계들에 대한 것으로써 그것들을 재고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고 하겠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잘됨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 또 그러한 판단을 받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기술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그 앞서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치 또는 기준이라고 함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관계를 이해함을 기초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것은 평안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편안한 관계, 서로에게 화평케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으로 접근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 성도들이 인식하게 되어지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바른 중심과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마 5:9)이라는 그 증거로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인데, 아주 기본적인 성도의 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인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 본문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두로와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다고 함을 인함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였음과 그로 인해서 아들과 딸들이 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다윗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킴을 말하고 있고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그들을 치라고 하심을 듣고 그들을 침과 그것이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다윗 앞에서 그의 대적을 흩으셨다하여 바알브라심이라 칭함이 기록되어있고 다윗과 그 종자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버린 그 우상을 치웠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함에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또 다시 물어 그 말씀하신 병법을 따라 그 전쟁을 이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이 있는 곳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엄습하라고 하셨는데, 그 시기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동작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 다윗을 앞서 블레셋 군대를 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인 순종하여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게 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지혜로써의 처세, 그 처세의 기본으로써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을 구하는 그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성도로서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선한 청지기의 중심이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질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대인관계라고 하는 것은 기본으로 서로 좋게 화목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그 처세를 말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그 화목을 위해 상대방을 배려하고 더 지나친 모습까지도, 즉 상대방에게 필요이상의 정적인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나 또는 요구하는 관계를 근간으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는 서로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깨어지게 되고 그것은 그 자신의 비참함을 현실적인 고통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 그것이라고 함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비교되어지는 본문인 누가복음을 먼저 주목하고 그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떤 표현으로 읽게 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본문으로써 오늘 본문이 주목됨에 따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누가복음(눅 16:8, 눅 16:1~10)에 대한 화평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그러한 것이 주인에게 들린 것으로 알고 직분을 빼앗길 것을 생각해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불러서 그 주인에게 줄 물목들을 고치도록 해서 이러한 불의한 행동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서 쫓겨날 때에 그들이 영접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 관계를 성립함을 재고하고 있고 그 화평을 구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화평을 위한 불의의 재물과 같은 형식으로 화평을 구한다면 그러한 자에게 재물을 다시 말해서 그 달란트를 맡기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판단은 오늘날 이러한 처세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 그러한 처세술을 알지 못한 자라는 측면에서 비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네가 세상을 알아 살기 위해 더 처절해야 돈을 구할 수 있고 살아남는단 말이야’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것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는 이미 그들이 세상에서의 지혜로움을 지적하셨으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옳다는 개념 상대적인 것을 전혀 배제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판단하심에서 사실을 말함에 대한 정당함을 배제한, 임의적 사실은 자존의 절대자 앞에서 취하게 되는 그들의 소송적 입장이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측면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의 실존이 부정되어지는 자로서의 미움을 그들이 적합하게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집을 지어주는 경의를 표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다는 것을 상대적인 정황을 미루어보아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화평이라고 하는 것을 구하는 가운데서의 관계성을 마음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일국의 왕에게 미움을 받아 대군의 추격을 받는 자로서 죽지 못해 산 것과 같이 외국으로 도망치고 하더니 온 나라의 신임이 그에게 돌아갔다고 하는 것은 필시 신의 섭리라고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혹 그와 같은 존재라면 서로 관계를 돈독히 해두는 것이 좋기 때문에 히람왕은 화평을 구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정황 속에서 블레셋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즉 일시적이라고 하여도 그 블레셋의 나라의 한 신하가 되었던 다윗을 볼 때에 그가 나라를 세웠다면 그것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억되어지는 다윗의 정황은,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왕에게 가서 살기위해 미친척을 해야 했던 것과 그의 종자들과 그들의 신하적 입장에서 시글락에 머물렀던 것은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금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이스라엘나라에 있어서 정당방위라고 하더라도 사울의 침공에 그를 죽일 수도 있는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상책으로서 그의 나라를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주시기까지 자신은 이민자의 자리에 서겠다는 그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블레셋이라는 그 이름의 뜻은 '이민자'라는 뜻인데, 다윗이 여러족속가운데서 그 족속을 택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자신의 기업에 대한 것을 맡긴다는 것과 그들의 신하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 안에서 그의 복잡한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에서의 행보도 성실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살기위해서 아부적 개념에서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선하게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운데서의 질서적 자리매김에서 그 사실의 거룩함을 받아들여서 그 신앙으로 그 열심을 다했던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수와도 화목케하시는 그 능력에 따라서 허락되어진 그 질서에 거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블레셋은 다윗에게 그 골리앗을 죽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가운데서 과연 상식적으로 다윗을 신하로 신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화목케하심이 아니고는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자신들이 다윗에게 배려해준 것과 같은 덕분이라고 생각했고 그 화평의 주체가 자신들이기 때문에 그 화평의 주체로서 다윗의 분깃으로 그 나라에 대한 소유권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임의적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화평의 이해에 대한 중심이 다윗과 다른 가운데서 그 화평의 관계는 깨어지고 전쟁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 전쟁에서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된 것으로 말씀하심을 읽게 하는 그 승리를 말씀하셨고 다윗은 그것이 ‘바알브라심’이라고 함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갈라진 틈의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깨어짐에 있어서 주관자, 승리자’(lord of the breaks)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화평이라고 함에 대한 시비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판단하심의 재가를 따른 자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알이 격파한다’라는 뜻도 되면서도 이것은 세상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다음에 인격적인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써 그 확고히 전쟁을 통해 분명히 하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블레셋의 두번째 다윗의 이스라엘을 침공함에 대한 주 하나님의 병법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 병법에서 인간의 걸음에 비교되어지는 걸음소리가 나는 가운데서 그 공격의 시작 점을 말씀하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다윗의 병사들보다 앞서 나가신다는 것은 인격의 창조자이시며 인격적인 자신의 행보를 주목하도록 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상대적인 시비가 있을 수 있는 그러한 자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변론하시는 인격적인 주 하나님의 판단하심이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역사적 시기과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과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그 뜻하심 안에서 사람마다 다 달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주를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화목의 사실을 믿고 누리고 증거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의 현실적인 증거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도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실제의식에서 화목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로 인한 사람들의 인식과 질서와 그에 따른 예의와 더 나아가서 처세라고 하는 것도 존중하고 그들의 업적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 말씀하심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기본적인 존중을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존중의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일반적인 사회의 질서라고 하는 것과 보편인식들과 그에 따른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들의 관계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로써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관계를 주의 구원하심의 화평에서 새롭게 규정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볼 때에는 그 잘하는 것이 특이하게 보여서 아부의 수준처럼 또는 필요이상의 비하의 자리에 서는 것처럼 또는 맹목적인 순종을 하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시비를 불러오고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주의 구원하심에 따른 화목케하심을 마음에 바르게 두는 성도의 중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 많은 처세술적인 기술(技術,記述)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따라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참고하고 재고함이 옳은 것이며, 주의 말씀하심에서 받을만한 사실적인 것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처세술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것에서 좀더 지나쳐서 상대방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그것은 물질적 개념이나 심지어 맹목적인 신앙적 입장에서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평케된다는 것과 그 정황에 따른 주어진 상황에서 질서적 화목을 이루는 평안을 구할 때에 세상의 주고 받음의 보상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지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두지 않고,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가운데서 정당함을 따른 화목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천국의 아들된 성도들의 화목의 기본이며 또한 불의한 청지기가 아니라 주의 뜻에 합당한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에게 화평케함에 대한 신원하심과 같은 그것이 일률적인 상대적 입장에서 우리 성도들의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신원하심이 실제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낙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주의 구원에 따른 화평을 전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의 자녀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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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04, 2006

서기관의 의문

2006년 9월 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2:1-12
서기관의 의문

입추도 지난지 오래되어 기억하지 않는 이 때에도 아직도 매미는 울고 있는 그러한 때.. 아직도 한 낮에는 덥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서도 식중독에 따른 보도가 있어서 음식을 주의해야 한다는 그러한 경각심을 가지게 됩니다.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 귀한 것이지만 상하거나 해롭게 된다면 때로는 버릴 수도 있는 특권이 또한 같이 주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아깝지만 건강을 위한 것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소위 어느 '먹자 골목'에서 팥이든 빵을 사먹고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더위에 상하였던 모양입니다. 차라리 빵속이 없는 것을 사먹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하게되었는데 그래도 빵은 그 안에 들어있는 첨가물이 맛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먹은 기억이 있는데, 그것은 나만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맛없는 빵을 '앙꼬없는 빵(bean jam)'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생명의 떡되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신앙 형식적인 신앙에서는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의적인 것으로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의 중심은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구주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칭 '구원파'와 같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수일후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고 집에 계심이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용신할 수도 없었는데 한 문둥병자를 네명이 메고 와서 지붕을 뚫어 예수님 앞에 내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어떤 서기관이 그곳에 앉았다가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며 참담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는 그 중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 서기관의 마음 속의 의문을 아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상을 들고 가라고 병자에게 말하자 그는 일어나 상을 들고 감에 따라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 문둥병자 그리고 그 네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 함께한 사람들, 서기관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서 서기관의 의문이라고 하는 것이 중심적으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 또한 오늘의 주목할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서기관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본문 앞장이 되어지는 마가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이 사역하시는데,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라는 개념으로 한정시켜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인위적으로 받으려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성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 나은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니시지 못하게 했고 그것은 복음 전도를 막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적 실제를 나타내고 있지만 주께서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도록 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가운데서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나기를 나타내시고 성도들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귀감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신 후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들짐승과 같이 계셨던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짐승의 마음과 같이 있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 그러한 다니엘의 증거(단 4:32)을 읽게 하시는 것이 본문의 이해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있어서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예언에 대하여서 분명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지 않는 자들은 주검이 있는 곳(마 24:28; 눅 17:37)에 있게 되어지는 독수리처럼 되어짐으로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기관의 의문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써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면서도 성경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들 주님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주의 책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그 행함에 열심이 있는 자들 즉 문둥병자를 짊어지고 온 자들은 예수님이 그 데려온 자를 낳게 하실 것이라고 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나 정황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고 존경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능력을 나타내셔서 구원과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메시아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능력이 많으신 참으로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의사의 모습 자체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는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보시고 네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그러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적 믿음으로써 인쳐주시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즉 그 낳게 해주시는 의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에서 주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의 실체를 마음에 두도록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사함이라고 하는 것에 임의적인 실제의식을 부여하여서 그것에 비로소 목을 메는 것처럼 말하려고 하는 구원파의 입장을 지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이 주목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사실적 증거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그 서기관이 더 잘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재가적 입장을 읽을 수 있는데, 그 서기관의 판단에 대한 시비를 직접 거론하시면서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께 있다는 것과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이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것을 선언하심에 있어서는 서기관과 같은 상대적인 인식에서의 비판적 당위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정황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심방하고 치료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것과 같이 행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적 증거와 사역과 그 풍성함인데,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그 풍성이라는 인식을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국한하려는 그러한 악한 모습에서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예수께서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시는지를 눈감게 만들어버려려는 것입니다.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경향이 신앙과 신학적인 입장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복음과 같이 사회활동과 노력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비로소 복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붙든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주목할 때에 과연 소위 이단인 '구원파'와같이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개념의 사실성에 비로소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할 것은 우리가 실용적 필요성에 따라서 구원을 실제적으로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자신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서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합당한 것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정하신 바 구원을 실제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흐름을 주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에서 비롯되어질 때에 진정 생명의 떡이 진정한 양식의 떡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변질되어져서 신앙의 식중독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급기야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해보자는 인지상정과 또 잘못된 것에 대한 상대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유익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보편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실존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같이 즉 '지경을 확고히하다'라는 그 뜻과 같이 임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가운데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적 입장에서 짐승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묶여있어야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이심을 먼저 기억하고 그가운데서의 사실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으로 그 풍성함과 구원함을 증거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서기관과 같이 성경을 많이 알고, 지위를 가졌다고 하나 그 실제의식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비로소 두는 것보다도 다른 것을 우선시하고 실제화한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의 판단에 침묵하여야 할 것이며 그 진밖에,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신앙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가운데서 말씀하심의 실제의식을 비로소 잘 구별하여 보는 가운데 참으로 생명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귀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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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8월 31, 2006

미갈을 데려오라

2006년 8월 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하3:1-16
미갈을 데려오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주목한다, 사람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목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시대마다 또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 왔음을 기억하면서도 어떤 한 방향으로 악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데, 바른 여성관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그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며 그 뜻하심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도록 힘쓰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인생들에게 유념해야할 것으로 나타남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시대적으로 모계 중심의 사상에서는 숭배의 사상도 있었고 욕정적인 측면에서 노예적인 측면의 부정의 모습도 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성에 대한 상품과 그에 따른 지배개념으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는 악한 모습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생계형이라는 개념으로도 당연성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중심이 바르게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게되는 것 중에 오늘 말씀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을 자신의 아내됨을 인하여서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주께서 마땅히 가져야할 오늘날 여성에 대한, 인식과 중심으로써의, 실제의식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이 전쟁이 오래동안 있는 가운데 사울의 집은 쇠하여가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감을 언급하시면서 다윗의 아내와 소생들을 기록하고 있는 다윗의 집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시 동일한 때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에 전쟁이 있는 가운데서 사울의 집안을 기술하고 있는데, 아브넬이 그 집안의 권세를 잡음을 기록하고 있고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한 것에 대하여서 이스보셋이 어찌 그렇게 하는가 하는 말을 건넴에 따라서 아브넬이 자신이 '개 머리'냐는 말을 하면서 이스보셋에게 반목하게 되어지고 이스보셋은 아무말도 하지 못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브넬이, 이스보셋과 반목후에, 다윗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사울의 땅을 다 넘겨주겠다는 것으로 언약을 제시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가를 데려오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데려오지 않으면 다윗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보셋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처 미갈을 다윗에게 돌리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이스보셋이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취하매 발디엘이 바후림까지 울며 따라왔는데 아브넬이 발디엘 그에게 돌아가라고 함에 따라서 그가 돌아갔음에 대한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움의 사람 이스보셋과 세상의 입신양명의 아브넬의 정치적 입장에서의 취하는 그들의 여성관과 그 일시적으로 취하였던 발디엘의 연모하는 여성관과 다윗이 자신의 아내로서의 정당함에 따른 미갈을 찾음에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은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다윗이 그 자신의 아내로서의 미갈을 찾는 그 중심이 주목하게 되어지는 여성관으로써 우리에게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어지는 여러가지 관점들이라고 하는 것이 다양히 있을 수 있는데 그것들은 주의 말씀하신 바 여성은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란 말씀의 의식속에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섭리적 입장에서 질서를 말씀하심을 인하여서 일반적인(?) 세상의 여성 폄하의 근거를 말한다는 합리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합리성의 기원이 상대적인 인륜적 입장에서 비로소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의 섭리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가운데서 세상의 합리적 표현이 차용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여성이 남성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상대적인 측면의 합리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판단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을 기억할 때에, 즉 합리성의 굴절과 사실을 정당하게 말할 때에 여기에 대한 논점이탈적 개념에서의 비롯될 수 있는 논의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인용함에 있어서 합당하게 전제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의 인생들에게 있어서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인식의 왜곡과 굴절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맹목적인 다산의 상징으로써 숭배하는 것이나 또는 색욕이라는 정욕의 대상으로써의 추구라는 것으로 영광이라는 것을 오욕하도록 하는 것과 산업시대에 있어서는 그 영광을 추구함을 물질적 개념으로 바라보아 성상품에 대한 개념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상대적 측면에서의 연약한 사람들은 안티적 개념으로서 손쉬운 동성으로써의 성을 의식하게 되는 것과 교육의 인식과 정황에 따라서 남성이 여성적 환경에서 자라게 되어지는 가운데 발달성장에 있어서 몸의 호르몬적인 영향으로 동성이나 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와 같이, 하나의 추구하는 영광에 대한 인식의 임의적 선택이 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말해야 하는 고통과는 달리 진정한 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음의 당연함을 말하게 되는 중심에서 여성관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 다윗의 미갈을 찾음이 그것이라고 함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사울의 집안의 몰락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 의미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거짓된 신앙까지 표현되어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여성관의 바른 인식도 가지지 못함에 대한 사실로써 측정되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정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정황을 고려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더욱 믿음안에서 세상의 정황을 살피고 구별하여 삶을 영위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오히려 힘써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정황을 살핌에 있어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하나님안에서의 실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상대적인 요구에 따른 인식을 비로소 따르고 있었기에 그러한 몰락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즉 사울의 그 이름은 '요구되어진(desired)'라는 뜻의 이름의 실존적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치적 입장에서 임의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사울이 발디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개념에 있어서는 여성이라고 함의 그 영광을 정치적 목적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보셋아브넬의 반목의 근거되는 이유라고 하는 것은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아비 사울왕의 첩 리스바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고대 왕국에서의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에 왕의 첩을 취한다는 것은 그 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의 정당함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추구하는 그 영광을 여인에게서 찾는 경우가 그것이었습니다. 아브넬이 그 충성한 대가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하는 그 입신양명적인 속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반목후에도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 아비 사울의 딸 미갈을 내어주도록 조치를 취하였고 아브넬은 최종적으로 힘의 실력행사를 한 것으로 보여지는 가운데 다윗과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물고를 트기위해 미갈을 다윗에게 보내도록 그 정부되었던 발디엘을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치적인 도구적 입장에서의 여성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의 경우에 있어서는 라이스는 '강함'을 말하고 있고 발디엘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이름의 존재적 증거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이름의 '미갈'여인을 취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하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강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내를 얻는 자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것'(잠 18:22)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으나 설득력의 사실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강함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강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그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영광으로써의 미갈은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다윗에게 주어진 영광으로써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디엘의 경우는 결국 상대적으로 힘이 있는 자의 요행적 입장의 아내를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여성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상대적인 정치적 측면에서 취할 수 있는 기쁨으로써의 여성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이름은'사랑받는 자'(beloved)입니다. 그런데 그는 시편에서 거의 하나님의 자존자로서의 계시적 이름인 '여호와'하나님의 자존적 그리고 사역적 실제를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첫번째 내용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써 오늘날 성도들의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영광으로써 여자를 합당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합당하게 아내로 취하게 되어진 여인이고,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미갈의 이름에서 읽게 되어지는 미갈의 중심은 다윗이 마음에 둔 합당한 기준으로서의 여인의 모습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후자적인 측면의 그 영광을 인해서 '사울의 조건적인 측면을 들어 정식으로 아내를 삼았다'(삼상 18:27)고 주목함이 더욱 옳은 것이며 그것을 바르게 자리매김되도록 하는 것이 그 신정왕국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다윗의 해야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성도들의 '가정을 살펴보는 자로서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딤전 3:5)를 읽게하심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러한 영광을 바라봄에 있어서 여러 여인을 거느린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써 모순이 되어진다는 것과 그 형태로서 성경이 일부일처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그러한 논란으로 논점을 흐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은 특별계시의 영감안에서 허용되어진 그의 신앙적 측면을 나타내는 존재로서의 생애를 살았고 지금에 있어서 특히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어진 가운데서의 일반영감 속에서 믿음의 사실을 말하는 성도들의 모습과 일반인들의 모습은 단순한 동일비교의 문제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굴절되어진 것같은 일부 다처제적 입장을 취한 다윗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특별영감적 차원의 합당함을 말하면서도 허용적 증거의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내심'을 나타내는 그 현실적 증거적 삶을 살았기 때문에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일시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허용적 사실이 되어지는 것이며,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회복되어짐의 사실이 그러한 현실적인 실제의 증거라고 하는 것에 메이지 않으시는 본질적 언약의 개념을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현실적인 실제라는 것이 더이상 계시의 담지자적 역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윗의 다처제적인 입장을 맹목적으로 흉내내는 것은', 시대적 인식의 착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보다 본래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합당함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갈이 나중에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즐거워 춤추는 다윗을 보고 못마땅해하는 그러한 모습과 그로인해서 그 미갈이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뜻하실 때에 그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미갈의 완전성 때문에 다윗이 그를 비로소 찾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하심의 섭리에 따른 믿음으로 미갈을 찾았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미갈이 그만한 완벽한 자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음에 대하여서 먼저 마음에 둘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윗과 같이 '남자의 영광'으로 빗으신 여자로서의 아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진정한 여성을 바라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허락되어진 나의 삶을 위해 함께할 수 있는 자로서의 영광은 누구인가를 믿음으로 주목하고 아내를 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써 합당히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 18:22)

합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임의적 개념에서 그 영광으로써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국은 음란이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바라보게 되어지고, 그 여성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이성과 그 자신의 존재를 값싼 표류하는 이성적 판단의 거품에 사라지게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형제 자매 모든 성도 여러분, 주의 마음에 꼭들었던 다윗과 같이 남자의 영광으로 빗으신 그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고 비록 세상의 여러가지 합리성의 여파속에서 형태적인 측면에 부응해야하는 가운데서도 바르게 취할 수 있는 중심이 되어서 음란한 세상에서 다윗처럼 합당한 영광을 바라보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영광에서 주의 영광으로 이르게 되어지는 뜻하심을 받드는 자리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성도된 자매여러분도, 세상의 여러 관점과 관능의 아름다움을 시험해보고 싶은 욕망의 기만에 자신을 내어주지마시고,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남자의 영광이 되어주셔서 주의 가정을 통하여서 교회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운데서 기뻐하는 성도들로서 여성관을 바르게 가지는 가운데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그 주님의 영광의 길을 잘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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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8월 07, 2006

복음의 시작

2006년 8월 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1:1-8
복음의 시작

소위 '차포를 떼고..'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여건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때에 아주 원색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할 때에 사느냐 죽느냐 생존적 문제가 가장 기본적인 재고의 일순위도 아니고 영순위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달리 어떤 불필요한 것을 강요하거나 당위성을 요구한다면, 요즘 코믹한 언어를 사용해서 상당히 '짜증 그대로의 모습'도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겠습니다.

생존세계, 살기 위해서 밤잠 못자고 노력하고 있는 또는 그러한 노력을 해야하는 가운데서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은 아마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나 한가하게 재고할 수 있는 것으로나 또는 그래도 살아가기 급하지 않은 돈이 있는 사람이나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상당히 교회에서 증거하는 내용들에 대하여서 경멸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달리 평가되어질 수 있음은 또한 기정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과연 이러한 말들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세계에서의 지친 영혼들에게 주의 복음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회유적 합목적성에서 비로소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재고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뜻하심이 그렇기 때문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의미로 말한다면 교회가 그들에게 속보이는 것으로 능력을 상실하지만 후자의 입장이라면 그 지친 영혼들이 주 앞에 나오게 되어지는 능력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이사야의 증거된 말씀을 따라서 세례요한이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전파함과 온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아와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한의 모습이 기술되며 그의 증거의 내용으로서 회개의 세례와 그 세례의 주체자에 대한 설명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나,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와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소위 '구원파'라는 잘못된 해석적 선택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시작을 바르게 알때에 복음의 합당한 증거자로서 빛된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복음의 시작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먼저 복음은 '좋은 소식'(good news)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그냥 허무맹랑한 귀를 즐겁게 하는 유희적 개념의 비실제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주관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명과 관련된 실제적인 것입니다. 즉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으로써(롬 1:2), 예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생존세계에서 살고있는 것은 내 생명을 지켜나가고 풍요롭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기위해 노력하기에도 바쁜 것은 바로 나의 생명에 관한 실제적인 것이 아주 현실적으로 의식되어질 수밖에 없음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실제적인 문제로 나타난다고 할 때에 과연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진정으로 마음에 두는 사람이라면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함에 마음을 두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밤잠 못자고 다른 곳에 눈돌릴 수 없는 바쁜 나의 삶을 위한 변명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에게도 더욱 솔직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되어질 것입니다.

물론 파스칼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것이 진짜라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손해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지적한 것을 기억합니다. 여기에 대하여서 손해를 본다는 것의 상대적 여지를 가지고 강조점을 이동시켜서 이러한 소위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항상 남는 것임에도 마음을 여전히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같이 생각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러한 것에서 신앙의 확신을 비로소 말하지 않습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심과 그 절대 합당함까지도 스스로 취하신다는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존재의 실제적 책임을 질 수 있음에 대한 여지적 반론의 모든 말들을 기각시키신다는 것에서 비로소 그 신앙의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개연적인 측면에서 비판도 긍정의 사실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과, 그것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핑계할 수 없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이 이미 부여되어진 실제적인 사실로서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자복하고 회개하게 된 것은 그들의 실존의 문제라고 하는 것, 그 당시 로마의 종속되어진 상황과 고통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산다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예수의 생명의 주이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 정황에서 비로소 동기부여되어진 자들도 있고 생활적인 빈곤에서 비로소 자신의 실존의 문제의 실제적 문제로서 동기부여를 받은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정화되어질 수 없는 것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사실성에서 정확하게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부르셨음에 대한 사실은 기정사실로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름부음을 받으신자'가 자신의 주권적 기뻐하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정당함의 사실을 부여하시는 분으로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못하면 정황적인 사실이해에서 그 사실의 확실성을 가질 수 없고 다만 맹목적인 임의적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현대적인 이성적 입장에서는 나약한 사람 힘든 사람의 자위적 개념으로만 오해하게 되어지는 현상적 인식의 자기 기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이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러한 중심을 가지는 것까지는 옳은 것이나 중요한 것은 그 구원의 주체로서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보다도 그 구원의 사실의 확신을 임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또한 그러한 것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대뜸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질문해놓고 그 구원의 확신을 아직 연약한 가운데서 마음에 두지 못한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을 그 합당함의 시비를 거치지 못한 가운데서 말하여서 임의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실제적인 사실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베푸실 분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에서 비로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그 주체로서의 예수님이 누구신가 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충족성을 합리성에 비로소 두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론에 기반한 실제론이 아니라는 것에서 그 합리성의 정당함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마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모두 성경적이라고 하는 맹목적인 논리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인용의 정당함을 말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 허용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의 인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을 부인하는 것에서 인용한 가운데 그 인용의 사실을 합당히 말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마 4:1-11 참고)

한마디로 구원이라는 실제의식에 매인 나머지 그 구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서의 구원의 확신의 사실을 말함의 충족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소위 이단 '구원파'의 거짓됨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실제적 사실은 합리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 합리성의 전환적 모색으로써 성경인용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가지고 거짓을 말하는 곳에 나가도록 말하는 모든 이단들에 대하여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함 즉 예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고 할 때에 그 구원의 주체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로 알게 될 때에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며 합당한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깊이와 정도는 달리 나타나고 그 확신의 정도도 상대적이지만 그 믿음을 주시는 주체로서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의 믿음의 확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라는 점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실체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시작에 대한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비로소 구약과 단절적인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시작이전에는 어떤 후에 오게 되어지는 또는 후에 기술되어지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것으로도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시작이라고 함을 말함에 대한 당연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약성경으로써의 이사야의 말씀의 예언적 정당함을 말씀하심으로 그 신구약의 연속성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그 중심이 그리스도라고 함을 마음에 두게 하시고 예수께서 기름부음받으신 자로서 그 기름부어 사실화한 것은 그 거룩성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르케'라는 말로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태초에'라는 말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되어지는 '바라'(태초에)(창 1:1)라는 말과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은 그 시점적 이해가 다르면서도 실제적인 비교에서 사실을 읽을 수 있는 것을 허락하신 것으로써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에 태초라는 것과 복음의 시작은 창조와 재창조에 대한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새로움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즉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연속성에서 고생하고 우리의 존재를 임의적인 스스로 주관한다는 것에서 책임지지 못하는 자리에 서 있을 때에 주님은 예수님의 구원하심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써의 시작 그 예정된 그 뜻하심의 시작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에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 별로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고 하여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모습으로 세워지게 되었고 그들을 통한 주의 복음의 사실이 증거되어지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라고 말했던 것을 이 복음의 시작에서 이미 주목한 자신의 신앙고백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신앙고백은 특별영감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리 성도의 일반 영감과 다르면서도 연속성이 있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습들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나이들며 쇠퇴해져가는 모습과 그렇게 들래지도 못하고 오히려 전보다 못한 모습이라고하는 인식의 판단 강요가 가능한 나의 모습이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지 못한다는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에 대한 합리성의 표현과 기술이 불가능하게 여겨진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현상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나를 복음의 시작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것은 기정사실로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에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별로 내놓을 것이 없는 평범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지는 나의 삶 속에서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씨를 뿌릴 수 있는 종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는 하나님'(빌 2:13)을 바라보게되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관한 것으로 그가 그 믿는자를 구원하신다는 그 진정한 실제의 것으로써 모든 인생들이 들어야할 소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제의 구원의 확신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그 충족성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이며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알아가는 자리에서 주의 구원의 확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은혜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존세계에서 밤잠 못하고 쉴새없이 뛰어다니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생명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구원의 확신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음에 대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바빠서 또는 여러가지 생존에 대한 이유로 거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오히려 진실된 자는 믿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지친 영혼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로서, 예수님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로서의 기쁨과 그 감사로 복음의 시작으로 나를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성실하심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아주 평범한 가운데서도 주의 특별하신 섭리를 받들어내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주의 첩경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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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26, 2006

시글락에 머문 다윗- 복잡한 세상속에서..

2006년 6월 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27:1-12
시글락에 머문 다윗

우리 인생이 경영하는 '인생이라는 삶'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지친 사람들은 좀 쉬운 것을 추구하고 있고 지친 삶의 무게에 가중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것은 일말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편안함을 누리고자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분복의 하나로써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아담의 후손들로서의 인생은 그 토지를 갈아서 그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은 그들의 종된 자리에서의 위로로서의 자유와 어려움의 무게를 내려놓는 편안함이라고 함을 추구하여야 하는 당위성과 일말의 추구적 당위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비로소 불순종이라는 죄로 인한 욕심과 어울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규정적 입장을 알지 못하는 죄악된 가운데서의 분별의 임의성 때문에 그 분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자유와 실체가 없는 실체로서의 고통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참 고통스럽기도 하고 삶을 위한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지치기 쉽고 싫어지는 가운데서 이 복잡하면서도 배척하고 싶은 가운데서 그것이 가능하지 못한 것같이 느껴지는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며 기쁨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설교를 듣고 읽고 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머리속에서는 세상의 여러가지 생각들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지금에 있어서 이 말씀을 대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의 삶에 또 삶을 주장하는 신앙은 그러한 것에 대한 온유적 답변을 말할 때에 그렇게 쉬운 것으로 비로소 위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그 은혜를 우리는 더욱 사모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의 물이 있음에 대한 소리를 들었을 때에 심정으로 말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부터 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하게 될까 하여서 블레셋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와 함께한 자들과 가솔들을 데리고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가게 됨과 다윗의 의도한 바와 같이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찾아 죽이기 위한 수색을 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왕 아기스에게 이르러 블레셋의 지방중 한 곳을 주어 거하기를 구하니 아기스가 시글락을 주었다고 함과 그것이 그때당시 유다왕의 소유가 되었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고 또한 머문 기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임을 기록하고 있고 이 일에 있어서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데려가지 않음과 아기스의 그 다윗의 행보에 대한 것을 보고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는 중심을 가졌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간 이유와 그곳에서 행한 행보에 대한 해석과 사태에 있게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이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나감에 대한 그 중심을 이해함에 대하여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신앙이 약해진 가운데서 자구책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으로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주목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적 개념만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나간 것은 두 번입니다. 한번은 사울에게 쫓기는 중심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나타나서 아기스에게 나아간 것(삼상 21:1~15)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상황을 구별하여 주의 섭리를 따르는 자로서의 순종으로서 나아간 오늘 본문(삼상 27:1~12)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의 아기스왕에게 나아감을 말하는 본문(삼상 21:1~15)에서는 직접적인 인식이 기록되어지지 않았지만 시편에서는 그의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고 그 곤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하는 중심이 있었다는 것과 그 불안한 가운데서도 그 섭리의 사실을 믿는 가운데서의 순종하는 중심이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시 59:1~17)

두 번째 아기스 왕에게 나가는 것은 전혀 반전되어진 가운데서의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믿음의 종으로서의 다윗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다윗에게 끝까지 따라다니는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것으로서의 주 앞에서의 순종의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해서 죽이고 다윗에게 이미 예정적 주어진 그의 나라에 대한 기득권에 대한 항의와 존속을 위한 노력을 행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다윗은 이미 그 기득권적 재가가 다윗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주께서 나타내시기까지 현실적인 측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을 치거나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서 그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두번 있게 되어지는데 이제는 그러한 것이 있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그러한 메타적인 그러한 입장을 취하여야 하겠다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소위 '상책'이라는 말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의 행위로써 블레셋 족속을 택한 다윗의 행보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 블레셋 족속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그 이름은 '이민자'라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서의 법적인 실제의 이스라엘의 왕적 권세와 그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현실에 아직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기름부으신 왕과 그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의 현실적 정당성을 거두시기까지는 합당하게 아직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는 이민자처럼 기업의 주장을 비로소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원하여 주시기 원합니다'라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으로써의 블레셋 족속에게 가서 그의 기업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당위성을 말했던 것입니다.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곳을 준 것에 대하여서 좀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의 그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휘어짐 타래(winding)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곳을 다윗에게 주는 아기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도 다윗을 시험하여서 자기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하는 중심도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시글락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곳이었고 정체성이 의문시되는 그러한 곳이기 때문에 다윗이 아기스왕을 위해서 일하면서 자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시험적으로도 관계적 판단을 위한 그 왕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곳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시글락이란 곳에 현실적으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사실 그곳에 그술사람들이 있었고 아멜렉 족속도 있었음을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는 그술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술사람은 유다족속으로서 이후에 다윗의 아들 암논을 낳게 되는 다윗의 아내가 그 족속사람인 것과 같이 다윗의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도 이후도 호의적인 관계가 지속되어지고 있는 족속인데 그 지방족속중에서는 애굽에 오가는 족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함께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당위성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그 족속들 사이에서도 변방족속으로서의 문제가 있음에 대한 소외적 계층으로 주목되어지고 이것은 인식적으로도 충돌이 있는 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들을 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다른 또는 바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그것도 또한 있었다는 것이 그곳의 사람들의 인식과 그 정황의 복잡함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범하는 자들로서의 그술사람들을 침에 있어서 본 그술사람들의 중심에서 직접적인 전반적인 반목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혼선적 판단의 정황의 고민이라고 하는 것이 해결의 현실적 모습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블레셋 아기스 왕은 유다민족을 징벌했다는 액면적 판단으로 다윗을 자기 사람으로 임의적 해석과 사실로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복잡한 인식과 정황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사실에 대한 판단과 상황적 입장에서의 사실의 판단의 그 차이는 과연 많이 복잡하면서 차이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게 역사하심을 따라서 다윗은 원수와도 화목케되는 그 현실적 사실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순종의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시글락과 같은 아주 복잡한 세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굽어져 판단되어지고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실타래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믿음으로 상황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잘 구별하여 사실로 받고 생활하여 나갈 때에 주의 기쁨 가운데서 원수 가운데서도 상을 베푸시는 그 화목의 능력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주시는 기업으로서의 우리 삶의 분복을 누리며 또한 주의 예비하신 영광의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한 사람이 '신은 죽었다'고 임의적으로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며 '위험하게 살아라'는 모험적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노력해야 하는 도덕철학밖에 안되는 것으로써 그가 그렇게 혐오하던 자신의 입장도 역시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강요받는 사람들에게는 답변되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의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자존적 형상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는 중심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스스로의 삶을 위한 노력과 그것이 진정한 자존적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로써 인생으로서 내가 해야할 사실이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졌다고 하는 것의 인식적 사실은 상대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존의 하나님이 규정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함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도 주의 보내심 안에서 정당한 것으로 받아 나의 삶으로서 사랑할 이유와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진정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종들로서 비록 실타래같이 복잡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강요되어지는 포기내지 도피와 같은 것에 굴복하지 않고, 참으로 그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잔치할 수 있는 진정한 사실구별을 통하여서 삶을 긍정하고 주 앞에서 다윗(beloved)처럼,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화목의 능력을 통하여서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받는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 세우심을 받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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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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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19, 2006

유다의 뉘우침

2006년 6월 1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7:1-10
유다의 뉘우침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하나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한 예를 유다의 뉘우침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 선한 면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그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보편적인 생각을 한다고 할 때에, 어떤 무대 공연에서도 주인공이 있으면 그 상대편의 악역도 있어야 그 드라마 같은 공연의 실제적인 반전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말함에 있어서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증거의 중심적 실제일 때에 그 악한 조연역활이라고 할 수도 있는 가룟유다의 현실적인 평가는 긍정적인 면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마치 하나의 보편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판단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같은 판단이 되는 우리 인생, 현실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목적도 알 수 없어 보이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듯한 현실적인 판단에서 판단되어지는 나그네의 모습인데, 같은 인간의 고뇌로써, 어떤 일에 대한 잘못을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고 용납되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유다의 판단은 재평가 되어야하며 그의 공로는 기독교에서 선히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개념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들의 입장이 되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의 정당함은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감람산 동산에서 가룟 유다가 그와 함께한 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아서 대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그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불법의 재판형식을 갖춘 후에 주 예수님을 모독하고,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하니 대제사장들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면서 유다 그가 죄를 당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인해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되는데 대제사장들은 그 은삽십이 성전고에 넣기부당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돈으로 토기장의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고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기록된 말씀대로 되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회개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 그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회개라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유다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의 섬김이라는 것으로서 선히 받을 수 없음에 대한 것도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정황과 문맥을 살펴보면 이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앞장인 마태복음 26장 마지막에 기록되어져 있는 베드로의 회개 그 뉘우침과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마 26:74~75) 즉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고 난 뒤에 닭이 두 번 울게되어지는 때에 그의 주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나가 심히 통곡하였음과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본문의 문맥적 상황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회개와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냐 아니냐 아니라고 할 때에 유다의 뉘우침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베드로는 어떤 중심의 회개를 했으며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주목할수 있고 말씀하심의 강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회개하라'는 그 말은 거의 모두 '메타노에오'라는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 3:2; 4:17; 계2:16,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은 영역으로 동일하게 'repent''후회하다, 회개하다, 유감으로 여기다; 참회하다'라는 말로 번역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측면에서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회개라는 말로 표현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은 이미 성경에서 구별하여 달리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해석적 당위성은 이미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더욱 회개하라는 말에 일관성있게 쓰여진 '메타노에오'라는 말을 놓아두고 다른 말인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을 기자가 선택하였다고 하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영감에서 비롯되어진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 상대적인 차이는 실제적인 차이로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다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하라는 그 말과 다른 의미에서의 뉘우침이라는 것을 성경기자는 특별영감속에서 기록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유다가 입맞춤으로 주님을 팔때에 하신 말씀 '네가 인자를 파느냐'(마 26:49~50; 눅 22:48)라는 말을 하셨을 때에 그 '판다'는 그 말은 '파라디도우미'라는 뜻으로 자신의 앞에 어떤 것을 내놓아서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을 말하는 마치 계약되어서 자신의 소유와 상관없는 것을 의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하는 소유권이전을 말씀하셨던 '테텔레스타이' 즉 '거래가 끝나서 이제 거래물은 내 것이 되었다'라는 말과 정 반대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주님의 통치하심과 함께하심과 그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예수님께로부터 주님께로부터 비로소 찾는다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구속의 실제와 거룩하신 자로서 믿는자에게 그 판단의 구별적 사실을 재가하시는 주님의 부여하시는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이미 그는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그의 입장의 보편성은 절대의 재가를 받을 수 없는 가운데서의 보편성으로써 비록, 그 보편의 형식은 상대적으로 공감되어질 수 있다고 하여도 실제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제한되어지고 상대적 편협이라는 것으로써의 보편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의 보편과 비교되어질 수도 없는 그러한 판단으로 하나의 보편성이 있는 것과 같은 기만성이 있을 뿐인 기각되어진 상대적 보편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의 인식과 판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마 27:3) 여기서 스스로 뉘우침이라고 할 때에 이 '스스로'의 개념은 재가를 받지 못한 것으로써 결국 '임의적'이라는 판단의 사실규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성경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하라'라는 말인 '메타노에오'라는 말의 뜻은 후회하다(repent)는 마음을 변화시키다(to change one's mind)라는 말로서 먼저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심을 볼 때에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의 표현이 가능한 것이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으로써 진정한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하심이 자신에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가운데서의 스스로가 되지 않고 임의적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또한 증거는 본문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그 존재의 정당함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신의 주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였음에 대한 총체적인 그의 중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의 하나님의 이름의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의 기본입니다. 그러한 중심을 취하지 않고 그 괴로움으로 그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상대적 정당함을 요청할 수 있으나 절대의 재가있는 정당함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공감이 갈 수도 있고 아주 인간미라는 보편적 인식에서 정당함을 부여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는 그의 주님을 판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며 주의 뜻하심이 자신으로부터 나타내시기를 바라는 중심이 전혀 없는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회개라는 개념은 이처럼 자신의 임의적인 도덕적 판단과 생각에서 정도면에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뉘우침의 형식을 갖춘다는 것만으로써 진정한 그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주의 말씀이 기억나고 그 말씀을 주목할 때에 그 말씀하심에서 그 말씀의 사실을 의지하여서 자신의 존재의 판단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로소 그 뉘우침의 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중심과 마음이 바뀌어서 그 말씀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그 사실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 회개하는 그 모습이 '회개하라'(메타노에오)는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어떤 규범적 한계를 밝히 말하지 못한다고 그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마치 상대적인 보편적 이야기가 절대적인 보편인 것과 같이 착각에 빠지게 되는 소위 '나르시즘'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자기 파괴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 사람들 불법의 사람들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와 같이 그가 취한 그의 정적인 행동과 임의적 판단에 따른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인 설득력이 절대의 보편과 절대의 보편적 재가가 있는 보편적인 사실을 부인하거나 또는 제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표현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고 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러한 기만적 요소는 다른 형태로 항상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셨던 그 계시가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기억할 때에 그가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말씀하심에서 그 사실적 규정과 존재를 절대 합당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상대적 보편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선한 역이 있으면 악역도 있어야 된다 또는 악역이 없으면 선한 역이 빛을 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유다가 없으면 예수님의 뜻하심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고 악을 선하다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개념의 보편성의 당위성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유다의 그 행각이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 자신의 그 뜻하심을 선히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말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재가있는 것으로 그 합당함을 말할 수 있고 또한 그의 정하심에 다른 여지를 말하는 것도 이미 사유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우리가 하지 않음이 좋은 것이니 말하지 못하여도 하지 않아도 그 정당함이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상대적인 역활로 인한 그 뜻하심을 이루실 것이라는 그 구속의 의식을, 비록 죄가운데 있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다는 가운데서 의식해야만 하는 것이 선인과 악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인식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그러한 상대적 인식의 보편성의 유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행적에 대한 선함을 상대적으로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성립과 존재적 사실적 입장은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같은 정적인 기만적 보편성의 당위성에 따른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참되게 이전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중심과 마음이 바뀌어서 그 말씀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그 사실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의 뉘우침, 그 회개하는 중심을 가지신 성도들로서 베드로와 같이 동일한 사도는 아니지만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서 이시대에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내어줄 주의 마음에 꼭드는 주의 성도 주의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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