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27:1-12
시글락에 머문 다윗
우리 인생이 경영하는 '인생이라는 삶'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지친 사람들은 좀 쉬운 것을 추구하고 있고 지친 삶의 무게에 가중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것은 일말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편안함을 누리고자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분복의 하나로써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아담의 후손들로서의 인생은 그 토지를 갈아서 그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은 그들의 종된 자리에서의 위로로서의 자유와 어려움의 무게를 내려놓는 편안함이라고 함을 추구하여야 하는 당위성과 일말의 추구적 당위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비로소 불순종이라는 죄로 인한 욕심과 어울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규정적 입장을 알지 못하는 죄악된 가운데서의 분별의 임의성 때문에 그 분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자유와 실체가 없는 실체로서의 고통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참 고통스럽기도 하고 삶을 위한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지치기 쉽고 싫어지는 가운데서 이 복잡하면서도 배척하고 싶은 가운데서 그것이 가능하지 못한 것같이 느껴지는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며 기쁨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설교를 듣고 읽고 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머리속에서는 세상의 여러가지 생각들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지금에 있어서 이 말씀을 대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의 삶에 또 삶을 주장하는 신앙은 그러한 것에 대한 온유적 답변을 말할 때에 그렇게 쉬운 것으로 비로소 위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그 은혜를 우리는 더욱 사모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의 물이 있음에 대한 소리를 들었을 때에 심정으로 말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부터 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하게 될까 하여서 블레셋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와 함께한 자들과 가솔들을 데리고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가게 됨과 다윗의 의도한 바와 같이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찾아 죽이기 위한 수색을 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왕 아기스에게 이르러 블레셋의 지방중 한 곳을 주어 거하기를 구하니 아기스가 시글락을 주었다고 함과 그것이 그때당시 유다왕의 소유가 되었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고 또한 머문 기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임을 기록하고 있고 이 일에 있어서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데려가지 않음과 아기스의 그 다윗의 행보에 대한 것을 보고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는 중심을 가졌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간 이유와 그곳에서 행한 행보에 대한 해석과 사태에 있게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이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나감에 대한 그 중심을 이해함에 대하여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신앙이 약해진 가운데서 자구책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으로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주목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적 개념만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나간 것은 두 번입니다. 한번은 사울에게 쫓기는 중심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나타나서 아기스에게 나아간 것(삼상 21:1~15)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상황을 구별하여 주의 섭리를 따르는 자로서의 순종으로서 나아간 오늘 본문(삼상 27:1~12)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의 아기스왕에게 나아감을 말하는 본문(삼상 21:1~15)에서는 직접적인 인식이 기록되어지지 않았지만 시편에서는 그의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고 그 곤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하는 중심이 있었다는 것과 그 불안한 가운데서도 그 섭리의 사실을 믿는 가운데서의 순종하는 중심이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시 59:1~17)
두 번째 아기스 왕에게 나가는 것은 전혀 반전되어진 가운데서의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믿음의 종으로서의 다윗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다윗에게 끝까지 따라다니는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것으로서의 주 앞에서의 순종의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해서 죽이고 다윗에게 이미 예정적 주어진 그의 나라에 대한 기득권에 대한 항의와 존속을 위한 노력을 행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다윗은 이미 그 기득권적 재가가 다윗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주께서 나타내시기까지 현실적인 측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을 치거나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서 그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두번 있게 되어지는데 이제는 그러한 것이 있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그러한 메타적인 그러한 입장을 취하여야 하겠다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소위 '상책'이라는 말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의 행위로써 블레셋 족속을 택한 다윗의 행보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 블레셋 족속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그 이름은 '이민자'라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서의 법적인 실제의 이스라엘의 왕적 권세와 그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현실에 아직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기름부으신 왕과 그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의 현실적 정당성을 거두시기까지는 합당하게 아직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는 이민자처럼 기업의 주장을 비로소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원하여 주시기 원합니다'라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으로써의 블레셋 족속에게 가서 그의 기업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당위성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곳을 준 것에 대하여서 좀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의 그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휘어짐 타래(winding)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곳을 다윗에게 주는 아기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도 다윗을 시험하여서 자기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하는 중심도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시글락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곳이었고 정체성이 의문시되는 그러한 곳이기 때문에 다윗이 아기스왕을 위해서 일하면서 자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시험적으로도 관계적 판단을 위한 그 왕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곳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시글락이란 곳에 현실적으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사실 그곳에 그술사람들이 있었고 아멜렉 족속도 있었음을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는 그술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술사람은 유다족속으로서 이후에 다윗의 아들 암논을 낳게 되는 다윗의 아내가 그 족속사람인 것과 같이 다윗의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도 이후도 호의적인 관계가 지속되어지고 있는 족속인데 그 지방족속중에서는 애굽에 오가는 족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함께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당위성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그 족속들 사이에서도 변방족속으로서의 문제가 있음에 대한 소외적 계층으로 주목되어지고 이것은 인식적으로도 충돌이 있는 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들을 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다른 또는 바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그것도 또한 있었다는 것이 그곳의 사람들의 인식과 그 정황의 복잡함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범하는 자들로서의 그술사람들을 침에 있어서 본 그술사람들의 중심에서 직접적인 전반적인 반목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혼선적 판단의 정황의 고민이라고 하는 것이 해결의 현실적 모습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블레셋 아기스 왕은 유다민족을 징벌했다는 액면적 판단으로 다윗을 자기 사람으로 임의적 해석과 사실로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복잡한 인식과 정황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사실에 대한 판단과 상황적 입장에서의 사실의 판단의 그 차이는 과연 많이 복잡하면서 차이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게 역사하심을 따라서 다윗은 원수와도 화목케되는 그 현실적 사실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순종의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시글락과 같은 아주 복잡한 세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굽어져 판단되어지고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실타래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믿음으로 상황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잘 구별하여 사실로 받고 생활하여 나갈 때에 주의 기쁨 가운데서 원수 가운데서도 상을 베푸시는 그 화목의 능력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주시는 기업으로서의 우리 삶의 분복을 누리며 또한 주의 예비하신 영광의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한 사람이 '신은 죽었다'고 임의적으로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며 '위험하게 살아라'는 모험적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노력해야 하는 도덕철학밖에 안되는 것으로써 그가 그렇게 혐오하던 자신의 입장도 역시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강요받는 사람들에게는 답변되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의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자존적 형상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는 중심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스스로의 삶을 위한 노력과 그것이 진정한 자존적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로써 인생으로서 내가 해야할 사실이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졌다고 하는 것의 인식적 사실은 상대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존의 하나님이 규정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함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도 주의 보내심 안에서 정당한 것으로 받아 나의 삶으로서 사랑할 이유와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진정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종들로서 비록 실타래같이 복잡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강요되어지는 포기내지 도피와 같은 것에 굴복하지 않고, 참으로 그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잔치할 수 있는 진정한 사실구별을 통하여서 삶을 긍정하고 주 앞에서 다윗(beloved)처럼,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화목의 능력을 통하여서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받는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 세우심을 받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삼상27:1-12
시글락에 머문 다윗
우리 인생이 경영하는 '인생이라는 삶'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지친 사람들은 좀 쉬운 것을 추구하고 있고 지친 삶의 무게에 가중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것은 일말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편안함을 누리고자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분복의 하나로써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아담의 후손들로서의 인생은 그 토지를 갈아서 그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은 그들의 종된 자리에서의 위로로서의 자유와 어려움의 무게를 내려놓는 편안함이라고 함을 추구하여야 하는 당위성과 일말의 추구적 당위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비로소 불순종이라는 죄로 인한 욕심과 어울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규정적 입장을 알지 못하는 죄악된 가운데서의 분별의 임의성 때문에 그 분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자유와 실체가 없는 실체로서의 고통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참 고통스럽기도 하고 삶을 위한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지치기 쉽고 싫어지는 가운데서 이 복잡하면서도 배척하고 싶은 가운데서 그것이 가능하지 못한 것같이 느껴지는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며 기쁨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설교를 듣고 읽고 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머리속에서는 세상의 여러가지 생각들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지금에 있어서 이 말씀을 대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의 삶에 또 삶을 주장하는 신앙은 그러한 것에 대한 온유적 답변을 말할 때에 그렇게 쉬운 것으로 비로소 위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그 은혜를 우리는 더욱 사모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의 물이 있음에 대한 소리를 들었을 때에 심정으로 말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부터 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하게 될까 하여서 블레셋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와 함께한 자들과 가솔들을 데리고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가게 됨과 다윗의 의도한 바와 같이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찾아 죽이기 위한 수색을 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왕 아기스에게 이르러 블레셋의 지방중 한 곳을 주어 거하기를 구하니 아기스가 시글락을 주었다고 함과 그것이 그때당시 유다왕의 소유가 되었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고 또한 머문 기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임을 기록하고 있고 이 일에 있어서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데려가지 않음과 아기스의 그 다윗의 행보에 대한 것을 보고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는 중심을 가졌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간 이유와 그곳에서 행한 행보에 대한 해석과 사태에 있게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이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나감에 대한 그 중심을 이해함에 대하여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신앙이 약해진 가운데서 자구책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으로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주목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적 개념만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나간 것은 두 번입니다. 한번은 사울에게 쫓기는 중심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나타나서 아기스에게 나아간 것(삼상 21:1~15)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상황을 구별하여 주의 섭리를 따르는 자로서의 순종으로서 나아간 오늘 본문(삼상 27:1~12)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의 아기스왕에게 나아감을 말하는 본문(삼상 21:1~15)에서는 직접적인 인식이 기록되어지지 않았지만 시편에서는 그의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고 그 곤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하는 중심이 있었다는 것과 그 불안한 가운데서도 그 섭리의 사실을 믿는 가운데서의 순종하는 중심이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시 59:1~17)
두 번째 아기스 왕에게 나가는 것은 전혀 반전되어진 가운데서의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믿음의 종으로서의 다윗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다윗에게 끝까지 따라다니는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것으로서의 주 앞에서의 순종의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해서 죽이고 다윗에게 이미 예정적 주어진 그의 나라에 대한 기득권에 대한 항의와 존속을 위한 노력을 행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다윗은 이미 그 기득권적 재가가 다윗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주께서 나타내시기까지 현실적인 측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을 치거나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서 그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두번 있게 되어지는데 이제는 그러한 것이 있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그러한 메타적인 그러한 입장을 취하여야 하겠다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소위 '상책'이라는 말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의 행위로써 블레셋 족속을 택한 다윗의 행보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 블레셋 족속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그 이름은 '이민자'라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서의 법적인 실제의 이스라엘의 왕적 권세와 그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현실에 아직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기름부으신 왕과 그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의 현실적 정당성을 거두시기까지는 합당하게 아직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는 이민자처럼 기업의 주장을 비로소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원하여 주시기 원합니다'라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으로써의 블레셋 족속에게 가서 그의 기업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당위성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곳을 준 것에 대하여서 좀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의 그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휘어짐 타래(winding)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곳을 다윗에게 주는 아기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도 다윗을 시험하여서 자기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하는 중심도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시글락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곳이었고 정체성이 의문시되는 그러한 곳이기 때문에 다윗이 아기스왕을 위해서 일하면서 자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시험적으로도 관계적 판단을 위한 그 왕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곳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시글락이란 곳에 현실적으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사실 그곳에 그술사람들이 있었고 아멜렉 족속도 있었음을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는 그술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술사람은 유다족속으로서 이후에 다윗의 아들 암논을 낳게 되는 다윗의 아내가 그 족속사람인 것과 같이 다윗의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도 이후도 호의적인 관계가 지속되어지고 있는 족속인데 그 지방족속중에서는 애굽에 오가는 족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함께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당위성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그 족속들 사이에서도 변방족속으로서의 문제가 있음에 대한 소외적 계층으로 주목되어지고 이것은 인식적으로도 충돌이 있는 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들을 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다른 또는 바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그것도 또한 있었다는 것이 그곳의 사람들의 인식과 그 정황의 복잡함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범하는 자들로서의 그술사람들을 침에 있어서 본 그술사람들의 중심에서 직접적인 전반적인 반목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혼선적 판단의 정황의 고민이라고 하는 것이 해결의 현실적 모습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블레셋 아기스 왕은 유다민족을 징벌했다는 액면적 판단으로 다윗을 자기 사람으로 임의적 해석과 사실로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복잡한 인식과 정황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사실에 대한 판단과 상황적 입장에서의 사실의 판단의 그 차이는 과연 많이 복잡하면서 차이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게 역사하심을 따라서 다윗은 원수와도 화목케되는 그 현실적 사실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순종의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시글락과 같은 아주 복잡한 세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굽어져 판단되어지고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실타래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믿음으로 상황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잘 구별하여 사실로 받고 생활하여 나갈 때에 주의 기쁨 가운데서 원수 가운데서도 상을 베푸시는 그 화목의 능력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주시는 기업으로서의 우리 삶의 분복을 누리며 또한 주의 예비하신 영광의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한 사람이 '신은 죽었다'고 임의적으로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며 '위험하게 살아라'는 모험적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노력해야 하는 도덕철학밖에 안되는 것으로써 그가 그렇게 혐오하던 자신의 입장도 역시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강요받는 사람들에게는 답변되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의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자존적 형상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는 중심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스스로의 삶을 위한 노력과 그것이 진정한 자존적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로써 인생으로서 내가 해야할 사실이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졌다고 하는 것의 인식적 사실은 상대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존의 하나님이 규정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함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도 주의 보내심 안에서 정당한 것으로 받아 나의 삶으로서 사랑할 이유와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진정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종들로서 비록 실타래같이 복잡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강요되어지는 포기내지 도피와 같은 것에 굴복하지 않고, 참으로 그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잔치할 수 있는 진정한 사실구별을 통하여서 삶을 긍정하고 주 앞에서 다윗(beloved)처럼,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화목의 능력을 통하여서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받는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 세우심을 받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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