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6월 26, 2006

시글락에 머문 다윗- 복잡한 세상속에서..

2006년 6월 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27:1-12
시글락에 머문 다윗

우리 인생이 경영하는 '인생이라는 삶'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지친 사람들은 좀 쉬운 것을 추구하고 있고 지친 삶의 무게에 가중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것은 일말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편안함을 누리고자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분복의 하나로써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아담의 후손들로서의 인생은 그 토지를 갈아서 그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은 그들의 종된 자리에서의 위로로서의 자유와 어려움의 무게를 내려놓는 편안함이라고 함을 추구하여야 하는 당위성과 일말의 추구적 당위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비로소 불순종이라는 죄로 인한 욕심과 어울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규정적 입장을 알지 못하는 죄악된 가운데서의 분별의 임의성 때문에 그 분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자유와 실체가 없는 실체로서의 고통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참 고통스럽기도 하고 삶을 위한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지치기 쉽고 싫어지는 가운데서 이 복잡하면서도 배척하고 싶은 가운데서 그것이 가능하지 못한 것같이 느껴지는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며 기쁨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설교를 듣고 읽고 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머리속에서는 세상의 여러가지 생각들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지금에 있어서 이 말씀을 대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의 삶에 또 삶을 주장하는 신앙은 그러한 것에 대한 온유적 답변을 말할 때에 그렇게 쉬운 것으로 비로소 위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그 은혜를 우리는 더욱 사모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의 물이 있음에 대한 소리를 들었을 때에 심정으로 말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부터 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하게 될까 하여서 블레셋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와 함께한 자들과 가솔들을 데리고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가게 됨과 다윗의 의도한 바와 같이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찾아 죽이기 위한 수색을 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왕 아기스에게 이르러 블레셋의 지방중 한 곳을 주어 거하기를 구하니 아기스가 시글락을 주었다고 함과 그것이 그때당시 유다왕의 소유가 되었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고 또한 머문 기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임을 기록하고 있고 이 일에 있어서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데려가지 않음과 아기스의 그 다윗의 행보에 대한 것을 보고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는 중심을 가졌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간 이유와 그곳에서 행한 행보에 대한 해석과 사태에 있게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이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나감에 대한 그 중심을 이해함에 대하여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신앙이 약해진 가운데서 자구책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으로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주목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적 개념만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나간 것은 두 번입니다. 한번은 사울에게 쫓기는 중심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나타나서 아기스에게 나아간 것(삼상 21:1~15)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상황을 구별하여 주의 섭리를 따르는 자로서의 순종으로서 나아간 오늘 본문(삼상 27:1~12)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의 아기스왕에게 나아감을 말하는 본문(삼상 21:1~15)에서는 직접적인 인식이 기록되어지지 않았지만 시편에서는 그의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고 그 곤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하는 중심이 있었다는 것과 그 불안한 가운데서도 그 섭리의 사실을 믿는 가운데서의 순종하는 중심이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시 59:1~17)

두 번째 아기스 왕에게 나가는 것은 전혀 반전되어진 가운데서의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믿음의 종으로서의 다윗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다윗에게 끝까지 따라다니는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것으로서의 주 앞에서의 순종의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해서 죽이고 다윗에게 이미 예정적 주어진 그의 나라에 대한 기득권에 대한 항의와 존속을 위한 노력을 행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다윗은 이미 그 기득권적 재가가 다윗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주께서 나타내시기까지 현실적인 측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을 치거나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서 그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두번 있게 되어지는데 이제는 그러한 것이 있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그러한 메타적인 그러한 입장을 취하여야 하겠다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소위 '상책'이라는 말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의 행위로써 블레셋 족속을 택한 다윗의 행보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 블레셋 족속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그 이름은 '이민자'라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서의 법적인 실제의 이스라엘의 왕적 권세와 그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현실에 아직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기름부으신 왕과 그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의 현실적 정당성을 거두시기까지는 합당하게 아직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는 이민자처럼 기업의 주장을 비로소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원하여 주시기 원합니다'라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으로써의 블레셋 족속에게 가서 그의 기업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당위성을 말했던 것입니다.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곳을 준 것에 대하여서 좀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의 그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휘어짐 타래(winding)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곳을 다윗에게 주는 아기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도 다윗을 시험하여서 자기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하는 중심도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시글락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곳이었고 정체성이 의문시되는 그러한 곳이기 때문에 다윗이 아기스왕을 위해서 일하면서 자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시험적으로도 관계적 판단을 위한 그 왕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곳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시글락이란 곳에 현실적으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사실 그곳에 그술사람들이 있었고 아멜렉 족속도 있었음을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는 그술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술사람은 유다족속으로서 이후에 다윗의 아들 암논을 낳게 되는 다윗의 아내가 그 족속사람인 것과 같이 다윗의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도 이후도 호의적인 관계가 지속되어지고 있는 족속인데 그 지방족속중에서는 애굽에 오가는 족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함께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당위성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그 족속들 사이에서도 변방족속으로서의 문제가 있음에 대한 소외적 계층으로 주목되어지고 이것은 인식적으로도 충돌이 있는 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들을 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다른 또는 바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그것도 또한 있었다는 것이 그곳의 사람들의 인식과 그 정황의 복잡함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범하는 자들로서의 그술사람들을 침에 있어서 본 그술사람들의 중심에서 직접적인 전반적인 반목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혼선적 판단의 정황의 고민이라고 하는 것이 해결의 현실적 모습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블레셋 아기스 왕은 유다민족을 징벌했다는 액면적 판단으로 다윗을 자기 사람으로 임의적 해석과 사실로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복잡한 인식과 정황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사실에 대한 판단과 상황적 입장에서의 사실의 판단의 그 차이는 과연 많이 복잡하면서 차이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게 역사하심을 따라서 다윗은 원수와도 화목케되는 그 현실적 사실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순종의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시글락과 같은 아주 복잡한 세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굽어져 판단되어지고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실타래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믿음으로 상황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잘 구별하여 사실로 받고 생활하여 나갈 때에 주의 기쁨 가운데서 원수 가운데서도 상을 베푸시는 그 화목의 능력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주시는 기업으로서의 우리 삶의 분복을 누리며 또한 주의 예비하신 영광의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한 사람이 '신은 죽었다'고 임의적으로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며 '위험하게 살아라'는 모험적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노력해야 하는 도덕철학밖에 안되는 것으로써 그가 그렇게 혐오하던 자신의 입장도 역시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강요받는 사람들에게는 답변되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의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자존적 형상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는 중심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스스로의 삶을 위한 노력과 그것이 진정한 자존적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로써 인생으로서 내가 해야할 사실이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졌다고 하는 것의 인식적 사실은 상대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존의 하나님이 규정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함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도 주의 보내심 안에서 정당한 것으로 받아 나의 삶으로서 사랑할 이유와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진정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종들로서 비록 실타래같이 복잡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강요되어지는 포기내지 도피와 같은 것에 굴복하지 않고, 참으로 그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잔치할 수 있는 진정한 사실구별을 통하여서 삶을 긍정하고 주 앞에서 다윗(beloved)처럼,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화목의 능력을 통하여서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받는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 세우심을 받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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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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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19, 2006

유다의 뉘우침

2006년 6월 1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7:1-10
유다의 뉘우침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하나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한 예를 유다의 뉘우침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 선한 면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그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보편적인 생각을 한다고 할 때에, 어떤 무대 공연에서도 주인공이 있으면 그 상대편의 악역도 있어야 그 드라마 같은 공연의 실제적인 반전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말함에 있어서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증거의 중심적 실제일 때에 그 악한 조연역활이라고 할 수도 있는 가룟유다의 현실적인 평가는 긍정적인 면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마치 하나의 보편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판단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같은 판단이 되는 우리 인생, 현실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목적도 알 수 없어 보이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듯한 현실적인 판단에서 판단되어지는 나그네의 모습인데, 같은 인간의 고뇌로써, 어떤 일에 대한 잘못을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고 용납되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유다의 판단은 재평가 되어야하며 그의 공로는 기독교에서 선히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개념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들의 입장이 되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의 정당함은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감람산 동산에서 가룟 유다가 그와 함께한 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아서 대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그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불법의 재판형식을 갖춘 후에 주 예수님을 모독하고,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하니 대제사장들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면서 유다 그가 죄를 당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인해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되는데 대제사장들은 그 은삽십이 성전고에 넣기부당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돈으로 토기장의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고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기록된 말씀대로 되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회개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 그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회개라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유다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의 섬김이라는 것으로서 선히 받을 수 없음에 대한 것도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정황과 문맥을 살펴보면 이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앞장인 마태복음 26장 마지막에 기록되어져 있는 베드로의 회개 그 뉘우침과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마 26:74~75) 즉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고 난 뒤에 닭이 두 번 울게되어지는 때에 그의 주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나가 심히 통곡하였음과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본문의 문맥적 상황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회개와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냐 아니냐 아니라고 할 때에 유다의 뉘우침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베드로는 어떤 중심의 회개를 했으며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주목할수 있고 말씀하심의 강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회개하라'는 그 말은 거의 모두 '메타노에오'라는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 3:2; 4:17; 계2:16,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은 영역으로 동일하게 'repent''후회하다, 회개하다, 유감으로 여기다; 참회하다'라는 말로 번역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측면에서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회개라는 말로 표현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은 이미 성경에서 구별하여 달리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해석적 당위성은 이미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더욱 회개하라는 말에 일관성있게 쓰여진 '메타노에오'라는 말을 놓아두고 다른 말인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을 기자가 선택하였다고 하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영감에서 비롯되어진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 상대적인 차이는 실제적인 차이로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다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하라는 그 말과 다른 의미에서의 뉘우침이라는 것을 성경기자는 특별영감속에서 기록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유다가 입맞춤으로 주님을 팔때에 하신 말씀 '네가 인자를 파느냐'(마 26:49~50; 눅 22:48)라는 말을 하셨을 때에 그 '판다'는 그 말은 '파라디도우미'라는 뜻으로 자신의 앞에 어떤 것을 내놓아서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을 말하는 마치 계약되어서 자신의 소유와 상관없는 것을 의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하는 소유권이전을 말씀하셨던 '테텔레스타이' 즉 '거래가 끝나서 이제 거래물은 내 것이 되었다'라는 말과 정 반대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주님의 통치하심과 함께하심과 그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예수님께로부터 주님께로부터 비로소 찾는다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구속의 실제와 거룩하신 자로서 믿는자에게 그 판단의 구별적 사실을 재가하시는 주님의 부여하시는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이미 그는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그의 입장의 보편성은 절대의 재가를 받을 수 없는 가운데서의 보편성으로써 비록, 그 보편의 형식은 상대적으로 공감되어질 수 있다고 하여도 실제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제한되어지고 상대적 편협이라는 것으로써의 보편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의 보편과 비교되어질 수도 없는 그러한 판단으로 하나의 보편성이 있는 것과 같은 기만성이 있을 뿐인 기각되어진 상대적 보편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의 인식과 판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마 27:3) 여기서 스스로 뉘우침이라고 할 때에 이 '스스로'의 개념은 재가를 받지 못한 것으로써 결국 '임의적'이라는 판단의 사실규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성경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하라'라는 말인 '메타노에오'라는 말의 뜻은 후회하다(repent)는 마음을 변화시키다(to change one's mind)라는 말로서 먼저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심을 볼 때에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의 표현이 가능한 것이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으로써 진정한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하심이 자신에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가운데서의 스스로가 되지 않고 임의적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또한 증거는 본문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그 존재의 정당함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신의 주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였음에 대한 총체적인 그의 중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의 하나님의 이름의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의 기본입니다. 그러한 중심을 취하지 않고 그 괴로움으로 그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상대적 정당함을 요청할 수 있으나 절대의 재가있는 정당함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공감이 갈 수도 있고 아주 인간미라는 보편적 인식에서 정당함을 부여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는 그의 주님을 판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며 주의 뜻하심이 자신으로부터 나타내시기를 바라는 중심이 전혀 없는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회개라는 개념은 이처럼 자신의 임의적인 도덕적 판단과 생각에서 정도면에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뉘우침의 형식을 갖춘다는 것만으로써 진정한 그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주의 말씀이 기억나고 그 말씀을 주목할 때에 그 말씀하심에서 그 말씀의 사실을 의지하여서 자신의 존재의 판단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로소 그 뉘우침의 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중심과 마음이 바뀌어서 그 말씀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그 사실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 회개하는 그 모습이 '회개하라'(메타노에오)는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어떤 규범적 한계를 밝히 말하지 못한다고 그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마치 상대적인 보편적 이야기가 절대적인 보편인 것과 같이 착각에 빠지게 되는 소위 '나르시즘'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자기 파괴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 사람들 불법의 사람들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와 같이 그가 취한 그의 정적인 행동과 임의적 판단에 따른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인 설득력이 절대의 보편과 절대의 보편적 재가가 있는 보편적인 사실을 부인하거나 또는 제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표현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고 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러한 기만적 요소는 다른 형태로 항상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셨던 그 계시가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기억할 때에 그가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말씀하심에서 그 사실적 규정과 존재를 절대 합당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상대적 보편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선한 역이 있으면 악역도 있어야 된다 또는 악역이 없으면 선한 역이 빛을 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유다가 없으면 예수님의 뜻하심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고 악을 선하다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개념의 보편성의 당위성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유다의 그 행각이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 자신의 그 뜻하심을 선히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말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재가있는 것으로 그 합당함을 말할 수 있고 또한 그의 정하심에 다른 여지를 말하는 것도 이미 사유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우리가 하지 않음이 좋은 것이니 말하지 못하여도 하지 않아도 그 정당함이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상대적인 역활로 인한 그 뜻하심을 이루실 것이라는 그 구속의 의식을, 비록 죄가운데 있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다는 가운데서 의식해야만 하는 것이 선인과 악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인식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그러한 상대적 인식의 보편성의 유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행적에 대한 선함을 상대적으로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성립과 존재적 사실적 입장은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같은 정적인 기만적 보편성의 당위성에 따른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참되게 이전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중심과 마음이 바뀌어서 그 말씀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그 사실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의 뉘우침, 그 회개하는 중심을 가지신 성도들로서 베드로와 같이 동일한 사도는 아니지만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서 이시대에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내어줄 주의 마음에 꼭드는 주의 성도 주의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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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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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12, 2006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

2006년 6월 1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6:57-75
권능의 우편에 앉은 인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판단하고 말하게 되어지는 말들이라고 하는 것도 이미 성립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이야기라고 할 때에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을 고려하는 객관적인 판단에서는 그 말이 성립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여서, 어떠한 질문이나 판단을 요구하는 문장이나 표현 그리고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존재에 앞서 그것이 올바른가 성립되는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성립되어지도 않는 문제에 대하여서 답을 요구하거나 그것에 답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의 당위성은 없는 것입니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나 질문한다는 것에만 의미두고 있고 아무 생각도 못하는 판단중지적 개념의 말에 미주알 고주알 답변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을 지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말들이, 항상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요즘 많이 대두되고 있는데 하늘에 계신자가 웃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이 오늘 권능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할 수 있도록 들리는 목자의 음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9절에서 7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감람산 동산에서 주께서 그 기록된 말씀대로 잡히시고 이제 유다와 함께한 자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끌고 가게 되고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으나 그 증거를 찾지 못하다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다는 그 증거가 있자 대제사장은 그 치는 증거가 어떠한가 예수께 말하였으나 주께서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대제사장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함에 주께서 '네가 말하였다'라고 대답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신 말씀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그것을 보고 대제사장은 그것과 같이 참담한 대답이 없다면서 제사장 옷을 찢고 말하기를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함에 따라서 그 하속들이 주님께 주먹질과 손짓을 하고 폭력과 조소를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9절에서 75절까지의 말씀에서는,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바깥뜰 앉았는데 각기 두 비자와 다른 곁에 섰던 사람이 '너도 갈릴리 사람과 함께 있었도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라는 말에 모두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나니 닭이 울더라는 기록과 함께 베드로가 세번 부인하리라는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이 그렇게 참담하다고 말하게 한 주님의 말씀과 그것을 뒤늦게 알게된 베드로의 회개의 상관관계가 그것입니다.

먼저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식보편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과 그로인한 외식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그들이 주의 말씀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부분은 그들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써 우격다짐적 부정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보게 되는 부분이라는 것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감람산에서 유다와 그 함께한 자들이 잡아와서 예수님에 대한 즉석재판과 같은 임의적 형식이나마 갖추려고 할 때에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고 자기들의 상식적으로도 증거가 될만한 것이 없었던 것을 고심하던 가운데 형식적인 측면의 상대적 여지가 있는 증거를 하나 내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을 헌다는 불경과 상식적으로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는 식의 신앙의 형식을 갖춘 실제적으로는 임의적인 그래서 거짓증거가 되는 증거를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되신 예수님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성전된 주님의 몸을 말씀하신 것인데(요 2:19~22 참고) 주님을 알지도 못하고 또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사태파악을 임의적으로 해서 조작한 그런한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 질문과 판단의 증거를 요구하는 말의 성립되어짐에 대하여서 답변하실 의미를 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잠잠하셨고, 대제사장은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자신의 임의적 기득권적 재판권을 가진 것이 마냥 실제적인 것과 같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렇다는 말씀을 하시며 하신 말씀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이러한 말에 대한 것을 제대로 비판과 그에 따른 잘못을 가르치는 것이 대제사장의 입장이 될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을 말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임의적인 상대적 정당함을 비로소 의지하는 것으로 대제사장의 옷을 찢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분과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슬픔이나 어떤 감정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는 아론이 하나님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자신들의 아들들로 인해서 옷을 찢지 않았고 오히려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믿음으로 구별하여 사실로 행함에 따라 모세의 좋게 여김을 받았음을 기억할 때에'(레10:8-20참고) 본문에 나타난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명분에 충실한 것과 같이 그 일반대중을 기만하고 상대적 정당함을 강탈하는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보편적 개념에서의 비로소 정당함을 말함에 따라서 그러한 제사장적 권세를 의지하는 자들이 겁없이 그리스도께 폭력의 죄를 더욱 가중적으로 범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한층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런 잘못된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 참담함을 위해 임의적으로 상대적 정당함으로 부인하려고 했던 것이 그 총체적인 것이 바로 주께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할 때에 그것에 대한 분명한 뜻하심을 주목하는 것이 또한 성도의 기본적인 중심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안티적 개념에서 한 사실을 주목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본질적인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임을 본문을 통해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것에 대하여서..

권능의 우편이라고 함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을 말씀하시는데 상대적으로 우편이라고 하는 것이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언어이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언어를 절대의 언어로서의 상대적인 언어로 구별하여 사용하시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절대의 권능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측면을 살피면,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 즉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과 그것의 정당함이 절대적인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인자로서의 상대적인 존재의 모습과 그의 상대적인 형태로서의 그 말씀이 자존자로서의 자기 절대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이라는 개념만으로 비로소 유사비교 판단 평가절하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형태적인 면이 있어도 그것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일뿐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써 절대의 말씀으로써 상대적인 주의 존재와 주의 말씀을 판단함의 정당함은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떠한 상대적 정당함에 따른 비판, 비록 상대적인 무한의 정당함을 가진 바된, 비판이라고 하여도 모두 기각되어지는 것이며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이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권능은 모두가 핑계할 수 없는 복음 자체로서 나타나는 능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말씀에 대하여서..

여기서 '하늘 구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범신적 개념의 하늘이나 또는 자연적인 측면의 하늘이라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자존의 절대자로서 그 하늘이라고 함에 주의 주권적 뜻하심의 거룩함과 보편성을 전제로 한 구별되어진 언어로서의 상식적 언어인 '하늘'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세베대의 아들과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을 때와 같은 현상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17:1~13 참고)

베드로는 그곳이 너무 좋아서 초막 셋을 짓되 주를 위해 모세를 위해 엘리야를 위해 할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에 빛난 구름이 나타나서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막 9:8 왕상 8:11 참고) 두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 저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과 함께 예수만 보이게 되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마 17: 4~9, 막 9:1~13 참고)

즉 본다고 하는 것의 인식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에서의 비로소 좋게 보인다는 것으로써 진정한 사실적 판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들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의식하고 그를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인식들, 본다고 하는 것으로써 판단되어지는 것들은 주님을 판단할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별되어진 인식으로 섬기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식의 방향을 한정시키면서 또한 상대적 무한의 인식을 보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정당함이 부인되어지며,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되느니라'(고후 1:19,20)는 그 말씀의 의미를 통한 신앙의 합리성과 노력의 사실들이 구축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제사장이 아주 상대적인 극단적 당위성으로 사람들의 눈먼 정당함을 강탈해서 기정사실화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앞서 말한 주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의식한 것입니다. 즉 믿지 못하지만 의식할수밖에 없는 자이기에 그러한 불법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의 제자 베드로는 그 상대적인 정황적 불리함과 그에 따른 자신의 존재적 변명을 하게 될 때에도 주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이 이미 부정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닭 울음을 통해서 주의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닭 울음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시점에서 주의 말씀하심이 깨닫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특히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마음에 둘 수 있었던 베드로는 그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의 권능 앞에서 세상이 부정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임마누엘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할 때에 자기의 임의적 신앙의 확신을 부끄러워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것이 후대의 속설로 내려오기도 하는 베드로의 순교의 이야기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교적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사도 베드로의 그 신앙의 확신을 찾음에 있어서 임의적인 것을 회개하고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정당함에 따른 그 가르침에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정당함을 찾아서 그러한 죽기까지 순종을 한 것으로 선히 받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저부터 시작해서, 누구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중심의 고백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인위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고 또 오히려 살기 위해 주님을 저주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여서 고민하며 회개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사역을 위해 그 뜻하심의 정당함이 부여되기를 기도하신 주님의 감람산 기도에 모든 제자들이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이 베드로와 같은 모습으로 일시적이나마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할 때에 세상의 풍조와 그 기만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상식적인 보편성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도 합당하게 삼위일체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주기도적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가운데서 고백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그 실존이 합리적인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절대 합당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둘 때에 주께서 말씀하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확실하게 주의 말씀이, 베드로에게와 같이, 우리 중심에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요 10:1~27 참고)

이러한 중심을 바르게 받아서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심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으로서, 임마누엘하시고 있으신,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고 있으신 것을 마음에 두시는 분들로서 세상의 풍조에 휩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로서 주의 마음에 꼭들게 되는 참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담아내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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