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9월 22, 2005

사망이 이김에 삼킴바 되리라

2005년 9월 2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5:35-58
사망이 이김에 삼킴바 되리라

한번은 학생들과 성경공부하기 전에 고민되는 질문이나 이해되지 않는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는데, 어떤 아이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 축구하는데 두 팀 모두에 크리스찬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다 이기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기를 하는데, 경기의 승패가 있을 경우 지게된 팀의 기도는 안들어 주시는가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못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못하지 않은가요?’라는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의 답변으로는 경기에 이기고 지는 것으로 기도를 들어주심에 대한 판단을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즉 이기는 자의 영광과 비록 이해할 수 없는 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가운데서의 주의 축복하심과 영광은 비교되어서 비로소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사실을 상대적 이미지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대적 여지를 따라서,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부활의 상대적 납득 가능성이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써 그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자들의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전반적인 존재부정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인식을 가진자들이 있는데 부활이 있다고 함을 말하는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목하며 또한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부활이 없다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고 그것에 이어서,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그러한 이어지는 인식과 그에 따른 질문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씨와 형체의 차이는 그 상대적으로도 비교되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과 같이 즉 형체가 다른 씨앗이 자라서 식물이라는 형체가 되는 것과 같이 주님 안에서 부활의 실제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체로써의 육체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영광도 다 다름에 대한 것으로 동일한 영광의 상대적 비교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하늘에 속한 영광, 땅에 속한 영광,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들의 영광이 다른 것으로써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핑계치 못함에 대한 것과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기록된 계시된 말씀에서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하며, 그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시며, 비로소 살려주는 영이 되심을 말하고 있고 그에 따른 형상과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혈과 육, 썩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비밀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며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며 우리들도 변화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음을 입을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할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고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전반적인 증거의 전체적이고 핵심적인 측면에서 표현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출 7:10~12)

고린도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성찬식의 포도주와 떡을 임의적으로 먹는 것과 같은 불량배적인 모습이 죄악으로 그들 자신들에게 인식되어지지 않고,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교회의 질서와 증거의 사실을 믿지 못하는 증거이며 이것은 부활의 참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난 교회의 ‘쓴 뿌리’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정황적으로 볼 때에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도 시간이 흐른 후에 사람들의 인식에서 쇠퇴하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던 것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부활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린도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연보를 해야 하는 그러한 상황에서 각 지역교회의 모습들이 상당히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상황에서의 현대적인 가치를 가질 만한 것인가 그러한 초라한 모습에서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위로하는 거짓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이 있느냐는 그 사실 시비적인 인식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이며 그것의 현실성적인 증거도 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그 현실이라고 함을 상대적이지만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대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있다고 하여도 몇몇 사람들인데, 그 부활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 초라한 모습에서 그러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초라한 것을 더 구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인식적 시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되는가 하는 시비적 입장의 인식을 가진 자들이 사도 바울의 말에 목을 매는 것을 사도 바울도 의식하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35절참고)

부활의 모습에 대한 상대적인 설명을 요구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씨앗과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나는 형체의 연속성에 대한 것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씨와 식물이라는 형체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 연속성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의 현실과 모습들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말함에 전혀 비교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럴 가능성의 상실이라는 느낌에서, 우리 성도들의 부활이라는 형체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확신할 수 없는 부당한 임의적 말을 하고 있음에 어리석다는 표현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하던 고린도교회의 모습들과 지역교회들의 모습은 연약하고 환경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들의 연보로 서로 돕고 있는 모습과 많은 빈곤한 모습이 있다고 할 때에,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닌 위로차원의, 임의적 자위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없다는 것을 말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말하자고 하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이 가능한 것과 비판이 옳은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 여러 영광들의 모습의 다양성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광의 실존과 사실을 믿는다면 그 절대 선하심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으로 영광이 비교되어져서 부끄러운 쇠퇴하고 버려야할 영광으로 자리매김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연보를 하고 연보를 받는 교회의 모습들, 그 모습들이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그런 모습에서 또한 도움을 주는 자나 받는 자들의 모습들도 그렇게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들, 성도들의 그 때당시의 풍족하지 못한 모습들, 그러한 것들에서 그 영광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그 영광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모두 사라질 사실로써 부활이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상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현실론적 비판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상대적인 비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함은 그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이라는 세월이라는 개념을 주권적으로 주장하는 가운데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은 가운데서도 시간 속의 진리로 나타내신 바를 기억하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예수님이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존재부정이라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심을 나타내셔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로서 그의 뜻에 합당한 자들에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기름부으심과 구별하심으로 주의 말씀을 다르는 자들의 존재를 영생을 얻도록 사실화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가 상대적인 형태로써의 성도들에게 그 존재와 삶과 섬김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으로의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규정은 비로소 성도들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에 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 세월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진리의 말씀 진리의 사실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의 증거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좀더 주목해보면 그 앞서 사도 바울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출 7:10~12)

애굽의 왕 바로 앞에 모세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을 때에 애굽의 술사들도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모세의 지팡이로서의 뱀이 그 애굽의 지팡이로서의 뱀을 삼킨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 지팡이로 여러 기적을 행하던 가운데(출 7:15) 그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출 14:16)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부활의 사실의 실재를 부여받은 자들로서 나타내시고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시며 세상의 존재적 정당함이 없는 간교한 지혜의 상징으로써의 상대적 지혜는 그 존재가 이미 하나님의 이기게하심 즉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입은 상대적 지혜에 삼킨바가 되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도록 하고 있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부활이라는 그 사실과 그 재가를 받은 하나님의 지혜의 실재는 모든 상대적인 핑계라는 간교한 지혜의 실존을 부정하게 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모세의 지팡이를 손에 들게 하시는 것과 같이 이제 주의 부활하심과 그 뜻하심의 재가를 받는 지혜를 믿으며 마음에 두며, 주의 뜻하심을 위한 그 믿음의 섬김의 손을 뻗어서 주의 영광의 구원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성도들은 즐거히 믿음의 선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간교한 말의 존재적 부정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그 부활의 사실의 정당함을 믿는 자들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따라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을 믿는 자에게 이김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따라서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됨의 말씀이 응하심을 기쁨으로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의 길을 잘 달려가시며 이후에 나타날 예비된 면류관으로 주께 돌려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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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15, 2005

부활이 없다 하느냐

2005년 9월 1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5:1-34
부활이 없다 하느냐

‘모든 것은 세월이 말해준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진다’라는 말과 같은 세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며 우리의 곁을 지나는데, 그것의 보편적인 인식은 인정하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고통의 시절도 잊고 즐거움의 시간도 망각이라는 바다에 버리게 되는 것이며 세월이 지나면 일반적으로 무상함을 느낀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실제한다고 믿었던 그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후대의 사람의 기억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억한 바가 없는 것을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사실이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다만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실증적인 개념에서 다소 유익을 허구라고 하여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산 증인들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죽고 몇몇정도 살아 있다고 할 때에 그 사실을 현대의 요구에 따라서 재해석되어지고 현대에 맞도록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의 패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9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33, 34절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속지 않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서는 것은 주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믿을 수 있는 자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분란이 있었던 것은 여러 사람들의 열정적인 측면에서 실증적인 실리적인 개념으로 자신들의 합리적인 이유를 따라서 판단하고 그것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주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도외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라고 하는 것의 가장 큰 기본적인 이유는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부활의 확실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5:12 참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은 여러 파로 나뉘어서 자신들의 실리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가운데서 마치 사무엘과는 다른 엘리의 제사장의 아들들과 같이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한 성찬의 예물을 임의적으로 먹고 마심으로 취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그러한 악한 모습 ‘불량배의 모습’(삼상 2:12)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엘리의 아들의 모습(삼상 2:12)과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의 증거로서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도 패역의 쓴 뿌리는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의 사실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나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가운데서 쓴 가라지의 열매가 되어 교회의 합리성만 추구하는 가운데서 주 앞에서의 정당함의 사실로서의 합리적인 가르침에 순종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서신의 결론적인 부분에 와서 바로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3절과 34절에 그러한 합리성을 비로소 의지하는 자들의 부활의 사실의 부인하는 것에 속지 말라고 하심과 그들이 악한 동무임을 지적하시면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으로써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의 내용들을 주목하면 먼저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전한 복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함과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 증인들이 있다는 현실적인 실제의 실증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역사성을 말할 때에 역사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실증적인 것 즉 살아 있는 현실적인 실제적인 것만을 비로소 의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급하는 것은 이렇게 본문에서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 증거의 말씀은 주의 평화 언약, 즉 예정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 창세전에 예정되어진 사실들입니다.(엡 1:4,5) 사도 바울은 주님의 뜻하심(요 17:21~24)을 품었던 자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2:16)

창세 전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은 '시간의 시작, 세월의 시작을 말하기 전'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 사실로 시간의 판단을 받는 세월의 흐름의 판단에서 생성과 쇠퇴와 부인되어지는 사실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는'시간의 시작 세월의 시작을 말하기 전'이라는 개념도 시간의 표시이기 때문에 모순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는 지혜로운 분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상대적 합리성의 상대적 완전성과 충족성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있는 입장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비판 가능한 입장일뿐 아직 정당함의 재고를 하지 않는 질문이 되어질 것이며 그러한 지혜의 지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그에 대한 묘사를 상대적으로 표현하실 때에 그것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연속성은 상대적인 불연속성이라는 말로 비판의 형태를 띠면서도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원인은 바로 그 합리성의 존재를 비합리적이면서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전이라는 말이 비합리적이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서의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의 범주 전에 있다는 표현이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정당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실증적인 현실적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것이 상대적으로 세월이 지난 후에 쇠퇴할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부활의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의 부당함을 말하면서도 그것은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즉 세월의 범주를 벗어나는 세월의 판단을 벗어나는 진리로서 세월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자존의 절대자가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길 기뻐하셨다는 것과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에 역사속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의 형태로 진리로서 말씀하심에 그것은 상대적인 시간, 세월 속에 쇠퇴 소멸되어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라는, 존재를 모두 휩쓸고 존재부정으로써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그러한 판단 속에서도 사실이라고 하는 것도 소멸해버리는 가운데서, 인식되는 정황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판단하여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한 홍수가 있어도 그 사실을 붙들게 되는 자들은 세월의 판단과 정죄로 인한 홍수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소리에 속지 않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 '다시 주님 안에서 살아남'이라고 하는 것은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는 영원한 실제의 사실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말은 합리성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존립 정당함은 임의적이라는 사실에서 그 부인의 사실은 세월이 판단 받는 날, 창조된 시간이 판단 받는 날에 같이 판단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최후의 심판 때에 판단을 받는 자들의 모습을 오히려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맹신하지 말고 진정으로 상대적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 말자체도 상대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즉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즉 그것은 절대의 재가를 받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데, 그 기본은 그 공식적인 것은 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바를 역사속에 사실로 나타내심에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활이 없다는 그러한 말, 정당함이 없는 말에 속지 않고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그로 인한 구원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깨어 있어서 선한 행실을 하며 죄를 짓지 않고 주 앞에서 의를 행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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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 받은 영광

2005년 9월 11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삿20:1-16
책망 받은 영광

작은 일이라도 하지 않던 일을 행하는 경우에는 상당히 온 몸이 아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조금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몸에 어느 한 곳이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픈 것과 같이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청년의 기력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간과할 수 있지만 기력이 떨어지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것에 대한 경향이 아주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몸된 교회를 말씀하시면서 몸의 작은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전체가 고통을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는 한 지파에서 이루어진 것이 전 지파의 고통으로 나타나게 되는 지파간의 전쟁으로 비화되어지는 시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길르앗 땅에서 나왔으며 온 백성들의 어른들과 보병 사십만이 모여서 한 레위인에게 되어진 일을 고하라고 하고 그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자신의 첩으로 베냐민에서 욕보인 것에 대하여서 의견과 방책을 낼 것을 말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베냐민 기브아에 가서 그들의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고 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을 보내어 그 악이 어찜인지 그리고 그들 비류한 자들을 죽여 악을 제하여 버리기를 구하였는데 베냐민 자손이 도리어 듣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고자 하는 중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몸의 아픔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파들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레위인의 억울함을 위해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이유는 레위인의 첩을 베냐민지파 기브아 사람들이 성적으로 욕을 보인 것과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하여서 그 첩의 몸을 쪼개어서 각 지파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죄는 바로 레위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권위적 정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 첩에 대하여서 성적인 음란함으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것은 레위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인데 그것이 민족의 죄로 비화되어지는 것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레위인의 직접적인 죄와 더불어 이스라엘 단 지파에서는 한 레위인 미가의 만든 신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공식적인 자신들의 우상으로 설정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 공식적인 지파의 죄악과 이스라엘의 죄악이 실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레위인의 이러한 악한 모습과 자극적인 선동으로 행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그들은 그 선동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지파들의 전쟁에 말려들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가운데서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죄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우연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그러한 죄를 범할 때에는 그 말씀을 맡은 자들이 먼저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그들의 존재와 영광이 버려지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한 변론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쓴 뿌리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잘 믿는 교육용으로 형상을 만든 것에 대하여서 정당하게 말하는 구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것은 그들의 영광이 다 떠나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여러 가지 절차적인 개념에서는 잘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억울함을 위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위한 협상적인 측면에서 그 진위를 알아보려고 한 것은 잘 한 것이나 이미 그러한 일이 있게 되어지는 것에 기본적인 죄악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살펴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는 가운데서 합당하지 못한 레위인의 악함이 교회의 쓴 뿌리가 있게 하며 교회의 고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주의 말씀하심의 진정한 사실임을 기억할 때에 죄악에 타협하지 않고 그러한 죄악에 타협한 그 영광을 위해 주의 몸된 교회에 악을 행하는 일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것으로써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 상대적이라는 맹목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복음의 사실을 인위적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 진정 주의 말씀이 사실임을 깨달아 그 말씀에 진실한 순종을 하며, 잘못된 자신의 ‘책망 받을 영광’을 추구하는 가운데 교회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그러한 죄악의 자리에 서지 않고, 주 앞에서 진정 신실한 종들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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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12, 2005

주 손으로 덮으시네

2005년 9월 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슥13:1-9
주 손으로 덮으시네

자신의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적고 그것을 관리하고 하는 것은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일기를 쓰다가 다른 사람이 보면 손으로 감추게 되고 또 자기만 보고자 하는 책이나 정보등도 손으로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가 아닌 기성세대에서도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서 나름대로 자신의 손으로라도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만의 기쁨을 사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자신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그의 자녀들을 택하신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하고 기뻐하심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이 주의 권능의 손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덮으시며 보호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의 사실적인 증거를 근거로 믿음으로 받음을 우리 성도들은 말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는 것과 그날에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때의 정황에 대한 몇 가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한다고 칼로 찌르는 일과 선지자가 예언과 그 이상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의 종임을 말할 것이고 그들의 팔에는 상처가 있는데 그것은 친구의 집에서 얻은 상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때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목자를 치실 것과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주께서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온 땅에 삼분지 일은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을 것과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시험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함을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일주간에 대한 예언과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호산나 찬송 부르는 자들의 영접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같이 그 생애 전체가 공생애적인 것이면서도 고난 일주간에 대한 것으로 다시 한번 전반적인 메시아로서의 증거를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과 동일하게 예언되어지고 있고 현실에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스가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게 되는 가운데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불확실한 맹세의 시대, 그러한 죄로 인해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모르는 시대에 함부로 임의적 사실을 받아야 하는 시대에,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어지는 그의 가르침과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어 생활하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죄악을 씻는 샘이 열리는 것은 도성 예루살렘으로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오심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종말의 때요 교회의 시대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예언하는 자들을 그 낳은 자들이 칼로 찌름과 같이 거짓된 신앙의 정적인 자기 정당함을 따르는 거짓된 경건의 모습이 있는 즉 경건의 모습이 있으나 경건의 실상은 부정하는 자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자녀들 아이들이 호산나 찬송을 부를 때에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막기를 원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인식을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신앙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그 주님오심에 대한 간절함 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그러한 진정한 사실을 사모하고 그것으로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모습으로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상에게 맹세를 말하는 그러한 것으로 자학한 모습을 한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친구에게서 얻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교적인 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악한 모습과 거짓된 모습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목자를 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그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그로 인하여 제자들이 다 도망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 작은 자들 삼분의 일 위에는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주의 이름으로 세우신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의 세 아들과 같은 기업과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 삼분의 일인 셈족의 언약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드리게 되는 자들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아들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노아가 그의 세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하심과 그 주권적 정당함에 따라서 예언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5~27)

오늘 본문에서 삼분의 일이 멸해지는 것은 함의 족속을 제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삼분의 일이 고난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어지는 것은 셈족 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벳족속의 경우는 창대케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삼분의 일이라는 축복의 말씀에 동참하게 되는 것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삼분의 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의 족속이라고 함은 그 이름이 '셈'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을 둔 족속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셈족 계통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신약의 처음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전체적으로 말씀하셨으며,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을 기억할 때(마 6:9~13)에 셈족 계통의 축복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인 구원과 생명의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작은 자들 힘없는 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하심 안에서 그의 소유된 자들을 손으로 덮으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의 깊이와 사실을 우리 성도들은 마음에 세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는 오늘날 모두 불가지론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사실을 말씀하심에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심에 있어서 인정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사실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것에서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실이 절대적인 것임을 믿고 진정한 사실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주의 축복하심의 손이 드리워진 자리에 선 자들의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골 1:24) 원했던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믿음의 달려갈 길을 잘 달리시고 주께서 예비하신 면류관을 주께 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그 기쁨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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