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5월 23, 2005

참된 기도

2005년 5월 2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8:28-34
참된 기도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고하는 중심과 또한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평안하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지는데, 이는 인지상정적으로 당연한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일말의 당연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말의 당연함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의 복음에 대한 의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의 출처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의 실제는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주 앞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성도들의 입장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그러한 생각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알 수 없다는 것과 그러한 중심에서도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들로 그 기준을 자신의 소유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고 그러한 것으로 일관하여서 자신들의 삶을 의도하며 계획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는 그들의 의도와 계획함과 같은 인식이라고 함에서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그것이 결국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헛된 삶이라고 함을 나타내게 될 때에 그것은 극히 불쌍하다는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현실적인 기준들로서의 소유라고 함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또한 혼란되어진 가운데 실험인생으로써 일관하게 되어지고 그것은 결국 신이 죽었다는 그러한 알지 못하는 합리성으로 자위하게 되는 그 또한 불쌍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기도가 되어짐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풍랑을 잔잔케 하셨던 주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음을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귀신들린 자를 만나 그를 고쳐주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적 정황도 읽게 하시는데, 그 귀신의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는 그의 주님께 행하고 있는 말과 그들의 요구로 인해 허락되어진 가운데서 돼지들이 바닷물에 몰사하게 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돼지 치는 자들이 되어진 것을 보고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함으로 인해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임의적인 판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짐과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러한 타당성을 생각한다고 하여도 죄로 인한 그 영향 때문에 근시안적인 소경의 길을 택하고 있음을 인한 불쌍한, 의도와 방향과 전 인격적인 삶의 기로로서의 기도를 주목하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주님을 영접함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분별한 삶의 방향이라고 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 사실여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과 전체적인 측면을 살펴보게 되는데, 마태복음 8장은 산상보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서 주의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한 단락을 이룬다고 함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 8장인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되어진다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시간적 의미에서 전계되어지는 동일한 내용으로 말한다는 것보다는 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단위로서 연결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자기 땅 자기 나라에 오시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음을 기록하고 있고, 이윽고 3장에 가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서는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주님과 함께한 자들로서의 ‘산위의 동네’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난 후에 내려오셨으나 사람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초자연적인 섭리를 보이시며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증거를 하셨고 오늘 보문에서는 결론적인 측면에서 영접하지 않고 떠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의 중심은 바로 가다라 귀신의 인식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읽게되어지며 그 불쌍함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자의 모습을 반대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음이 본문의 전반적인 인식과 이해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다라’라는 곳에 가셨을 때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예수님이 오신 것을 귀신을 괴롭게 하는 자로 오셨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식이 허용되어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러한 은혜가 그에게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리적인 것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도 들었지만 그것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마 8:27참고)과 그것이 이 귀신과의 상관성으로 읽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식의 주체적 개념까지 점령하여 소위 ‘귀신들린 자’로서의 기본적인 인격과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동일한 결과적인 측면으로 말할 수 있는 그 열매를 보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것이 ‘죄아래 팔린 인생’(롬 3:9; 갈 3:22)으로써 자리 매김되어지는데 이제 ‘주님께서 그 소유권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하려고 오심’(요 3:16)에 있어서 귀신은 말하기를 자신들을 괴롭게 하려고 오셨느냐는 식의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현실적인 실재에 입각해서 그 죄악된 가운데서 타당성을 현실적 소유라고 함에서 찾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 그 교활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허락을 받는다는 측면을 현실적으로 부각해서 그 현실적인 책임을 주님께 전가하여 주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부인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귀신이 그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인식의 통제권을 가지고 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수많은 돼지들에게 귀신 자신들이 들어가기를 구하고 그에 따라 들어가서 바다에 빠지게 하여서 그 현실적인 실재적 피해에 대한 타당성에 따른 임의적 정당함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두 번째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시내에 들어가서 ‘되어진 일들’이라는 현상적인 현실적인 소유권적인 개념의 타당성으로 주님의 자기 증거라고 함을 임의적인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왜곡되어진 합리성의 증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장검증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입장에서 와서 보고 현실적인 타당성에 따른 인식의 결론으로써 주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무엇을 관점으로 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인 것이냐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좋은 것을, 생명을 잃게 되어지는 불쌍한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기준들 특히 그 선함으로써의 생명과 평안을 위한 소유라는 기준이 악하게 왜곡되어진 기준으로써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쌍한 기도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물질 만능’이라는 말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혐오하는 그러한 표명을 하면서도 사실 생명과 평안한 삶을 위해서 추구하는 방향성과 그 얻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에 있어서 모순된 모습이면서도 인정이 강요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능력의 표현으로 가능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 영혼을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서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의 재가를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의 사실적 재가를 받을 수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의 옳은 능력으로서의 한 표현이 되어지는 소유권이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권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그것이 비로소 진정한 삶에 있어서의 분명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가 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절대적으로 스스로 취하심을 기억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모든 것이 진정한 사실로 나타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존재와 생명과 평안의 실제는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중심에 두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단지 현상적인 권세로서의 물질적 개념에서의 사실로 일관하며 인생의 삶과 존재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가운데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은 불쌍한 기도의 자들이 되어지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주님을 영접한 자들로서 주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한 자들로서 참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하는 귀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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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5월 19, 2005

십자가의 도

2005년 5월 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18-31
십자가의 도
For the word of the cross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책임지게 될 때에 또는 본의가 아니라도 감당하려고 할 때에 자신이 대표자로써 책임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에 비교하여서 그런 표현으로 ‘내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짐을 대신 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 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좀 분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한 것에 즉 도덕적 부담이라는 것의 상징으로써의 십자가라는 잘못된 ‘십자가의 도’를 생활 속에서 인정하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으로서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의 ‘십자가의 도’는 무엇일까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함과 지혜 있는 자 이 세상의 변사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말하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부르심을 보라고 하며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자체로서의 그 고린도교회가 주의 구원하심의 섭리로서 하나님 앞에 자랑함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도’는 어떤 것인가 그것과 지혜와 총명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세상의 변사가 그 존재적 입장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써 지혜없다 하심과 하나님의 미련한 것으로서의 지혜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난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에 머물고 마는 가운데 현상적인 이해로만 일관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으니, 성도도 고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도덕관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전혀 부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라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과의 연속성에서 구별되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적 판단이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도는 그러한 도덕적 신앙윤리적 개념의 모습으로만 이해함에 있어서는 본질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써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상대적인 존재의 부정이라는 개념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받는다면 자신의 자존의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죽음에 메여 있을 수 없는 분으로서 다시 살아나셔서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로서 그가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속죄하는 것을 다 이루셨다고 하실 때에 이미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정당함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존재로서의 재가를 받은 성도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옷을 입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적 재가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왕적 권세와 같은 것으로써 그것은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주 앞에서 행할 때에는 그 재가를 받은 것으로써 정당할 때에는 그 증거하는 것이 미련하다고 하여도 진정한 사실로서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증거를 할 때에 상대적 입장에서 편협한 모습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능력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구원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실재라는 개념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그 절대 보편적 지원을 받게 되어지는 것이 상대적으로 편협해 보인다는 것으로 성도들을 미련한 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만적인 어리석음으로 자신들을 자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스스로 절대 정당하게 취하셔서 상대적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신다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고 능력의 재가가 있는 것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식보편적 생각에서 지원되어지는 세상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체적으로 정당함을 스스로 취한다고 하여도 그 정당함은 역시 상대적이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로서의 변사들은 그 말의 임의적 정당함 상대적인 것으로써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지혜를 정당한 지혜를 취한 세상의 변사는 없다고 할 때에 그들은 궤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도 납득의 당위성을 신이 아닌 이상 절대적으로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는 신의 속성으로 상대적인 범주에서 비로소 존재하지 않으며 판단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성부하나님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표적이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함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지혜의 기본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 십자가에 달리신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 주의 자기계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과 같은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을 책임론이라는 것으로 비로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기계시로서의 예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는 그 한마음을 품으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혜와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는, 믿음의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먼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란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러한 ‘주의 십자가에 도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능력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차이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우리의 믿음들도 실제적인 주의 증거로서 재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으로 다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는 회의적 측면을 가지고 말한다고 하여도 합당한 증거가 되며, 그러한 증거를 통해 합당하게 주의 뜻하심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십자가에 도’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의 아들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능력을 담아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감당하게 되지만 그것이 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러한 자리에 나가야만 하는 것을 체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상대적인 측면의 완전성을 지나야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서 비교 우위적 개념보다도 진정한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으로 생각함보다도 주 안에서 믿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형제들을 받아주며 오래 참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미련해 보이는 상대적인 우리의 증거에 주의 뜻하심을 담아내어 주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주의 구원을 진정한 사실로써 합당하게 믿으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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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화요일, 5월 10, 2005

박넝쿨 교훈

2005년 5월 10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욘4:1-11
박넝쿨 교훈

얼마 전에 세들어 사는 집 주인 할머니께서 호박죽을 쒀서 먹어보라고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전에 청년 때에, 학교 다닐 때에 한 번씩 식사겸 먹어본 기억이 나서 참 감사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박’이라는 것은 식용의 호박(珀)으로도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호리병박’ 또는 ‘조롱박’과 같은 박(a gourd, a plant)으로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박넝쿨로 교훈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교훈과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서 여호와께 기도함과 주께서 그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인 즉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니느웨성이 무너지리라는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으로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알아봤다는 식의 언급과 생명을 취하시기를 구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요나 자신에게 나음이라고 강변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요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하여 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성냄에 대한 합당함을 물으심에 요나는 답변하지 않고 그 성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성에서 나가 초막을 짓고 앉았음에, 하나님께서 그 초막위에 박넝쿨을 준비해주셔서 그늘지게 하셔서 요나가 그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함과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씹게 하여 마르게 하시니 요나는 또 스스로 죽기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박넝쿨에 비교하시면서 요나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질문을 하시며 배양도 하지 않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요나 자신이 아꼈거든 니느웨 성에 좌우를 분별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있는데 그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냐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나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요나의 답변은 요나서 본문에서는 기록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회개의 열매로서 어떤 것이어야 마땅한지는 이미 요나도 알게 하심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교회의 신앙고백이 어떻게 나타야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아가서 2:14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에서 찾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박넝쿨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요나서 3장에 나타나고 있는 니느웨성의 사람들의 열매라고 함을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니느웨 성 왕과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멘’으로 믿었던 것입니다.(욘 3:5, 그들이 믿었다는 말, ‘와야아미누’로써 아만, 아멘의 뜻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멘이라고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을 기만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의 인식의 대표적인 입장으로써의 그 왕의 인식을 표현한 것을 보면 9절에서는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욘 3:9)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먹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더욱 마지막에서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박넝쿨로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막연한, 개연적인 믿음으로 복음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지 못하고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오래참으시고 또한 주의 뜻하신 시기에 회개시키실 수도 있으시며 그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는데 요나는 주의 뜻하심보다도 그 말씀하신 액면적 판단하심의 신실하심을 내 보여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에 있어서의 주권적 판단을 요나는 그의 자신의 사역적 판단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합당치 못한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표현을 귀하게 여기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액면적 판단으로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에서부터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요나에게 주의 몸된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좀더 살펴보면 그리고 그 요나의 마땅한 신앙고백의 자리에 서도록 하심의 뜻하심을 이미 요나가 알게 하심을 뜻하셨다는 것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아 2:14~17)

솔로몬이 그의 신부 술람미 여인을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주의 몸된 교회를 부르심과 같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교회와 같이 비교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비둘기야’라고 할 대에는 ‘요나티’라는 말로써, ‘요나’라는 말에 일인칭 소유격을 나타내는 ‘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서 4장에 나타나는 선지자 ‘요나’와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동일한 비둘기라는 뜻을 지닌 ‘요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 요나에게 하신 말씀과 대하심이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요나티’ 즉 ‘나의 비둘기’라는 말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나의’라는 말의 소유격적인 측면은 주권적 정당함을 주장하시는 분으로써 비둘기가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상태에서,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요나)로서 표현하며 참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요나서에서는, 그러한 정당함을 주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는, ‘박이 하룻밤 사이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 표현함에 있어서는 그리고 아가서에서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인생의 종말적 시간을 의미하며 종말의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나타내심으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교회의 시대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는,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요나서에서는, 요나서 전반적인 측면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가서 ‘베데르의 산’이라는 것은 ‘부분’,‘조각’이라는 뜻을 가진 산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아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요나서에서는 주관적 자기 진리, 즉 ‘나의 진리’(my truth)라는 요나의 중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말(욘 1:1)에서 그 ‘아밋대’라는 말이 바로 ‘나의 진리’(my truth)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주관적인 것으로 큰성 니느웨에 가서 그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해봐야 받아들여지지 않고 우습게만 여겨질 것이라는 점에서 요나는 도망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음이라는 진실로 복음의 사실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서 말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에 자신에게 주신 증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심판을 받지 않는 현상적으로 나타나니까 요나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알아봤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정당함은 현실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요나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잘못되게 굳혔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실제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야 합당한데, 심판하심이 현상적인 상대적 충족성의 판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요나가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함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요나는 이러한 자신의 잘못된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합리성이 충분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분별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고쳐주시기 원하며 오래 참고 있으시고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쁘게 받으시면서도 주 앞에 순종하기를 따라가기를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서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로 표현되어지고 있고 본문에서는 요나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반복적인 말씀과 박넝쿨의 비유와 그 니느웨성에 대한 주의 뜻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결혼하여 신혼 때에 참으로 서로 아름답게 여기지만, 세월의 때가 묻게 되고 생활에 따른 고통이라고 함을 서로 감수할 때에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실망하게 되어지는 경향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배필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라고 함을 볼 때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어여쁜 당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서로의 모습에서 어쩌면 지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어여쁘게 보시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주의 몸된 교회를 어여쁘게 보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마음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박넝쿨 비유로 가르쳐주시는 주의 교훈을 받으며, 여러 말씀하심의 뜻을 분별하고 그 명령을 따를 때에 주의 말씀하심을 주의 뜻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분별하는 가운데, 우리의 아집과 편견으로 나타날 수 있는 종으로서의 판단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가운데, 형제를 받으며 주의 몸된 교회를 받으며 그들을 주장하시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지 않는 가운데서, 참으로 주님과 동행하시는 귀한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어여쁜 당신’(아 2:13)으로서의 요나와 같은 시대의 표적으로서의 성도님들과 교회가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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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5월 05, 2005

선한 데 지혜롭고

2005년 5월 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6:1-27
선한 데 지혜롭고

소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시기를 맞이하면서 내일이면 어린이 날인데 어린이들의 특성이라고 함을 부모된 자들이 잘 알았으면 하는 중심도 가지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의 발달 특성이라든지 어떤 분별력이 있는 가운데서 좀더 우리의 아이들을 잘 양육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가정을 돌아봄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결실이 있는 자들을 교회의 직분자들로서 세우도록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이러한 선함에 좀 지혜로운 자리에 서도록 함도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로 선함을 알게 될 때에 복음으로 낳게 되어지는 믿음의 후손들을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지도함에 있어서 일말의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심의 은혜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아이들의 지혜를 말할 때에 아이가 '영악'하다라는 표현을 할 수도 있는 것을 주위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이를 괴롭히는 형태에 있어서 즐김이라고 하는 못된 모습에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냥 한때 그렇겠지 하는 생각으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지혜롭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영적으로 영적인 삶에서 선한데 지혜롭도록 권면하며 그 사실을 믿음으로 보며 축복하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1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겐그리아 뵈뵈집사에 대한 천거를 비롯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하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참으로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기반으로 한 권면이 이어지고 있는데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를 떠나라고 하며 그들의 악함을 지적하며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문안을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성도를 견고케 하시는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세토록 영광이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그렇게 될 줄로 믿음으로 아멘으로 글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서로 문안함에 있어서 권면함에 대한 간략한 언급입니다. 그것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의 문맥적으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의 한 맺음말에 해당되어지는 말씀인데 그러한 가운데서 그 증거의 내용적인 것을 간략하게 또는 함축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또한 주목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여러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되어지는 이 권면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서로 현실적인 직접적인 교제를 위해 문안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그 가운데 권면이라고 함이 있는데 그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교제의 기본적인 지혜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이 선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그 전제적으로 언급한 것을 주목하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합력하여 선을 이룸에 있어서 로마의 교회의 모습에서는, 사실상 죽음의 공회라고 할 수 있는 협력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의 율법을 준수함과 믿음이라고 함에 대한 견해라고 하는 것이 그 임의적 신앙적 열정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로마의 교회에 '한 마음'(롬 15:6)을 품을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고린도 교회에도 증거한 내용으로 '같은 믿음의 마음'(고후 4:13)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데 지혜롭고' 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고 그 가운데서 실제적인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믿음과 그 가운데서 진정한 성도의 교제와 그것을 위한 인내의 사실을 힘써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주의 성도들이 그와 같은 믿음으로 섬길 수 있도록 각자 주께서 주신 뜻하심이 무엇이며, 주께서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참으로 지혜롭게 분별하고, 믿음 안에서 형제들을 받고, 그 주신바 달란트를 힘써 행하게 돕는 것과 같은 지혜로움을 나타내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은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라고 함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말은 '아케라이우스'라는 말입니다. 그 뜻 '섞이지 않은'(unmixed), '단순한'(simple)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게 되어지는 악이라고 함은 역시 선에 대한 반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써의 그 자체적 불순종과 그에 다른 생활적 불순종이라고 함이 그것입니다.

즉 임의적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가운데서의 생활의 완전성을 말하거나 임의적으로 믿음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것의 충족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의 사실 규정을 말하기 보다는 현상적 입장이라고 함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도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현상적입장이라고 함의 상대적인 보편적 판단으로 일관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재가라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함을 지적할 수 있게 되며 이것이 악으로 나타나며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형제들을 믿고 있다고 함에 있어서 그 형제된 로마의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 대한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사실분별이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러한 것의 고통이라고 함이 현실적인 고통의 사실로 자리매김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에 증거하는 내용적 중심을 기억할 때에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을 행할 때에 비로소 '악'이라고 함에 미련하기를 원한다는 것의 의미를 주목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미련'이라는 말은 그 말만 볼 때에는 어려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고 '단순하게 생활하는 것' 또는 '도덕적으로 악한 행실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련하기를 원한다는 이 말도 로마서 전반적인 가르침 안에서 규정되어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바로 선함을 위한 노력들, 주 안에서 같은 마음,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시비를 거쳐서 현실의 사실을 판단하게 되어지는 가운데 형제들을 그 믿음 안에서 받고 교제의 사실을 믿고 힘써 성도의 교제의 자리에 나가게 되어지는 노력들, 이러한 것의 순수성을 '단순성'이라고 함을 전제적으로 한 반대적인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선'이라고 함의 반대적 입장으로 현상적인 인식이 가능함을 기억할 때에 '악'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에 대한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그러한 성도들의 선한 중심에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통해서 사실들을 섞어서 하나의 죄악의 쓴 뿌리의 결정체를 형성하지 않는 것 그것을 악에 대한 단순성으로써 인식되고 있고 그것을 '악에 대하여 미련하다'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상대적으로 반대말로 인식이 되어지는 것과 같이 선함이 하나님을 인해서 생각과 판단과 생활이 되어진다면 악함은 그러한 것을 행하지 않는 불순종의 모습인데 이러한 불순종의 모습이 없기를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지혜롭기만 추구하고 있지 그 지혜가 선함이라고 함과 악함으로 열려진 것에 대하여서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가지론적인 세상에서,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에 대한 기준의 부재라는 생각에서 자기 본위적 선과 악으로 하나님 앞에서와 하나님 안에서 주신 사람들의 일반적인 보편적 의식이라고 함의 사실을 힘써 부인하고 자기를 위한 선을 추구하는 가운데 참으로 일그러진 모습들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우리 인생에게 주신 일반적인 보편적 당위성을 생각하여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가운데 참으로 건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쓰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일반적인 도적적인 개념에 비로소 그러한 판단을 행한다면 로마의 교인들과 같이 여전히 고통 속에 있을 수 있기에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분별하는 가치관과 그 선함을 따라서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허락되어진 우리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여 나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아름다운, '선한 데 지혜롭고 악에 미련한 자'로서의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 견고하게 세움을 받으며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하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