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월 09, 2009

슬픔으로 인한 잠에서 깨어

2009년 2월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22:39-53
감람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정에 대한 기본적 단위로서의 인식은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서양의 개념에서보다 동양에서 보다 더 그런 경향을 읽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사랑하는 여성인 경우에는 자신보다도 남편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모습과 그 남편이 잘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페미니즘적 측면에서는 구시대의 한 모습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받을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어주고 싶은 것이 또한 한 중심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서 밤 늦게 들어와서 잠든 모습들을 보면 남편 자신이 더 잘해야 할 것인데 하는 중심에서 미안해 할 수 있는 모습, 그런 가운데서도 또한 새 힘을 내고자 다짐하는 것이 또한 앞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이고 일반화 되어 있는 우리 인생의, 사회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남편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거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건강한 가정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신부로 표현할 때에, 그 신부된 교회가, 성도가 주님에 대한 확신이나 그 뜻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 슬픔으로 인해 잠들 때가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감람산에서의 주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9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7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 39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저희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돌던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기도하심과 그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슬름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 47절에서 53절말씀에서는 가룟 유다가 와서 예수님께 입맞추고 인자이신 예수님을 파는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지적하시니 그 좌우가 그 될 일을 생각해서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 것과 주님께서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전에 있을 때에 그들이 잡지 아니하였음을 지적하시면서 이제는 어둠의 권세라고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예수님의 기도와 기도모범의 의미와 슬픔을 인하여서 잠든 제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우에 있던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린 것의 의미와 주님의 치료하심의 뜻하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하신 52절과 53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모범의 의미와 슬픔을 인하여서 잠든 제자들의 인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위격적 차이를 드러내시는 것으로서의 인성적 차원을 통해 우리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인데, 그 위격적 차이를 상대적으로 비로소 해석적 모순이라는 객관적 근거지움을 비로소 말하지 못할 때에는 부정이나 모순으로서의 부정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을 통해 우리 성도가 하나님 아바 아버지로부터의 정당한 사실을 따라 순종하기를 원하며 인간으로서의 정당하다는 판단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뜻하심을 구하는 것이 기도의 바른 모습이라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범과 동시에 십자가를 지시는 성자로서의 그 감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원적 당위성이 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함임을 보이시는 것도 하늘로부터의 사자의 도움도 언급되어짐으로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슬픔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여러 상념에서 고통을 잊고싶은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괜히 예수를 주로 따라왔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낄 수 있는 입장이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도 드러내도 의미없는 상황에서 잠이나 자자는 심정인 것입니다.

제자들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은 '군대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고도 그 지역의 유지들로 보이는 자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 피해본 자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떠나달라는 푸대접을 받았지, 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배척해서 다른 길로 가야하는 것이지..

뭐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할 때에 앞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한다고 하지.. 그래 예수님이 죽는다고 할 때에, 그를 따르는 우리는 뭐가 될까.. 다시 살아난다고 하지만 그건 상식적으로 볼 때.. 그냥 위로차 하는 이야기지 그것이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 감람산..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친 것과 같이 숨기 쉬운 곳으로서 감람나무가 많은 곳입니다. 그러한 곳에 제자들이 와 있는 심정은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반역자를 수색한다고 하면 다른 곳보다도 그곳 감람산을 먼저 수색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제자들도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자신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이 후회되어질 수도 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욱 제자들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저쯤 떨어져서 기도하시는데, 현실적으로 볼 때 아무런 대안이 없는 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 예수님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자신의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놓고 기도하시는 것을 볼 때에, 열심당 시몬과 같은 사람을 비롯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현실성 없어 보이는 그분에 대하여서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 앞서 있는 누가복음 22장 31절과 32절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에게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너희를 청구했다'는 말씀과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것입니다.(눅 22: 31~32)


즉 본문의 문맥을 먼저 볼 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했을 예수님을 잡히게 되는 그 상황이라는 것 앞서 주님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시간적으로 먼저 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아무도 나에게 기도하지 않는 것 같아도 본문의 앞섬이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통해 그 앞서 이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음과 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본래적으로 앞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자로서의 주님의 기도는 상대적인 실제로서의 현실적 시험이 성도를 비로소 넘어지거나 실족함의 사실을 구한다고 해도 그것의 실제적인 성립은 기각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교리도 여기에 기준되어지는 것이며 예정하심의 현실적 섭리로서 항상 성도에게 주어지는 권세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이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기정 사실화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맥적 본문을 주목해 볼 때에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하려고 청구한다는 것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실제적 주님으로 인식하지 못함을 의도한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1~33)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제자들에게 감추였다는 것은 그 죽으심과 부활의 자기 계시는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죽는다' 또는 '산다'라는 즉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와 같은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로서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자기 계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에서 예수님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상대적 판단 속에서 절대를 읽지 못하고 현실적 사태가 실제인 것과 같이 납득 당위성을 실제적으로 가진다는 것에 인식적 강요를 당해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현실적 실제의 궁색한 표현들이 있게 되어지고 그것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슬픔은 체념의 고통을 잊기 위한 잠을 청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청구한다는 것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밀 까부르다'라는 표현은 알곡과 실재라는 실제를 인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도한 것임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실재론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두지 못한 것이 사단의 청구내용의 핵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린 것의 의미와 주님의 치료하심의 뜻하심에 대해서

누가복음 36절의 말씀에서는 '검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검 두자루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 보였고 주님께서는 족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22:38 참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검이란 예수님을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성령의 검으로서의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서 행할 때에 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것임을 총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데, 제자들은 현실적인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족하다고 하심은 그들의 연약함을 받으심과 또한 예수님의 고난받으심과 그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의 역사적 현재를 이루시기 전이므로 그들의 인식적 한계를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메시아적 마음에 꼭들었던 사람으로 그 증거가 있었던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그 뜻하심을 분별할 수 없었음의 구차함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실재적 실제의 분별이 형성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예수님을 판다는 상황인식에서 물리적 검을 사용함의 당위성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여서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것입니다.

이러한 연약함에 따른 강변일도의 입장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자주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터부시하고 극단적 배척을 하거나 성도들의 자기 비하적 개념으로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예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그곳에 모인 자들에게 850대 1명으로서 하나님의 불을 내려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을 보였건만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오히려 아무 감각도 없고 심지어 되지도 않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할 때에 그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자신의 생명을 취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로 그는 그의 사역을 감당하였고, 그러한 바른 복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합왕조는 예후의 사역에서 아합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이세벨까지 죽임을 당하는 신원하심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가 적기라고 생각되는 그 때에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시간에 나타난다는 것의 실제를 믿는다면 엘리야와 같이 성도들은 주님의 복음을 사람들이 듣지 않아도 자기를 실족에 내몰지 않고 끝까지 증거할 수 있는 권세 또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예수님의 실재와 실제의식을 결여한 제자들은 현실적인 실제에 믿음 보다는 도의적 차원에서의 강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금하시는 경건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하신 52절과 53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본문에서는 강도를 잡는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는 말씀과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음을 상기시키시면서 이제는 어둠의 권세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상식적 개념에서만 본다면 잡히는 자의 입장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의 입장을 옹호하는 그러한 것을 취한다고 할 때의 한 개인의 편협한 그리고 궁색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황상의 개념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윗이 골리앗을 대면하여서 '너는 창과 방패로 나가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삼상 17:45 참고)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할 때에 그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으로서 자기 부정이라는 것을 자기 능동으로 취하신다는 것을 객관적 규정을 지으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자신이 허락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시험의 모든 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증거하심을 나타내심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서 두 가지를 주목하게 되는데하나는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과 같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사단이 그것을 의도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의 섭리안에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더욱 곤고하게 서게 될 것이라는 것과 그것을 볼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밀 까부르는 듯한 시험을 이미 자신이 받으심으로써 이제 더 이상 시험이 현실적으로 성도들을 비로소 정죄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우리 성도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고전 10:13)는 그 뜻하심을 증거하심으로 성도들의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삶이 어려울 때면 어떤 한 시인이 한 말이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냥 참고 견디는 것으로서의 버티기적 개념도 유용하겠지만,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실제의식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를 받는 가운데, 도의적 경건이 아니라 믿음의 경건으로 주님의 기뻐하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의식을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짐에서 찾을 때,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무엇이 진정한 삶의 사실인가를 알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세상에서의 비몽사몽간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현실적 '슬픔을 인한 잠'에서 깨어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의 모습을 갖추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는 우리 성도들을 '밀 까부르듯' 청구할 만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검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의식을 갖추는 즉 깨어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시는 삶으로서의 기도를 주께 드리는 가운데, 주의 강한 군사들로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주의 뜻을 행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ecrio.blogspot.com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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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월 21, 2008

갑절의 영감(The inspiration of God)

2008년 1월2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하 2:1-11
갑절의 영적감동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이 웃음을 창조했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에 대한 시비(是非)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인데, 이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통한 어떤 복에 대한 개념이 동양세계에서도 통용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나 또는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들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구적 개념에 익숙해진 가운데서, 현대의 삶의 바쁨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것에 대한 간과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 오락을 통한 노력들이고 직업적인 정신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주는 개그프로그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그에서도 사실 여러 차원이 있어, 색다른 개그를 구사하는 실력들로서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긍정적 사회 문화로서 이해하게 되는데, 개인적이면서도 어쩌면 공적인 측면에서의 시비라기보다는 지나친 표현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차원이 다른 개그를 말함에 있어서, '허무개그'를 말할 수 있는데, 실재적인 것이 아닌 것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가운데서 웃기지 않는 것을 웃기는 것으로 표현하는, 그래서 황당하다는 개념에서 비로소 웃음을 말하는 중심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재 선정에 있어서 한번은 신앙의 구원이라는 것이 등장해서 전근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개그행위로써 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즉 '나 9원 받았네..', 땅에 떨어진 10원짜리 동전을 들고 '나 10원 주었네.. 받았네..' 그것도 신앙의 기도적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언급하는 것이 구원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비실제적 모습이라는 비유적 개그를 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허무개그적 개념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적 발상에 대해서 한편은 상당히 불편하고 질책할 수도 있으면서도 실제의식이 결여되어진 사회속에서 불가지론적 개념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사회의 인식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에, 질책보다는 불쌍히 여김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의 은혜적 사모함이 바른 자리매김으로 세상에 빛을 비출수 있는 자리에 서도록 마음을 두어야함이 옳다고 함을 인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목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시려고 할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 나가는데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자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과 함께 따르게 되어지고 이와 같이해서 벧엘에 가고 또 여리고까지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벧엘과 여리고에서는 선지생도들의 말과 엘리사의 말이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라는 말과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야가 요단으로 가는데, 엘리사가 따르는 모습을 첫 번째 본문의 형식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요단의 선지생도들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엘리사의 답변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가에 이 두 사람이 서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구할 것을 말함에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이 엘리야 자신에게는 어려운 것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취하시는 것을 보면 이루어질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엘리야와 엘리사 이 두 증인의 전인격적인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과 또 그들이 행한 행보의 여로에서 읽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체 문맥적 흐름에서 주목하면 열왕기상 18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의 고백이 있게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로 인해서 두려워 굴 속에 숨었던 엘리야는 주의 말씀에 새 힘을 얻고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데, 아합왕의 아들 아하시아가 난관에서 떨어져 병이 나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함에 따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안계셔서 그들에게 묻는가 하는 반문과 왕이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전에 굴 속에 숨었던 엘리야는 그때와는 달리 산의 공제선을 의식할 수 있는 높은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대한 시비를 가림에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었습니다. 즉 아하시아왕이 디셉사람 엘리야를 잡아오라고 50부장과 그 수하들을 세차례 보내게되는데 두번까지는 모두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죽였고, 세번째는 주 여호와 하나님의 아하시아왕에게 가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가서 그 면전에서 예언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올리시고자 할 때에 엘리야와 그를 따르고 있는 엘리사 이 두 사람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 전인격적인 그들의 증거를 주목해 봅니다.

엘리야 그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my God is Jehovah" or "Yah(u) is God" )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그 이름이 그들의 존재적 삶의 전인격적 증거임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 등장하는 가운데 좋은 이름의 악한 자의 모습도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자신의 존재의식을 가지지 않고 임의적 개념에서의 그러한 이름으로서의 치장적개념으로 일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중심은 전자의 입장으로서 신실한 이름의 합당한 종들로서의 인격적 삶의 증거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God is salvation)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상관성을 추종적 동행의 개념으로 언급되어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머물라고 함에 대한 것으로서의 그 의식의 차이하나님의 영성을 나타내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자리매김되도록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임의적 개념으로서의 구원을 정의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한정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실재적 개념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 엘리사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을 흐려놓기 위해서 임의적인 신을 말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구원의 실재를 허구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정직하지 못한 이성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기만적 개념으로 죄를 범하는 모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이슬람에서의 신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서의 표기 '하나님'과 동일하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링크되는 글 각주 1번참고) 한국에서도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이슬람을 말하는 것인지를 재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중심의 신앙과 상관관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적 필요성에서 비로소 언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하심의 정당함을 기억할 때에 예정되어진 사실로서 기억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야벳의 창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셈의 장막에 머물게 되는 것(창 9:27)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노아의 언약의 기본이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전인격적인 노력과 방향과 구함의 실제적 연속성을 기반으로한, 증거를 읽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벳의 창대함이라고 함에서 그 열매적인 풍부에 대한 시기에서 비롯된, 속된 표현으로 짝퉁, 즉 모조물이 있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 중심을 흐려놓게 되는 시대적 정황적 악함이 있게 될 것을 의식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서 그 말씀이 오늘날 시대적 인식의 정체성을 판단하고 있으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의 시대적 정신의 발현이라고하는 그러한 악함의 모습이 있을 때에도하나님의 구원의 실제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엘리야의 전인격적 신앙이 그 신앙의 그 구원의 열매의 실재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것으로서 선택한 미련한 구원 전도는 세상의 허무개그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으로서 세상의 감당하지 못하는 핑계치 못하는 복음의 영적 감동과 구원의 실제를 우리의 삶 속에 담아내게되며 증거하게 된다고 하심을 그 증거의 실제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론적 사실의 정당성은 상대적 개념의 사실 시비를 바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형태로서 절대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의 정당성을 본래적으로 가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들이 행한 행보의 여로에서 읽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또는 한 가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엘리사는 엘리야의 앞으로 되어질 일 즉 하나님께서 엘리사 위로 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따르려고 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적 증거일 때에 그러면 엘리야는 그 가는 그 특정 지역에 머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어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의식의 차이이면서도 반목이냐 아니면 더 풍성한 주의 뜻하심으로서의 그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역에 머문다는 개념과 함께 실제적 의미부여와 사실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명들을 주목해 볼 때에 '길갈'(a wheel, rolling)이라는 이름의 지명은 '애굽의 수치가 물러간다'(수 5:9)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지방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여호와의 법괘를 맨 제사장들의 발길이 그 요단강에 닿을 때에 물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일 건널 수 있게 되었고 또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의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쌓았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했던 곳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죄의 종 애굽의 즉 함의 저주에서 벗어났다고 함의 신앙고백적 중심을 실제로하는 성례전적인 언약적 행보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주일성수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그 삶의 모습을 길갈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머물러라고 하였던 것, 즉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함의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뜻하심을 증거하였고, 엘리사가 그것을 순종하지 않은 것은 그 또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식을 가지지 않고, 그로 인해 믿지 않고 단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예배당에만 나온다고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엘리사의 순종하지 않으면서 증거한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서도, 예배당에 나와서 세례받고 신앙생활하며 감정적 동요로서 자기를 기만하고 자위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는 것이요.. 앞서 자존의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그 믿는 자로서 마땅히 그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구별된 장소 벧엘에 출석하게 된다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엘리야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전혀 말하지 않고 신없는 종교 또는 아무 알지 못하는 신의 이름으로 기만적 행위의 사실과 기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에는 구원의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체험한 또는 그것에 실족한 자들구원이라고 하는 것 등떠밀린 신들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허무개그일 뿐이요 비소의 씹힐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 '우리 성도들이 씹히지 않도록 하시며'(시 124:6)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를 말하고 된다는 것을 믿고 기억하며 증거할 때에 그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어지는 갑절의 영적 감동하심의 큰 권세는 주의 몸된 교회에 있게 되며 또한 그 시기적 개념이 아니라 본래적 개념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단 허무개그 뿐이겠습니까..세상에 내놓으라 하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자들의 지성과 이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야말로 차원 개그의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의 불가지적 개념과 그러한 가운데서 '유희'를 말하는 '해체'의 개념 이 모든 것이 허울좋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써의 '신은 죽었다'는 계보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구교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잘못한 가운데서 그러한 신은 죽었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에 대한 것이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추종적 동행의 두 증인이 증거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개념에 관심도 없고 임의적으로 설정하고 그 신이 죽었다고 하고 ...에휴.. 그만한 허무개그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려..

성경은,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도록 엘리야와 엘리사를 두 증인을 통해서 가르쳐주셨으며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음을 기억하고 참으로 우리의 삶의 상대적이면서도 진실로 받을수 있는 구원의 사실과 증거는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정당함에 따른 정당성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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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2월 11, 2007

손 마른 인생

2007년 12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6:1-11
네 손을 내밀라

어떤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그 손으로 집어주며 먹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받아 먹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여지는 있어서 그 받는 사람의 절실한 입장이라고 할 때에 받아 먹을 수도 있고 또 굴욕적 강요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 음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상식적 여지를 감안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신앙적 실제의식에 따른 판단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상대적 절대'라는 획일적 고립적 성립되지 않는 그 누가 말했던 것과 같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성은 자존의 자기 정당함에 따라서 구별되어진 상대적면서도 절대적인 실제의식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절대자 하나님 자신의 받으심을 읽을 수 있도록 하심을 오늘 본문에서도 주목하며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에 따라 주목해 볼 때에, '손'이라는 표현이 증거로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과 그와 같은 것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는 내용의 기술적(記述的) 전반적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적 증거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의 손을 고쳐주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음에 따라 어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적 위반을 말하면서 시비(是非)를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며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임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엿보아 송사할 빙거를 찾고 있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하는 것에 대한 분별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심에 따라 그 손이 회복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송사할 빙거를 찾던 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의논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 동일본문과 문맥 속에서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의도되어진 복음서 기자의 의식이 또한 주의 말씀에 따른 증거를 위해 특별 영적인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의 증거되어지는 해석적 당위성을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출애굽기 4장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두 안식일이 비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두 본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 성례적 기호적 표적으로서의 손을 회복하게 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표지로서의 성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행하신 성찬이 그 전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증거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시적 표적적인 거룩한 예표로서 읽을 수 있는 성례로서 각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안식일에 고쳐진 '손'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쉼이라는 것으로서의 안식이라는 개념은 예수님 안에서 그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죽으심과 우리를 의롭다 칭하심을 나타내는 부활하신 날을 마음에 두는 것이, 시간적 개념의 전통적 안식의 규정적 입장보다 바른 안식의 실제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을 안식으로 마음에 두는 것은 성경대로 한다는 미명아래 성경의 저자인 예수님의 의도하심과 섭리는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거짓을 범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를 읽지 않고 그가 쓴 책을 그대로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과 같이, 그것을 주장하기를 기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우기는 것이요 잘못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기의 실존이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분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자기 정당함을 절대적 자기 속성에 따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 자신이 그와 같은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안식을 말씀하셨고 그 안식에서 주권적 정당함을 취하심에 따라 상대적 관점의 시비라는 것에 실존적 정당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주의 제자들의 인식과 행보라는 것에 있어서의 판단도 주의 뜻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경우에는 허용되어질 수 있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경우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경우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 첫 안식일에 있는 주의 답변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제자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은 바로 '세상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나는 지팡이가 뱀과 같이 변하는 첫 번째 기적을 읽게 하시는 것이며, 또한 무슨 상대적인 말들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막 16:18)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두게 하시려는 것으로 연결되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손을 회복시켜주심에 대하여

또 다른 안식일에 있었던 일로서 손마른 자의 손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손 마르다는 개념이 위생적 개념으로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더럽다는 개념으로 바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과 또한 그 정상적이지 않다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본다고 할 때에 몸의 질병적 개념으로만 볼 것으로 한정되지 않고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정당함에서 판단되는 행위들로서 정체성을 잃은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개념이 이입되어짐의 당위성을 설정함의 정당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 가인과 아벨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가인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벨보다 가인이 더 수고하고 노력해서 밭의 소산들을 드렸다고 하는 측면에서 더 받음직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벨과 같은 그리스도를 예표함으로서의 성례전적인 양을 드림의 실제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보와 그려한 행함의 손은 하나님께 드림과 섬김으로서의 정체성의 실존을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그 의로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청함받은 자들의 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택함받은 자로서의 손길과 다른 것으로서 마른 손에 비교되어지는 진실로 고침을 받아야 할 '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른 손이라고 하는 것이 그와 같은 성례전적 증거로 받을 수 있음의 타당성과 일관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습임을 받게 될 때에 본문과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난 두 번째 기적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출 4:6~7)

'나와 같은 선지자가 있을 것'(신 18:15; 행 7:37)을 예언했던 모세의 증거를 마음에 둘 때에 예수께서 모세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자기 체험을 자기의 몸된 교회에서의 성도들의 손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자존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의 증거와 같이 예언되어진 메시아 구주이심에 대한 것과 구약이 증거하는바 예수님을 믿음이 옳으며 믿게될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손을 고쳐주심은 이제 주님 안에서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 주님을 섬기고 주의 택한 백성을 이끌어낼 모세와 같은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별되어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들의 상대적인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황적 실존일진대 절대와 상관하겠다는 것 절대에 비교되어진 가운데서 당위성을 비로소 얻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고 할 때에 과연 인생의 손은 마른 손입니다.

즉 속된 표현이지만,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같이 아무리 고귀한 척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 앞에서 무엇인가 받을 만한 행보를 나타내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시는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적 기준에서 마련한 그 방법, 절대의 정당함을 얻는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게 하신다면 이제는 우리의 모자란 모습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받으신 바를 행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적 권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른손 인생..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나의 중심과 삶에 기준으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다윗과 같은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마른손으로서의 인생의 모습이 치유함을 받아,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 바되는 그 섬김으로서 잘했다 칭찬함을 받게 되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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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월 04, 2007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2007년 11월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26:1-11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이라고 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월을 인식할 수 있고 시간의 순서적 개념을 의식하는 경우에는 처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다 자연스러운 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과 나중 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에 대한 그들의 의식의 의지적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일반은총적 개념의 한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에서의 '처음'이라는 것을 의식함에 있어서 선점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 입장에서도 언급되어질 수 있는 계기적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제 고별설교를 하는 중심에서의 말씀으로서의 신명기의 말씀인데 즉 모압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곳에 들어가서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처음하게 되어지는 신앙의 예식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0절과 11절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신 땅에 들어가 거하게 될 때에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제사장에게 가져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고 할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의 조상이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음과 그곳에서 번성했는데 학대와 압제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셔서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렀음에 대한 회고와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과 11절의 말씀에서는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음과 경배함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집에 복을 주셨음을 인하여서 레위인들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들거워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시행하게 되어지는 광주리에 담긴 맏물로서의 소산물을 담아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타나는 십일조에 관한 것과는 또한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언급하면, 창세기 28장과 레위인과 사도의 관계성예수님 안에서 그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그에 따른 십일조의 해석적 실체를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목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실제 아래 있었지만, 세상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구름따라 광야를 헤매며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고 하면 지금까지의 문화와 다른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위 '문화적 충돌과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그곳에 있는 자들의 기득권적인 행사를 구별하여서 따르거나 협력하는 가운데서 독자적인 생활을 구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는 죄와 타협이 기만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곳에서의 첫 열매들 즉 소산의 맏물들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에 가서 제사장을 통해 놓고 경배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식으로만 볼 때, 하나의 추수감사와 같은 것이면서도 그러한 상황적 특별성과 개체적인 판단 입장으로 단순화 또는 잊혀질 것의 성격이 아니라, 그것은 기본적인 신앙의 고백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몸된 구약 교회의 언약적 기반과 증거를 나타낸다는 것과 성례전적으로 신약교회를 포함한 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나타냄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창세기 28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에 동일한 언약의 고백적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28장 16~22절에서는 하란으로 가고 있는 야곱이 돌배개로 잠을 청하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곳에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부어 하늘문으로서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라고 함의 실제적 의식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한 그곳에 와서 맏물을 드린다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와 그 상관성을 의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약속하신 곳에 왔다는 것, 아버지의 약속하신 곳 그 집에 왔다고하는 것, 이미 구원받아 예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이미 소속되어진 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니 오늘날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특히 주일날 예배당에 출석을 하게 되는 것은 야곱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구별하여 실제로 받는 한 예배처소에 나와서 그 구원받아 천국의 시민이 되었음에 대한 증거로 이 야곱과 같은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한 신앙고백적 표현과 증거가 바로 십일조와 헌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소산의 '맏물'이라는 것은 레위인과 사도들의 각각의 특성과 그들의 사역적 불연속성과 동시에 연속적 개념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맏물'이라는 것은 처음 난 것으로써 특히 정착적 상황에서 본다고 할 때에 첫 열매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맏물'이라는 개념이 바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그 함께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과 함께한 자요 주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자들로서의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의 정당함을 부여받게 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토지의 소산물의 맏물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자신과 그 믿음의 후손들을 주님께 드리는 가운데서 야곱의 서원을 이행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인과 사도성의 관계의 시대적 정황적 불연속적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속성과 주의 뜻하심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심'(고전 15:20)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는데, 레위인들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표하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에 장자을 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이 즉 장자들은 다 죽임을 면하였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고 난 다음에 이 장자들은 속전을 내고, 그 장자적 입장의 사역을 대신 감당하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장자를 대표하는 가운데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며 이것은 성례전적으로 부활하신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그 말씀의 사역이 맡겨진 자들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들의 정체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시대와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정체성과 사역의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십일조에 대한 야곱의 언약적 서원을 지금도 이행함의 당위성을 합당하게 읽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오늘 본문 두 번째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이며 그것을 위해 그 고아와 과부와 객들로 함께 하며 레위인들과 기뻐하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라고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10절과 11절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면에서는 12절에서 19절까지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쁜 세상에 그리고 간접적인 측면에서 연락망과 교제라는 형식을 갖출 수 있다는 측면을 기억할 때에 교회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은 간과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심지어 아무 중심이 없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출석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천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증거합니다라는 중심으로 한 교회의 질서를 따라 구별되어진 장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야곱과 같이 서원을 이행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고 그것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께 자신을 헌신하도록 하는 그 일에 쓰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광주리에 그 땅 소산의 맏물을 담아오라고 하심의 뜻하심과 증거인 것입니다.

참으로, 토지의 소산의 맏물을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을 담아 드릴 수 있는, 세상의 흙에서 난 인생을 주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성도님들이 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바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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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9월 11, 2007

요한의 탄생

2007년 9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1:57-66
요한의 탄생

일반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이름에 대하여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쁜 한글이름을 지으시는 분도 있고, 대부분 신앙적으로나 또는 무속적 개념에서까지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이름을 바꾸기 위한 절차적 법적 개념까지 나아가는 해프닝도 보도되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족의 분류상 우리 나라는 알타이어계 셈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창 9:26)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을 기억합니다. 즉 셈족의 정체성과 그 이름적 개념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죄악 가운데서도 셈족계통에서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념적 발생을 의식하도록 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서의 현상적 실제의 모습들이 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것이 인식의 타당성의 객관성을 말할 때 여전히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도 신앙적 정당함을 비로소 얻지 못한다면 그 이름에 대한 것은 실제적이지 못한 것으로서 실제적인 것같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기만적 사실로서 받음이 당위성을 얻는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적 개념이 아닌 가운데서도, 그런 납득되어지는 현상들과 사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부모의 정이라는 현실적인 맹목성 개념에서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개념에서도 그 실재적 다른 입장이 있으니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탄생에서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에 따라서 부친 사가랴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과 일시 벙어리되었던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함을 말함에 따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놀라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가 예언한 것과 같이 사가랴의 아들로서의 요한이 탄생하고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을 확정하는 가운데서 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입이 풀려 말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한의 탄생과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의 되어진 일들이 계시로서 기록되어짐과 그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의원 누가가 '데오빌로'(눅 1:3)게 써보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알아 쓰게되어지는데 이것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에서 증거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벗' 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에게 보내는 것이며 이것은 그 데오빌로라는 개인이 성례전적으로 교회를 성도를 지칭하는 역활적 증거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벗'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을 받은 자가 있는데 그가 아브라함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

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함을 실제적인 것으로 믿고 사모하는 자의 중심 그것이 셈족 계통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축복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또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에게는 그의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고 할 때에, 여러가지 합리적인 판단에서 볼 때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터전과 기반이 있는 생활을 버리고 갈 곳도 정해지지 않는 곳을 가라는 것에 순종함에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상대적으로만 볼 때는 전혀 납득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께서 말씀하심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고 실제화하여야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상대적인 고려 자체가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성을 판단하는 것으로서의 실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존적 정당함이 현실적으로도 합당함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며 실제라는 사태파악과 납득과 인식이 바로 하나님의 친구라는 벗이라는 칭함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가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것들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기정 합당한 납득 당위성을 가진 것으로 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중심이며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주의 세우신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벗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운데서 이 누가복음에서 기록되어진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 편지로서의 그 말씀을 마음에 세기는 것이 마리아의 찬송으로 나타났고, 마리아는 개인적인 특수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적 차원의 한 증거자일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마리아의 찬송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54~55)

이러한 문맥적인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의 첫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머리로서의 남편 사가랴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의 기억(memory of Jehovah )'이라는 뜻이며, 어머니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맹세(oath of God)'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라는 예정적 뜻하심의 주권적 기억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기억적 사실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적 뜻하심의 표현으로서의, 맹세로서의 증거로서의,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증거를 하는 자로서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이라는 천사의 이름을 말해준 것과 같이, 일반적 아비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의 비판적 여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일반적인 죄의 굴래의 상속적 실존과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선택된 자며 또한 그 증거자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요한으로서 합당하게 그 당위성의 실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받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의 요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증거적 의미를 안다면, 굳이 세례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본명을 달리함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 막연한 가운데서도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은혜로 마음에 비로소 둘 수 있는 사가랴는 찬송을 하게 되는데 주의 손이 그 아이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의 영광, 예수의 영광의 증인이 되어지는 사랑받는 자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의 복음을 통하여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우리 교회들의 모습'(고전 4:15)에서는 어쩜 그렇게 화려함도 없어보이고 요한과 같이 늦둥이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즉 아이의 양육적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여러 모순을 찾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작은 모습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막연함에서가 아니라, 진실한 사실로서, 그 복음으로 길러내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읽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 이름모를 작은 교회들에서는 장차 사도가 될 바울의 그 모진 행동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적 증거자로서의 바나바의 증언에 따라 사도 바울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도 바울을 통한 주의 함께하심을 보고 즐거워했을 것을 주목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어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모순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고 하는 말과 같이 여러가지 말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실 것을 보고, 죄가 아닌 이상 허물을 덮는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증거자로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실제의식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함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서 마땅한 것이며, 이름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며,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실존적 정당함을 가진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잘 구별하여 사실화하고 그것을 분별하여 해석하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증거와 그 기업으로서의 아들의 탄생을 통한 증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존적 주권과 그 기억하심과 그 은혜로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에 따라 하나님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거듭남에 대한 증거를 일 가족을 통해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서의 야곱과 같이 여러 상대적인 것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해석이 진정한 내가 납득해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찬송과 기쁨이 있으며, 이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엘리야의 심령을 갖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자로서 거듭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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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7월 10, 2007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유와 증거

2007년 7월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상 8:12-26
성전봉헌의 축복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 따라 그 누리는 문화라고 하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일관성을 고집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호화로운 주택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그렇게 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착민에게 있어서는 그와 달리 좀더 안정적인 측면에서 의식주를 생각할 때에 거할 곳으로서 그 주택의 의미는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현대의 재태크적인 측면으로 의미가 변화되어진 모습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재태크라는 개념이 어떤 부동산개념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적 개념에도 변형되어진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대형 사업장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개념의 상식적 입장에서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회의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경우와 같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해석되어진다는 것과 납득당위성을 비로소 갖는다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즉 합당한 예배당에 대한 인식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의 인식의 연약함을 인하여서 교회의 예배당의 건물적 의미를 마음에 두는 그러한 신학적 입장의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교회 성장학에 있어서의 그러한 측면으로 접근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인식의 연약함을 이해한다는 것과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음에 대한 현실태적인 증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복음전도의 준거점으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은 그러한 준거점적 실재에 대하여서 비로소 의미를 두지 않지만 상대적 현실성에 있어서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선히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또한 선히 받을 수 있기를 마음에 둘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비로소 우리 성도들이 성전으로서의 예배당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그 증거적 입장을 마음에 둘 때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솔로몬의 성전봉헌식에서 그 중심을 배워 익히며 증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주께서 계실 영원히 계실 처소'로서의 성전을 선포하고 이 성전은 다윗이 건축하고자 했으나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지을 것이라고 하심의 정당함에 따라서 그 뜻하심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 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라는 중심으로서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는데 하나님뜻대로 이루게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한 가운데서 그 약속하심이 그 백성들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솔로몬 성전봉축이라는 개념이 계시적 실제적인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떤 증거적 실제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성전봉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실제적 헌신을 의미함인데 예배당과의 상관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과 봉헌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솔로몬성전 건축을 마치고 그 성전건축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증거와 그러한 합당한 봉헌식을 가짐에 따라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음을 의지하여서 그러한 신실하신 섭리가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져 주의 말씀에 따른 정당함에 거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언약하심이 백성들에게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신실하심의 약속하심을 나타내심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임의적 강요에 따른 간구가 아닌 합당한 종들의 증거와 섬김과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정당함에 따른 성전봉헌을 말할 때에 다윗이 건축하지 않고 자신이 짓도록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정당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상식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다윗'이 아니면 상식적으로 누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권세를 합당하게 취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볼 때에 자존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시고 솔로몬을 통한 건축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상식적인 측면의 납득 당위성이 없다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그 뜻하심을 살펴서 그 말씀하심의 증거를 읽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그 날 천사들의 증거를 통해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3~14)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에서 증거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에 따라 구속받은 자들과 그의 지으신 백성들에게 있게되어지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적 개념에서의 주어지는 차이가 있는 평화이면서도 실제적인 그들의 평화가 있게되어짐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기뻐하심이라는 것은 '(기쁨과 의지와 선택Will, Choice)'을 의미하는 말인 유도키아스(ευδοκιας )라는 말입니다. 주의 주권적 기뻐하심과 그 의도하심에 따른 택하심에, 구약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솔로몬을 선택하신 것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의 증거적 복됨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 중에 평화는 살롬적 성전의 성례전적인 증거의 실제적인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모두 다른 지역의 다른 성의 이름이면서도 동일한 '살롬'이라는 기원적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즉 '살롬' '평안' 그 평안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성이며, 평화로서 주어진 성전으로서의 솔로몬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을 때에 이 모든 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의 실존적 자신을 주의 소유된 자로서 주님께 드리게되는 헌신의 실재를 예표하는 성례전적인 성소였던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솔로몬 성전이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도 있지만 성례전적인 개념이 주의 정하심의 뜻하심에 따라 그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제 그 계시의 시간이 지난 가운데서는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권한이 비로소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고난과 고통속에서 무너짐을 주목하여서 우리의 연약함으로 지상의 성전적 개념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도록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즉 이제 '참 성전이신 예수님'(요 2:21)이 오셨고 다시 오실 언약이 실행되고 있는 가운데서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는 계시의 시대가 이미 완성되어진 가운데서 성례전적인 개념에서 성소라는 개념을 비로소 취하는 성전의 개념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배처소를 드린다는 측면에서 한정되어지면서도 실제적인 성전의 의미를 마음에 둠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받으신 바되었기에 이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 받으셨음에 대하여서 우리 자신을 드림이라는 헌신에서의 성전봉헌의 실제적인 모습과 증거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참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εν Χριστος)을 예수님 몸 안에 존재적 흡수와 같이 생각하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고대 중세를 지나 존재의 유출적 개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당위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롬 5:1; 갈 3:11)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은 실존적 존재로서 주 앞에 거하게 되는 것'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떤 증거적 실제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성전봉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실제적 헌신을 의미함인데 예배당과의 상관성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서 가장 아름답고 합당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창세기28장의 말씀입니다. 즉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밧단 아람으로 갈 때에 노숙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로서 꿈을 꾸게 되어 그곳에서 돌배게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함의 '벧엘'을 언급했습니다. 그러한 구별적 장소에서 그는 아버지집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시면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겠으며 자존의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임을 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28장 10~22절 )

우리 성도들도 이미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롬 5:1), 앞으로 구원받아야할 존재들이 아니라 이미 실제적으로 구원받은 자들로서 현실적인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한 예배처소를 구별하고 그곳에 나와서 야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나의 하나님이심을, 주의 구원하심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일예배를 비롯한 모든 예배의 기본이며 예배당 출석의 실제적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간접인격적 의미부여로서의 인터넷이나 예배의 인도자의 직접인격적 인도를 배제한 어떤 화상적 예배는 그 의미를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측면에서 도우미로서의 실제적 의미를 가질 뿐 교회 예배당 출석을 통한 신앙고백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인격적 예배라고 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요 주의 소유된 자들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러한 신앙의 중심과 증거로서 한 처소를 주의 말씀에 입각한 교회의 질서에 따라 구별하여 그곳에 출석하며 예배하여 자신을 드림의 축복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솔로몬 성전봉헌식은 예수그리스도의 참성전이심을 근거로한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러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자들로서,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들로서 장소를 구별하여서 예배하며 주의 말씀하심이 우리 성도들의 삶속에 이루이지기를 구하는 것이 성도들의 본분의 기본인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세상의 복음의 접촉점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고 구별되어질 수 있으나, 이러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라는 그 중심이 분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언약하심을 이루어주시기를 구함에 있어서는 그 구하는 자의 신실함이 주의 판단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되게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바르게 주일성수 및 예배생활을 통해서 성전된 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롬 5:1) 주의 말씀과 같이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함을 받으며(마 5:9) 그러한 면류관으로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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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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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18, 2007

겟세마네의 고통 이해

2007년 6월1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14:32-42
머물러 깨어 있으라

요즘은 사람들의 인식에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같습니다.

매년 우리나라를 비롯한 특히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국에서 있게 되어지는 '입시전쟁' '삶을 위한 투쟁', 시간을 비롯한 적당한 또는 최소한의 물적 심적 노력 투자에 따른 최대의 기대효과와 그것의 내용이 되어질 수도 있는 경쟁에 대한 것은 삶을 위한 변명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작금의 삶에 대한 인식일 수 있고, 또 시대의 변천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진일보할 것이라는 것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을 것같다는 인식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인식 그 삶의 여정의 배경으로서의 시간투자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이라고 할 때에 입시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을 아끼려는 마음에 각성제도 먹어보는 입시생들의 심정은 분야가 다를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시대에 민감하다는 것 그것이 하나의 '깨어있다'는 '분별력을 위한 또한 분별력이 있다'는 개념으로 이야기 되어질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신앙적으로 또는 그 가운데서 해석되어지는 삶에 있어서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지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합당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생들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은혜로서의 사리 분별이 되어질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32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으로서 구성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세번 기도하심과 제자들의 깨어 있지 못함에 대한 모습과 그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하심인데, 내용은 예수의 자기 계시로서의 증거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이라는 실제적 증거로서 말씀하심을 읽게하는 것과 그들의 연약함을 받으시며 그들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심과 예수님 자신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하심은 그 내용적 계시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제자들이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서의 그들의 깨어있지 못함에 대한 연약성이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 내용적 계시그들의 연약성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는 어떻게 나타나며 상황적 세상의 모습은 성례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맥적인 측면에서 주목해보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마지막 일주일간의 사역을 묘사하고 증거하는 내용으로서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감람산 겟세마네라는 동산에 가셨는데, 그 때에 주의 성자로서의 성부께 기도하심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내용적 계시에 대하여서

본문 32절과 34절 말씀에서는 제자들에게 그 한 곳에 '앉아 있으라' 그리고 '머물러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고민하시며 죽게 되었다고 하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고뇌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처형이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 도망치기 위한 개념으로 상식선에서 규정함은 옳지 않습니다. 정당성 시비에서 이미 죄악된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규정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개념적 정리에서 파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규정적 인식은 가능하나 정당한 규정적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인간적인 고뇌로 나타나는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흩어짐의 사실이 없을 것이나, 결코 구원이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일시적이라고 해도, 예수님 자신의 제자들, 그들의 받을 현상적 실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을 덜어줄 수 없음에 대한 것으로서의 실존적 비참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식적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심이 메시아로서의 인식적 차원에서 합당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히 4:15 참고 사 53: 질고를 아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아)

그러한 연민은 상식적인 차원의 가능성이라는 개념에서는 모든 것을 구별하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성부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께 구해서 그 제자들과 함께한다는 것의 현상적 개념을 구별하여서 사실화 시키는 즉 십자가를 지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있어주는 가운데서도 그 뜻하심을 이룰 수 있는 것을 마음에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인성적 뜻하심 보다도 성부하나님의 신성적 뜻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얻는 것이 본문에서는 이렇게 기도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16)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개념없이 상식적인 개념에서 시간적 보편성에 따라서 볼 때에는 상황에 따른 예수님의 인식의 변화와 고뇌 메시아로서의 자기 인식의 변화 즉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비로소 자기 신뢰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그 때에 비로소 있었다는 기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자로서의 그 복음을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죽고 사는 문제'(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이 자존적 합당함에 따라 전제되어 있다고 할 때에, 시간에 따른 인식의 변화로서 메시아적 자기 인식의 변화와 자기 쇄뇌라는 말은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이며 옳은 본문 해석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해석의 정당성 시비에서 옳다 하는 그러한 사실적 판단을 내리고 진리로서의 실존적 정당함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것을 비로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상식적인 해석 가능성에 의한 실존적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서 본문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로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11:12)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의 이름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자기 계시를 하시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들이 질서를 찾아 실존하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해하고 되어질 일들에 있어서 그 연민의 정과 그렇게 행하실 수 있는 자이지만 성부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인식과 행함의 사실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실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실체, 삶의 전 방향과 실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낸다는 것이 합당한 기도임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가장 중요한 시간에 그것을 마음에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함으로 인해서 더욱 깊이 잠들게 되어지는 자리에 있게되어지며 앞으로 되어지는 그들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로서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상황적 판단을 해야 했기 때문에 또 상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당되어지는 현실적 조짐들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 머물라고 하신 곳에서 평안을 취하려고 하는데 깨어 있어야하는 그 부담감이라고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개념을 바르게 마음에 두었더라면 그것이 합당하게 가능했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적인 이해가 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연약성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제자들은 바리세인들과 서기관과 그 당시 성전과 관련되어진 자들의 인식과 그 행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것으로 합목적적인 방향을 잡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과 언약을 맺고 동행하고 있는 가운데서 인식적으로 또는 몸으로도 상당히 지쳐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고 계시니 별 탈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긴장이 풀려질 수 있고 아주 좋은 휴식시간으로서의 예수님의 기도시간에 눈이 감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상황적 그들의 인식의 추이를 이해하는 것이고, 좀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함이 죄악으로 나아가는 즉 '머물러 깨어 있으라'는 말씀에 불순종하게되어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계시적인 증거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눅 9:44,4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시고 변화산상에서 보여주신 계시에 따른 '예수님의 별세'(막 9:31)를 말씀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문맥을 볼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은 아직 알지 못했으며 깨닫지도 못했다는 말씀이며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을 본 여인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음'(요 20:9)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과 달리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 부활의 해석적 근거를 말씀하심이 이렇게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6,27)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서 자주 언급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소리의 내용은 알고 있지만 그것의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 잘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2장에서 사두개인들과 대화속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부활이라는 것의 사실적 근거는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마음에 두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즉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성경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개념적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사도개인과 같이 부활의 실존을 믿을 수 없으며 믿는다는 중심을 가져도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여서 부활신앙에서 잠들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두지 않으면 많은 가능성의 성경해석이 오해의 사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상황적으로 제자들이 지칠 수밖에 없는 그 연약함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졸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하여도 깨어있을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실 수 있음의 정당함을 따라서, 깨어있기를 실제적으로 주 하나님께 예수님처럼 주 하나님의 마음에 원대로 되기를 기도했더라면, 깨어 있었을 수 있는 사실적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처녀의 비유에서 열처녀 모두 졸았지만 지혜로운 처녀들로서의 다섯처녀의 실존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25:5, 1~10)

그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통해 사실 규정을 함이라는 왕같은 제사장적 입장의 행보로서의 순종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반석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두는 것에서 멀리하여지는 당위성에서 속수무책의 고통의 현실을 맞보아야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슬프고 고통스러우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은혜의 실제는 어떻게 나타나며 상황적 세상의 모습은 성례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어나 같이 가자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택하심은 그들의 연약함에서 비롯되어지는 부활의 개념이 비록 확실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주의 자존적 택하심이 있을 때에, 그러한 사실에서 비롯되어지는 은혜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함에 대한 사실적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같이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세상은 이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거와 그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그 사실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여러 시험이 있고 결국 예수님을 돈벌이식으로 이용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을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확실하지 않다, 또는 예수님의 실존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부활의 상대적 증거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맹목적이다, 예수외에 다른 예수가 가능하다. 즉 '예수 후 예수' 또는 '예수로 예수를 뛰어 넘기' 등, 성립되지도 않는 말들이 그 합리적 당위성을 가지고 말할 때에 답변하지 못하고 자기기 가진 신앙에 확신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고통의 밤에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름을 짜는 듯한 개인적인 고통이 되어질 것입니다. 즉 갯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비로소 왔던 곳이 아니고 그곳 주민들은 다 알고 있는 곳이고 또 왔을 수 있는 곳으로서 세상의 사람들의 고통의 장소로서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에서 성경에서 기록되어진 것으로써 구별되어진 그 기름짜는 곳으로서의 이름을 가진 겟세마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가운데서 쉼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깨어있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이 주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로서의 겟세마네의 증거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실제적 평안과 사실은 예수님안에 있으며'(마 11:28~30) 예수님의 증거로서 가르쳐주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 참 주의 말씀과 같이 '갈수록 사람들의 왕래가 빨라진다고 하신 것'(단 12:4)과 같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에 생존의 발을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식과 그 흐름으로써의 신경씀이라고 하는 것은 고도의 노력을 요구하는 가운데 피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오면 되지' 뭐 또 '성경공부를 하고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옳고 그르고 시비를 가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을 상대적으로 강요받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말못할 고민이 되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에서 현실의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사실화하고 기뻐하고 그것을 받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합당한 필요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뜻하심과 섭리를 따라 순종하기 위한 노력들의 기본으로서 성경공부가 필요한 것이며 그 자체가 그러한 삶 자체가 주님의 기도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과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자존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취하시기 때문에 그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안에서 내 실존의 정체성을 스스로 배워나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성도들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서의 삶의 기도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주일 내내 신경쓸일 많고 쉬지 못하고 예배드리고 출석하는 것까지 했는데 좀 쉬고 싶은데, 성경공부와 섬김이라는 것에 메인다는 것은 어쩜 '기름을 짜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송이꿀 같아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의 핑계치 못하는 복음의 사실을 마음에 둘 때에 그 위로의 말씀은 그 위로의 쉼으로서의 사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적 차이로 현상적 일률적 단정적인 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느낌의 판단과 달리 실제적으로 주어짐에 있어서는 동일한 은혜의 사실로 기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임의적 개연적 당위성만 갖추어서 사실시비를 가리는 고통의 밤에 답변할 것을 온유함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강조되어지는 증거들이 일시적인 각성제 역활을 해서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이 속쓰림으로 나타나 이제는 더 죽도 못먹는 단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각성제도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마음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비판의 목소리들 속쓰린 소리들을 내밷고 있는 것은 임의적 각성제만으로 부흥만을 말하려고 하는 모습에 식상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그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우리 성도의 존재적 정당함과 개연적 모습의 상대적 증거라도 주의 말씀의 재가에 따라 사실화시키고 증거하는 가운데 합당한 진리임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하여 증거하시는 가운데 이제 단단한 것도 먹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며 성장하며 진정으로 이 세상에 머물라고 하신 주의 말씀대로 허락하신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 있어, 사실을 분별하고 세상의 불가지론적 입장의 여지에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 온유함으로 내세의 소망을 증거해 그들을 주예수께서로, 옳은데로, 인도하시는 자들로서 하늘의 별과 같은 영광을 받으며 그 영광으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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