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4월 30, 2005

스올의 뱃속에서

2005년 4월 2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욘2:1-10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삶에 있어서 어떤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일을 한다는 것만큼 불안하고 또 심지어는 꺼려지는 것은 또한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살이에서 호감을 가지고 행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항상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있고 오히려 호감이 없다고 하여도 해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일을 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렇게 적지 않게 우리의 삶에 또한 있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본다면 부정에 대한 학습이라고 하는 것이 그 부정적인 입장과 도피적 인생, 마지못하여 행하는 모습들이 있는데, 신앙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삶 전체와 그것의 생명이 되어지는 신앙이라는 총체적인 인생에 있어서 부정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서 주목하며 그 말씀하심을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합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의 말씀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이 자신의 음성을 들으셨음에 대한 것과 회개와 증거와 찬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심에 따라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한 것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요나의 증거인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의 중요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도 특히 이 요나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마 16:4; 눅 11:29; 눅 11:30 참고)

주님께서 언급하신 이 말씀에서 표적(shmei'on),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것의 뜻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that by which a person or a thing is distinguished from others and is known)

이처럼 다 상대적인 것으로 알려진다는 개념이 특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메시야라고 하는 것도 그 구별되어진 사실이 아닌 상대적인 존재로써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에 대한 표적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굳이 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을 보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자신들의 정욕적인 개념으로 자기 정당화 시키는 자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으로써의 표적을 말할 때에 요나라는 선지자의 인물을 통하여서 구별되어짐을 이미 말씀하셨음을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요나의 증거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가능한 또는 허용되어진 가운데서 판단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니느웨에 가서 주의 명하신 바를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곳에 가면 자신의 역량이라고 함보다도 비교되어질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많은데 상대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에는 도대체 그곳에 가는 것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요나서 1장 1절에서는 요나를 아밋대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아밋대’라는 말은 ‘나의 진리’(my truth)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이 진리라는 자의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에 상대적으로 주관적인 생각으로 객관성이 결여되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편협한 것을 전한다고 할 때에 아주 큰 성에 그것에 대하여서 반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함에 도대체 이러한 주관적인 것을 어떻게 증거하라는 말인가 하는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주님이 지적하셨던 한 달란트를 받은 악한 자는 아니었어도 주인의 그 맡겨주심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못한 자로써 그 악한 권세에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스올의 뱃속으로써의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게 하시며 그를 인도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요나서 1장 1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심을 깨닫고 자신의 기도를 이미 들으셨음에 대한 예정하신 섭리의 오묘함을 찬송하는 것이 바로 나의 기도를 들으셨나이다라는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 상대적인 주관적 진리라는 것에게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절대의 정당함이 그에게 부여되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상대적 보편성이라고 함이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사실이 구별되어진 것임을 증거하여야 하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그러한 스올의 뱃속으로써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 안에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게 되어지는 법적 의로움을 취하게 되어지는 자들이 진정으로 깨닫게 하심의 은혜가 있게 되어질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 요나가 쓰임 받는 것임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주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세상의 상대적인 실제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도 온전하게 증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이 요나로부터 이미 예언되어질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자신의 음성을 주께서 들으셨음에 대한 증거를 함에 대한 것은 이후에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라고 함이 그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육체적인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존재의 부정이라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에, 죽음이라고 것에, 메여 있지 않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언약을 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상대적인 주관적인 것으로도 절대의 재가를 받아 절대의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이 있을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는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또는 여러번 강조하는 표적으로써 상대적 충족성을 만족시켜야 하는 당위성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심은 너무나 합당하시고 신실하신 말씀이심을 마음에 두며 또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지옥이라고 하는 뜻도 있고,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장소, ‘지하세계’ 등등 있어서 어느 것을 선택해서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러한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요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죽음의 종노릇하는 것에서 자유하시게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성도들로써 삶이라고 하는 죽음의 종노릇하는 살기위해 전쟁을 치룬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나의 사실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인도하심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가운데서 주의 구원의 증거자로써 인도하신다는 것을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이미 우리의 고백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신 바된 것을 고백하며 증거합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진리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진정한 사실로 받으며 우리의 스올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현상적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회개하며 찬송하며 증거하시는 가운데 거룩한 길을 가는 시대의 주의 구원의 표적이 되어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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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4월 21, 2005

너희도 서로 받으라

2005년 4월 2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5:1-13
너희도 서로 받으라
Accept one another

상식적으로 본다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는 지나치지 않고 정도껏 한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고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비난받음의 당위성을 자초(自招)하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껏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일을 함에 대하여서 판단할 수 있는 관련 공동체들의 생각의 판단에 따른 용납의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 사회에서도 고래로부터 중용을 말하기도 한 이유도 그러한 것이고 서양에서도 중용적인 덕을 말하는 가운데서 극단적 회의주의적인 개념에서도 벗어나며 삶을 위한 지혜로서의 지식들을 말해왔습니다.

이러한 상식이라고 함의 판단을 실제적으로 비로소 받지 않는 믿음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 임의적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를 인정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성도들의 믿음의 교제라고 함에 적신호를 생각하며 식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받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말씀하심의 증거를 사모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것과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시게 하시지 않으신 것과 같이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하심임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하나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함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과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열방이 열방을 다스리시기 위해 일어나시는 이이신 그에게 소망을 두게 될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며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서로 받으심이라고 함의 당위성이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식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중용적 판단으로만 실제적으로 판단할 수 없음에 난감하지만 믿음 안에서 같은 실제적인 마음을 갖게 하시는 은혜 가운데서, 소망이 넘치게 하실 것에 대한 사실을 기뻐하며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맥적으로 볼 때에 로마에 있는 교회는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로서 구성되어진 가운데 율법의 문제 즉 신앙윤리적 행함과 그 믿음의 상관성에 대한 구분적 생각에 따른 그들의 삶에 있어서 분란이 있었고 이러한 것은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도저히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판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사도바울은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하심으로 그러한 것 가운데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에 대한 사실을 말씀하심을 증거하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른 것으로서의 섭리라고 함에 있어서 그 자존적 절대 확실성을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로마서 14장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서 협력할 때에 형제에 대한 존재가 하나님이 받으신 존재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가운데서 서로 받으라고 하심에 대한 적극적인 말씀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정당함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의 합목적적인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서 그 자유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서로 받으라고 하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모든 죄악과 비방이라고 함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과 같이 그러한 가운데서의 뜻하심이 소망을 주님 예수께 두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심은 예수님이 그 죄인을 사랑하셨다고 하면 우리 성도들도 그를 사랑할 이유와 당위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사랑하시고 용납하심을 나타내시는 주의 판단하심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나의 기분과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으로 비교판단 정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예수께서 받으시고 사랑하신다면 그 선하신 판단 하에서 나도 받고 사랑함에 나의 판단을 넘어서 너무나 합당한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기에 열심이었습니다. 외국에 원정을 가는 그러한 노력들 즉 다메섹으로 가는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서 때가 되어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오래참으심과 자신을 받으시며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을 몸소 깨닫게 하심을 알아서 고린도 교회에게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고전 13:4~7)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랑에 대하여서 많이 이야기 하였고 오늘 본문의 문맥으로서의 로마서에서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을 말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즉 율법의 본성인 행위를 요구함에 있어서 그 윤리적 완성이라고 함이 오래참음이라고 함과 온유함과 같은 것이 본체적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믿음의 형제를 주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받으신 바된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을 주님이 받으신 자들이라는 그 당위성을 합당히 여겨서 받으라고 말씀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너희도 받으라’고 하실 때에 그 언어는 ‘프로스람바노세데’입니다, ‘프로스람바노’(proslambavnw)라는 말로써 ‘친구로 삼다, 옆으로 인도하기 위해 손을 잡다, 집으로 영접하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말로도 사용됩니다만 그 문맥에 따라서 그리고 그 앞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자 하시는 그 뜻하심을 읽는다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친구로 삼다, 옆으로 인도하기 위해 손을 잡다, 집으로 영접하다는 것으로 표현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 2절에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데 이 세운다는 말은 건축물 건축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사실 집이라는 개념의 ‘오이스’라는 말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즉 성도들이 협력하여서 각 부분에서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성전을 이룬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그 특성적인 것을 받고 그러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책망없는 칭찬이 될 것을 사도 바울을 마음에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운다는 것에서 형제들을 기둥처럼 쓰이도록 인도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으며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성경의 안위를 생각할 때에 비교되어지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빌라델피아교회의 모습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빌라델피아라는 뜻이 형제사랑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나타나는데 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됩니다.(계 3:12) 즉 서로 사랑함으로 인내와 온유함으로써 받음으로 시험의 때를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온유하며.. 라는 말씀을 어떤 당위성만을 생각해서 행한다면, 자신의 한계가 이르렀을 때에는 그래도 그렇지.. 라는 입장에서 그 자리에서 벗어남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도의적 개념에서 생각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며 받으셨다고 함을 받을 수 있을 때에는 주님이 사랑하신다는 그 정당함이 있다면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비록 나의 상대적 판단의 거부적 당위성이 강요되어진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나의 받을 바가 아닌 것으로 알고 주님이 사랑하심으로 내가 사랑함의 합당함을 깨달아 사랑할 수 있도록 오래참고 온유하며 그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서로 받음이라고 하심의 뜻하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사랑으로써의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주신 축복과 같이,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것과 같이 형제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의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리에 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그 사랑하심을 따라 사랑할 수 있는 당위성을 기쁘게 따르는 가운데 형제들을 서로 받는 가운데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세우며 이루어가는 자들로서 주께로부터 칭찬이 있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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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4월 14, 2005

하나님이 받으셨음이라

2005년 4월 1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4:1-23
하나님이 받으셨음이라

한 때, 나라에서 ‘담을 허물기’를 노력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담장을 허문다는 개념에서 의식의 변화를 추구하고 좀더 친근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생각이 되어집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구분적 영역의 분별을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인식들로 인해서 더 이상 추진되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옛날에는 지금과는 비교되어지지 않는 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네 집이라는 그 영역만 표시하는 것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본의가 아니라고 하여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도의 높이와 토담으로써의 소박한 담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나가다가도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본의가 아니라고 하여도 듣기도 하고 또 굳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도 담 너머로 전을 붙인 것이라든지 음식을 넘겨주기도 하고 바쁠 때는 소리쳐 전달하는 그러한 것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담벼락에 숨어 의병 놀이하던 것도 기억이 날 수 있겠습니다.

담이라고 하는 것은 구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배제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의식하여서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이 있다고 하여도 배제하여야 하는 경우가 분명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이웃사이에 상당한 실랑이라고 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받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의 구별적인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형제들을 용납하며 교제함에 대한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심과 그것은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라고 함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자가 누구냐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를 일으키는 힘이 주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심에 있어서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한 자들로서 우리가 주의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시면서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말씀하시고 있으시며 또한 모든 입과 혀가 주께 자기 일을 직고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런즉 서로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두지 말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속된 것이 없음과 믿지 못함에 대한 것이 속된 것을 지적하시며 먹고 마시는 것으로 형제를 실족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서로 화평의 덕을 세우며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도를 받으셨음에 대한 정당성’을 분별하는 가운데서의 믿음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는 임의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위성을 잃게 되며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책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서 성도의 교제의 사실을 인한 노력과 교제의 자리에 서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문맥의 정황적인 것을 먼저 기억할 때에, 로마서에 나타나고 있는 유대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의 율법준수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함의 차이에 따라 신앙 윤리적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룰 수 있겠느냐는 현상적 이해와 반목에 대한 것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는 식상해하였던 것입니다. 즉 오늘날로 말하면 여러 교파들의 자기식의 이해로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에 회의적 모습을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한 반문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바울은 성도들의 그러한 모습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은 그러한 현상적 판단의 실제인식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참는 사랑을 이룰 것을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즉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이 그것이었던 것입니다.(롬 13:10)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이 이어지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을 언급한 것과 같이 오래 참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믿음으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의미하며 그것을 행하는 가운데서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 성도들 자신들과 형제들에 대한 판단이라고 함을 어떻게 분별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존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서 비로소 있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한계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의 소유되어진 자로서 신랑이 신부를 취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받으셨음과 그로 인한 그 판단은 주의 종들에게는 허용되어진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에 따른 판단을 하지 않는 것으로써 주의 종된 자들로서 주의 자녀된 자들이 아닌 ‘남(他人)(롬 14:4)’으로써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급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남의 집에 있는 이야기들을 판단할 수 없음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요즘은 가정폭력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당위성을 잃는 가운데서 그 가정의 법적질서라고 함에 관계할 수 있는 법적 조치라고 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자리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만, 건전한 가정이라고 함이 그러한 것의 전부로 규정되어지는 것은 또한 아니라고 할 때에 그러한 건전하지 못한 가정의 제제를 받게 되어지는 것까지 고려하여서 언급해야 하는 당위성은 없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은 그러한 상대적인 판단의 영역적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비록 상대적인 판단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러한 가운데서 넘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여도 믿음의 행보에서의 차이와 그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두 받으셨다고 할 때에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잃은 자들 즉 이단적 입장의 사람들의 입장까지 고려되어질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즉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들 임의적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은 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단에 대하여서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심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요이 1:10~11)

사도 바울이 말하게 되어지는 형제들의 교제와 그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전제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존의 삼위하나님을 임의적 삼위하나님으로 말하는 자들이나 삼위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 연약함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이단임을 분명히 함에 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적인 재가라고 하는 것을 통한 사실 분별이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바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말하게 되어지는 그 형제가운데서 오래 참을 수 있는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이 상대적인 판단으로서의 형제들의 연약함과 믿음의 분량차이라고 함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단이 아닌 가운데서는 서로 오래참고 서로 용납할 수 있을 수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형제에 대한 판단은 믿음의 분량이 차이가 난다고 함에 있어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사도바울이 전제하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과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상대적으로도 사실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전제에서 언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적 차이에서 무슨 판단의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형제의 연약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분량의 차이라고 함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의 권세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시는 사실 판단에 있어서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비로소 구별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판단 가운데서 참으로 주의 받으신 형제의 실존적 정당함을 서로 이해하고 알아주며 받아주며 상대적인 여러 가지 믿음의 분량적 개념에서 오게 되어지는 고통과 고난이라고 함을 주의 남은 고난으로 알아 내 몸에 채우는 사도 바울이 지녔던 그 합당한 마음을 믿음으로 받으시는 가운데 자신의 임의적 옳은 일이라는 것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복 있는 자로서, 성도의 교제 안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오래 참음이 있는 사랑을 이루시는 복된 자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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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4월 07, 2005

빛의 갑옷을 입자

2005년 4월 6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3:1-14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을 할 때에 필요한 적당한 옷을 입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좀 전문적인 일을 하게 된다면 단체적인 측면에서 어떤 ‘유니폼’을 입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위한 옷을 입을 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한번씩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오늘 일과가 시작되는구나.. 그래도 한번 해봐야지.. 살기위한 것인데..’라는 생각들 물론 잘하겠다는 생각과 사명감을 표현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여야하고 표현하여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면 그래도 생명이 있는 동안에 평안한 삶을 위해서 해야지 하면서 일을 위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생명이 있을 동안의 평안’이라는 것은 가히 ‘생명과 평안’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생명과 평안의 복음에 대한 의식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의식되지 않더라도 삶을 통하여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삶을 영위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자존적 형상을 위한 것으로써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실제는 ‘생명과 평안’의 ‘복음’임을 기억하여야 하고 우리 성도들은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롬 1:2)이라고 언급하고 난 다음에, 이러한 ‘생명과 평안이라고 함을 놓고 복음에 대한 언급을 한 것’(롬 8:1~10)을 기억하면서 오늘은 빛으로 갑옷을 입는 것, 그리스도로 옷을 입음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고 하심과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며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세를 거스리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으로 나타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난 후에 선을 행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권세에 대한 의무를 행하면서 두려워할 자와 존경할 자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음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음에 대한 것을 언급하면서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하시며 단정함으로 행하고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세 가지 주제로써 ‘권세’와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과 ‘빛의 갑옷 즉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음’에 대한 것이 선을 행하는 가운데서 하나의 동일한 뜻하심을 이루게 되어지는 것을 총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성도들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심의 축복의 자리에로 초대함의 전반적인 언급을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권세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에서의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성도들로서 또한 종들로서의 유대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의 정황을 이해하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라는 말은 힘 ‘strength power’로 표현되어지고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권세라는 말로써 ‘엑수시아’도 ‘power strength’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로마의 권세라고 하는 것 그 질서적 개념에서 있게 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정하신 바에서 이루어지는 사실로서의 실제를 가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정황이라고 함에서 유대파 헬라파 성도들의 신앙윤리적 생활이라고 함을 행함에서 ‘선을 행할 수 있음’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두도록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로마서 12장의 언급이면서 사실 기독교적 선을 행함에 대한 논의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근본적인 사실이해에 반목에 있음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룸이라고 하는 것의 총체적인 사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심이라는 것이 중심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하심에 있어서는 그 앞서 있게 되어지는 믿음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에서 다소 있게 되어지는 불협화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진정한 훼방적 사실이 될 수 없는 것임을 마음에 두며 그것이 사실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오래 참는 온유하는 사랑’(고전 13:4)을 이루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권세를 말씀하시면서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정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현실적인 강요의 권세적 입장으로 해할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권세의 존재의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권세까지도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측면에서 그 특정적 한 부분적 개념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할 때에 죄악의 권세의 자리에서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신앙윤리적 모습의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려고 하는 것에 지지 말고 진정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무엇이 사실인지를 증거하는 사람 즉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사실을 말하는 자들로써 진정한 사실을 분별하는 자리에 이르게 하는 즉 빛을 비추는 자리에 서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권세라는 것의 실존, 신앙의 행함의 사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인식함에 대한 진정한 사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 성부 하나님 자신이심의 계시하심에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 분 안에서 정당함을 얻을 때에 진정한 사실임을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그것을 통하여서 세상에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중심을 가지는 것이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로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그리고 그 인내함에 대한 소망이 진정한 사실이라는 것의 확신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함이라고 하는 것 즉 인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주장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행함을 요구하는 것에 온전히 인내함으로 행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그 열매가 그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성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할 때에 그의 이름으로 세우신 주의 몸된 교회에서 현상적인 협력의 사실들이 믿음의 분량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같은 가운데서 식상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과 같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정할 때에 주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파생된 예정하심의 선하심과 그러한 상대적인 모습에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하심과 협력하게 하심의 사실을 말할 수 있도록 하심의 뜻하심이 진정한 사실인 줄 알고 진적으로 주의 몸된 교회에서 오래참고 온유하며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 축복의 자리로 나오게 하시는 은혜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의 정당함과 주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믿으며 주님을 의지하여서 사실을 분별하고 오래참고 온유하며 거짓을 행하시지 않는 가운데 진정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자들로서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들로서 주 앞에 나타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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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4월 04, 2005

사사 옷니엘

2005년 4월 3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삿3:1-11
사사 옷니엘

사람이 살다 보면, 세월을 의식해야 하는 때가 있고 시기라고 함을 분별하게 되는 인생의 때를 맞이하게 되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주의 사도들의 증거에서도 ‘때를 분별하라고 하심’(롬 12:2; 엡 5:16)과 같이 그 말씀이 신약시대 그때 비로소 생소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사사기에서도 읽게 되어진다는 점을 말하게 됩니다.

구약에서의 세대라고 함을 말할 때에 ‘도트’를 말하는데 이는 시간의 순환적 개념을 말하게 되어지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라고 하는 것이 자연의 반복적인 것과 비교하여서 순환적 시간관을 말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그러한 것으로 세대주의자들의 시대를 나누는 어리석음도 이러한 언어적 개념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하심을 생각하는 잘못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환적 시간과 그에 따른 세대를 말하는 형식은 그러한 세대를 말하는 형식과 실존이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성례전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 증거한 내용이 실제적으로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함을 분별하도록 하심의 선하심과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서 채용되어진 언어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다고 할 때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한 세대로서의 옷니엘 사사의 하나님 앞에서의 통치기간에서 증거하는 그 존재적 그들의 시대적 성례전적인 그 증거의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읽어내며 또한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알게 하려 하사 열국을 남겨두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남겨진 족속과 자신들의 자녀들을 혼인시키고 그들의 신들을 섬겼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과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음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세우셔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 땅이 태평한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옷니엘 사사를 보내신 주의 뜻하심과 그 앞서 기뻐하신 뜻하심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에서는 사사를 세우심에 있어서 전반적인 사사의 사역을 말씀하신 2장까지의 말씀을 기억하고 본문에서는 구체적인 사사들의 증거와 정황이라고 함을 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제일 먼저 기억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전쟁에 대하여서 알지 못함에 대하여서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시기 위한 뜻하심이었습니다.

즉 주의 몸된 교회가 가장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다음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하심을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일에 더욱 그리고 더 많이 마음을 두고 행하여야 할 것을 앞서 언급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는 그 시내산에서 언약을 받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모압지방에서 언약을 그의 다음세대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중심이 선하였는데 여호수아의 경우에서는 그 백성들의 신앙의 합당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선택하도록 하는 그러한 정도에 그쳤고, 진정으로 그러한 다음 믿음의 세대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르침을 위해서 그들이 청종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방인들과의 상관관계 속에 있게 되어지는 고통의 자리에 서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청종의 여부를 알기 위하심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그의 선하심의 예정하신 가운데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적 증거로서 메시아가 오심과 관련되어진 가운데서 본문이 해석되어질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주의 말씀을 받아야 할 것을 마음에 두는 가운데 인성적인 표현으로 경험적 지식의 형식을 선히 취하셔서 ‘청종의 여부를 알기 위하심’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옷니엘의 사사로서의 존재적 사역적 증거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을 취하기 위하여서 벌인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것의 전형적인 측면에서의 성례전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오게 되어지는 주의 몸된 교회의 세대들 오고 오는 주의 몸된 교회에 대한 예표적 성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사들이 아닌 옷니엘이 그 사사의 역할을 맡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힘이 다음 세대를 붙들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한 세대의 사사일 뿐이면서도 다음세대의 총체적인 하나님의 권능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주의 몸된 신 구약의 교회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에서 특히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오순절로 인한 주의 몸된 교회의 공식적인 출범이라고 함을 예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몸된 교회가 복음으로 나은 다음 세대를 주의 말씀으로 양육시키는 일에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주의 오고 오는 모든 교회는 자존의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의 재가로 지키실 것이라고 함의 소망을 가지게 하심의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음세대에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도록 하심의 권고하심과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소망의 말씀을 마음에 둠이 귀한 은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세의 한 징조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서 증거되어지는 것과 같이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암 2:12)는 말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선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성도들이 주의 선지적 형상으로 회복되어지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옷을 입은 자로서 주의 복음을 증거함에 그러한 선지적 역할을 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증거하지 말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믿음의 후손들도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서 그러한 ‘신앙고백적인 답변을 준비하는 것’(벧전 3:15)이 합당함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진정한 사실임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참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구원과 생명과 평안의 사실이 있음을 증거하며 가르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 신앙고백위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것으로 주의 몸된 교회가 온전히 세워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16:15~18)

이와 같이 참으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인 사실을 말씀하심에 진정한 구원과 사실이 있음을 기억하고 이러한 복음의 사실을 믿고 인내하며 온전히 증거하고 복음으로 낳은 다음세대에 바르게 가르치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시는 귀한 소망이 사실로 나타나는 그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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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2005년 4월 1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암2:1-16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 20:29)라는 말씀을 기억할 때에 그 힘과 함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힘의 자랑이라고 할 때에 어떤 물건을 들어올리는 그러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서 그 들어올림으로 인한 힘의 자랑을 검증받게 되어지는 것에 앞서는 것은 그 들어올리는 것으로서의 그 물건의 재질이나 이해에 대하여서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똑같은 모양의 물건이라고 하여도 더 무거울 수 있는 것이 사실이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무게의 차이가 변하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임의적으로 힘에 대한 과시를 나타내는 경우에 있어서 실수하는 경우가 있고 본의 아니라고 하여도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넌센스적인 언급이라고 함을 예로 든다면 자기 용량에 맞는 무개의 바벨을 누운채로 들어올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가운데서는 그 바벨을 떨어뜨려서 목이나 가슴을 다치게 되어질 수 있는 위험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의 존재적 증거는 ‘짐’ 또는 ‘짐 지는 자’라는 뜻의 사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인생에게 주어지는 임무로서의 짐이라고 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판단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압에 대하여서 그들의 서너 가지 죄를 인하여서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다에 대하여서 그들의 서너 가지 죄에 대하여서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고 열조를 따라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북쪽 이스라엘의 행한 바에 대하여서 책망하시고 있으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실하게 대하심에 대한 것을 더 자세히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음에 대한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누르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피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으며 그 도망하는 자들이 있게 하심에서도 그들의 용사되어진 자들의 존재적 사실이 부끄럽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수레에 담은 곡식 단이라고 하는 것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 짐이라고 함이 그들을 결코 자유롭게 하지 못하며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짐은 지기 쉬울 것이며 쉼이 있는 짐’(마 11:28~30)이 되어질 것을 예표적 그 당시의 존재적 증거자로서 아모스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본문 2장은 1장과 연관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문맥적인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아모스의 소개와 그의 보내심에 대한 것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고 이방의 받을 심판에 대한 것을 언급하는 가운데서 2장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방의 심판받음이라고 하는 것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같이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동일한 판단 받음이라고 하는 것을 본문에서 읽어내는 것이 관건으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아모스 1장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 족속과 2장 첫 부분에 언급한 족속은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고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과 존재에 대한 분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암몬자손(암 1:13)과 모압자손(암 2:1)이 그들인데, 이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딸들의 후손들로서 백성을 이룬 자들입니다. 조카 롯은 상대적으로 상당한 상식이 있는 그러한 분별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정황적 이로움을 생각하는 자이었는데 그의 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유황불로 멸하게 되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구하여 소알 성읍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딸들은 생각했습니다.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창 19:31~32)

이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9:1)고 하심의 주의 뜻하심을 그들이 의식함의 여부에 관계없이 타락한 의지와 본능적 정서가 하나님의 정하신 말씀의 뜻하심을 따르지 않는 가운데서의, 인종을 전하자는, 임의적 당위성을 따르기로 하여 신앙적인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자신들의 아버지의 삼촌인 아브라함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을 자들이 아닌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정욕적인 것은 신앙적 입장의 유순한 표현을 슬로건으로 내걸어서 그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신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들에게는 질 수 있는 은혜로운 짐이 되어지는데 그것을 임의적으로 생각하여서 생각하여 임의적으로 자취하는 자들의 모습은 그들의 그 짐이 그들을 눌러버리게 된다는 것으로 그들의 죄에 대한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서너 가지라는 죄의 상대적인 개체적 사실을 분명한 심판받을 사실로써 규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달란트와 같은 것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성도의 믿음의 뜻하심을 수행하게 되어지는 그 짐이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의적으로 주장하려고 할 때에 그것이 그들의 눌리게 되어지는 짐으로써 나타나며 하나님 앞에서 곡식의 자라남의 씨앗이 발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러한 불모의 자리로 하나님께 강퍅한 자리에서의 심판을 자초하는 자리에로 나가게 되어지는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심판의 선취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압과 암몬 족속 앞서 있게 되어지는 이방 족속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달란트와 주의 주신 뜻하심을 이룸을 우습게 여기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비방하며 그 백성들을 노략질하던 자들로서 그 자초한 짐에 깔리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웃시아 왕을 비롯한 상당한 주의 은혜를 입은 자리에서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선택하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발상으로 행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에 하나님의 목장에 있는 양무리들로서 택하심의 징표를 받지 못하는 자로서 판단 받을 수 있음을 놓고 회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의 입장에서는 그 목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그 때 그들이 하는 일이 그들의 목장에서 양이나 가축에 표하는 자입니다. 양으로서의 합당한 것의 관리적 차원에서 주목하는 자인데 이것은 주의 짐을 지며 주의 뜻하심 안에서 쉼의 정체성을 찾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히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신 바 그들이 받게 되어질 달란트와 그들의 행할 일들과 같은 짐을 마음에 바르게 두지 못했던 것이며 거짓 것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후에 히스기야와 같이 선왕도 북쪽 이스라엘 왕과 같이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 전장에 나갔다가 죽을뻔한 사실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 전에도 그러한 상관관계에서 분명하지 못한 거짓된 것을 따랐던 전적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그들의 흥왕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입장에서는 선지자들이 굳이 말함에 있어서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지는 가지지 못하는 자들이었고 적극적으로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그러한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짐뿐만 아니라 주 앞에서 그들의 합당한 짐을 지고 증거하는 선지자들의 짐을 벗기는 악한 모습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총체적인 주의 판단하심을 수레에 눌릴 자들의 모습으로 그들의 강퍅해진 그 중심에 ‘은혜 받을 자’의 자리에서 제하여짐에 대한 판단하심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레에 흙이 눌리게 되어지는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지는 인생들이 바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임의적 당위성으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임의적으로 신앙생활을 생각하게 되어지는 자들도 그러한 이방인과 같이 판단을 받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짐이 있습니다. 인생이 스스로 자신이 판단하되 그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의 성격이 하나님의 자존적 형상의 지음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의식적으로 인식적으로 인정하여야 하면서도 그것을 행치 아니하는 불순종이라는 죄의 짐을 짊어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죄의 짐이 벗겨지고 주의 주신 믿음의 주의 뜻하심을 이루기 위한 자원하는 마음에서 지는 짐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이들과 같이 심판에 이르게 되어지는 짐으로써 나타난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종교 다원주의라는 개념으로 여러 종교의 서로 포용성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심의 선하심과 구원하심의 자존적 유일하심에 대하여서 마음에 두지 않거나 말하지 못하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존적 유일한 구원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나타나는 그 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그 짐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구주이심에 대한 사실을 말할 때에 말할 수 있을 때에 내려놓게 되어지며 그 강퍅함에서 벗어나서 은혜 받을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30)고 하신 주님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주의 뜻하심 안에서의 해야 될 의무라고 함이 진정 쉬운 것이며 쉼을 주시는 것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주님 안에서 인내하며, 죄짐이 아닌, 주의 뜻에 합당한 짐을 지는 자로서의 행복이 주의 축복으로 나타나는 귀한 은혜가 있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주의 고난을 남은 육체에 채우는 종의 심정과 같이 주의 받으신 바가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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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