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4월 14, 2005

하나님이 받으셨음이라

2005년 4월 1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4:1-23
하나님이 받으셨음이라

한 때, 나라에서 ‘담을 허물기’를 노력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담장을 허문다는 개념에서 의식의 변화를 추구하고 좀더 친근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생각이 되어집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구분적 영역의 분별을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인식들로 인해서 더 이상 추진되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옛날에는 지금과는 비교되어지지 않는 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네 집이라는 그 영역만 표시하는 것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본의가 아니라고 하여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도의 높이와 토담으로써의 소박한 담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나가다가도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본의가 아니라고 하여도 듣기도 하고 또 굳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도 담 너머로 전을 붙인 것이라든지 음식을 넘겨주기도 하고 바쁠 때는 소리쳐 전달하는 그러한 것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담벼락에 숨어 의병 놀이하던 것도 기억이 날 수 있겠습니다.

담이라고 하는 것은 구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배제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의식하여서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이 있다고 하여도 배제하여야 하는 경우가 분명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이웃사이에 상당한 실랑이라고 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받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의 구별적인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형제들을 용납하며 교제함에 대한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심과 그것은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라고 함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자가 누구냐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를 일으키는 힘이 주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심에 있어서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한 자들로서 우리가 주의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시면서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말씀하시고 있으시며 또한 모든 입과 혀가 주께 자기 일을 직고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런즉 서로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두지 말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속된 것이 없음과 믿지 못함에 대한 것이 속된 것을 지적하시며 먹고 마시는 것으로 형제를 실족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서로 화평의 덕을 세우며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도를 받으셨음에 대한 정당성’을 분별하는 가운데서의 믿음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는 임의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위성을 잃게 되며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책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서 성도의 교제의 사실을 인한 노력과 교제의 자리에 서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문맥의 정황적인 것을 먼저 기억할 때에, 로마서에 나타나고 있는 유대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의 율법준수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함의 차이에 따라 신앙 윤리적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룰 수 있겠느냐는 현상적 이해와 반목에 대한 것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는 식상해하였던 것입니다. 즉 오늘날로 말하면 여러 교파들의 자기식의 이해로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에 회의적 모습을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한 반문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바울은 성도들의 그러한 모습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은 그러한 현상적 판단의 실제인식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참는 사랑을 이룰 것을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즉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이 그것이었던 것입니다.(롬 13:10)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이 이어지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을 언급한 것과 같이 오래 참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믿음으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의미하며 그것을 행하는 가운데서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 성도들 자신들과 형제들에 대한 판단이라고 함을 어떻게 분별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존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서 비로소 있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한계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의 소유되어진 자로서 신랑이 신부를 취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받으셨음과 그로 인한 그 판단은 주의 종들에게는 허용되어진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에 따른 판단을 하지 않는 것으로써 주의 종된 자들로서 주의 자녀된 자들이 아닌 ‘남(他人)(롬 14:4)’으로써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급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남의 집에 있는 이야기들을 판단할 수 없음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요즘은 가정폭력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당위성을 잃는 가운데서 그 가정의 법적질서라고 함에 관계할 수 있는 법적 조치라고 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자리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만, 건전한 가정이라고 함이 그러한 것의 전부로 규정되어지는 것은 또한 아니라고 할 때에 그러한 건전하지 못한 가정의 제제를 받게 되어지는 것까지 고려하여서 언급해야 하는 당위성은 없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은 그러한 상대적인 판단의 영역적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비록 상대적인 판단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러한 가운데서 넘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여도 믿음의 행보에서의 차이와 그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두 받으셨다고 할 때에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잃은 자들 즉 이단적 입장의 사람들의 입장까지 고려되어질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즉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들 임의적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은 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단에 대하여서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심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요이 1:10~11)

사도 바울이 말하게 되어지는 형제들의 교제와 그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전제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존의 삼위하나님을 임의적 삼위하나님으로 말하는 자들이나 삼위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 연약함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이단임을 분명히 함에 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적인 재가라고 하는 것을 통한 사실 분별이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바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말하게 되어지는 그 형제가운데서 오래 참을 수 있는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이 상대적인 판단으로서의 형제들의 연약함과 믿음의 분량차이라고 함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단이 아닌 가운데서는 서로 오래참고 서로 용납할 수 있을 수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형제에 대한 판단은 믿음의 분량이 차이가 난다고 함에 있어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사도바울이 전제하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과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상대적으로도 사실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전제에서 언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적 차이에서 무슨 판단의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형제의 연약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분량의 차이라고 함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의 권세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시는 사실 판단에 있어서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비로소 구별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판단 가운데서 참으로 주의 받으신 형제의 실존적 정당함을 서로 이해하고 알아주며 받아주며 상대적인 여러 가지 믿음의 분량적 개념에서 오게 되어지는 고통과 고난이라고 함을 주의 남은 고난으로 알아 내 몸에 채우는 사도 바울이 지녔던 그 합당한 마음을 믿음으로 받으시는 가운데 자신의 임의적 옳은 일이라는 것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복 있는 자로서, 성도의 교제 안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오래 참음이 있는 사랑을 이루시는 복된 자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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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