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28, 2004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넘어서

2004년 12월 26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7:16-26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판단의 기준들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차이를 가져오는 견해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좋은 견해를 취하는 것이 진정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권위적 개념의 재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신제품으로 좋은 것이라는 측면의 합리성보다도 전제되어진 명성이 있는 브랜드의 제품으로써 합리성의 동일한 판단이 있을 때에는 단연 후자의 경우가 선택되어질 수 있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함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야말로 견해라는 개념의 정체성 시비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라고 함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그처럼 슬픔의 골짜기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한 자를 가리기 위한 제비뽑기를 하게 되었고 아간이 뽑혔으며 그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의 사자가 아간의 진술에 따라서 그 물증을 확보하고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으며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짜기라고 부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간이 죄를 범하게 된 것에 대한 그 진술에서 그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주목하며 그러한 슬픔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심의 은혜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간의 진술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 7:21)

한마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그러한 말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상식적인 개념이 되어지는 것으로써 그 보다 더 근본적인 그것을 지배하고 파생케하는 주의 말씀하심에서는 ‘안목의 정욕’(요일 2:16)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지으신 영광을 잘 나타내게 되어지는 자들로써 비록 타락하여서, 예수님의 구속하심을 의지하지 않고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의 인식모습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아담과 하와의 죄악된 인식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그 개연적 의식으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써의 하나가 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을 견물생심으로 말할 수 있어도 견물생심이라는 개념으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본질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의 하와에게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와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는 가운데서 자기 합리화가 이루어졌고 사단은 그러한 합리성의 상대적 타당성으로 넘어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죄악의 모습이 오늘 슬픔의 골짜기의 표적이 되어야 했던 아간의 인식에도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견물생심이라고 해서 상대적인 방법에서는 안 본다는 그러한 것이 최선이 되어질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러한 것으로는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판단하는 자리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다는 그 자체의 실제적인 판단을 분명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함에 있어서 거의 본다는 개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보지 않는다는 개념의 확실성으로는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도 분명 옳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행함의 온전함이라고 함에서 그 합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진실로 그 본다는 그 개념의 판단의 실제적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가운데서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통하여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믿었다면 피조물로써의 합리성의 재고를 요구하는 뱀의 당위성이 이미 결여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알 수 있는 가운데서도 그 악함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 정당성의 시비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의 기본적인 속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간도 그의 내력적인 집안의 사람들을 주목할 때에 상대적인 인식의 열려있는 가정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절대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을 상대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견해 즉 그 안목의 정욕의 자리에 서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슬픔의 골짜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인식함에 있어서 본다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고 또한 그러한 것의 보편성을 생각할 때에 그냥 조심한다는 개념으로 일관한다면 그 안목의 정욕의 사악함을 인하여서 범죄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떠날 수 없고 그로 인한 슬픔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의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분별하여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다는 개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본다는 개념의 사실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인식하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는 그 아골 골짜기의 판단을 넘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보는 사실들에 대한 견해를 분별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행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2004년 12월 24일 소망교회 성탄전야금요철야예배설교
사7:10-25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일반적으로 요리의 재료로 그리고 요리와 제과의 재료로 쓰이는 식품으로써 그 중에서 버터와 치즈를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식품은 비슷하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버터(butter)는 ‘우유의 지방을 분리하여 응고시킨 식품’이고 치즈(cheese)는 ‘우유 속에 있는 카세인을 뽑아 응고 발효 시킨 식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의 차이를 가지면서도 우유라는 공통점과 그 가운데서 어떤 성분을 분리시켜 응고시킨 점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버터의 재조라고 함에 있어서 지금의 생산적 입장의 산출방법과는 다르게 재래식적인 방법으로는 아마도 우유라고 하는 젖이라고 함을 저어서 생산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젖으로부터 버터를 만들어 내는 것을 생각하며 본문에서는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예언하시는 가운데서 버터와 꿀을 먹으리라는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사야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직접 일인칭으로써 유다 왕 아하스에게 하시는 말씀중에 한 부분입니다. 아하스에게 이사야가 하나님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심에 아하스 왕이 거절함과 그러한 가운데서 이사야가 다윗의 집에게 들으라고 하면서 주께서 친히 징조를 주시는데 처녀에게서 한 아이가 날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관련되어진 사건들에 대한 비유적인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에 말씀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날’이라는 말들로 시작하고 있고 정체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간단한 비유의 언급들이 네 번 이어져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한 아기의 나심에서 그것이 성취되어질 것으로써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이 버터와 꿀을 먹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심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남이 오늘 본문의 말씀하심의 성취로 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버터라고 하는 식품은 젖 즉 우유를 저어서 만드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본문 이후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부분에서 하나님이 바다를 저어서 물결을 흉용케 하시며 그 가운데서 주어지는 젖의 제품으로써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사 51:15~16)

세상의 요동 속에서도 주의 구원하심의 그 사실들이 온전히 결실되어질 것과 그것을 먹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받을 자들이 다윗의 집 사람들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징표는 처녀가 아기가 나음에서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진정 아기 나심에서 그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함으로써 아기 나심부터 그 메시아로서의 사역적인 영향력을 나타내셨고 그 때부터 이미 젖으로써 버터를 먹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어린양으로써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가운데서 그 세파 속에서 그 메시아 안에서 준비되어지는 버터를 먹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음료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은 그의 나라의 자녀들의 모습의 정체성을 말씀하셨고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와 같이 온갖 짐승이 나오는 그러한 바다를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께서 저으시는 가운데서 그러한 가운데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속한 자들이 그 약속의 땅의 증표로서의 그 기업과 소산을 먹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예언된 아기예수님의 탄생에서 그 실제적 사실이 증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며 감사하는 자리에 서시며 세파 속에서 그 세상을 저으시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로서의 기업과 양식을 먹으며 마시며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잘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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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2월 23, 2004

스스로 믿는 사람들

2004년 12월 2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2:17-29
스스로 믿는 사람들

성탄절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슈퍼스타로 떠오르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마도 소위 ‘산타크로스’라는 인물이 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임의적으로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산타크로스의 날로써 임의적으로 생각하려는 세상의 사람들의 문화라고 하는 개념을 주목하게 됩니다.

복음이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는 그러한 임의적으로 스스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인식의 저변에는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지 그 여부와 관계없이 주님의 나심의 대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제대로 옳게 표현하지 못하여서 엉뚱한 대상을 찾는 세상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날을 기뻐한다는 그 자체는 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죄악 된 문화에서 그 기쁨의 실제가 구겨져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믿는다는 것과 그 나름대로의 정당함이 있다는 식의 인식이 이전부터 지혜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있어 왔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과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의 율법적인 측면에서의 선함을 여기고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신이 도적질함에 대한 것과 율법을 자랑하는 자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을 통하여서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율법의 정점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할례라고 하는 것의 유익함을 말하나 율법을 범함에 무할례가 되었음에 대한 것과 이와 같이 잘못된 행함에 대한 인식에 따른 것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칭찬이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임을 또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율법의 실제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함을 의문에 두려고 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동의적 정당함에서의 칭찬의 경건이라는 모습을 가짐에 책망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경건의 자리에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스스로 믿는다’는 개념이 중요한 것이 되어지며 또한 신령과 의문이라고 함의 개념이 그것에서 분별되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주목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글 개역성경 본문 ‘스스로 믿으니’(롬 2:20)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본문 문맥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자처한다는 의미에서 해석적 번역인데, 문맥적인 차원에서 바르게 그리고 잘 해석되어진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율법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자처하면서 뒤에는 자신들 스스로를 가르치지 않는 거짓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실을 말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면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주장적인 사실의 여부가 항상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라도 참된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절대 자기 정당함을 취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서도 절대의 자기 계시를 하실 수 있다고 할 때에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에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또한 진정한 사실로써의 참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유대인들은 로마교회에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유대인들의 인식이라고 함이 메시아고 오심에도 불구하고 율법적인 개념의 경건성으로 주 예수께서 거룩하게 하신 율법의 행함을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릇되게 행하는 가운데서 자기 모순적인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것을 보는 자들이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과 참됨에 대한 그 증거의 사실을 그들이 행함에서 볼 때에는 말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인식과 함께 마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신 것과 같이 상대적인 판단을 받도록 하는 자리에 서는 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스스로 믿고 있지만 그 스스로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재가적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임의적인 것으로 그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으로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 이름의 여호와인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기름 부어 거룩하게 하시는 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심으로(롬 4:25) 이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미 의롭다 칭함을 입은 자들이 그 중심에 주시는 믿음으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행함을 요구하는 그러한 특성으로써의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가치평가와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상대적 경건의 타당성을 비교한다는 것은 신령과 의문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령하다고 함은 상대적인 개념이 주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인하여서 진정한 사실로써 구별되어짐이라고 하는 것, 복음의 사실의 실제성은 예수그리스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상대적 존재부정으로써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대적인 교훈적인 말씀하심이 진정한 실제의 계시로 구별되었음에 그 신령함은 참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의문이라고 함은 그러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서 그것을 증거하는 가운데서의 행함의 빛을 비추던 것을 예수님 안에서의 거룩함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 그 정당함이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에서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확실성의 개연적인 언급들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의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자처한다는 말이 스스로 자신의 입장과 처신을 그리고 신념을 규정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그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따르지 못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의 영광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말씀을 맺습니다.

스스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뇌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어떤 이데올로기나 주의라는 사상들을 주입하여서 어떤 합목적적인 인간을 기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러한 것이라도 자신들의 선하다는 판단의 당위성을 따라서 그렇게 임의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그러한 것은 필요에 따라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익한 세뇌가 된다는 식의 임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은 거의 다 이러한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임의적인 주관적 스스로의 판단으로써 세뇌라는 개념으로써 여지를 가지는 그러한 의문으로써 신령한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려둡니다. 아무리 화려한 합리성이라도 그 합리성의 정체성이 정당함이 없으면 그것은 속이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형태적인 측면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더 나아가서 임의적인 주관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를 취하시도록 실제적으로 우리의 중심에서 은밀하게 주권적으로 주장하신 분이 자존의 절대자 자신으로써의 예수님이시라면 그것은 임의적 스스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세뇌의 판단을 기각시키는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믿음이며 그것은 은혜로써의 선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주로 탄생하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며 감사하시는 가운데서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성탄선물로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이미 그러한 선물을 받으신 성도님들에게는 후히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로서의 선물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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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2월 16, 2004

판단하지 말라

2004년 12월 1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2:1-16
판단하지 말라

우리 인생이 어떤 일을 하면서 판단하여야 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섣부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비적 지식이라고 함의 필요성은 또한 갖추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이라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니면서도 잘 준비되어진 사전지식(事前知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판단들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가운데서 인식의 사실이 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일반적인 인식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인식적 공감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렇지 못한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남을 판단함에 대하여서 같은 일을 함이라고 함과 그와 같은 판단이 그 판단하는 자에게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하심을 피하지 못할 것에 대한 말씀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며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이 되며 다만 고집과 회개하지 않음이 그날의 진노를 쌓음이라고 또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유대인에게 또한 헬라인에게 이며 이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심에 대한 이유적인 측면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일반 사람들의 율법에 대한 인식을 본성적 입장에서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것에 대한 판단과 심판이 총체적으로 주 예수의 날에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판단 중지’를 요구함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개념에서 성도들의 연약함이나 또는 성도들을 알아주라고 하심의 말씀을 따름도 같이 정죄되어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dilemma) 아닌 딜레마로써 오해되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그리고 불행히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또한 많은 성도들의 분란의 요소가 되었질 수도 있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도덕주의적 해석에서 서로의 판단의 근거 아닌 근거처럼 자리매김 되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에서 좀더 바른 판단을 위한 주목할 필요가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현상학이라는 학문적인 이성에서는 그 기본적 출발을 '판단중지'(epoche)라는 개념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왜곡하지 말고 보자는 것의 전제적 언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판단함에 있어서 선입관의 왜곡됨을 막을 수 있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판단 중지’라는 그 개념 자체는 또한 전제되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상대적 자기모순과 기만성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도 있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가능한가?’하는 것과 ‘그러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것에 검증되어지지 않은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실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마찬가지로 개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성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도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의를 구하여야 하는 가운데서 역시 정당함이 없는 합리성도 갖추지 못한 그러한 학문적 개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의 초등학문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문적 이야기라고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일상적인 용어로 본다면 현실파악 현실이라고 함의 실제적인 판단이라고 함이 진짜라고 임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러한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더욱 참된 신으로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스스로 취하시는 자존의 절대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이미 바울이 본문에서 증거한 바이며 그러한 것이 복음은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상대적이라는 판단만으로써 임의적 사실을 말하는 자들의 모습은 그 정체성이 판단 받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에 나타나고 있는 판단이라는 개념은 그 문맥상에서 볼 때에 1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재가를 받지 못한 가운데서 ‘스스로 지혜 있다’(롬 1:22)고 함에 연속성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남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실의 판단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되어지는 현상적 판단으로써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형제들의 믿음의 판단이 상식이라는 것에 그리고 상대적 윤리개념으로 판단되어져야 하는 것과 같이 말하고 그 주관적 동의를 할 수 있는 사람들 자신들의 모임 즉 ‘당을 만드는 자’(롬 2:8)가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임의적 당위성을 다른 사람들의 동의적인 차원에서 주관적으로 말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불특정 다수에 의한 자기 고집의 모습을 당연시하는 것으로써 주 앞에서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그러한 악한 인식과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과 같이 그러한 임의적 성경해석과 율법해석으로 성도들의 믿음의 행보를 판단하는 것을 옳다고 하는 모습들이 있게 되어지는 모습도 책망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9절에 나타나고 있는 악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나타나고 있는 자들은 그러한 것의 유혹을 참는 자들과 선을 행하는 자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율법을 먼저 받은 자들과 나중에 받게 되어진 자들 즉 유대인으로써 그리스도인과 헬라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을 말씀하심으로 전체적인 성도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본성도 하나님이 지으신 자들로써 그들의 중심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적인 영향력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율법의 영광을 나타내는 가운데 판단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주관적 임의적 판단 사실로 형제를 판단하는 세대를 주 예수의 날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오늘날 주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은 주관적인 형식으로써 객관적 모습의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믿음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에는 그 객관적인 사실성이 부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주의 교회의 권세 성도의 권세로써 이미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왕권의 재가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주관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임의적 주관을 임의적으로 믿음으로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말씀이신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시고 그 말씀하심 안에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질서를 따라서 객관적인 지도를 받게 하시는 가운데서 양심의 자유와 실제를 따라서 자라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임의적 상대적 개념에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는 가운데서 또는 동일한 상대적인 개념에서의 금기적인 판단중지라든지 이러한 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써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자리에서 나와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그리고 그 세워진 질서를 통한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양심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실제를 바르게 판단하는 가운데 주의 복음의 사실을 주의 오실 때까지 증거하시는 귀한 성도로서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월요일, 12월 13, 2004

가슴을 치는 사람들

2004년 12월 1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3:26-49
가슴을 치는 사람들

사람들이 가슴을 칠 때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슬픈 일을 당하였을 때에 자신의 무능함이라고 하는 것을 한탄하는 모습과 그러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당위성에서 가슴을 처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한다면, 대화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 답답함을 인해서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소위 이성주의자들은 대화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그러한 언급들과 그러한 것에서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라고 함, 즉 전달의 의미의 중요성은 말하면서도 그 전달의 내용적 진실성이라고 함은 잘 모른다는 측면에서 그 전달하는 것의 사실도 기만적일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서 또 한번 가슴을 칠 노릇이라고 하겠습니다.

슬플 때, 답답할 때, 각자의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난 가운데서도 가슴을 치는 여인들에게 분별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을 주목하면서 그 가슴을 친다는 것의 의미와 그 실제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9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44절에서 49절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레네 시몬과 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잠시 대신 지게 되어지는 가운데, 주님의 고난의 길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하여 끌려가시는 길에, 따라가는 자가 있었고 많은 여인들이 따라가는 가운데 가슴을 치며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여인들에게 주님을 연민하는 가운데서 슬퍼 울지 말고 그들 자신과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는 말씀을 하시며 비유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난의 말들과 희롱의 말들이 있는 가운데서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9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는 자들의 믿음의 인식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고 주님은 우편에 있는 자에게 낙원에 같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여 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44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 육시쯤 되어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예수님이 아버지 손에 영혼을 맡기심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심이 기록되어 있고 이를 구경하는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도 다 멀리서서 이 일을 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주의 운명하심이라는 것 자체에 큰 증거와 함께 간과하기 쉬운데, 가슴을 친다는 개념들이 그 인식의 차이에서 오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에 주님께서 그 믿음으로써의 인식의 분명한 구분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별되어지고 그 가운데서 구분되어진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나타나고 있는 여인들의 가슴을 치며 따라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슬퍼하는 연민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기 증거라고 함의 사실을 곡해(曲解)하는 것으로, 잘못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자기 계시의 주권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자기 정당함 속에서 이루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러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자신의 실패를 나타내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잘못이며 그들의 인식과 그 열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받으실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게 되어질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여인들의 먹이지 못한 젖과 수태하지 못한 배가 복이 있다고 하심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그들의 화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잘못된 교회의 가르침으로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며 그 기본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인위적으로 연민(憐憫)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받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사실의 실제를 알지 못하고 임의적 연민으로 일관함에 대한 책망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없음이라고 함이 열매가 맺혀야 할 나무 푸른 나무가 판단을 받는데 마른 나무는 더 책망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것의 아주 분명한 예로서 십자가에 달린 자들의 인식의 차이에서 주님의 행하심의 옳음을 말하는 자에게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기 정당함을 부여하여서 그 우편 강도의 복됨에 대한 사실과 증거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가라고 하는 특별재가와 또한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보는 자들이 주님의 증거와 그 죄인의 증거의 합당함을 일반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잘못됨을 놓고 가슴을 치는 자들이 있었는데 주의 제자들은 이를 보았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오는 여인들의 가슴을 침과 구경하러 모인 자들의 가슴을 침은 슬픔에 따른 연민이었던 것과 달리 다른 것을 나타난다는 것을 또한 제자들이 보았던 것입니다. 즉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던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마음에 두었던 자의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참으로 오늘날도 예수님에 죽으심에 대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고, 주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는 중심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임의적 개연적인 사실논쟁으로 많은 고통의 가시 속에서 복된 자리에 서지 못하였던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고 있지 그 전달되어지는 것의 내용적 사실성에 대하여서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사실 기만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답답하여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놓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인 진정한 사실인지를 분명하게 살펴야 할 것이며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럴듯한 말로 만든 개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신앙은 실제상황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어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전달과 새로움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지만 전달의 기교만 생각하고 있고 그것의 새로움만을 추구하고 있는 가운데서는 주의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놓고 고민하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복음이 진정한 사실임을 말할 수 있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서 은혜를 입는 은혜 위에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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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

2004년 12월 10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51:1-16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

일반적으로 음식을 만들 때에 음식재료들의 비율이라고 하는 것과 그 조화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튀김이나 붙임을 하기 위하여서 밀가루와 물을 적정량으로 섞이도록 잘 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위해 공기나 그 외 불순불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도 사람들의 오고가는 그 관계 속에서 그 역사의 휘몰아치고 때로는 도도히 흐름 속에서 이러한 감칠맛 나는 음식을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즉 ‘살맛나는 세상’에 대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참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 우리를 보내시며 이처럼 세상을 휘저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속에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향기로운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사야 50장 10,11절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 자들로써 슬픔에 눕게 될 것을 말씀하심을 이어서, 주께서 위로하시는 내용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상 아브라함의 혈혈단신 때에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심에 대한 것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로하심과 그 내용적인 것을 언급하시고 있습니다. 즉 광야로 에덴 같고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의 공의를 세우심과 섬들이 주의 팔을 의지할 것에 대한 것과 하나님 자신의 의가 폐하여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를 아는 자들로써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말며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와 같은 주의 말씀하심에 성도들의 화답으로써의 실제의 기도가 이사야의 언급으로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여호와의 팔이 깨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게 되어질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위로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반복하여 말씀하시면서 학대자의 분노의 실재를 부정하시고 있고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과 그 양식이 핍절되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말씀하시면서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이심을 말씀하고 시온에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실제적인 증거의 내용이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나타나게 되어지는데 하나님의 이름에 나타나는 신실하심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슬픔에 누이는 자들에게 위로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위로의 본문으로써 시작을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신약의 시작 즉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심에 대한 것에서 위로의 실제라고 함이 공식적으로 나타내신바가 될 것을 구약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러면서도 실제적으로 주의 말씀의 사실성을 믿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도 구약적인 시대적 한계가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한과 축복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3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광야로 에덴동산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그것은 광야교회의 모습이라고 함이 에덴동산과 같이 언급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온전성이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어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다스리시는 분으로부터의 그 정체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존재와 그 존재에게 주어지는 위로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하라고 4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의라고 함의 사실을 받는 자들 즉 의를 아는 자들이 사람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고 훼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그들의 비방과 훼방이라고 함의 실존이라고 함이 정당하지 못하며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으로 그것이 실제로 부정되었음을 받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성도들이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주 앞에 그 믿음의 소원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위로하는 자가 다름 아닌 자신이심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50장 10절과 11절의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는 가운데서 즉 그 이름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러한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는 것의 사실을 받을 수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주체로서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며 ‘라합을 저미시며 용을 찌르신 이’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면서 즉 바다를 휘저으시면서 그러한 불법의 존재를 부정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산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격동의 세월, 어떤 소설이나 그러한 것에서 나오는 말이 현실적인 수식으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그러한 세월을 살아가면서 참 고민도 많고 주의 말씀하심 보다도 현실이라고 함이 더 실제라고 하는 사실의 강요를 받는 삶 속에서 지쳐 슬픔의 잠을 잘 때가 있는 것이 현실의 인생의 모습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격동이라는 세월의 풍파와 세파는 바다를 저으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정당함에서 사실과 존재를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광야와 같은 세상길 걸을 때에도 능히 걸을 수 있게 하시고, 피곤하여 산을 넘는 발길을 기뻐보시는 주님을 의지하여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세상의 격동의 세월의 담을 넘으며, 슬픔과 탄식을 떠나, 주의 복음의 증거자들로서의 성도의 향기로운 산 제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또한 전혀 낯설지 않는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 뵙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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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2월 09, 2004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2004년 12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26-32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삶을 살아가다보면 어떤 일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즉 ‘왜 그럴까?’라는 반문을 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믿을만한 사람이 ‘본래 그렇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일의 진척을 위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기본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함을 말하는 본래적이라는 개념적 정의가 다시 해설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지혜를 말하는 선구적인 자들은 그 ‘본래적이다’라는 뜻을 잘 분별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은 ‘본래적으로 당연한 것이다’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본래적이다’라는 반론이 있게 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러한 후자의 의미는 실제적인 이유로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핑계마저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영원히 찬송 받으실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가운데,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둠에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 남자들도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는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합당치 못한 일을 함에 대한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 가지 나열되어진 구체적인 언급들과 함께 그 같은 일들을 행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되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함과 같은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함에 대한 것을 또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본래적인 사실로써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어짐에 대한 것과 그것을 소위 비 본래적인 것이라고 납득의 당위성이 없다고 거짓되게 말하는 합당하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서 그 본래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말하는 이유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마음에 둠이 본래적이냐 아니냐는 것은 이미 본래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영원이라고 함은 구약언어로써 ‘올람’이라는 뜻으로써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의 사실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언약하심 안에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씀하시기 위한 지음을 받은 존재가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언급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시비(是非)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를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고 오히려 상대적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시비를 말할 수 있다고 하나 시비(是非)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성에 대하여서 납득의 당위성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되어야 할 때에 그것을 깨닫지 않는 자는 짐승과 같다는 말씀하심이 이루어져서 분별력과 지혜의 실존과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동물들의 본능적인 성적인 모습에 머물며 그 말씀하신바 짐승의 모습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진 모습과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자들의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지혜라는 것이 합당함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지혜의 실존과 사실의 근본이 되어지는 여호와를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도 옳지 못한 그러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하는 가운데서 불특정 다수의 지지적인 정당함 상대적 정당함으로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로써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셨고 여호와께서 새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심의 자기의 신실하심을 따라 새 언약을 세우셨으니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 그 이름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대적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는 방법론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절대의 보편적인 말씀하심으로써, 상대적이면서도 본래적인 절대의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간접적인 가운데서도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일방성과 그 자체적 절대 정당하심을 증거하면 사람들은 일방적이라는 형식적인 측면만 생각하기를 원하고 대화의 원점이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와 그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서 다수의 편견이라고 함이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우상으로 그 그늘에 있는 종사하는 그러한 종노릇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게 되어지는 것은 죽는 것에 즉 상대적인 존재부정이라고 함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그 뜻하심을 바라볼 때에 종들을 보내시는 그 뜻하심의 정당함에서 주의 복음을 전함의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오심을 놓고 영접기도하면 주께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며 우리에게 주신 믿음대로 우리의 마음과 실재에 실제적으로 좌정하시며 다스리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주님을 마음에 영접한 자들로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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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12월 06, 2004

만나와 신발

2004년 12월 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5:10-15
만나와 신발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들로서, 먹고 마시는 것과 행하는 모습들 그러한 것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변화라고 함을 말하는 것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먹고 마시던 것들의 종류와 성격의 차이는 신분에 따른 음식문화의 차이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일을 하였는가 하는 것과 지금의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서도 그 변하는 것의 신분적 차이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음식의 귀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업의 귀천이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느껴지는 변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동의적인 차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회에서의 그러한 구분적인 개념의 단순한 단정적 입장을 취할 수 없지만 상대적이면서도 구분적 구별적인 차원의 그러한 사람들의 변화를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그 뜻하심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또한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서 진(陣)쳤고 유월절을 지낸 것과 유월절 이튿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으며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에 칼을 빼든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난 그곳이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고 하심에 여호수아가 순종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만나가 그쳤음에 대한 것과 여호수아의 신발을 벗음에 대한 것을 주목하며 그것이 무엇을 실제적으로 말씀하시는 예표적 실제 사건적 증거인가 하는 것입니다.

음식으로써 만나와 그의 행보의 상징적 신발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삶의 변화를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인 하나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의 변화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써 출애굽 하여서 광야 40년을 지나올 때에 주의 백성을 먹이시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옴에 있어서 그것의 완성적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씀의 땅에서 이제는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심의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는다는 것은 구별되어진 것으로 일반적인 이방인들의 먹고 마시는 것과 동일하면서도 구별되어진 새로운 것으로써 언약의 것으로써 그 음식의 거룩함을 말하며 그것을 접하는 자들의 거룩함을 또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발을 벗으라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남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자기표현과 자기 계시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것은 앞서 모세와 함께하는 것과 같이 여호수아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셨던 그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과 같이 여호수아에게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떨기나무 아래 불 가운데서 모세를 만나시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위엄아래서 순종함으로 신을 벗음으로 인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복음의 신을 신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엡 6:15, 빌 1:27)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만나에서 무교병과 볶은 곡식으로 바뀌었던 것과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신을 벗어버린 것과 같은 그러한 것에서 예표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아주 조촐한 일상적인 음식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상황적인 차원의 어쩔 수 없는 인위적으로 준비되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윗이 노래하며 증거한 것과 같이(시 23:5) 하나님의 재가에 따른 거룩함이라고 함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써 원수 앞에서 베푸시는 상이 되어지며 그것은 그 상을 받은 자의 거룩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먹이심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측면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누리며 먹고 마시는 자들로서의 오늘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모습의 실제적인 예표적 증거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벗으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도록 하신 주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따라서 예전에 믿어 구원받기 전의 삶의 행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주의 성도되어진 자들로서의 복음의 신을 신게 되어질 것을 예표적으로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처럼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주의 뜻하심을 날마다 이루어가는 자들로써 진정 순수한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며 먹고 마시는 가운데 주의 영광의 나라를 잘 예비하며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항상 함께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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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빌라도의 간교함을 넘어

2004년 12월 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3:1-25
빌라도의 간교함을 넘어

상대적인 역사와 사회에서 한 인물의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억되어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억되어지기도 하고 또한 오래 사람들의 인식에 남겨지기도 하고 그렇지도 못한 것이 전반적인 가운데서 그러한 인물평가가 있을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지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에 대한 연민이라든지 또는 여러 가지 긍정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과 같이 논란이 되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빌라도’였습니다.

그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부인하고 죽이도록 한 자들의 실제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한 증인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3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리들이 잡아서 끌어옴에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무리들이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소내용은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함의 내용이었고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자칭 왕 그리스도임이 옳다고 말씀하심과 빌라도가 주님께 죄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무리들이 계속하여서 백성을 소동시키는 정치범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빌라도는 그 무리들의 말 중에 자신의 소속적인 권한 밖이라는 개념에서 헤롯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헤롯에게 예수님이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보내지게 되고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적이라도 볼까하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여러 무리들이 고소함에 있어서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힌 가운데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고 끌고 왔지만 그에게서 죽일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때려 놓겠다는 제안을 세 번 하게 되었고 그 백성들이 큰소리로 재촉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 이긴 가운데 예수를 넘겨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자들의 주관자로서 빌라도의 모습을 읽도록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선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슬픔의 상대적 원인이 되어지는 세상의 모습과 세상의 주관자들의 실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실상은 헛된 실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서점이나 일반 시중에서 일반적인 작은 판플렛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의 제목은 ‘빌라도의 고백’이라는 작은 프로필에 가까운 것인데.. 그 내용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으며 또한 어쩔 수 없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그러한 것이었고 또한 그의 번민에 대한 것을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 내용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합리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성을 성경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해석의 실제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의 재가라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실존적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이 있다는 개념이 항상 사실일 수 있느냐는 것과 합리성과 사실이라는 개념이 오도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즉 속이려고 하는 자들의 입장은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서 합리성 자체만 생각하고 있지 납득의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당위성을 조작하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주님을 사실상 죽인 자의 모습이라고 함에 있어서 정적으로 그를 지목하고 저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언급하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정적인 의미에서 호소력이 있는 것이며 또한 사실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감정적인 것일 뿐이라는 합리적인 측면에서 앞서 말한 빌라도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함이 마치 건전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이 가능한 것은 빌라도의 간교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간교함이라고 함이 정치적 개념의 야누스적인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의 기본적인 의도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러한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수밖에 없는 자라고 함을 기억하게 되며 또한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이름인 빌라도의 모습은 불법의 사람임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의 이름 ‘빌라도’라는 말은 라틴어로 ‘확고히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헬라적인 뜻은 ‘찌르는 창으로 무장된’"armed with a spear"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5절에서는 베드로와 누가는 다윗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바로 빌라도의 모습이 불법의 사람 사울과 관련되어 읽게 되어지는 것을 증거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사울이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고 한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이며 다윗을 죽이려고 한 사울의 인식은 이미 악한 신으로 불리는 마귀의 행함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지 못한 실제로서의 이스라엘 나라의 상속권을 주장하려고 하는 자의 불법의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 말씀이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의 계시를 이루심에 대한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삼상 19:9~10)

특히 간교함을 말한 것은 그의 예수님을 죽일 일이 없음에 대한 것을 위한 당위성을 놓기 위하여서 그 다른 곳에 보냄에 대한 자신의 성실함과 또한 다른 곳에서도 희롱을 받음에 대한 것과 그에 따른 백성들의 집요한 요구라고 하는 것이 자신이 내릴 사형언도라는 개념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확고히 하는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절정의 자기표현은 자신의 죄는 없다는 자신의 손을 물에 씻으며 그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댓가는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확고히 하고 싶었고 그러한 언급을 했던 것입니다.(마 27:24)

즉 무리의 대중적 편견의 정당함을 따라서 자신의 정당하지 못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의 심의를 했으며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하는 절대의 자존적 신실하을 판단하는 그 간교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적인 여지를 말할 수 있으면서도 절대의 신실함에서는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비난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상대적인 확실성이라고 함에서 주의 구원의 사실을 부인하고 주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사실 심의는 이미 기각되어진 실제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보는 가운데서 주의 성도들은 그러한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담대할 수 있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을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더욱 그 현실적인 실제에 사실을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로께서 함께하심에 있어서 더욱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은 절대의 재가를 받는 것에서 진징한 사실로써 증거되어야 함과 또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빌라도가 진정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실심의 결과 죽일 죄가 없다는 것과 그를 놓아주려고 했다고 하면 대중에 납득되어질 수 있는 사실 심의 결과를 말하며 납득의 노력을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납득되어질 수 있는 사실심의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죄가 없다는 단정적인 언급은 이미 납득하려고 하는 노력적인 중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대중의 편견의 확고한 의지적 표현을 통한 자기의 정죄하려는 의사의 정당함과 타당성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절대의 판단이 아닌 절대와 상관이 없는 가운데서의 상대적인 판단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상대적인 군중의 판단은 편견의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이 현실이라는 임의적인 사실 가운데서 실제인 것처럼 자신들을 기만시킨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기만적 죄라고 하는 사실과 정당성 시비를 피하고 싶어 하는 정치적 간교함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되어지는 세력들이라고 함과 그것의 타당성은 자존의 절대자를 임의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기만적 현실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우리 주의 성도들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현실이라는 것에서의 실제의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실재와 실제 의식적인 판단의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생각하면서 세상의 부정된 사실들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의식을 가지고 그 정당함을 의지하여서 주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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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2월 02, 2004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2004년 12월 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18-25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젊은이들이 자신의 창작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것들도 준비하는 곳이 고등교육의 중심적인 지도방침 그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는 대학교육이 그러한 것을 말한다고도 하겠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을 배우고 그러한 가운데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적응이라는 개념 즉 보다 한정되어진 가운데서의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비단 고등교육기관에 국한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사회에 바로 진출하게 되어지는 젊은이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한정되어지는 사회에 적응하여 나가는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위한 스스로의 삶을 경영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행한다는 그러한 개념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며 또한 마땅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적 증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을 위한 말씀으로써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이유로써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과 저희에게 보이셨음을 인하여서 핑계치 못할 것인데 미련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었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25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우준함에 따른 진노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에 따라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셔서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조물주보다 더 피조물을 경배하는 것을 인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며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심이 진실로 그렇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함에 대한 성격과 그것에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실제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는 이사야의 말씀, 그중에서도 이사야 48장과 그리고 요한복음의 서론이라고 일명 불리고 있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그것을 이해한 사도 바울의 오늘 본문은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죄라고 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 그것과 상관없이 나타나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마땅히 취할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28절에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기 때문에 핑계치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29절에서는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 핑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범죄한 아담의 인식이라고 함의 연속성에 있는 모습입니다. 즉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그러한 불순종의 죄를 짓고 주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은 변명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에 하와는 뱀 때문에 라는 개념과 그를 지은 하나님께 대한 합리적 변명의 여지를 두려고 하는 그러한 합리적 변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성에서 자신의 불순종이라는 죄악 가운데서 합리적 정당함이라는 상대적 정당함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의 실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뱀이 또한 범죄한 하와가 아무리 아담 자신을 합리성에 따른 이유와 정당함을 말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의 이유라고 하는 합리적 진술과 명령은 절대의 상대적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절대의 정당함이 있는 것의 실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존의 절대자로서 인정하지 않았기에 상대적 합리성의 정당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언급을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에서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함을 인하여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음에 대한 지적도 이와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마음을 마음에 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나타나고 있는 ‘스스로 지혜 있다’는 자의적 임의적 모습을 취하지만 본문에서는 그것의 정당함이 없음과 그것으로 인한 실존적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부인되어지는 기각되어지는 존재와 합리성이 되어지는 모습의 연속성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한다는 것의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부여하면서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도 히스기야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그러한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이라고 함을 증거하는 자의 모습이 온전히 나타나지 못하였을 때에 그러한 자들의 모습의 예표적 실제의 동일한 후손들로써 그들 이스라엘이 혼돈의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사 48:1)

요한복음 1장을 언급함에 있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심에 있어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나 영접하지 않음이라고 함이 그것이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받기 싫어하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상대적으로 죽음 이편에 존재의 부정이라고 하는 가운데 묶여있게 되어지는 사망이라고 함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라고 하심의 증거가 바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 즉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받기 싫어했음에 대한 것이 요한복음 서론으로써의 1장의 내용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스스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의 증거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스스로 행한다는 개념을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과 그것에서 파생되어지는 일반적인 정당함 안에서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말하나 그 지혜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미련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미련함의 실제는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절대 신실함을 상대적으로 판단하며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현상적 실제에 진정한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기만함이 그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과 그 타당성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실존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한 시각의 고정을 말하는 것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재가는 그러한 상대적 편협의 판단의 실존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절대의 도장이 상대적인 도장이라고 함의 판단에 따른 권위와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도장이라고 함은 성령의 재가와 인간의 임의적 재가가 동일하게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성도의 기본이 되어지는데, 이는 주의 가르친 기도(마 6:9)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성도의 중심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함과 그것의 신실하심은 절대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신실하심에 있음을 삶의 기본과 양식에서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따른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자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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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11월 29, 2004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

2004년 11월 2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2:54-71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

사람들은 누구나가 모두 행복을 추구하고 있고 그것의 한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인생에 있어서 그러한 것만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한다면 아직 인생에 대한 숙고적인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人生)에 있어서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는 것입니다. 슬픔을 향한 기쁨이 있는가 하면 기쁨을 위한 슬픔이라는 것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성에 대하여서는 그 행복에 대한 실제적인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설정하면서도 그것이 진정한 사실로 납득되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기쁨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것이 종국에 가서는 슬픔으로 귀착되어지는가 하면, 고통과 고민으로 기쁨의 실제를 부여할 수 없는 슬픔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심리적으로 새디즘 즉 사디즘(sadism)이나 매저키즘, 즉 마조히즘(masochism)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어지고 해석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기쁨과 슬픔이라고 하는 것의 방향성을 생각하게 하고 그 전환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4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3절에서 7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4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그곳에서 포도주 떡으로 언약을 세우신 후에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는데 그곳에서 가룟유다의 주님을 파는 것에 이어서,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감에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감과 그곳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어지는 것을 아주 현장감이 있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베드로를 돌아보심에 베드로의 심히 통곡함에 대한 기록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3절에서 7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밖에서 지키던 자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고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친 사람이 누구냐는 식으로 대하고 있음과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서 예수님을 공의회에 넘겨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고 그들이 그 말씀을 받지 못하고 자신들이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베드로의 통곡하게 되어짐과 그에 앞선 슬픔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문맥상으로 살펴보며 그 전환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현장감 있게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베드로의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수치를 당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께서 돌아보심에 있어서 베드로의 인식의 전환과 기쁨을 위한 기쁨의 실제를 향한 고통과 슬픔의 전환으로써의 통곡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실 때에 주님의 뜻하심을 제자들이 세상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은 예수님의 잡히실 것에 대한 것과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한 언급하심에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던 것입니다. 더욱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잡혀가심이 눈앞에서 전개되어지고 있는 가운데서는 진정한 자신들의 존재의 부정이라는 사실의 실제를 강요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더 잘 살피고자 하는 베드로의 충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구별되어졌고 잡혀가시는 주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외적으로 자신의 존재라고 함을 자의적으로 변명해야하는 자리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될 때에 주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심은 그냥 힐문하시는, 연민하시는 또는 환멸감에서의 배척하심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기억 속에 실제의 판단의 전환을 위한 기억나게 하심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은 이미 예수님이 성만찬 석상에서 이미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되었다고 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현실적 실제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주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은 베드로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 자신들의 존재 부정에 따른 슬픔의 생각과 달리 주 안에서 여전히 존재의 정당함과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주님이 잡히실 때에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신 사실도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성전에 있을 때에 잡지도 못하던 자들이 지금 주님을 잡으러 나온 것은 주님 자신이 허락하신 그 때라고 함과 그 때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규정하고 주장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심도 기억함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눅 22:53)

그처럼 그러한 자신에 대한 예언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을 때에 주께서 하신 말씀에서 또한 그러한 인식의 전환이 합당하다는 것을 느끼며 인식의 전환으로써의 통곡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을 위한 그것을 향한 인내의 자리에 서기 위한 인격적인 전환으로써 회개로써 그 통곡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인식이 있으면서도 그들의 연약함은 상대적으로 완성되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의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상황은 그리 쉽게 인정하는 사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주님의 수욕과 수치라고 함이 계속되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이라고 함은 그들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지지되어질 수 있는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로서의 정당함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진정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주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자신의 기뻐하는 뜻으로 자신을 상대적으로 나타내시지 상대적인 것의 요구와 범주에 한정되어진 가운데서 증거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보이셨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으며 믿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도 상대적인 것에서 확실한 여지라고 함이 없다는 것과 다만 동의적인 차원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은 이미 그 여지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기쁨도 있지만 슬픔이라고 함도 고난이라고 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모든 인생이 죽음이라고 함에 있어서 죽음의 슬픔이라고 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종된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그로인한 슬픔이 항상 인생의 기로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시는 분복으로 사람들이 삶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그것의 시름을 잠시 실제적으로 잊게 하시는 은혜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구원하시려고 구별하시는 자로 그리스도로 구원자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인해서 그러한 정교한 메시아 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냐는 것과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독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말은 설득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의 존재를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을 인하여서 그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의 우편에서 나타내실 때에 그 자존의 절대 정당함은 상대적인 납득 이유로 주님을 배척하는 자리에 서는 자들의 기쁨은 결국 슬픔으로 종결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의 사실을 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따른 것으로써 신실함을 믿을 때에 그 사실은 현실적 강요로 슬픔이라고 함이 기숙되어진다고 하여도 구원의 기쁨의 실제로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이심의 증거와 그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 자녀로 삼으심에 있어서 그 절대 신실하심을 의지하여서 존재 부정을 하는 헛된 현실적 실제의 강요의식을 벗어나서 주의 구원하심의 기쁨과 사실로 띠를 띠우시는 또한 그것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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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1월 25, 2004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義)

2004년 11월 2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8-17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義)

시기적으로 지금은 초(初)겨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움출이기 쉬운데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고 넘어짐이나 여러 가지 부딪히는 그러한 일은 건강을 위해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충격에도 뼈가 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쟁이가 아니라고 하여도 넘어서져서 뼈를 다칠 수도 있는데 그 뼈가 부러졌다가 이어지면 그 부분은 오히려 단단하다고 합니다. 다만 뼈가 붙은 바로 옆 부분에서는 자체적인 역학적인 불균형으로 또는 상대적인 약함으로 오히려 전체적으로 다친 부분이 오히려 다칠 수 있는 경우의 위험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이 신구약 성경의 합리적 불연속성에 대하여서 상당히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비판 가능하다고 그것이 또한 정당하다는 개념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은 또한 아님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임의적 사실에 실제적 사실처럼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신구약 성경에 대하여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그러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복음의 내용과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한 후에 축복함에 이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짐에 대한 것과 그들을 위한 자신의 기도를 말하며 심히 만나기 원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교제라고 함에서 피차 안위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형제들에게 가고자하는 노력이 있음에 대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그러한 가운데서 길이 막혔음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열정은 자신이 빚진 자임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고,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언급을 하고 있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심을 언급하고 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살 것에 대한 언급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은 성도의 교제라고 함 안에서 문안하고 있음과 그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자신의 실존적 증거와 함께 그 내용으로써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음에 따라 믿음으로 의인이 살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성도의 교제 안의 정체성으로 로마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함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말하기를 ‘기존의 교회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교회에 복음을 사도 바울이 전함에 대한 것을 기존교회의 부정의 당위성이 성립되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주장하는 경우를 접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되며 잘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의 모임으로써 교회를 부정하고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즉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전도함에 있어서 같이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것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설교와 같은 서신을 통한 교육과 교제라고 함에서 자신도 그들의 섬김 속에서 안위를 받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미 그들의 성도됨을 부정하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며 바울이 피차 안위를 받고자 함에 의미는 자기모순이라는 개념을 내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과 전도하여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교제를 나누게 되어질 자들이 있음과 그들과의 안위를 나눔을 위한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미 이 수신자들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들을 축복하며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섬김과 성도의 교제 즉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더 풍성한 성도의 교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자신들의 행함의 특이한 정체성을 위하여 기존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의 모임으로써의 교회를 부정하는 모습은 성경해석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실재와 사실에 대한 분별의 기준도 없다고 함을 말해두겠습니다.

다음으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 입장에서도 본다면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부끄러워한다면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어떤 인위적 사실로써의 복음을 애써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합목적적인 개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보여질 수 있다는 개념과 사실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그 본문의 구문만 주목할 때에는 그러한 일상적인 인식이라고 함의 이입하여서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그 성경의 문맥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미 1절에서 7절에 나타나고 있는 복음이라고 함이 그 아들에 관한 것으로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인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에 대한 사실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주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생명의 주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외에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외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없고 어느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내심에, 그러한 자기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비판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가 육신적 개보로써의 언약이 있게 하였던 할례라는 개념에 주의 언약하심이 매여 있어 정죄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주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사역가운데서 실제적으로 깨닫게 하심에 대한 증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자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은 그의 신앙의 윤리적 동기부여의 힘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마지막으로 주목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음에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창 15:6) 그런데 복음이 그 아들에 대하여서 언급한 것인데 그 아들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의 실제는 바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그에 따른 의로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서 죽음이라는 상대적 부정이라는 개념의 실제적 판단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심의 의미를 함축하여 증거함에 대한 합당한 증거자로 서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있어서 그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것의 동일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의 내용적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 증거를 마음에 두지 못한 가운데서 루터의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상대적 개연성에 따른 불 분명성에 대하여서 비판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에 대하여서 분별이 없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나락에서의 탄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구약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1장 1절에 나타나고 있는 증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 그 실재적인 증거가 되었음에 대한 것을 분별하는 것에서 답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는 합리성의 완전성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의 판단으로 부끄러움에 이르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떤 목적을 위한 의지적 개념에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에 한계가 있고 그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하신 하나님에 증거로써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그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의 그 증거의 사실은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할 때에는 결코 너무나도 합당한 실제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의 의롭다 하심의 칭함을 받은 자들로서 이 의로운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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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22, 2004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2004년 11월 21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4:1-24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의 책들은 많이 나오고 있고 역사와 해석에 대한 문제도 상당히 거론되어지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와 삶과 정체성과 관련되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역사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여러 영역의 인식보다도 중요한 전체 정체성에 관한 당위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모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시키고자 눈에 보이는 서툰 행위까지도 일삼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 왜곡에 있어서 독립 운동가들의 행적을 알리는 ‘선구자’라는 노랫말을 기록한 돌의 표면을 깎아내고 쓸 것이 없어 용(龍)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있는 것을 모 방송국의 보도로 알게 된 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역사적인 증거로써의 이스라엘이 요단의 돌들을 자신들의 유숙하게 되는 곳에 남겨두고 증거를 삼았음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0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가 인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를 정탐한 후에 이제 요단강을 건너게 되며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 언약궤를 매고 간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서 물이 멈추게 된 때에 그곳에서 돌 열둘을 그 지파마다 취하여서 그들의 유숙할 곳에 두게 하시고 그것들이 후일에 표징이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한 바 있는 르우벤과 갓자손과 므낫세 반지파들이 먼저 건넴과 그날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두려워하게 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게 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심에 있어서 요단에서 여리고쪽으로 그 제사장들이 올라오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순종한 것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올라오니 그 요단강이 다시 합쳐서 예전처럼 언덕에 넘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사적인 시간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이 유숙하게 되어지는 ‘길갈’이라는 곳에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그곳에 세움에 대한 것과 그것이 후일 후손들이 물을 때에 요단을 건넌 증표임을 말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열두 돌을 취하도록 하심과 그 돌들의 증거라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돌들의 증거는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권위적 정당함과 그 시간 그 섭리의 시대를 분별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섭리로써 그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열두 돌을 세운 길갈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교회의 기본적인 고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르침과 회개와 성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앞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이 길갈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역사들 그곳에서 정당함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모습들의 신실성의 시비라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는 증표를 준비하였던 것과 같이 주의 예식과 함께 주의 섭리에 대한 기술(記述)로써 믿음의 후손들을 가르칠 수 있기도 하고 오용하는 악한 자들의 모습도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전반적인 역사의 그러한 예를 모두 기술하고자 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유숙하게 하시는 그곳에서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서 산돌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것들이 바로 오늘날 요단강을 건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약속의 땅을 취할 수 있게 되어지는 증표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며 나타냄이 옳은 것입니다.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산돌이신 주님에 대한 증거들과 그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을 오실 때가지 우리 믿음의 후손들에게 증거함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단강이 흐름은 자연의 이치로써 하나님의 정하신 일반적인 당위성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뜻하심 주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주의 계시적인 정당함은 그러한 것을 오히려 주장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주의 구원하심의 증거를 실제적으로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는 12개의 돌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이집트에서 피라밋 공사에 동원되어진 그 돌들에 대한 이해되어지지 않음이 더 화려하게 세상 속에서 알려지고 있는 것이며 그 맹목적 신비에 무엇인가 실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길갈에서 세워진 12개의 돌은 그 정체성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적인 정당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실제적으로 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 성례전적인 실제적 증거가 메시아 예수님이 오심에 있어서 완성되었고 이제 더 이상 실제적인 증거로써의 그것은 아닌 평범한 것이지만 우리가 그 증거하고자 한 그 증거의 실제는 주 안에서 이제 우리가 믿게 되어진 주의 가르침의 사실들로써 준비하며 우리 인생의 유숙하는 지금에 준비하며 주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로 주의 몸된 교회를 온전케 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힘써 나르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해석이 상대적이면서도 주의 절대의 신실하심 안에서 정당한 주의 가르침의 실제로 받으며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증거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를 교회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주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증거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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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

2004년 11월 21일 소망교회 추수감사주일예배설교
시50:22-23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

오늘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추수감사주일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일반적으로 이 절기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오게 되어진 청교도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한 해의 지은 결실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되어진 것에서 연유한 절기입니다. 물론 이 절기(thanksgiving day)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써 그것은 감사함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앙의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해서 그 여러 어려움들에서 결실을 얻게 하심에 대한 구원을 기뻐하는 가운데서 지키게 되어지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의 절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전통이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동일한 표현과 증거를 할 수 있음에 있어서 신앙의 전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모범적인 행위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감사로 인한 구원이라고 함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에게 생각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찢으실 것으로 건질 자가 없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억할 것으로써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행위를 옳게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행위를 옳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맙다는 표현이나 자신의 감사함을 표현할 때에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내놓고 고마움에 대하여서 표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너무 정형화 되어지는 가운데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고마움에 대한 표현까지도 어렵게 하며 부끄럽게 하는 그러한 강요된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비방하는 사람들은 역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에 상당한 불만적인 것과 또한 돈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실제적인 것으로 느껴서 교회에 대하여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기본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감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할 때에는 감사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부담되어지게 되는 것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으로 예물의 강요적 개념으로 형제를 공박하며 그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20절) 그러한 자리에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모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4절, 5절)

이러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없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대한 주의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과 같이 착복하는 자로 생각하는 자들의 악한 인식과 그러한 감사라는 명목으로 도적질하며 착복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잊어버림의 것으로써의 그 행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얼마만큼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하는 만큼이라는 개념에서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그 기준을 삼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잊은 자들로서의 착복의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실제를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며 상대적인 기준 즉 착복하는 자들의 기준을 포장한 것으로써 행하여도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도적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것의 논란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같은 관련된 혈연적 개념에서도 그 도적함을 위하여서 그 악함의 변론으로 형제들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착복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서 울며 겨자 먹는다는 식의 감사를 드리는 자들의 모습까지도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잊은 까닭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써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삼음에 있어서는 그 상대적인 것의 감사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옳은 것입니다.

그 구별이라고 함은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즉 언약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라는 중심으로 돌을 세우고 그곳에서 기름을 부어 성별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이 만나주심 안에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에 대한 것을 약속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 28장 참고)

우리 성도들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라는 그 중심으로 한 예배처소를 준비하고 그곳에 출석하며 주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중심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로써 드리는 것으로써 상대적으로 많고 적음에 상대적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물질을 하나님이 받으셔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로서 하나님이 상대적인 것에서 어떤 도움이나 조력을 필요로 한다는 식으로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어지는 것은 또한 옳지 않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소위 사람들이 인식하는 상대적인 절대 빈곤이라고 함에 있어서 감사의 빈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을 강요하는 현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은 그러한 것에서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작은 모습들 속에서도 감사의 실재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증거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잊은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에서 실제적인 감사의 자리에 서지 못하며 그 표현에만 급급한 가운데, 잘못된 기복적 신앙으로 비록 그 표현의 많고 적음에 따른 당위성을 갖춘다고 하여도 주의 판단을 받게 되며 주의 구원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에서 그 행위를 옳게 하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비롯하여 모든 예물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에 대한 증거로써 드려짐이 옳은 것이며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를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많고 적음이라는 개념에서 형제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우리의 존재의 작은 것으로써의 판단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여도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기억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도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와 자존의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인하여 상대적으로도 절대 신실하시게 말씀하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초라함이라고 함에서 감사의 빈곤을 말하지 않으며 감사의 진정한 실재와 증거를 찾아내는 자로서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그 행위를 옳게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는 종들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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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1월 18, 2004

복음을 위하여

2004년 11월 17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1-7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위한다’는 것은 그 뜻에 ‘보호한다 또는 변호한다’는 것과 더 나아가서 그것의 정체성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뜻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마치 주의 복음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우리 증거자들에게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라고 함을 우리가 변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주의 복음에 대한 어떤 사실들을 기술하고 방어하는 것에 몹시 불편한 입장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의 비판적 목소리가 있음을 의식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비판이 있다는 것과 그 비판이 성립되어진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던 사실에 근거한 불편한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주의 복음을 위한다는 사도 바울의 증거에서는 전혀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며 주의 복음의 능력이라고 함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음과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서 그의 출생하심과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과 곧 그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그로 인하여 은혜와 직분과 그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하심에 대한 증거를 하며 이 글을 받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며 인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의 내용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에 대한 증거의 말씀과 그로 인하여서 주시는 주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뜻하심을 받게 되는 은혜를 증거함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미리 예언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함을 말할 때에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였을 뿐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하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함을 말씀하심은 역시적 시간 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때도 있었다는 것과 자신이 메시아로서 자기 도취했다는 그러한 합리적 가정에서 그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함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다른 사람들도 핑계할 수 없는(롬 1:20; 2:1)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인정과 찬양’이 있게 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서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하심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인 존재와 상대적인 비존재라는 개념의 판단이라고 하는 자리에 서는 존재가 아니라 자존하는 자로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바로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정당함 속에서 인간적인 모습과 계보적 모습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즉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표현적 상대성인 아들로서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며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자기가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의 자격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사심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서 우리 성도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하여 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로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의롭다 칭하심으로 진정한 실재와 실제를 말씀하시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세상에 속하였으면서도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실재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주님의 의롭다하심에 상대적인 판단의 정죄를 받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윤리의식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은혜의 동기를 따라서 나타나며 그것은 빗진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빚진자임을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14절)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주님은, 시간이라는 역사라는 개념의 판단에서 자기도취적 개념에서 사람들의 등 떠밀리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어진 것이 아니라, 진정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을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나타내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가운데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핑계치 못할 복음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심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 핑계할 수 없는 주의 복음 그 아들에 관한 것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는, 주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주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하는 그 중심에서 윤리적 동기로 나타나며 그러한 가운데서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보내심을 받았을 때에 진정 주의 복음을 위하여 힘써 행하고자 하는 중심을 주께서 우리 성도들 중심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의 삶이 주의 복음을 위해 정진하는 삶이 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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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1월 11, 2004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2004년 11월 1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8:16-31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우리나라의 특유의 입시제도와 그 열기를 반영하는 것은 정황적 이해가 될 수 있으면서도 그러한 가운데서 그 열기라는 측면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가운데서 마치 독려(督勵)하는 듯한 책들이 서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기(傲氣)’라는 것으로 소기의 학업성적을 내었다는 표현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열심이라고 함이 자신들의 앞길에 제제가 없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오기(傲氣)’라는 뜻은 ‘능력은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상당한 에너지를 통한 집념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도 신앙을 말함에 있어서는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존하심에 대하여서 그 자존적 정당하심에서 그 나타내시는 구원과 섭리에 대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마치 없다고 함이 납득당위성이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허사를 경영하는데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올무가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자유케하심 안에서 주시는 그 담대함으로 주의 뜻하심을 증거하심의 증거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증거되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0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의 일행이 로마에 들어감에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게 함에 따라 사흘 후에 바울이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서 로마로 호송되어짐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상대적 현실적인 진실이라고 함을 말함과 그 자기 민족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대인들이 일자(日字)를 정하고 사도 바울의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함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옳음에 대한 것을 증거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0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에서 만난 유대인들의 입장표명과 그들의 행함에서 읽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것과 연속성에서 읽게 되어지는 바울의 증거와 자유함의 실제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중에 높은 사람들을 사도 바울이 초대하여서 바울이 오게 된 경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화답하는 그 내용 중에서, 21절 이하에서 읽는 것과 같이, 유대에서 사도 바울을 폄하하고 고소하는 내용형식의 편지가 없었음과 또한 로마에까지 와서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 한 사람이 없음에 대한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들의 헛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이 결실로 로마에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읽도록 하심의 언급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들의 헛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폐하는 자들의 중심과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도 다메섹이라는 외국성까지 마다않고 가는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인들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려진 현실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오기(傲氣)’라는 말이 어울리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즉 ‘능력은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 ‘이미 자신들의 존재적 정당함을 그들의 죄악에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가운데서 가지는 허상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더욱 주님께서는 이러한 책망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사도 바울이 로마로 오는 그 항해 여정에서 2주간에 폭풍우에 밀리게 되어지는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이 탑승한 실제적인 아드라뭇데노(죽음의 공회)의 배에서 구원받아 멜리디라는 섬에 있게 되어지고 성도의 교제로 이곳 로마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셨던 곳에 왔음을 기억할 때에

로마에서도 사도 바울을 훼방하는 자들의 경건으로써의 열심이라고 하는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인데 본문에서는 전혀 없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진 것으로도 추정되어지는 가운데서 전설에 의한다고 할 때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바리새인들의 무리가 뒤따를 것을 예상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은 일반 교회의 성도들의 증거로 이어지게 되지만 계시로써 성경은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계시적 실존이라는 정당함에서 실제를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복음의 자유함과 진정한 경건에 따른 열심은 상대적인 우겨쌈의 형식이라는 것에서도 존재와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록 셋집에 유하는 바울이지만 그에게 오는 자들을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께 관한 것 즉 복음을 전함에 대하여서 금하는 사람이 없었음을 사실로써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가운데서 이사야의 말씀을 의지하게 된 것을 언급함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 43:8절에서 43장28절까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본문의 문맥을 보면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자존의 하나님께서 구속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임의적 변론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이 옳음을 말하게 하라고 하심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을 하시면서 모세의 기적과 같이 바다를 건너게 하심에 대한 것과 중요한 것은 22절 이하에서는 이스라엘이 괴로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맥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영접하지 않음이라고 함과 같은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대적 확실성의 당위성을 입는 해석을 합목적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 자기 정당함으로 오셨으나 임의적으로 그 백성들이 받지 않음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요한복음 서론에 해석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여서 교회에서는 기독론에 대한 허락되어지지 않은 상대적 합리성을 의지하다가 많은 고통을 자초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을 상대적 당위성으로 생각하는 경건이 판단받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읽고 그 말씀이 이제는 주의 선택하심이 육체적 계보라는 것에 그 당위성을 두지 않고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 열린 것이라고 함을 증거하도록 하심을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 표현하셨다면 상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순이라는 개념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체적 정당함이 절대의 재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상대적인 사람의 모습으로도 절대의 자기를 절대적으로 표현하실 수 있고 계시하실 수 있음의 정당함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의 절대 속성이 그 절대 신실하심이 찬양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큰 회당이 아닌 알려지지 않는 작은 셋집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주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것은 오늘날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초석으로 쓰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남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롭다 하심의 정당함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적으로나 앞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작은 현실들이라고 하는 개념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가운데 열심히 달란트를 감당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 그들이 모두 장사한다면 유리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모두 잃을 수 있는 강박관념이라고 함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 속박의 실세를 느낄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바라볼 때에 두 달란트 가진 자이건 다섯 달란트 가진 자이건 한 달란트 가진 자이건 그 존재와 사역의 정당함을 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가진 자의 모습은 그러한 것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서 의롭다 하시며 맡겨주신 것을 믿지 못하였기에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들지 못하였으며 그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처럼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적으로 나타내신다고 하심을 기억할 때에 비록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지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을 실제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충성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하는 가운데서 하늘에서 이루신 뜻하심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종들로서 쓰임을 받게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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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11월 08, 2004

진실한 표를 내라

2004년 11월 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2:1-24
진실한 표를 내라

사회적으로, 부정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나 조직들에 있어서 그 사실을 알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내부 고발자’라는 자들이 그들인데, 이들의 신변에 대한 안전조치라고 하는 것이 국가에서 좀더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내부 고발자’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도 있고 그 표현적 진술이 적절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휘슬(whistl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도 하는 그러한 다른 나라의 예를 들고 있는 어떤 방송에서의 언급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모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상대적인 선함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에서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지고 있는 관습이나 악습 악행에 대한 납득이 한번에 일소되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고발자의 판단이 개인적인 판단으로 취급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면 여러모로 그 고발자의 모습이 좋게만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보편적 인식의 건전하지 못함이 다시 객관적으로 판단의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의 백성들에게 이방의 여인으로써 ‘내부 고발자’ 또는 ‘내부의 조력자’라고도 할 수 있고 심하면 ‘매국노’라는 개념의 그 기생 라합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고 여리고를 엿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냄을 받은 두 사람이 그곳의 기생 라합의 도움을 받아 정탐꾼을 찾는 자들에게서 보호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숨겨준 두 사람이 잠들기 전에 라합이 그들과 대화를 나눈 부분으로써 라합의 인식이라고 함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지역의 민심이라고 함과 의식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서 읽도록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자신의 존재적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약속을 받게 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두 정탐꾼과 라합이 대화를 나눈 내용이고 이윽고 붉은 줄을 통하여서 성에서 내려주고 또한 앞으로 어떻게 행하여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책략도 말하여서 돌아가게 함과 그 두 사람이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자신들에게 붙이셨음에 대한 것을 확신하며 정탐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라합의 믿음이 상대적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의 국가적 반역죄라고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사역이라고 함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성경을 대하면서 상식적인 측면에서 아직 더 분명하게 성경의 오류나 비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라합의 거짓말에 대한 것과 그의 나라를 배신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윤리적 판단이라고 함을 무시한 가운데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배척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의 논란이 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거짓말의 실체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일반적으로 불특정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의 기득권에 관련되어진 사실들을 언급할 때에 상당히 거짓말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불특정 사회의 인식이 연장되어 고려되어질 수 있는 역사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거짓말의 정체성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이라고 함이 절대의 보편과 상관성을 가질 때에 대등적인 비교라고 함이 허락되어진 가운데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체성이 세상에서의 보편적인 인식의 정체성보다도 더 보편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할 때에 기생 라합은 그 보편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기독교 신앙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그 실존을 말할 때에는 라합이 진정으로 옳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매국노와 특정 사회의 전복을 의도하거나 이루는 자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구약에서는 어떤 지역적인 땅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또한 하나님나라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지는 가운데서 성례전적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계시관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그 표현과 그 표현의 실제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절대적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의 기록이라고 함의 합목적적인 개념이나 또는 하나님나라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이 땅에 동일시하여서 말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어떤 국가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이 대등하게 비교되어지고 그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매국적인 행동이나 또는 어떤 특정한 사회의 기득권자체를 전체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측면에서 자신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기득권에 대한 표현과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계시의 존재와의 동일한 기록적인 상관이 없는 가운데서도 일반적인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주장할 수 있는 권세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일반 사람들과 대등한 권리를 사회적으로 받게 되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그 믿음의 두 정탐꾼들의 상황파악과 정보를 통하여서 준비하는 것을 중심으로 우리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는 원수와도 화목하게 하심에 있어서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말씀을 맺습니다.

‘진실한 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신 6:7~8참고) 주의 말씀하심을 따르고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과 그러한 섭리를 따를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라합이 말하는 진실한 표를 내라고 한 것에 답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복음입니다. 진정으로 상대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도 절대 정당한 주의 말씀이 있으며 그 말씀이 있음을 기억할 때에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음에 대하여서 그 말씀을 받을 수밖에 없음에 주를 두려워하며 합당하게 그 복음의 동역자로 세우시는 경우도 있으며 그가 또한 그 말씀에서 주의 백성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은 자로 서게 되는 것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분별력이 있게 하나님의 주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께서 원수가운데서도 화목케 하심에 있어서 고레스와 같은 자들을 세우시고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함께하심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이처럼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온전히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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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대를 가지며, 검을 사며

2004년 11월 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2:24-38
전대를 가지며, 검을 사며

일상적인 어떤 관찰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볼 때에 가장 중요한 어떤 전환점이라든지 어떤 발상의 시점을 분별해낸다면 이해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과 그것에 따른 어떤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고 그런 처신을 통하여서 자신의 유익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인 또는 다른 어떤 현상에 대하여서 해석해내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의 납득의 당위성을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것은 학문적인 개념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 이어지는 또는 현실에서의 학문적 개념으로 이어지는 가운데서 많이들 행하여 왔고 그러한 것은 오늘날도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의 판단의 실제라고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떤 국한되어진 가운데서만 그 당위성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너무 분별하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것은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의 만찬에서 상당한 판단의 차이를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그때만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점 새 언약적인 관점에서 말씀하심의 사실들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4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5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성만찬 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떼며 나누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세우심에 이어서,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시비가 나타나 다투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의 임금들의 판단과 주님의 말씀하심의 차이를 말씀하시고 있고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몬에게 시험이 있을 것과 주의 기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전에 전대를 가지지 않음과 그 보냄을 받았을 때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과 이제는 전대있는 자는 가질 것과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분별하지 못하여 다툼이 되어지는 것의 분별하여야 할 사실과 그 시점 그리고 그 사역적인 측면에서의 말씀하심의 변화와 지속성이해에 있습니다.

먼저 요구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누가 크냐는 다툼에 있어서의 관점과 중심의 분별인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의 나라라는 개념은 권세라고 하는 것을 세상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높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권위와 당위성을 말할 수 있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서 일한다는 것이 자신들의 입신양명이라는 개념으로 상대적 우위적 실제의식으로 다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에서의 상대적 우위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주님께서 섬기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즉 주님이 행하심에 대한, 주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그 권위의 당위성을 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고레스 왕과 같이 상대적 우위가 주께로부터 언약가운데서 구별되어지는 가운데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주의 언약하심에서 섬김이라고 함을 위한 가운데 그리고 그러한 구별적 사역적인 권세의 당위성을 말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시몬에게 사단의 청구가 있음과 주님의 기도가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앞으로 되어질 일에 현실적인 실제의 예언이 되어지며, 더 나아가서 새 언약을 받을 자들의 되어질 일들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의 예표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되어질 현실적인 실제의 예언이라고 함은,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함이 되어지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회개하게 하심의 은혜가 있도록 하시는 주의 의도하심과 주장하심의 섭리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을 받을 자들의 되어질 일들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의 예표적인 것이라고 함은, 새 언약이라고 함을 받은 교회의 모습에 마치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는 해를 입은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에 용이 삼키려고 했던 것과 같이 주의 나심과 주의 몸된 교회의 탄생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단의 모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계 12:1~6 참고)

그리고 두 번째 본문으로 주목하는 오늘 본문에서 전에는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셨을 때에 부족함이 없음을 말씀하심은 어떤 양식을 위한 합목적적인 개념으로나 또는 양식을 위한 돈이라고 함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도록 하심의 의미였으며 그것을 통하여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 자신이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고자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달리 주목하게 하시는 말씀을 나타내시는데, 그것은 전대 있는 자는 전대를 가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검을 가질 자는 겉옷을 팔아 살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보는 관점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본문의 문맥상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의 지지 가운데서의 그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수 있는 전대를 준비하라고 하심의 뜻하심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진리의 검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을 자신의 존재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비로소 의지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헐벗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도 그 복음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중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전대라고 함은 돈 주머니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이 때 당시에 있게 되어지는 달란트라는 개념이 돈의 개념과 같이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주 안에서 개발하며 주의 부르심에 그 달란트로 화답할 수 있도록 또한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달란트를 분별하여서 주 앞에서 섬김의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께서 성찬식을 행하시면서 주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되어질 일들이라고 함과 그 시점이 주의 잡히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시작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의 질서적인 실제를 인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행정적 관료적 개념에 잡히고 계보적인 명령체계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질서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구별하여서 인식하는 섬김의 체계를 이해하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도록 하시면서 주의 뜻하심의 달란트를 분별하여 개발하고 그 가운데서 때를 따라서 주의양식을 나누어줄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가운데서 섬기는 자들로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주의 말씀 안에서 그 앞에 되어질 일들을 분별하며 주의 말씀의 검을 사모하며 준비하며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워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나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서 주의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섬길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서 힘써 믿음의 선한 싸움의 달려갈 길을 잘 달려가시는 가운데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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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1월 04, 2004

그 섬은 멜리데라

2004년 11월 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8:1-15
그 섬은 멜리데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굴곡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무엇인가 형통을 말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고 그리고 그러한 대비적인 개념으로만 말할 수 있는 때가 아닌 때도 있고, 등등,

그러한 인생의 여정의 기복적인 때 중에서도 소위 ‘슬럼프’(slump)라고 하는 그러한 때를 만날 때에는 너무나 곤고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길을 다 막힌 듯한 때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 때에는 상대적으로 어떤 나름대로의 반전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지지 않을 때에는 더욱 곤고함을 느끼게 되어지는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우리 인생들 우리 성도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항상 우리를 주장하신 것과 같이 현실적인 실제에서 주장하시는 가운데 힘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로 호송되어지게 되는 바울을 태운 배가 파선되어서 헤엄쳐 섬에 이르러 구원을 얻고 나서 알게 되니 그 섬의 이름은 ‘멜리데’라고 함을 알았음을 기록하고 있고 그 섬에서의 일들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바울이 나뭇가지를 거두어 불에 넣는 가운데서 뱀에게 물린 사건과 그 가운데서도 해함을 당하지 않았던 일과 섬에 가장 높은 보블리오의 열병과 이질을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함과 그 가운데서 호의를 받게 되어지고 여정을 위한 쓸 것을 공급받게 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석 달 후에 디오스구로라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이윽고 로마에 도착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그 여정에서 형제들을 만난 것이 간단하게 기술되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라구사’와 ‘레기온’을 지나 ‘보디올’에 이르러서 형제들을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유하다가 로마로 가며 거기에서 형제들이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나옴으로 바울이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멜리데’에서의 석 달간 있었던 일에 대한 증거와 형제들을 만남에 대한 여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며 우리의 인생여정에서의 주의 동행하심이 어떤 것인지 주목하며 기뻐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멜레데 섬’에서의 사도 바울의 모습이라고 함은 세상에 우겨쌈(고후 4:8)을 당하지 않는 성도들의 모습과 그 가운데서의 주의 뜻하심을 성실히 행하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도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이미 믿음으로 알게 하심에 따라서 자신이 무죄하다는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가운데서도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호소함에 따라서 믿음으로 그 여정을 선택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일행은 로마로 가는 배를 타게 되는데 그것은 ‘아드랏뭇데노’(Adramyttium)라는 배였습니다.(행 27:2) 그 이름의 뜻은 ‘죽음의 공회’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인력적인 측면에서 사도 바울의 행보를 막음으로써 하나님의 뜻하심을 막으려고 하는 그러한 의도함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믿어주시는 성도들의 전형적 모습으로서의 일시적으로 바울을 내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배를 바꿔 탔지만 그러한 의도라고 함은 이미 배를 바꾼다고 하여도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2주간 동안 그러한 죽음이라고 함의 공회를 지나는 것으로써의 항해여정에서 주의 뜻하심의 예정하심을 이루실 것을 믿는 바울의 믿음대로 그들은 그 한 섬 멜리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멜리데’의 이름의 뜻은 ‘꿀’(honey)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례요한의 외치는 자로서 들에 있을 때에 먹었던 ‘석청’(마 3:4, 막 1:6)이라는 것과 동일한 어근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이 말하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그러한 표현을 사람들이 의미와 실제를 말하지 못하면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이 죄인된 것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존재의 정체성과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죽음이라고 함의 인생여정을 행하고 있는 것이 바울이 타고 가던 배들의 실제적 존재적 증거의 이름으로써 ‘아드라뭇데노’라는 ‘죽음의 공회’의 인생이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두 죽음이라는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의 섭리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구원의 사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함의 외침이 들에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세상이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진정한 구원을 받게 되어지며 그러한 구원받음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의 동떨어진 마치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이 현실로 다가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섬이 하나님을 앙망하리라는 것이 주의 교회에 이루어짐과 그 어떠함을 알도록 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사 42:4, 사51:5)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에서 믿음으로 씨를 뿌리며 그러한 일을 온전히 마칠 수 있도록 하심의 위로하심과 권고하심이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도들의 만남에서 기쁨의 샘을 보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는 바울의 존재적 증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가운데서 형제들을 처음만나는 곳은 바로 ‘보디올’이라는 곳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작은 우물’, ‘샘물’이라는 뜻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샘물을 여신 것입니다.(시 104:10)

이제 우리 성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주 안에서 그 샘물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말씀을 맺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곤고함과 그것으로 인하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리에 설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을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요한과 같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주의 위로하심이 있게 되며 주의 회복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소위 사면초가라는 그러한 정황 속에서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분별하여 행하여 나갈 때에는 그 우겨쌈(고후 4:8)이라고 함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고 또한 더 일할 수 있는 달란트와 인도하심이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기업을 다윗과 같이 기뻐하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종으로서 세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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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01, 2004

부끄럽지 않은 복음

2004년 10월 31일 소망교회 종교개혁주일예배설교
롬1:1-17
부끄럽지 않은 복음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나 사안, 그리고 그 밖에 어떤 정체성에 대하여서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러한 태제라고 하는 것, 즉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고자 하는 것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으로 일축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로써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사실의 실제를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일축함이라고 함이 그 경솔함과 모자람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31일에 루터의 면죄부 사건에 대한 토론을 위한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 ‘캐슬교회당’ 문에 붙임으로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그 종교개혁에 대한 분명하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증거로써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적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과 그 복음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종들의 중심을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종 사도 바울이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음과 이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임을 말하고 있고 이러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는 가운데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쉬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과 만나보기를 심히 원하였는데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견고케 하려 함과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는 길이 막혔지만 빚진 자로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심과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복음을 전하고자 심히 원했던 사도 바울이 그 입을 열었을 때에 자신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에서의 팽배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정황을 읽고 있었다는 것임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더욱 오늘날의 정황도 이와 비교되어진다고 할 때에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님에 대한 것을 그 실상을 마음에 둠이 아름다운 것이며 또한 그 사실의 실상의 정당함을 주목하는 것도 합당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대학인 소르본느 대학에서 제출되어진 한 논문에서는 기독교를 의식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신화로 취급하면서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들의 실증주의적 입장이 정밀과학적 입장으로 받아들임이 좋을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조르주 귀스도르프, 신화와 형이상학, 문학동네 p7)

이러한 것은 중세에 있어서, 또한 구교에 증거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분명한 사실을 증거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신론을 말하는 자들은 신의 형상이라고 함을 배척하는 가운데서 신도 배척할 수 있다는 지극히 자의적인 합리성을 쫓아서 결론적으로 종교는 아편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일반적인 상식적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측면을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자들로써 기독교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식으로 그 맹목성을 따르는 자라는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함을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함을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시키려고 하는 미련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적 사회인식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할 것은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인식하고 증거하는 중심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보내심이라고 함의 뜻하심을 확신(행 27:24)하는 가운데서 성도들의 만남을 위해 힘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로마라고 하는 뜻은 ‘세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러한 곳에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로 그 아들에 대하여서 증거한 것입니다. 그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앞선 자로써 주의 복음을 전하는 종들을 표현하는 구약적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믿음의 종들의 증거적 차원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의로움의 한 믿음의 조상을 부르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즉 그 아브라함의 언약적 계보가 바로 예수께서 세우신 자신의 교회로써 오늘 날의 교회의 정체성과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1:1)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여호와를 믿음에 대한 것’(창 15:6)임을 다른 자들(약 2:23)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인식하고 있었고(롬 4:3, 롬4:) 그러한 중심을 가지고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인 기반에서의 합리성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셨음과 그렇게 하심에 대한 것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인 합리성의 여지라는 개념이나 또는 합리성의 재고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느냐’ 그러한 말들을 말할 때 그것들은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아그립바 왕의 판결 앞에 서 있는 바울과 그의 증거를 통하여서 주목할 수 있는데, 상당한 분별 있는 가운데서 그 아그립바 왕은 그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정적인 측면의 입장에 서 있는 베스도는 사도 바울에게 미쳤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정신차린 말을 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행 26:17~25)

중세의 가르침의 연속성이 있는 구교에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증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름이라고 하는 것 상대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한편으로 옳은 것이지만,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하심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말씀하신다면 그 이름과 상대적인 것으로도 그 상대적인 비판적 불확실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도 사실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함이 진정한 경건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하나님 앞에서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가서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써 그 스스로 지혜로움의 정당함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롬 1:22, 23)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고 하여도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경건한 모습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제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 그로부터의 상대적으로도 절대의 말씀하심을 믿는 가운데 성경과 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아들에 관한 증거로서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써의 복음을 믿는 것은 전혀 비이성적이지도 않고 진정으로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며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서 제한된 지식의 참됨이라고 함과 그 보편성이 하나님을 의지한 절대 보편적인 생각일 때에 그것은 상대적 보편의식보다도 더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결코 비이성적이라는 판단에서 파생되는 부끄러움을 취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 하나님을 믿음과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참된 것으로 인생이 정신차린 말로써 받아야 함이 그 합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던 사도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 외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했던 것과 같이 그러한 자리에 서도록 권고함에 있어서 그 첫 번째가 주의 복음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담게 되어지는 가운데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한 그릇과 같이 쓰임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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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25, 2004

히스기야의 세상읽기

2004년 10월 2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39:1-8
히스기야의 세상읽기

어떤 분야에서 공적으로 시험을 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과목으로 선정되어 공부하게 되어지는 것들 중에 일반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고려하는 곳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식을 시험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보편적인 일상적 생각과 사고가 필요한 것이 요구되어지는 가운데서 마련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한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서 일반적으로 알려지는 학문들과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한 것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결별되어진 가운데서 경건을 말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세속화 신학에서 말하는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경건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일반적인 세상들의 일들에 대하여서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 속에서 일반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여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 옳은 것을 택하는 것이 성도들의 순전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경건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히스기야의 세상적 입장의 모습을 바르게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죄악된 자리에 잠시나마 서게 되어지는 그러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데 그것을 통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문맥적인 것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남쪽 유다 왕 히스기야가 한번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가 주의 구원하심의 뜻하심 안에서 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이어지고 있는데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의 병 나음을 인하여서 예물을 보내왔는데 히스기야가 기뻐하여 그의 궁중의 보물과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이사야 선지자가 묻기를 그 온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으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보았는가를 질문함에 대충 답변하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집의 소유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가 되고 남을 것이 없을 것과 그 자손 중에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에 대한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히스기야의 몇 마디의 언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 히스기야는 성도들의 모습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그러한 연단의 시기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비교되어지는 것은 바로 욥의 순수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사야가 질문한 것에 히스기야가 다 답한 것으로 언급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벌을 내리심을 언급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실은 히스기야의 옳은 답변이 아닌 것과 또한 다 답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답변에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과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변만 있고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였느냐’는 이사야 선지자의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과 그 순전함을 잃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사야 37장과 38장에서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그러한 글들을 하나님 앞에 펴놓고 그 정당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분별력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자신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함을 이루어주시기를 위한 자신의 고통이라고 함의 부당함을 놓고 기도할 줄 알면서도 자신이 들은 말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질문된 답변에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은 그의 순전함이라고 함의 정당함이 이미 판단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욥과 비교되어지는 것으로 언급한 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욥에게도 있었는데 그는 순전함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욥은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욥의 아내가 욥의 받는 고통을 인하여서 말하기를 그래도 그대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을 했을 때에 욥의 고백인 것입니다. 삶의 모습에서 정황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에서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모습이라고 함을 통한 그의 경건의 순전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히스기야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그 예물이라고 함과 방문함에 대한 예를 갖춘 것은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그에게 선함을 말하지만 이교도의 입장에서 그 정황적 입장에서 그 되어진 것의 그 근원이 무엇이냐는 측면의 답변을 구하는 것으로 주목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 히스기야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가 취하여야할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핍박의 실체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이것을 묻는 이사야에게 답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에 있어서 그가 기뻐하며 그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은 가운데서 시험에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시험을 통한 분명한 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앞서 히스기야의 본분은 그의 이름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라는 증거가 그의 존재적 모습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던 것을 기억할 때에 그의 모습을 잊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핍박’이라고 하는 것이 형태적 순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강압적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죄악의 교묘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스기야는 주의 말씀 안에서 분별하여야 했으며 그것이 경건으로 인한 순전함을 지키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증거하여야 함이 옳았던 것입니다.

핍박의 순한 모습의 형태를 취함에 대한 예를 든다면, ‘요나’ 선지자의 경우입니다.(욘 1:1~3)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그 소명을 받았는데 큰 성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려하여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가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의 순전함이라고 생각하기에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스올의 고통 속에 기도하여야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되어지는 일들이 잘 된다는 생각들, 그리고 외형적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외형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에서 비로소 교회의 존재적 정체성이나 성도의 존재 및 신앙이 평가되어질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라는 생각은 진정한 경건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막 13:1~2)

그럼 우리가 다시 주목하게 되어지는 히스기야의 이러한 죄악이라고 함을 허락하신 가운데서 읽게 하시는 주의 뜻하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의 권세의 깨어짐이라는 그 종말의 때의 모습과 그 시험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단 12:7)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의 구원받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주의 은혜로 회개하며 그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히스기야의 죄로 인하여 넘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마지막이 아닌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이후에서는 주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과 메시야의 고난과 구원하심에 대한 예언하심의 실체를 증거하는 말씀 안에서 오늘 본문이 증거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귀한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문제라는 측면에 있어서, 내면적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의 보기에 기뻐하는 것은 주의 판단의 정당함을 받기를 주저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책망을 받고도 자신의 시대에는 평안이 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는 히스기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자하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주관적인 측면의 실제적인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를 자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과 삶의 정당함을 찾는 즉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을 이루는 가운데서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실천하고 힘써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성도들은 바로 히스기야의 모습과 같은 존재적 반열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강압적으로 나타나는 욥의 모습과 달리 아주 순탄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상식적 보편의 판단에 비로소 납득 당위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이 있는 가운데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는 종말의 때에 있어서도 주의 위로하심에서 기쁨으로 씨를 뿌리며 결실을 맺는 자들로서 전혀 낯설지 않는 모습으로써, 언제나 함께하시며, 주의 뜻하신 때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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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18, 2004

예수님께 듣는 종말의 징조

2004년 10월 1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1:20-38
예수님께 듣는 종말의 징조

‘징조’라는 것은 ‘어떤 일이 생길 기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기미’라는 뜻은 ‘생각의 지향성이나 취미 따위가 일치하거나 가까워서 은연중에 서로 이해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합해보면 ‘어떤 일이 생길 것에 대하여서 관계되어지는 생각의 지향성과 같은 것이 일치하거나 가까워서 은연중에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의 지향성이라고 함에 대한 인식이 어떤 획일적 개념이 아니라고 할 때에 상대적 다양성이라고 함이 또한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인해 혼란을 가져오게 되어지는 경우가 수반되어지는 가운데서 짐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것에 대한 사실을 어떻게 말하는가 또는 말하지 못한다면 임의적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여러 가지 징조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징조가 말하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라면 그 해석자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4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 날은 형벌의 날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아이 벤 자와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음과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잡혀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방인들에게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밟힐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을 것이고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할 것을 말씀하시며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타고 오심을 볼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런 일이 있으면 구속이 가까웠음에 대한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무화과 비유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움에 대한 것을 알도록 말씀하시고 있으며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룰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진다고 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4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스로 조심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이 종말의 날이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심과 밤이면 감람원에서 쉬심에 따라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누가복음 21장 1절에서 19절의 말씀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함을 기억하면서 종말에 대한 징조를 구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심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나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시대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 교회의 시대를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그 실제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곤고한 자리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에 있어서 즉각적으로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구약적인 교회의 시대를 포함해서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가운데서의 공식적인 실제의 모습까지 포함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심은 이사야와 미가의 예언의 말씀을 따를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미가와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던 것입니다.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2)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하심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기득권적인 자신들의 성에서 나올 것과 또한 그러한 아집적인 주관적 실제를 가지고 자랑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가 아닌 잘못된 교훈으로 사람을 낳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아이 벤 자의 받을 화를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진정으로 거짓된 정당함에 따른 사실들에 대하여서 곤고한 모습을 취하는 가운데서 이방인에게 밟히는 수모를 겪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왕하 18:26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의 인식을 비교할 것)

일월성신 징조에 대한 말씀하심과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할 것과 같은 그리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은 시대를 분별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구약에서는 ‘시대’라는 말과 ‘시간’이라는 말의 같이 사용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증거적인 언어적 표현이 있었습니다. 즉 세대를 분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세월을 아끼라고 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이라고 함에 대한 사실의 근거를 분별하는 것과 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는 하나님이 창세 때에 정하신 질서의 한 표본이며 그로 인한 인식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하늘의 별들로써 위성으로써의 태양과 각종 천문적인 별들은 시간과 상관성이 있음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무의식적으로도 인식해왔습니다. 즉 그러한 것이 점성술과 같은 역사초기와 오늘날의 무속신앙으로 변질되어지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성육신하심을 알리실 때에 이미 예정하신 가운데서 별을 통하여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시간이라고 함 속에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실제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섭리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있었고 이것은 주의 천사들의 증거로 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헤롯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왕이 나심에 대한 혼란과 곤고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또한 유아학살로 인해서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하게 되어지는 그러한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징조적 개념으로써 일반적인 범신적인 하늘의 이치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만으로 이해되어질 수 없는 가운데서의 혼돈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게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께서 그러한 상대적 확실성이라고 함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오심이 구름타고 오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의 의미로 나타나시고 있고 또한 이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증거도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구주와 심판자로서 다시 오심에 대한 것을 주목할 때에 구속의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신다고 함을 기억하고 우리의 머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주의 말씀의 주관적인 것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증거하시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하심의 종말적 징조에 대한 해석을 마치시는 가운데서 그것에 대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심이 이어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심과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심이 언급되어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한다는 것은 임의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통한 주의 형상을 입은 자들로서의 합당히 행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서의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아주 평범하게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라고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그 첫 번째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도록 가르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절대자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서의 실재를 분별하는 또한 실제를 증거하는 자리에 서는 자들로서 성도들의 삶의 방향과 의도와 힘씀이 정초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종말에 대한 징조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복음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주의 은혜로 그 복음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알기 전까지는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시간 속에 역사 속에 오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만이 진정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자존의 하나님의 성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이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 이름을 힘입을 때에 모든 것의 주관적이면서도 진정한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의 상대적 표현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경을 받으며 그 말씀의 사실성이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이라 함에 있다고 할 때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는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나감이 기록된 뜻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징조의 해석에 따른 시간과 세월의 임의적 해석에 따른 혼돈된 가치판단과 주의 말씀을 흐리게 하는 자들의 말들에서 벗어나서, 주의 말씀하심에 따른 사실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주의 구속하심의 은혜의 실제의 자리에 서며 구원의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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