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2월 06, 2004

빌라도의 간교함을 넘어

2004년 12월 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3:1-25
빌라도의 간교함을 넘어

상대적인 역사와 사회에서 한 인물의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억되어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억되어지기도 하고 또한 오래 사람들의 인식에 남겨지기도 하고 그렇지도 못한 것이 전반적인 가운데서 그러한 인물평가가 있을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지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에 대한 연민이라든지 또는 여러 가지 긍정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과 같이 논란이 되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빌라도’였습니다.

그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부인하고 죽이도록 한 자들의 실제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한 증인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3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리들이 잡아서 끌어옴에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무리들이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소내용은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함의 내용이었고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자칭 왕 그리스도임이 옳다고 말씀하심과 빌라도가 주님께 죄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무리들이 계속하여서 백성을 소동시키는 정치범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빌라도는 그 무리들의 말 중에 자신의 소속적인 권한 밖이라는 개념에서 헤롯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헤롯에게 예수님이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보내지게 되고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적이라도 볼까하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여러 무리들이 고소함에 있어서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힌 가운데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고 끌고 왔지만 그에게서 죽일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때려 놓겠다는 제안을 세 번 하게 되었고 그 백성들이 큰소리로 재촉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 이긴 가운데 예수를 넘겨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자들의 주관자로서 빌라도의 모습을 읽도록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선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슬픔의 상대적 원인이 되어지는 세상의 모습과 세상의 주관자들의 실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실상은 헛된 실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서점이나 일반 시중에서 일반적인 작은 판플렛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의 제목은 ‘빌라도의 고백’이라는 작은 프로필에 가까운 것인데.. 그 내용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으며 또한 어쩔 수 없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그러한 것이었고 또한 그의 번민에 대한 것을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 내용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합리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성을 성경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해석의 실제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의 재가라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실존적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이 있다는 개념이 항상 사실일 수 있느냐는 것과 합리성과 사실이라는 개념이 오도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즉 속이려고 하는 자들의 입장은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서 합리성 자체만 생각하고 있지 납득의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당위성을 조작하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주님을 사실상 죽인 자의 모습이라고 함에 있어서 정적으로 그를 지목하고 저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언급하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정적인 의미에서 호소력이 있는 것이며 또한 사실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감정적인 것일 뿐이라는 합리적인 측면에서 앞서 말한 빌라도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함이 마치 건전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이 가능한 것은 빌라도의 간교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간교함이라고 함이 정치적 개념의 야누스적인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의 기본적인 의도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러한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수밖에 없는 자라고 함을 기억하게 되며 또한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이름인 빌라도의 모습은 불법의 사람임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의 이름 ‘빌라도’라는 말은 라틴어로 ‘확고히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헬라적인 뜻은 ‘찌르는 창으로 무장된’"armed with a spear"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5절에서는 베드로와 누가는 다윗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바로 빌라도의 모습이 불법의 사람 사울과 관련되어 읽게 되어지는 것을 증거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사울이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고 한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이며 다윗을 죽이려고 한 사울의 인식은 이미 악한 신으로 불리는 마귀의 행함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지 못한 실제로서의 이스라엘 나라의 상속권을 주장하려고 하는 자의 불법의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 말씀이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의 계시를 이루심에 대한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삼상 19:9~10)

특히 간교함을 말한 것은 그의 예수님을 죽일 일이 없음에 대한 것을 위한 당위성을 놓기 위하여서 그 다른 곳에 보냄에 대한 자신의 성실함과 또한 다른 곳에서도 희롱을 받음에 대한 것과 그에 따른 백성들의 집요한 요구라고 하는 것이 자신이 내릴 사형언도라는 개념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확고히 하는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절정의 자기표현은 자신의 죄는 없다는 자신의 손을 물에 씻으며 그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댓가는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확고히 하고 싶었고 그러한 언급을 했던 것입니다.(마 27:24)

즉 무리의 대중적 편견의 정당함을 따라서 자신의 정당하지 못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의 심의를 했으며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하는 절대의 자존적 신실하을 판단하는 그 간교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적인 여지를 말할 수 있으면서도 절대의 신실함에서는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비난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상대적인 확실성이라고 함에서 주의 구원의 사실을 부인하고 주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사실 심의는 이미 기각되어진 실제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보는 가운데서 주의 성도들은 그러한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담대할 수 있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을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더욱 그 현실적인 실제에 사실을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로께서 함께하심에 있어서 더욱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은 절대의 재가를 받는 것에서 진징한 사실로써 증거되어야 함과 또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빌라도가 진정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실심의 결과 죽일 죄가 없다는 것과 그를 놓아주려고 했다고 하면 대중에 납득되어질 수 있는 사실 심의 결과를 말하며 납득의 노력을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납득되어질 수 있는 사실심의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죄가 없다는 단정적인 언급은 이미 납득하려고 하는 노력적인 중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대중의 편견의 확고한 의지적 표현을 통한 자기의 정죄하려는 의사의 정당함과 타당성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절대의 판단이 아닌 절대와 상관이 없는 가운데서의 상대적인 판단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상대적인 군중의 판단은 편견의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이 현실이라는 임의적인 사실 가운데서 실제인 것처럼 자신들을 기만시킨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기만적 죄라고 하는 사실과 정당성 시비를 피하고 싶어 하는 정치적 간교함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되어지는 세력들이라고 함과 그것의 타당성은 자존의 절대자를 임의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기만적 현실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우리 주의 성도들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현실이라는 것에서의 실제의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실재와 실제 의식적인 판단의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생각하면서 세상의 부정된 사실들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의식을 가지고 그 정당함을 의지하여서 주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