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2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2:17-29
스스로 믿는 사람들
성탄절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슈퍼스타로 떠오르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마도 소위 ‘산타크로스’라는 인물이 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임의적으로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산타크로스의 날로써 임의적으로 생각하려는 세상의 사람들의 문화라고 하는 개념을 주목하게 됩니다.
복음이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는 그러한 임의적으로 스스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인식의 저변에는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지 그 여부와 관계없이 주님의 나심의 대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제대로 옳게 표현하지 못하여서 엉뚱한 대상을 찾는 세상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날을 기뻐한다는 그 자체는 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죄악 된 문화에서 그 기쁨의 실제가 구겨져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믿는다는 것과 그 나름대로의 정당함이 있다는 식의 인식이 이전부터 지혜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있어 왔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과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의 율법적인 측면에서의 선함을 여기고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신이 도적질함에 대한 것과 율법을 자랑하는 자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을 통하여서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율법의 정점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할례라고 하는 것의 유익함을 말하나 율법을 범함에 무할례가 되었음에 대한 것과 이와 같이 잘못된 행함에 대한 인식에 따른 것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칭찬이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임을 또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율법의 실제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함을 의문에 두려고 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동의적 정당함에서의 칭찬의 경건이라는 모습을 가짐에 책망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경건의 자리에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스스로 믿는다’는 개념이 중요한 것이 되어지며 또한 신령과 의문이라고 함의 개념이 그것에서 분별되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주목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글 개역성경 본문 ‘스스로 믿으니’(롬 2:20)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본문 문맥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자처한다는 의미에서 해석적 번역인데, 문맥적인 차원에서 바르게 그리고 잘 해석되어진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율법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자처하면서 뒤에는 자신들 스스로를 가르치지 않는 거짓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실을 말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면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주장적인 사실의 여부가 항상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라도 참된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절대 자기 정당함을 취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서도 절대의 자기 계시를 하실 수 있다고 할 때에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에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또한 진정한 사실로써의 참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유대인들은 로마교회에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유대인들의 인식이라고 함이 메시아고 오심에도 불구하고 율법적인 개념의 경건성으로 주 예수께서 거룩하게 하신 율법의 행함을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릇되게 행하는 가운데서 자기 모순적인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것을 보는 자들이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과 참됨에 대한 그 증거의 사실을 그들이 행함에서 볼 때에는 말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인식과 함께 마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신 것과 같이 상대적인 판단을 받도록 하는 자리에 서는 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스스로 믿고 있지만 그 스스로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재가적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임의적인 것으로 그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으로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 이름의 여호와인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기름 부어 거룩하게 하시는 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심으로(롬 4:25) 이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미 의롭다 칭함을 입은 자들이 그 중심에 주시는 믿음으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행함을 요구하는 그러한 특성으로써의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가치평가와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상대적 경건의 타당성을 비교한다는 것은 신령과 의문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령하다고 함은 상대적인 개념이 주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인하여서 진정한 사실로써 구별되어짐이라고 하는 것, 복음의 사실의 실제성은 예수그리스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상대적 존재부정으로써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대적인 교훈적인 말씀하심이 진정한 실제의 계시로 구별되었음에 그 신령함은 참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의문이라고 함은 그러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서 그것을 증거하는 가운데서의 행함의 빛을 비추던 것을 예수님 안에서의 거룩함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 그 정당함이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에서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확실성의 개연적인 언급들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의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자처한다는 말이 스스로 자신의 입장과 처신을 그리고 신념을 규정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그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따르지 못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의 영광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말씀을 맺습니다.
스스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뇌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어떤 이데올로기나 주의라는 사상들을 주입하여서 어떤 합목적적인 인간을 기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러한 것이라도 자신들의 선하다는 판단의 당위성을 따라서 그렇게 임의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그러한 것은 필요에 따라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익한 세뇌가 된다는 식의 임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은 거의 다 이러한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임의적인 주관적 스스로의 판단으로써 세뇌라는 개념으로써 여지를 가지는 그러한 의문으로써 신령한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려둡니다. 아무리 화려한 합리성이라도 그 합리성의 정체성이 정당함이 없으면 그것은 속이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형태적인 측면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더 나아가서 임의적인 주관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를 취하시도록 실제적으로 우리의 중심에서 은밀하게 주권적으로 주장하신 분이 자존의 절대자 자신으로써의 예수님이시라면 그것은 임의적 스스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세뇌의 판단을 기각시키는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믿음이며 그것은 은혜로써의 선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주로 탄생하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며 감사하시는 가운데서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성탄선물로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이미 그러한 선물을 받으신 성도님들에게는 후히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로서의 선물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2:17-29
스스로 믿는 사람들
성탄절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슈퍼스타로 떠오르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마도 소위 ‘산타크로스’라는 인물이 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임의적으로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산타크로스의 날로써 임의적으로 생각하려는 세상의 사람들의 문화라고 하는 개념을 주목하게 됩니다.
복음이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는 그러한 임의적으로 스스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인식의 저변에는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지 그 여부와 관계없이 주님의 나심의 대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제대로 옳게 표현하지 못하여서 엉뚱한 대상을 찾는 세상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날을 기뻐한다는 그 자체는 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죄악 된 문화에서 그 기쁨의 실제가 구겨져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믿는다는 것과 그 나름대로의 정당함이 있다는 식의 인식이 이전부터 지혜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있어 왔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과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의 율법적인 측면에서의 선함을 여기고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신이 도적질함에 대한 것과 율법을 자랑하는 자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을 통하여서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율법의 정점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할례라고 하는 것의 유익함을 말하나 율법을 범함에 무할례가 되었음에 대한 것과 이와 같이 잘못된 행함에 대한 인식에 따른 것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칭찬이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임을 또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율법의 실제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함을 의문에 두려고 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동의적 정당함에서의 칭찬의 경건이라는 모습을 가짐에 책망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경건의 자리에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스스로 믿는다’는 개념이 중요한 것이 되어지며 또한 신령과 의문이라고 함의 개념이 그것에서 분별되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주목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글 개역성경 본문 ‘스스로 믿으니’(롬 2:20)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본문 문맥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자처한다는 의미에서 해석적 번역인데, 문맥적인 차원에서 바르게 그리고 잘 해석되어진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율법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자처하면서 뒤에는 자신들 스스로를 가르치지 않는 거짓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실을 말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면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주장적인 사실의 여부가 항상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라도 참된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절대 자기 정당함을 취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서도 절대의 자기 계시를 하실 수 있다고 할 때에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에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또한 진정한 사실로써의 참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유대인들은 로마교회에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유대인들의 인식이라고 함이 메시아고 오심에도 불구하고 율법적인 개념의 경건성으로 주 예수께서 거룩하게 하신 율법의 행함을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릇되게 행하는 가운데서 자기 모순적인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것을 보는 자들이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과 참됨에 대한 그 증거의 사실을 그들이 행함에서 볼 때에는 말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인식과 함께 마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신 것과 같이 상대적인 판단을 받도록 하는 자리에 서는 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스스로 믿고 있지만 그 스스로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재가적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임의적인 것으로 그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으로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 이름의 여호와인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기름 부어 거룩하게 하시는 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심으로(롬 4:25) 이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미 의롭다 칭함을 입은 자들이 그 중심에 주시는 믿음으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행함을 요구하는 그러한 특성으로써의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가치평가와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상대적 경건의 타당성을 비교한다는 것은 신령과 의문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령하다고 함은 상대적인 개념이 주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인하여서 진정한 사실로써 구별되어짐이라고 하는 것, 복음의 사실의 실제성은 예수그리스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상대적 존재부정으로써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대적인 교훈적인 말씀하심이 진정한 실제의 계시로 구별되었음에 그 신령함은 참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의문이라고 함은 그러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서 그것을 증거하는 가운데서의 행함의 빛을 비추던 것을 예수님 안에서의 거룩함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 그 정당함이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에서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확실성의 개연적인 언급들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의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자처한다는 말이 스스로 자신의 입장과 처신을 그리고 신념을 규정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그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따르지 못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의 영광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말씀을 맺습니다.
스스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뇌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어떤 이데올로기나 주의라는 사상들을 주입하여서 어떤 합목적적인 인간을 기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러한 것이라도 자신들의 선하다는 판단의 당위성을 따라서 그렇게 임의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그러한 것은 필요에 따라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익한 세뇌가 된다는 식의 임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은 거의 다 이러한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임의적인 주관적 스스로의 판단으로써 세뇌라는 개념으로써 여지를 가지는 그러한 의문으로써 신령한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려둡니다. 아무리 화려한 합리성이라도 그 합리성의 정체성이 정당함이 없으면 그것은 속이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형태적인 측면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더 나아가서 임의적인 주관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를 취하시도록 실제적으로 우리의 중심에서 은밀하게 주권적으로 주장하신 분이 자존의 절대자 자신으로써의 예수님이시라면 그것은 임의적 스스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세뇌의 판단을 기각시키는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믿음이며 그것은 은혜로써의 선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주로 탄생하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며 감사하시는 가운데서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성탄선물로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이미 그러한 선물을 받으신 성도님들에게는 후히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로서의 선물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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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