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26-32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삶을 살아가다보면 어떤 일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즉 ‘왜 그럴까?’라는 반문을 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믿을만한 사람이 ‘본래 그렇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일의 진척을 위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기본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함을 말하는 본래적이라는 개념적 정의가 다시 해설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지혜를 말하는 선구적인 자들은 그 ‘본래적이다’라는 뜻을 잘 분별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은 ‘본래적으로 당연한 것이다’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본래적이다’라는 반론이 있게 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러한 후자의 의미는 실제적인 이유로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핑계마저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영원히 찬송 받으실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가운데,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둠에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 남자들도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는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합당치 못한 일을 함에 대한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 가지 나열되어진 구체적인 언급들과 함께 그 같은 일들을 행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되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함과 같은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함에 대한 것을 또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본래적인 사실로써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어짐에 대한 것과 그것을 소위 비 본래적인 것이라고 납득의 당위성이 없다고 거짓되게 말하는 합당하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서 그 본래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말하는 이유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마음에 둠이 본래적이냐 아니냐는 것은 이미 본래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영원이라고 함은 구약언어로써 ‘올람’이라는 뜻으로써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의 사실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언약하심 안에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씀하시기 위한 지음을 받은 존재가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언급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시비(是非)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를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고 오히려 상대적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시비를 말할 수 있다고 하나 시비(是非)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성에 대하여서 납득의 당위성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되어야 할 때에 그것을 깨닫지 않는 자는 짐승과 같다는 말씀하심이 이루어져서 분별력과 지혜의 실존과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동물들의 본능적인 성적인 모습에 머물며 그 말씀하신바 짐승의 모습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진 모습과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자들의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지혜라는 것이 합당함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지혜의 실존과 사실의 근본이 되어지는 여호와를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도 옳지 못한 그러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하는 가운데서 불특정 다수의 지지적인 정당함 상대적 정당함으로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로써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셨고 여호와께서 새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심의 자기의 신실하심을 따라 새 언약을 세우셨으니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 그 이름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대적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는 방법론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절대의 보편적인 말씀하심으로써, 상대적이면서도 본래적인 절대의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간접적인 가운데서도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일방성과 그 자체적 절대 정당하심을 증거하면 사람들은 일방적이라는 형식적인 측면만 생각하기를 원하고 대화의 원점이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와 그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서 다수의 편견이라고 함이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우상으로 그 그늘에 있는 종사하는 그러한 종노릇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게 되어지는 것은 죽는 것에 즉 상대적인 존재부정이라고 함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그 뜻하심을 바라볼 때에 종들을 보내시는 그 뜻하심의 정당함에서 주의 복음을 전함의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오심을 놓고 영접기도하면 주께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며 우리에게 주신 믿음대로 우리의 마음과 실재에 실제적으로 좌정하시며 다스리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주님을 마음에 영접한 자들로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1:26-32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삶을 살아가다보면 어떤 일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즉 ‘왜 그럴까?’라는 반문을 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믿을만한 사람이 ‘본래 그렇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일의 진척을 위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기본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함을 말하는 본래적이라는 개념적 정의가 다시 해설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지혜를 말하는 선구적인 자들은 그 ‘본래적이다’라는 뜻을 잘 분별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은 ‘본래적으로 당연한 것이다’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본래적이다’라는 반론이 있게 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러한 후자의 의미는 실제적인 이유로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핑계마저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영원히 찬송 받으실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가운데,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둠에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 남자들도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는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합당치 못한 일을 함에 대한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 가지 나열되어진 구체적인 언급들과 함께 그 같은 일들을 행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되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함과 같은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함에 대한 것을 또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본래적인 사실로써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어짐에 대한 것과 그것을 소위 비 본래적인 것이라고 납득의 당위성이 없다고 거짓되게 말하는 합당하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서 그 본래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말하는 이유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마음에 둠이 본래적이냐 아니냐는 것은 이미 본래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영원이라고 함은 구약언어로써 ‘올람’이라는 뜻으로써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의 사실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언약하심 안에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씀하시기 위한 지음을 받은 존재가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언급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시비(是非)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를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고 오히려 상대적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시비를 말할 수 있다고 하나 시비(是非)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성에 대하여서 납득의 당위성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되어야 할 때에 그것을 깨닫지 않는 자는 짐승과 같다는 말씀하심이 이루어져서 분별력과 지혜의 실존과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동물들의 본능적인 성적인 모습에 머물며 그 말씀하신바 짐승의 모습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진 모습과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자들의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지혜라는 것이 합당함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지혜의 실존과 사실의 근본이 되어지는 여호와를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도 옳지 못한 그러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하는 가운데서 불특정 다수의 지지적인 정당함 상대적 정당함으로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로써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셨고 여호와께서 새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심의 자기의 신실하심을 따라 새 언약을 세우셨으니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 그 이름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대적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는 방법론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절대의 보편적인 말씀하심으로써, 상대적이면서도 본래적인 절대의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간접적인 가운데서도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일방성과 그 자체적 절대 정당하심을 증거하면 사람들은 일방적이라는 형식적인 측면만 생각하기를 원하고 대화의 원점이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와 그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서 다수의 편견이라고 함이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우상으로 그 그늘에 있는 종사하는 그러한 종노릇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게 되어지는 것은 죽는 것에 즉 상대적인 존재부정이라고 함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그 뜻하심을 바라볼 때에 종들을 보내시는 그 뜻하심의 정당함에서 주의 복음을 전함의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오심을 놓고 영접기도하면 주께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며 우리에게 주신 믿음대로 우리의 마음과 실재에 실제적으로 좌정하시며 다스리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주님을 마음에 영접한 자들로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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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