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0월 25, 2004

히스기야의 세상읽기

2004년 10월 2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39:1-8
히스기야의 세상읽기

어떤 분야에서 공적으로 시험을 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과목으로 선정되어 공부하게 되어지는 것들 중에 일반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고려하는 곳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식을 시험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보편적인 일상적 생각과 사고가 필요한 것이 요구되어지는 가운데서 마련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한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서 일반적으로 알려지는 학문들과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한 것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결별되어진 가운데서 경건을 말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세속화 신학에서 말하는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경건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일반적인 세상들의 일들에 대하여서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 속에서 일반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여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 옳은 것을 택하는 것이 성도들의 순전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경건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히스기야의 세상적 입장의 모습을 바르게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죄악된 자리에 잠시나마 서게 되어지는 그러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데 그것을 통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문맥적인 것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남쪽 유다 왕 히스기야가 한번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가 주의 구원하심의 뜻하심 안에서 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이어지고 있는데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의 병 나음을 인하여서 예물을 보내왔는데 히스기야가 기뻐하여 그의 궁중의 보물과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이사야 선지자가 묻기를 그 온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으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보았는가를 질문함에 대충 답변하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집의 소유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가 되고 남을 것이 없을 것과 그 자손 중에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에 대한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히스기야의 몇 마디의 언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 히스기야는 성도들의 모습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그러한 연단의 시기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비교되어지는 것은 바로 욥의 순수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사야가 질문한 것에 히스기야가 다 답한 것으로 언급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벌을 내리심을 언급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실은 히스기야의 옳은 답변이 아닌 것과 또한 다 답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답변에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과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변만 있고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였느냐’는 이사야 선지자의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과 그 순전함을 잃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사야 37장과 38장에서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그러한 글들을 하나님 앞에 펴놓고 그 정당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분별력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자신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함을 이루어주시기를 위한 자신의 고통이라고 함의 부당함을 놓고 기도할 줄 알면서도 자신이 들은 말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질문된 답변에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은 그의 순전함이라고 함의 정당함이 이미 판단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욥과 비교되어지는 것으로 언급한 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욥에게도 있었는데 그는 순전함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욥은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욥의 아내가 욥의 받는 고통을 인하여서 말하기를 그래도 그대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을 했을 때에 욥의 고백인 것입니다. 삶의 모습에서 정황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에서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모습이라고 함을 통한 그의 경건의 순전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히스기야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그 예물이라고 함과 방문함에 대한 예를 갖춘 것은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그에게 선함을 말하지만 이교도의 입장에서 그 정황적 입장에서 그 되어진 것의 그 근원이 무엇이냐는 측면의 답변을 구하는 것으로 주목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 히스기야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가 취하여야할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핍박의 실체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이것을 묻는 이사야에게 답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에 있어서 그가 기뻐하며 그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은 가운데서 시험에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시험을 통한 분명한 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앞서 히스기야의 본분은 그의 이름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라는 증거가 그의 존재적 모습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던 것을 기억할 때에 그의 모습을 잊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핍박’이라고 하는 것이 형태적 순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강압적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죄악의 교묘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스기야는 주의 말씀 안에서 분별하여야 했으며 그것이 경건으로 인한 순전함을 지키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증거하여야 함이 옳았던 것입니다.

핍박의 순한 모습의 형태를 취함에 대한 예를 든다면, ‘요나’ 선지자의 경우입니다.(욘 1:1~3)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그 소명을 받았는데 큰 성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려하여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가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의 순전함이라고 생각하기에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스올의 고통 속에 기도하여야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되어지는 일들이 잘 된다는 생각들, 그리고 외형적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외형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에서 비로소 교회의 존재적 정체성이나 성도의 존재 및 신앙이 평가되어질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라는 생각은 진정한 경건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막 13:1~2)

그럼 우리가 다시 주목하게 되어지는 히스기야의 이러한 죄악이라고 함을 허락하신 가운데서 읽게 하시는 주의 뜻하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의 권세의 깨어짐이라는 그 종말의 때의 모습과 그 시험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단 12:7)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의 구원받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주의 은혜로 회개하며 그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히스기야의 죄로 인하여 넘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마지막이 아닌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이후에서는 주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과 메시야의 고난과 구원하심에 대한 예언하심의 실체를 증거하는 말씀 안에서 오늘 본문이 증거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귀한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문제라는 측면에 있어서, 내면적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의 보기에 기뻐하는 것은 주의 판단의 정당함을 받기를 주저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책망을 받고도 자신의 시대에는 평안이 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는 히스기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자하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주관적인 측면의 실제적인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를 자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과 삶의 정당함을 찾는 즉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을 이루는 가운데서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실천하고 힘써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성도들은 바로 히스기야의 모습과 같은 존재적 반열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강압적으로 나타나는 욥의 모습과 달리 아주 순탄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상식적 보편의 판단에 비로소 납득 당위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이 있는 가운데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는 종말의 때에 있어서도 주의 위로하심에서 기쁨으로 씨를 뿌리며 결실을 맺는 자들로서 전혀 낯설지 않는 모습으로써, 언제나 함께하시며, 주의 뜻하신 때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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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18, 2004

예수님께 듣는 종말의 징조

2004년 10월 1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1:20-38
예수님께 듣는 종말의 징조

‘징조’라는 것은 ‘어떤 일이 생길 기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기미’라는 뜻은 ‘생각의 지향성이나 취미 따위가 일치하거나 가까워서 은연중에 서로 이해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합해보면 ‘어떤 일이 생길 것에 대하여서 관계되어지는 생각의 지향성과 같은 것이 일치하거나 가까워서 은연중에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의 지향성이라고 함에 대한 인식이 어떤 획일적 개념이 아니라고 할 때에 상대적 다양성이라고 함이 또한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인해 혼란을 가져오게 되어지는 경우가 수반되어지는 가운데서 짐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것에 대한 사실을 어떻게 말하는가 또는 말하지 못한다면 임의적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여러 가지 징조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징조가 말하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라면 그 해석자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4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 날은 형벌의 날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아이 벤 자와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음과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잡혀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방인들에게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밟힐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을 것이고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할 것을 말씀하시며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타고 오심을 볼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런 일이 있으면 구속이 가까웠음에 대한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무화과 비유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움에 대한 것을 알도록 말씀하시고 있으며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룰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진다고 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4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스로 조심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이 종말의 날이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심과 밤이면 감람원에서 쉬심에 따라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누가복음 21장 1절에서 19절의 말씀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함을 기억하면서 종말에 대한 징조를 구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심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나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시대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 교회의 시대를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그 실제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곤고한 자리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에 있어서 즉각적으로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구약적인 교회의 시대를 포함해서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가운데서의 공식적인 실제의 모습까지 포함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심은 이사야와 미가의 예언의 말씀을 따를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미가와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던 것입니다.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2)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하심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기득권적인 자신들의 성에서 나올 것과 또한 그러한 아집적인 주관적 실제를 가지고 자랑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가 아닌 잘못된 교훈으로 사람을 낳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아이 벤 자의 받을 화를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진정으로 거짓된 정당함에 따른 사실들에 대하여서 곤고한 모습을 취하는 가운데서 이방인에게 밟히는 수모를 겪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왕하 18:26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의 인식을 비교할 것)

일월성신 징조에 대한 말씀하심과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할 것과 같은 그리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은 시대를 분별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구약에서는 ‘시대’라는 말과 ‘시간’이라는 말의 같이 사용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증거적인 언어적 표현이 있었습니다. 즉 세대를 분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세월을 아끼라고 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이라고 함에 대한 사실의 근거를 분별하는 것과 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는 하나님이 창세 때에 정하신 질서의 한 표본이며 그로 인한 인식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하늘의 별들로써 위성으로써의 태양과 각종 천문적인 별들은 시간과 상관성이 있음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무의식적으로도 인식해왔습니다. 즉 그러한 것이 점성술과 같은 역사초기와 오늘날의 무속신앙으로 변질되어지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성육신하심을 알리실 때에 이미 예정하신 가운데서 별을 통하여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시간이라고 함 속에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실제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섭리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있었고 이것은 주의 천사들의 증거로 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헤롯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왕이 나심에 대한 혼란과 곤고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또한 유아학살로 인해서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하게 되어지는 그러한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징조적 개념으로써 일반적인 범신적인 하늘의 이치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만으로 이해되어질 수 없는 가운데서의 혼돈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게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께서 그러한 상대적 확실성이라고 함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오심이 구름타고 오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의 의미로 나타나시고 있고 또한 이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증거도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구주와 심판자로서 다시 오심에 대한 것을 주목할 때에 구속의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신다고 함을 기억하고 우리의 머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주의 말씀의 주관적인 것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증거하시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하심의 종말적 징조에 대한 해석을 마치시는 가운데서 그것에 대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심이 이어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심과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심이 언급되어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한다는 것은 임의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통한 주의 형상을 입은 자들로서의 합당히 행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서의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아주 평범하게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라고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그 첫 번째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도록 가르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절대자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서의 실재를 분별하는 또한 실제를 증거하는 자리에 서는 자들로서 성도들의 삶의 방향과 의도와 힘씀이 정초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종말에 대한 징조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복음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주의 은혜로 그 복음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알기 전까지는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시간 속에 역사 속에 오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만이 진정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자존의 하나님의 성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이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 이름을 힘입을 때에 모든 것의 주관적이면서도 진정한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의 상대적 표현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경을 받으며 그 말씀의 사실성이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이라 함에 있다고 할 때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는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나감이 기록된 뜻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징조의 해석에 따른 시간과 세월의 임의적 해석에 따른 혼돈된 가치판단과 주의 말씀을 흐리게 하는 자들의 말들에서 벗어나서, 주의 말씀하심에 따른 사실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주의 구속하심의 은혜의 실제의 자리에 서며 구원의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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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0월 14, 2004

야생마

2004년 10월 1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5:1-27
야생마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뜨거운 감자’ 즉 감당하기 어려운 또는 회피하여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 현안적인 문제로써 부각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떠넘기게 되어지는 경향의 어떤 문제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것으로 소란스럽게 하는 사람에게는, 그 기득권적인 특정 사회에서는, 야생마(野生馬)라는 수식이 붙일 수도 있는 경향이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답도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답변하지 못한다는 것과 답변이 없다는 것은 또한 항상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입각한 야생마적인 길들여지지 않는 자가 있을 때에 그를 길들이고자 하는 전문가들이 나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형식적인 표현의 동일함을 말할 수도 있는 말씀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 받게 되어지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말씀하심을 또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3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스도가 도임하여서 벨릭스 총독을 대신하게 되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유대인들의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그러한 의도에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서, 다시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사도바울을 심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심문하여도 불의한 일이 없음에 대한 바울의 언급과 가이사에게 바울이 심판을 호소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스도가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을 비공식적으로 만남과 사도 바울을 심문한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큰 위세를 나타내며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을 함께 신문소로 들어오게 하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라고 하여 심문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그립바’왕과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특히 아그립바 왕 그의 이름의 뜻은 ‘야생마를 길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자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그와 함께한 버니게의 뜻은 ‘승리를 거둔’이라는 뜻의 증거자들이었음을 주목합니다.

사도행전 17장 이전부터 사도 바울에 대하여서 유대인들의 집요한 비판과 소동과 소송이라고 함을 행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주의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 기정사실인데 그러한 것을 핑계할 수 있고 배척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합리적 당위성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현안으로써 벨릭스에게서 구류당하고 심판받았던 사도 바울이 베스도와 아그립바에게 심문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정치적인 사범으로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결국 사도 바울을 마치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 같이 인식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승리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정황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행복'(happy)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베스도는 페스티발(festival) 즉 '축제'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아그립바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사람의 행복이라고 함을 구속함을 받은 자의 행복(롬 4:6~9)이라고 함에서 그 행복을 말할 수 있느냐는 심문과 자신들의 임의적 축제의 기준과 자신들의 임의적인 기득권에서 해석한 야생마 취급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핍박하게 되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광야교회(행 7:38)의 모습은 정착민들에게 있어서는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또는 정착하지 못한 자들로써 야생적인 민족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세례요한의 증거로써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 1:23)와 같은 것이 그 정체성에 대한 세상적 판단을 받을 때에는 야생마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기득권적 소유라고 함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임의적 행함이 옳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을 심문하고 있는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를 길들이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승리한 것과 같이 자의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자의 모습이 바로 이들의 존재적 증거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위세적인 측면에서는 화려할 수 있지만 그 승리의 실제는 불법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을 정죄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으며 또한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부부로서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사이로써 그 함께함이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야생마적인 개념으로 잘못되게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길들이겠다는 것은 그 승리를 거둔다는 생각이 합당하게 설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음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또는 무엇이 ‘야생’이라는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떤 것이 그와 같은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할 때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의 존립적 정당함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과연 야생이 되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맛이나 일이나 생각들이 길들여진다는 개념에서는 어떤 자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국한되어진 가운데서도 진정한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재가를 받게 되어지는 곳에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그의 구속함을 얻는 자로서의 자유가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에서 야생마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고 하여도 진정한 자유와 존재의 구원으로 인한 존립적인 정당함을 받는 자리에 서는 것이 진정한 평안을 주는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으로써의 버려진 야생의 자리에 심판의 자리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상대적인 것에 길들여진다는 것의 국한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자유를 말하지 못한다는 상식적인 소심함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주의 말씀하심의 국한 속에서도 실로 아름다운 기업과 자유와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되어지는 예수님을 믿는 기쁨이 있어서, 이제는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길들여진 야생마와 같이,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여서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고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지혜로운 자의 모습과 같이, 주님의 마차를 끌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주의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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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11, 2004

인내로 영혼을 얻으리라

2004년 10월 1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1:1-19
인내로 영혼을 얻으리라

상대적인 사회에서 어떤 하나의 개념이라든지 아니면 자신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을 고수하려고만 한다면 여러 가지 편협함에 대한 판단과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다원화되어지는 사회에서의 부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미련한 고집으로써 미화되어지는 인내로써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독불장군과 같이 세상을 살아감에 대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대적이면서도 그 분명함을 말하여야 하고 그 당위성이 있는 것은 또한 있다고 함에 그 판단들에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위성이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은 그 인내가 비화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의 열매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핑계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써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주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상대적 이의(異意)로 인한 핑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의 사실을 위한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헛된 경영에서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핑계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헛된 경영을 하는 그 때가 종말의 때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복음에서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부자들의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시고,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모든 사람보다도 많이 넣었음을 말씀하시면서 가난한 과부가 구차한 가운데서도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날이 이르면 다 무너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들이 예수님께 주님이 말씀하신 그런 일이 이루려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는지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종말론에 대한 강화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이 종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하심의 시작을 누가복음 20장 45절에서 47절에 나타나고 있는 모퉁이 돌을 버린 건축자들의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때를 묻는 자들에게 그 미혹받게 되어지는 징조가 있음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며, 그 미혹과 핍박에서 인내로 영혼을 얻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이 됩니다.

오늘본문 첫 번째에서는 과부의 헌금함에 대한 주의 칭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약한 자 편들기 식의 해석이 아니라 주의 말씀하시는 종말론의 그 때와 시기라고 함이 주님을 배척한 자들의 악함이라고 함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누가복음 20장에 나타나는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써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라고 함에 있어서 결국 그들이 요한의 증거와 그의 정당함에서 볼 때에 상대적으로도 핑계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함에 그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즉 주를 배척함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눅 20:1~7, 17~18)

이것은 더 나아가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음을 말씀하심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의 모습은 누가복음 20장 45절 이후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고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로써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그러한 판결 받을 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과부의 헌금으로써 두 렙돈은 이와 같은 문맥적 연결선상에서 이루어짐을 주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종말의 때를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복음전파시대이며 주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힘없는 자들의 헌금을 갈취하는 자들의 모습들이 머릿돌이신 예수님의 심판하심에 대상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오늘 본문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자들의 외적인 수단으로써의 성전의 구색을 갖춘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함이 예수님을 배척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자신들의 시대인 것을 알고 이러한 일이 어느 때에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시대와는 무관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미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칭찬하심과 성전의 규모적인 것에서 그러한 헌금을 받는 자들의 모습이 판단되었다고 할 때에 자신들과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말씀하심이라는 것을 대제사장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징조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한마디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19절의 말씀으로써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여러 가지 현상적 징조를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8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와서 임의적으로 자신이 구세주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으로 거룩함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거룩함과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대한 것으로 자신들의 배를 체우는 이단들이 있을 것과 그것으로 인한 난리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0절 이하에서는 현실적인 실제의 표징들로써 민족의 분란과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고 하늘의 변화적인 것이 있을 것인데 중요한 것은, 하늘의 징조라는 개념에서 시간을 말하는 해와 달의 소임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시간(times)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이 빛을 잃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은 어떤 전란적인 개념의 종말론적 입장이 되면서도 창조 시에 그것으로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신 말씀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그 해와 달의 소임적 증거가 증거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시간과 시간의 판단을 받는 즉 역사적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역사 속에 오심에 대한 것의 불신임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역사적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역사적 구속하심을 믿지 못한다면 미혹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많아지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의 징조가 되어지는데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상적인 역사라고 하는 것을 바도 받지 못하고 진화론적 개념의 창조설을 말한다든지 성경에 있어서 본문비평을 비롯한 고등비평이라고 하는 것들 소위 오늘날에 있어서 성경을 문학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시간이라고 함이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그러한 정당하지 못한 모습을 전제로 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것을 행하고 있는 자들의 하늘의 큰 징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러한 인식의 확산은 사회적 인륜적 관계에 큰 영향력을 줄 것이며 이것은 절대의 상관성을 말하는 가운데서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과 그 미혹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 증거는 자기 자체적 절대 정당함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음을 말하게 되며 오히려 일상적인 상대적인 판단들이 판단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서 감정적으로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인 것만으로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증거를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존재는 상대적 정죄의 실제적인 판단을 받지 않기 때문에 머리카락도 상치 아니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 즉 예수님이 우리 존재의 구원의 모퉁이 돌이 되신다는 것은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는 것은 한 가지에 모든 것을 모든 실재와 사실들을 말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상대적인 편협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은 핍박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당한 핍박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의 구원을 받을 때에 그 인내는 우리 존재의 우리 영혼의 구원의 실제를 말하게 되며 누리게 된다는 것,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사실을 전체의 기반으로 받아들인다할 때는 상대적 여지를 두는 것이 상대적인 보편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모습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모순된 모습을 보는데,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생각과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한 앞서 언급한 말도 상대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열려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모습이니 너무나 제정신이 아닌 세상의 인식들을 봅니다.

특히 자존하시는 절대자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구원을 말씀하시면 그것을 상대적인 것만으로 정당함을 고려함 없이 임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 모든 핑계에 지나지 않으며 핑계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임의적인 세상 자신들의 편협한 보편적인 입장에서 편협하다고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주의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서는 많은 핍박이 있게 되지만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제와 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에서 사실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참된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가운데 주의 뜻하심과 그 인내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은사로써의 인내를 온전히 이루시는 가운데 주 예수이름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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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0월 07, 2004

부활, 이 한 소리

2004년 10월 6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4:1-27
부활, 이 한 소리

어떤 역사가는 역사를 기술하는 가운데서 언어의 생성된 시기를 언급함에 상당한 중요성과 실제성을 부여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언어 말이라고 하는 것이 그릇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 그 담아내는 것의 실재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또는 없는 것인지 또는 기만을 위한 것인지 유익을 위한 것인지 그러한 것에 따라서 때로는 식상해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삶 속에 언어의 표현으로써의 말은 상당한 의미와 사실 사건을 형성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말 못하는 사람의 냉가슴’이라고 하는 것이 표현 못하는 사람의 답답함으로써 종종 사용되어지는 것을 기억할 때에 그 말이라고 함과 그 귀결되어지는 그 내용이라고 함의 여부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동일한 내용에 대한 다른 설명의 대립적인 경우를 주목하게 되는데, 결국 어떤 전달하고자 하는 것의 사실여부와 그 실제적인 판단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까지 주목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더둘로’라는 변사와 사도 바울의 법정적인 대립에서 언급되어지는 그 사실들에서 복음의 중심을 읽게 되어지는데 주목하며 복음의 사실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4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 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함께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와서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 고소의 내용은 유대인을 다 소동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요, 성전을 더럽게 하려는 자라고 함의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라고 함이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의 내용으로써는 소동이라고 함을 말하기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고 함과 그러한 근거적인 측면에서의 결핍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나사렛 예수에 대한 것을 말함에 결국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벨릭스가 사도 바울을 지키도록 하고 그에게 자유를 주는 가운데서 그를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음과 그의 차기 임기까지의 시간 동안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사도 바울을 구류하여 둠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그것에 대한 불의함을 말하는 자들의 합리성의 재고라고 함을 세상의 법정적인 입장에서 고찰함에 대한 것과 그것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에서의 구원과 그로 인한 기쁨과 행복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더둘로 변사가 말하고 있는 것의 내용적인 것 즉 원고 측의 입장은 세 가지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중적인 질문이라고 함에서 그의 임의적 방향성을 주어서 결국 정치적 사범(事犯)으로써 로마의 법정의 희생자로 예수님을 세우고자 하는 합목적적인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에 대한 직접적인 주목을 하지 않은 가운데서의 현행범적인 개념의 언급으로 일관하는 것은 기각되어질 수 있는 것임을 언급하고 있고, 결국 신앙에 관한 내용인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이 그 핵심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었던, 핑계할 수 없었던 벨릭스는 사도 바울을 차기 후임자가 올 때까지 그를 구류하고 그의 일상적인 것을 허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부활에 대한 것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서 4장의 내용적 증거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롬4:2~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그리스도 예수 주님께서 기름부으심과 성별을 말씀하시는 자존의 절대자 자신으로서 죽음이라고 함의 실재적 사실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를 거룩하게 하셨음과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서,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 정죄의 당위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당함의 재고를 생각하지 못하고 합리성의 임의적방향성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원고 측과 피고 측의 바뀜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심판을 받음에 대한 핑계치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둘로의 정치적 사범으로 이익적인 대변을 통한 예수님을 기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판례가 있는 가운데서의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벨릭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22절 참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로마에서도 아레오바고에서의 스토아철학자들과의 변론에서 알 수 없는 신이라는 개념의 로마의 신관에서는 사도바울을 정죄치 못하였고 그러한 것은 에베소에서도 아데미 신에 대한 것에서도 이미 정죄치 못한 판례가 있었음에 대한 것을 총독으로서 알고 있었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기소함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존중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소가 승소한다면 벨릭스에게는 손해 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여지도 또한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벨릭스 그의 정치적 민감성이라는 것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도 바울에게 그만한 예우를 하여서 그를 가두어두나 그의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재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벨릭스의 이름의 뜻은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현실적인 실제의 여러 가지 판단을 할 때에 자체적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안한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은 갇히는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도 실제적 자유를 말하게 되며 행복의 실제를 누리게 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성도의 삶, 전도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행복하냐는 그러한 질문에 기소되어지는 것이 성도들의 기본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의 불이익을 말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하는 자로서의 진정한 자유와 그 가운데서의 행복의 실제를 말하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롬 4:6~9 참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기독교에 대하여서 여러 가지 비판되어질 수 있음의 합리적인 비판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현실적인 당위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과 거룩함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주의 부활하심에서 비롯되어지는 의롭게 하심과 주의 성도로서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상대적인 언급들 즉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상대적인 현실적인 당위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며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그러한 자들의 현실적인 행복의 이의가 있을 수 있고 현실적으로 당위성의 강요로 핍박하게 되어지지만 구속받은 자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 전도자로서의 성도들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말할 때에는 그 또한 구원의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 설수 있는 은혜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주의 부활하심에서 주어지는 그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주어지는 의로움이요 그 사실임을 증거하는 가운데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기쁨과 증거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그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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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04, 2004

산 자의 하나님

2004년 10월 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0:27-47
산 자의 하나님

어떤 방송매체를 통하여서 기독교에 대한 것을 오도하는 소설의 베스트셀러가 됨에 대한 것과 그 영향력이라고 함,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서 유럽의 어떤 주교의 반론적 입장과 소설의 입장의 개연성을 지지하는 어떤 사람의 인터뷰도 보이며 방송한 것을 기억합니다.

주교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소설임에 대한 것을 강조하며 사실의 개연성임을 주장함에 있어서 반론하는 자의 입장은 개연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 될 수 있음에 대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음에 대하여서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는, 엉뚱한 이야기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들의 사실의 분별을 개연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또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말들이 모두 빗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의 실존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진정한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 상대적인 한 견해이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자기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가운데서 비로소 절대 보편적인 사실이 성립됨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삶의 실존과 사실의 임의적인 입장에서 비판의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는 한 해프닝(happening)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변론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산자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산 자로서의 그 중심과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4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1절에서 4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중에 어떤 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그 부활이 없음에 대한 것을 합리적으로 반론하기 위해서 후사에 관한 한 예를 들어서 주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즉 예의 내용은 한 여자가 죽고 후사를 위하여서 그 형제들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부활 이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4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하심인데, 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는 앞서 언급한 내용적 당위성에 메이지 않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부활은 모세도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기준으로 보였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서기관 중에 어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옳음에 대한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저희가 감히 더 물을 수 없었음을 본문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41절에서 4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시편에 언급되어진 말씀으로써 다윗이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주로 칭함에 대한 모순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에 앉는 것과 같은 자로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의 판결이 중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는 합리적 인식으로써 주의 가르침과 행하심에 대한 것에 비난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산 자(alive)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하심입니다.

사두개인들의 합리성이 돋보이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세우시는 교회가 그 부활에서 그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핵심적인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함에서 이야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거짓된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모두 무덤에서 죽음에 매여 있는 가운데서, 이들과 달리 진정한 생명의 실존을 주관하지 못하는 자로써 나타나고 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서 그러한 것에 메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과 그것의 객관적 실제로서의 증거가 바로 주의 가르치며 증거하시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주의 부활에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거룩함의 수여와 재가와 재가적 권세까지 성도에게 주심에 있어서 주의 구원의 실제를 취하며 증거하도록 하셨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비판적 상대적인 측면에서 반론하고자 할 때에는 의식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입장인 ‘부활이 없다’라는 개념을 구약적 표현의 사실들에서 찾는다는 그 당위성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라고 함의 합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정당한 해석이라고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은 구약적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후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다윗이 그리스도로 칭함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이것은 세상적 합리성자체로써 구약을 해석함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직접적으로는 저 세상이라고 하는 천국의 비유적 언급을 하시면서 그곳은 상대적인 합리성의 판단에 메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구속적인 하늘’(redemptive heaven)로써 표현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구속자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실존적인 하나님나라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구속자가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성에 따른 판단은 상대적인 모순적 차원의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36절과 같은 천사들과 동등함과 또한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에 대한 언급과 같이 현실적인 요소를 거룩하게 하신 가운데서 비교되어질 수도 있는 형식을 갖추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도 상대적인 판단의 메임이 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유비적인 개념의 하늘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받을 수 있는 인식의 차원이 아니면 사변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의 실재를 현상적인 개념에서 볼 뿐 자체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가 살아 있으나 살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로써의 죽은 자에 비교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상대적 합리성의 정도적인 모순적 판단을 비로소 의지하거나 또는 받지 않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들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며 그들을 의롭게 하셨고 의롭다고 하실 자로서 자기 계시를 말씀하심이 산 자(alive)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다고 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은 모세를 통하여서 보였음을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심으로 칭하시며 산자라고 하셨는데 이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언급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그리고 그곳에서부터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사람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셈족이었음과 그 셈족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에서 사실을 말하는 자들의 특성적 증거자들이었음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는 역사적 인륜적 개념에서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정당한 사실로서 예언한 다윗의 자손을 다윗의 주로 칭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통하여서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그 역사적 인륜적 사실의 시비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하심을 기억하도록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45절 이하에서는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의 모습에서는 결국 물질적 많음에 대한 의식에서 더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가르쳐야 하는 당위성에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오래 기도함으로써의 보상적 개념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외식하는 자들로서 나타날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하신 17절과 18절에 언급한 것과 같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음과 사람이 그 위에 떨어지거나 돌이 그 위에 떨어지는 것의 어떠함을 읽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너무나 단순하게 나타나면서도 자신들은 아주 지적이며 최선의 인식을 가진 자들로서의 비판의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또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비판과 비난의 당위성을 가진 것과 같이 자기기만의 자리에 서는 경향이 참 많습니다.

그러한 것은 ‘비슷하다는 것’과 ‘똑 같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인데, 사람들이 ‘비슷하다고’ 많이 인식하고 있다고 하면 그러한 보편성을 의지하여서 ‘똑 같다’는 식의 단정적 실제를 말하고자 하는 잘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함부로 비판의 성립되어지는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잠잠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복음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인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는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산 자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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