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0:27-47
산 자의 하나님
눅20:27-47
산 자의 하나님
어떤 방송매체를 통하여서 기독교에 대한 것을 오도하는 소설의 베스트셀러가 됨에 대한 것과 그 영향력이라고 함,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서 유럽의 어떤 주교의 반론적 입장과 소설의 입장의 개연성을 지지하는 어떤 사람의 인터뷰도 보이며 방송한 것을 기억합니다.
주교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소설임에 대한 것을 강조하며 사실의 개연성임을 주장함에 있어서 반론하는 자의 입장은 개연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 될 수 있음에 대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음에 대하여서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는, 엉뚱한 이야기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들의 사실의 분별을 개연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또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말들이 모두 빗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의 실존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진정한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 상대적인 한 견해이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자기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가운데서 비로소 절대 보편적인 사실이 성립됨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삶의 실존과 사실의 임의적인 입장에서 비판의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는 한 해프닝(happening)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변론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산자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산 자로서의 그 중심과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4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1절에서 4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중에 어떤 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그 부활이 없음에 대한 것을 합리적으로 반론하기 위해서 후사에 관한 한 예를 들어서 주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즉 예의 내용은 한 여자가 죽고 후사를 위하여서 그 형제들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부활 이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4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하심인데, 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는 앞서 언급한 내용적 당위성에 메이지 않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부활은 모세도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기준으로 보였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서기관 중에 어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옳음에 대한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저희가 감히 더 물을 수 없었음을 본문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41절에서 4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시편에 언급되어진 말씀으로써 다윗이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주로 칭함에 대한 모순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에 앉는 것과 같은 자로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의 판결이 중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는 합리적 인식으로써 주의 가르침과 행하심에 대한 것에 비난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산 자(alive)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하심입니다.
사두개인들의 합리성이 돋보이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세우시는 교회가 그 부활에서 그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핵심적인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함에서 이야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거짓된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모두 무덤에서 죽음에 매여 있는 가운데서, 이들과 달리 진정한 생명의 실존을 주관하지 못하는 자로써 나타나고 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서 그러한 것에 메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과 그것의 객관적 실제로서의 증거가 바로 주의 가르치며 증거하시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주의 부활에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거룩함의 수여와 재가와 재가적 권세까지 성도에게 주심에 있어서 주의 구원의 실제를 취하며 증거하도록 하셨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비판적 상대적인 측면에서 반론하고자 할 때에는 의식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입장인 ‘부활이 없다’라는 개념을 구약적 표현의 사실들에서 찾는다는 그 당위성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라고 함의 합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정당한 해석이라고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은 구약적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후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다윗이 그리스도로 칭함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이것은 세상적 합리성자체로써 구약을 해석함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직접적으로는 저 세상이라고 하는 천국의 비유적 언급을 하시면서 그곳은 상대적인 합리성의 판단에 메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구속적인 하늘’(redemptive heaven)로써 표현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구속자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실존적인 하나님나라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구속자가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성에 따른 판단은 상대적인 모순적 차원의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36절과 같은 천사들과 동등함과 또한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에 대한 언급과 같이 현실적인 요소를 거룩하게 하신 가운데서 비교되어질 수도 있는 형식을 갖추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도 상대적인 판단의 메임이 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유비적인 개념의 하늘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받을 수 있는 인식의 차원이 아니면 사변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의 실재를 현상적인 개념에서 볼 뿐 자체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가 살아 있으나 살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로써의 죽은 자에 비교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상대적 합리성의 정도적인 모순적 판단을 비로소 의지하거나 또는 받지 않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들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며 그들을 의롭게 하셨고 의롭다고 하실 자로서 자기 계시를 말씀하심이 산 자(alive)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다고 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은 모세를 통하여서 보였음을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심으로 칭하시며 산자라고 하셨는데 이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언급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그리고 그곳에서부터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사람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셈족이었음과 그 셈족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에서 사실을 말하는 자들의 특성적 증거자들이었음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는 역사적 인륜적 개념에서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정당한 사실로서 예언한 다윗의 자손을 다윗의 주로 칭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통하여서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그 역사적 인륜적 사실의 시비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하심을 기억하도록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45절 이하에서는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의 모습에서는 결국 물질적 많음에 대한 의식에서 더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가르쳐야 하는 당위성에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오래 기도함으로써의 보상적 개념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외식하는 자들로서 나타날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하신 17절과 18절에 언급한 것과 같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음과 사람이 그 위에 떨어지거나 돌이 그 위에 떨어지는 것의 어떠함을 읽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너무나 단순하게 나타나면서도 자신들은 아주 지적이며 최선의 인식을 가진 자들로서의 비판의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또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비판과 비난의 당위성을 가진 것과 같이 자기기만의 자리에 서는 경향이 참 많습니다.
그러한 것은 ‘비슷하다는 것’과 ‘똑 같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인데, 사람들이 ‘비슷하다고’ 많이 인식하고 있다고 하면 그러한 보편성을 의지하여서 ‘똑 같다’는 식의 단정적 실제를 말하고자 하는 잘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함부로 비판의 성립되어지는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잠잠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복음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인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는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산 자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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