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5월 15, 2007

죽음의 지혜를 벗어나

2007년 5월13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상 2:13-25
죽음을 자초한 악한 종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구별하여주심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알거나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사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서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적인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생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말한다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라는 말씀에 대한 일반적 은총에서 있게되어지는 사람들의 의식적 지혜의 발상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라는 장소적 개념이나 또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의 특수적 입장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면서도 일반은총적 개념의 사실 속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가능하고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그러한 입장에서 재고되어질 수도 있지만 여러 구성적 경향의 '많음'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정당한 인식의 개체적 소수로서의 그것이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깨닫게 되는 진심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작은 말들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가지 실제적인 정당함을 고려하지 않은 많은 말들보다도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적인 개념은 기만적 요소로서 그 판단의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함이 하나의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가 밧세바를 만나서 수넴여인 아비삭 여인을 아도니아 자신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밧세바는 좋다며 솔로몬에게 말하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일로 말하려고 솔로몬에게 나아가니 솔로몬이 어미에게 예를 갖추고 그를 우편에 앉히는 가운데서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청을 솔로몬에게 말하자 솔로몬은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라는 말과 함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하고 아도니아를 죽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도니아가 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악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그것과 다른 선한 종들로서의 지혜를 구함과 그로 인한 충성으로 수종들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합니다.

먼저, 아도니아의 구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솔로몬이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이 왕위를 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의 왕위 계승권의 실재를 위해 그 왕국의 질서적 당위성을 따라서 말하는 아주 간교함이 배여있는 것입니다.

그의 인식을 읽을 수 있는 것은 15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그의 인식의 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고 그 왕위계승에 대한 불만과 거짓을 주목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왕상 2:15)

전반적인 측면을 상식에서만 본다면 별로 흠이 없는 겸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진정한 상식으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재적인 당위성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도니아는 그러한 개념이 아직도 없는 것입니다.

(상식이 스스로 실존적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는한 상대적인 존재인 한 그 자체적 정당함을 취할 수 없는 가운데서 절대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납득당위성을 상대적으로 취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속성적 당위성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실존할 수 있습니다.)

아도니아의 진술 속에서 '내 것이었고'라는 말은 '완료형'으로서 기존사실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외적인 상황의 반전으로서의 하나님 여호와의 당위성에 상대적으로 밀렸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상황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형식적인 도의적으로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 예를 갖추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적 반전 정도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진정한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는 거짓을 전제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 또는 '모든', 이라는 말들은 상황적 차원에서 특정한 전체를 말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개체적인 개념으로도 말할 수 있는 판단하에 있는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이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재가를 받는 경우에는 상대적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정황하에 비로소 동일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면 그것은 사실로서 상황논리적 판단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앞에서의 실재의식과 그 실제적 판단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도 그것이 참되지 못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악함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아의 이러한 개념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에게 지혜의 근거인 것과같이 자신을 기만한 가운데서 밧세바에게 그 자신의 왕위를 위한 당위성을 위하여서 인식의 상황적 변화를 위하여서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하는 것입니다.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함에 있어서는 사실 자신의 왕위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도니아가 왕으로서 자신을 세울 때에 결정적으로 솔로몬에게 지게 된 것은, 솔로몬이 다윗의 타던 노새에 앉았기 때문이며, 다윗의 재가를 말하는 정당함이 아도니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작은 하나가 모든 민심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 인식을 솔로몬에게 두는 것이 옳다는 당위성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당성의 반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여전히 남았고 또한 가장 유력한 것은 아비 다윗의 시종을 들었던 아내와도 같은 수넴여인 아비삭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아비삭'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잘못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삭 : 빗나간..'이라는 뜻과 '아비: 아버지'라는 말들이 합성되어진 이름으로서의 아비삭의 이름을 보는데 그것은 그 이름의 존재적 증거가 아도니아에게 반전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을 왕위로 세운 아버지는 잘못을 범했다'라는 것과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아도니아와 결혼해도 상대적 윤리성에서도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것과 바른 아버지 다윗의 영광은 아도니아에게 있는 것이라는 그러한 자기 정당함을 세상에 알려 결국 아도니아가 왕이 되는 것이 정당함을 나타내려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솔로몬은 왕위를 구하는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의 죽음이 마땅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도니아의 악함에 대하여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아도니아도 넷째 아들로서 앞선 세 명의 형들이 다 죽고 난 다음에 왕위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납득되어진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왕이 되려는 노력과 그것을 위한 질서를 따른 가운데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에 있어서 윤리적 잘못이 있겠는가 하는 측면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그 실체라고 하는 것이 상황적 개념에서만 임의적으로 보편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에,더욱 하나님의 실제적 재가라는 특수상황과 관련되어진 가운데서는 그러한 생각 일변도라는 것은 오히려 보편을 가장한 개체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재가의 절대성의 부여와 그에 따른 사실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떠나서 선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진정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불특정 시기와 장소와 사람들의 인식의 동의적 차원의 한 형태적이라는 개체적 동의의 당위성을 얻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당위성으로서 사실을 말하기에는 강변하기에는 편견으로서의 실존적 판단하에 있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재가 있는 하나님의 뜻하심의 사실을 반전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삭을 구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윗과 동침하지 않은 가운데서 윤리적 입장의 법적인 측면으로서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비삭이 다윗과 성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여도 아내와 같은 자리에 있도록 천거되어진 자로서 자신의 아비의 영광으로서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자를 상관하겠다는 것은 부모의 하체를 취하겠다는 것, 부모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조롱하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노아의 아들 함의 모습과 동일한 자리에 서는 죄'(창 9:21~25)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과 같이 종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왕상 2: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즉위한 바로 직후에 있게 되어지는 자의 모습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특별사면이라든지 어떤 그 덕을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아도니아에게 그렇게까지 행하지 않는 것이 솔로몬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아도니아도 그러한 점을 마음에 두고 그런 무리수를 두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며 그것을 모를리도 없는 솔로몬의 입장에서 강경책을 두지 않는 것이 상황적으로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왕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비롯되어진 합당한 당위성이 있는데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시비하겠다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용서할 권한이 솔로몬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실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으로서 죄없다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하에 솔로몬 자신이 임의적으로 무죄를 선포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아도나이의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가만히 주의 양무리에 들어온 자'를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측면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양들을 약탈하려고하는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인 자신의 질서적 개념으로 생각하려는 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다서 1:4)

'아도니아'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하신 말씀을 받는 자의 모습이 어떠함을 말씀하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아도니아처럼 상대적인 정당함만 생각하고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구별을 하고 그것의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들어와 자신의 입장을 위한 색욕적 개념으로 교회를 이해하려는 그리고 주의 양들을 잘못 먹이고 있는 자신의 양들로 전락시키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상식도 없는 것이 신앙이다'고 함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니라 상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실존적 의미와 사실이 성립되어진다는 것으로서 인식함이 옳은 것이며, 이것이 솔로몬으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한 모습이 되어짐을 믿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아도니아와 같은 잘못된 거짓되고 악한 죽음을 부르는 지혜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실제적인 섬김을 통해서 때를 따라서 주의 영혼들과 굶주린 영혼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는 귀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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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1, 2007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2007년 5월9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딤후 3:1-17
고통하는 때와 성경

한번은 모 도서관에서 고통과 죽음과 같은 인생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이라고 하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다는 것과, 또 일반 서점에서 읽게 되는 사람들의 인식적 경향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부정에 대응하는 가운데서의 긍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재치있는 처세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의 인식의 한 단면이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적 입장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노력과 긍정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의 지혜를 담은 지식들의 모습은 인생사에서 통념적인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개념적 실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할 때에 과연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온유함으로 세상에 우리 성도들의 소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러한 중심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을 말하며 강조하여 이것을 알라는 말을 하고 있고 그 내용적 기술이 이어짐을 봅니다. '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임을 말하며 그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며 욕심에 끌려서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며 모세를 대적한 두 사람과 같이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이어서 주께서 사도 바울을 건지셨음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악한 사람과 속이는 자들의 행보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 일에 거하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언급하면서 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욱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음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어서 성경을 알았다는 말과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지고 있는 예레미야의 증거와 모세의 증거가 같이 증거되어지고, 호세아적 말씀들이 동일한 증거적 말씀으로 나타나며 배경이 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먼저 예레미야와 모세의 증거를 먼저 주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하심은 인류의 범죄때 부터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하와가 진정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고 있었다면,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어도 그렇게 크게 잘못이 될 것이 없다는 상대적 당위성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뱀이 유혹하게 되는 그러한 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을 수 있는 개연적 입장이며 수용당연성도 재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그 당시나 현실에서도 납득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 상대적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가 말씀하신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의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따르지 않은 것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실적 실존에 나가는 것이며 고통의 시작적 기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시간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게 되는 종말 즉 시작과 이미라는 개념으로서의 시작을 나타내시는 주의 계시적 사건입니다. 물론 여기서 상대적인 여러가지 재고되어질 수 있는 합리적인 질문의 요소가 있으나 이미 성립과 실존에 대한 정당성 시비에서 부정적 사실을 말하기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만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눈물의 선지자로서 예레미야가 창세기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에 대한 사실적 개념이 그 왕국적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있음을 인한 그 고통의 기원을 지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읽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세를 언급하면서 그 종말적 입장에 고통의 때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2절 말씀에서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도 않는다는 것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계명에 대한 인륜적 약속있는 첫계명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서 애굽의 인식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이는 한역인데 이집트를 말하며 이는 '미즈라임'을 음역한 것으로서 이 미즈라임은 함의 아들입니다. 이 함은 노아의 아비로서의 권위를 무시하였습니다. 술취한 노아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부모의 존중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공경하라고 하심과 그에 따른 것에 있기 때문에 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인데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과 그것에 대한 시정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좀더 바람직하도록 함이 자식된 도리요, 그 수치를 감추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판단이 되고 비판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최종적인 본질적 자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대표자로서 애굽왕 바로는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말을 한 것을 주목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고통의 시대의 고통의 주체가 될 뿐이며 다 잃는 것이라는 것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출애굽했을 때에 증거되어진 미리암의 노래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증거'(출 15장, 출 15:21)를 통해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출애굽 7장 8절에서 16절에서는 나타나는 모세가 명하도록 하여서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어지고 그 뱀이 애굽의 술사의 만든 뱀을 삼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인 8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8~9)

즉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호세아의 증거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6절과 7절에 말씀과 동일하게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음탕한 고멜이 신랑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미혹되어진 것은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어리석은 여자로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당시에 있었던 한 사건적 입장을 언급할 수 있으나 이처럼 주의 말씀의 한 증거적 차원의 한 구별되어진 예표적인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상대적인 생각과 보편인식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겨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임의적인 조작적 합리성에 자신과 다른이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만족의 사실을 강요받거나 자인하기를 강요받을 뿐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참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합의된 이성적 당위성에서 실제적으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성경을 디모데가 알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자존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 고통이 있다는 것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성경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제적 지혜의 실존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찌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서 유대인들을 이김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행 18:28), 그것을 주목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자신의 계시적 정당함을 부여받은 자신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합당하게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의 중심이었음을 읽게 되며 그것의 풀어서 생활적 개념으로 증거되어진 것이 목회서신의 실존적 증거들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죽는다 산다는 개념의 상대적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바른 성경해석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성경은 상대적으로 기록되었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증거로 인해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절대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러한 재가되어진 것으로서의 판단하에서 자존의 절대자의 영광을 담은 계시로서의 '말씀 스스로의 증거'(성경의 자증, Autopistia)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상대적인 여지와 비판의 요소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께서 그러한 형식에 재가를 하셔서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에서 상대적인 여지로서 사실을 말하지 못할 때에도 사실화시킬 수 있는 근거적 기준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본론 2번의 4)번참고 성경의보편성이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즉 고통의 때에 어떤 인위적인 자위적 개념으로서의 처세를 위한 대안으로 성경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고통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실제적인 말씀으로 주어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사실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그 본래적 기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에 따른 실재와 실제를 분별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에 모세를 통한 아론의 지팡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도록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자들이 그 실제의식이 없어서 신학적인 임의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신앙과 신학의 본질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 개념도 없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여지와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에서 이해되어지고 규정되어지는 자유의 개념으로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성립되지 않는 자유의 개념으로서의 추구함에 있어서는 학문의 깊이와 성립이 있을 수있으나 그것의 사실의 실존과 존재의 정당함은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초도 준비되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입니다.

다원적인 개념이나 실증적 개념에서 성경을 아무리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여도, 구원을 받기 위한 실증적 목적으로서 비로소 말하고 증거하며 배운다고 하여도, 그러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여도, 기독교는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개념없이 구원의 실증적 판단은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실재 개념이 없으면, 그 어떤 객관적 근거지음의 증명적 신앙과 신에 대한 개념으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과 그 사실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라는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의 합리적 정당성만을 찾고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자기 계시를 바르게 알아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을 찾는 가운데 진정으로 고통의 시간을 '이미' 지난 자로서 '아직'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실제적으로 '항상 잔치하는 자들'(잠 15:15)로서 주 앞에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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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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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07, 2007

직임과 명령이해

2007년 5월4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11:1-7
직임과 명령을 지키라

다원화되어가는 세상에서 그 사태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그러한 상황에 따른 윤리와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세상 사는 하나의 지혜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를 한다면 앞서 언급한 이 말도 상대적일 수 밖에 없음도 인정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상황에 따른 윤리와 인식 그리고 상대적 여지로서의 개선을 말한다고 할 때에 기존사회에 대한 대화하다는 것으로서의 '데모'(demo)적 개념은 과격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대화라는 개념이 그것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대화를 위한 협력과 상황에 적응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추이에 있어서 유독히, 교회의 질서이해에 대하여서 예외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그러한 입장에서 개혁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질서에 대한 임의적 판단에 따른 상대적 여지를 통한 통렬한 비판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로서의 입장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 말씀에서는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들이 알지 못하지만 앞선 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광야에서의 자녀세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셨던 재앙들과 모세의 홍해의 기적 그리고 광야생활에서의 있었던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모든 목도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직임과 명령을 지키라고 하심에 있어서 진정으로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은 어떤 것이야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것을 당시, 지금 시점에서 말씀하심은 또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서의 말씀은 주로 모압지방에서 주어지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모압지방이라고 함의 특색은 참으로 오늘날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모압지방이란 그 지명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음란한 세대를 지칭할 수 있는 구별된 지역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술취한 가운데서 그 딸들과 동침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민족의 이름으로 지칭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음란한 곳으로서 황량한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발람과 발락의 저주하려고 했던 곳이며 실제적으로 저주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 이어서 음란이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에 들게했던 것이 그 지역의 특성인 것입니다.(민 22장 25장참고)

음란한 세대는 어떤 윤리적 통념적인 것보다도 자신들의 임의적 개념의 윤리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간섭받기 싫고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꾸어 입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이 있을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말하지 못한다면 타락한 본능적 개념에 충실히 행하는 것이 자기들 생각에는 솔직하고 사실인 것과 같이 자신을 기만하는데 익숙해진 것을 말할 수도 있는 정황과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한 광야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할 때에, 표면적으로는 순종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임의적으로라도 순종하겠지만 내면적인 공허함에서 결국 순종의 사실이라는 개념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광야세대에서 자라난 자녀들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고생과 함께 '잔뼈가 굵은 자들'로서 세상 물정이라고 하는 것에 아주 눈이 뜨여진 것을 말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의 직임과 그 직임을 맡은 자로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은 상황적으로 당연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앞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며 그들이 순종의 사실로 하나님께 경배드리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중심이 읽혀질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모세는 단도직입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직임과 그 명령을 따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과 그 자녀들에게 지난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앞서 언급되어지고 읽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합당한 대안으로서의 답변이 되어짐을 또한 읽을 수 있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직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본문 6절에서는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신 11:6)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직임에 대한 판단을 바르게 하지 못한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했던 자는 고라와 심지어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레위지파인 고로 모세의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여야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더욱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음을 인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그러한 여론적 입장이 있는 때에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모세의 손을 들어주시고 반역한 자들은 땅에 삼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상황만 본다면 미리암 덕분에 모세도 목숨을 건졌고 그러한 가운데서 지도자가 되었으면 누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당위성도 있었고 다른 레위인들도 지도자로서 그들의 입장에 따라 백성을 이끌어내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실 때에 달리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음과 모세를 통하여서 인도하심에서 다른 말씀하심이 없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상황적 당위성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자존적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그 당위성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직임에 대한 상대적 여지만으로써 그 직임의 실존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 자녀된 세대들의 순종하여야 할 직임을 맡은 자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질서에 대한 임의적 반목일 경우, 그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과 그것에 대한 책망과 징벌이 있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사람들은 교회의 모습을 판단함에 있어서, 교회의 질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상대적 차이라는 개념만으로 개혁을 말한다는 명분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정당한 것과 같이 생각하는 잘못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의 실제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개연적 입장에서 준비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의 진리가 아닌 의견(opinion)으로 교회개혁의 사실을 말하려는 진정 어리석음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 역사 이해에 있어서 상대적인 정황이라는 개념으로만 주목하는 가운데서, 구교 가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목으로만 비로소 생각하는 가운데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기존 교회의 질서에 반목하는 것이 어떤 마냥 의로운 투사인 것과 같이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구교 가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자 신교가 탄생한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의 사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질서적 존재의 사실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구별하여 질서에 대한 견해를 달리한 것이 합당하며 그것이 또한 신교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 구교에서의 '성직매매'가 있었는데, 이것은 실수에 따른 윤리적 잘못이라는 개념과 다시는 그런 행위가 없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봉합되어질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직임에 대하여서 바르게 기억하지 않은 자들로서의 모습이며 그러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심에 대한 불순종으로서 죄악인 것입니다.

윤리적 또한 연약함에서 있을 수 있는 잘못은 용서할 수 있으나, 주께 불순종으로서의 성직매매라는 행위는 분명 죄악이며 이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에 입각한 아퀴나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고 그것은 증명이라는 것이 진정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개념도 없고 이성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직에 대한 직임에 대한 인식도 상대적인 개념과 임의적 절대성을 가질 뿐 진정한 성직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존의 절대자로 믿었더라면 성직을 가지고 그 특권을 가지고 재정을 채우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링크되어지는 글 각주1번참고) 그러한 하나님의 성직을 사고 파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직임에 대한 개념이 욕정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서의 모습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질서와 그 가운데서의 직임은 구별되어진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할 수 없고 그 교회질서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구별하여 주의 몸된 교회의 질서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실제적 중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신교의 교회의 질서로서의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있게되어지는 직임이라고 하는 것에 상대성에 절대성을 임의적으로 부여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잘못이 있을 때에는 그 질서적 차원에서 그것을 시행하도록 질서가운데 있게되어지는 종들의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믿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뜻하심이 그것을 통해서도 바르게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과 그 기도의 사실을 믿는 것이 옳은 모습인 것입니다.

명령을 지킴에 대하여서

주의 명령을 지키도록 말씀하시는 그 배경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외에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알라'고 하심(신 4:39)하에서 십계명이 주어졌음을 모세가 증거하고 있는데(신 5:5~22), 그것을 기억할 때에는 자존의 절대자께서 상대적인 인생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그들의 잘못까지도 구별하셔서 증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주의 기록된 말씀하심을 통해서 분별하여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말씀을 받는 가운데 그 주의 말씀으로 듣고 명령을 지키는 순종의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말씀을 전할 때에 전하는 자가 절대 실수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가 없이 그대로 납득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전하는 자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만, 실수하게 된다고 하여도 그것까지도 성도들이 주의 말씀 하심 안에서 선하게 달리 받을 수 있다는 측면과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심안에서 믿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로서의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로서 제사장적 권세가 주의 말씀하심을 구별하여 받음의 사실적 정당함을 가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음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적 영광으로서 그 직임적 권세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인데 왕적, 선지자적, 제사장적 권세가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나타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경우에는 상대적 보편상식의 판단하에서 자유할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의 비판이 정당한 것과 같이 기만되어질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설교 말씀을 비롯한 주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을 따라야만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 여지가 있음에 대하여서 앞서 언급한 중심과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순종의 사실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해제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임의적 당위성에 따라서 순종함의 부당함을 잘못되게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사태파악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함을 주목할 때에는 그러한 상식보편이나 거기서 거기인 철학적 당위성은 오히려 주의 질서적 개념에서의 직임과 그 명령의 순종의 사실에 동의하고 다른 당위성을 말하는 핑계를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나 주의 가르침으로서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안에서 실제화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의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순종함에 합당한 것입니다. 상황적 정황적 보편상식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으로서 오히려 그것들을 판단함의 근거적 사실로 자리매김되어짐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주의 정하신 직임과 명령에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예수께서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받지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계시하셨고, '항상 예수님께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말씀에 따라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상대적인 것을 사실화 시키는 가운데서, 상식적인 보편적 철학적 당위성에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별하고 사실화하여서 판단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적 권세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사적인 인식과 여러가지 경우에 따라서 교회에 개혁이라는 임의적 입장을 통해서 형제들을 라가라하는 가운데 주의 판단을 받는 어리석은 자리에 서지 않으시고, 왕같은 제사장들로서의 성도임을 기억하여 그 사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때에도 주의 질서와 그에 따른 직임을 존중하고 바르게 이해하여 그러한 직임을 맡은 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회중 가운데서 그러한 질서 가운데서 직임과 명령을 지키는 종들로서 하나님을 찬양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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