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1월 14, 2006

미리암의 죽음과 다툼

2006년 11월 1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20:1-13
미리암의 죽음과 다툼

젊을 때는 어떤 연락(宴樂)하는 곳이 더 호감이 갈 수도 있습니다. 젊음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성의 실제를 모두 진실인 것과 같이 받아도 된다는 그러한 호기에 찬 시절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그 시기가 지나면 그런 연락(宴樂)이라고 하는 즐김이라고 하는 것이 식상해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으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잊게 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고 그 선함이 일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현실적 상황에서 지혜를 주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락하는 곳보다도 초상집이라고 하는 곳에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갖는 것이 남은 인생을 경영하는데 한 지혜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인은 축복된 삶인데 무슨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염세적으로 빠질 수도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가 하는 반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는 가운데서 어떤 소망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인생의 소망의 문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제는 계시의 특성으로써의 죽음은 결코 아니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현실적인 삶이라는 골짜기에서 소망의 문을 열어'(호 2:15)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그 구원의 소망을 전해야 할 것은 보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습니다.

죄아래 있는 모습을 취하여 인간적인 모습으로 말한다면,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는 현실의 고통속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냥 연락(宴樂)하는 것에 대한,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것만으로는 소망을 비로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다툼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진정의 소망이 무엇이며, 과연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지는 가운데 거룩함을 말하는 것인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민 20:1)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 가데스에 와서 물이 없음으로 인해 모세와 아론을 공박함을 그 정황적 입장에서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공박의 내용은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심에 따라서 그 백성들을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심에 따라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투었음에 대한 것은 그 상관성이 역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있다는 것과 그것은 광야같은 세상길 걸을 때에 처음부터 마음에 둘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의 문을 보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구약의 성도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의 광야교회생활에서 전제되어진 소망의 문을 이곳에서 보게 하시는 거룩함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먼저 미리암의 죽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가데스에서 죽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미리암.. 그의 이름의 뜻은 '높다'라는 뜻과 동시에 '반란(rebellion)'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높다라는 고귀함과 반란이라는 이 언어적 표현이 미리암의 생애에 그대로 나타났던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먼저 그녀의 '높다'는 이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녀의 생애를 주목하면,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 누나로써 모세가 나일강에 갈대상자에 버리움을 당하였을 때에 모세의 생모에게 유모자격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로서 규정되어지는 현실적인 모세를 먹이도록 하는 아주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미리암이 없었다면 아마도 모세의 생애는 달리 규정되어질 수도 있었을 수 있는 그러한 아주 큰 공로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란'이라는 이름의 뜻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열두 지파의 두령들을 정탐꾼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탐지하려고 보냈을 때에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의견은 약속의 땅을 취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실제할 수 없는 무리한 행보라고 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식은 분노와 슬픔으로 울게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여세를 몰아서 고라일당과 함께 모세의 영도력에 대하여서 이의를 제기하고 그녀와 고라의 지도자적인 입장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고라의 일족은 땅에 삼키움을 당하고, 미리암은 그 외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애굽여자를 모세가 믿음으로 취함에 있어서 반론하다가 문둥병에 들어서 진밖에 있다가 모세가 기도함에 다시 정결하게 되어지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과연 셈족의 특성적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의 이름에서 주목되어지는 것과 같이 높음과 반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데스'(holy)에서 죽음을 본문에서는 첫번째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안에서 그 죄악된 반란이 그 존재적 상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고난이 광야생활을 떠나기 전에 그 인생의 합목적적인 뜻하심임을 헤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함을 살펴본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모세와 아론에 대한 공박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식의 연장선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써의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현실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민 20:3) 이 말은 앞서 있었던 고라의 일행과 고라의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라 모세의 신통술에 죽은 것과 같이 인식하며 반론한 자들의 염병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민 16장 참고, 민 16:41~48)

직접적으로 고라와 함께하였던 미리암과 관계되어져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의 일부에게 공정한 심판으로써의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하여서 아직도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적 입장이라고 하면서 현실적인 실제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이 해석적 실존으로 해석하여 사실로 받지 못하고 액면 그대로의 현실적 실제의식으로써 모세와 아론을 공박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는 그 되어지는 사실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현상적인 현실적 사실이해가 둘다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 정당함을 현실적인 것에서 비로소 둘 것인가 아니면 합당하게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둘 것인가의 문제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자를 택하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의 인도하심의 사실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다는 시비를 내세우는 즉 여호와 하나님과의 시비다툼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현상적 실제인식에서는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그러한 인식이 그들의 눈을 감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하지 못한 비윤리의 반란이라는 성립될 수 없는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자존적 자기 신실하심을 따라서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만되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예표하는 물을 그들이 다투어 마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 무리바의 물은 비로소 투쟁의 물이 아니라 자존자의 은혜의 생명의 은혜로서의 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현실적인 실제에서도 가늠할 수 있도록 광야시대에 그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죄의 사하심을 얻게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의 뜻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하여서 이제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종노릇되어지는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비로소의 중심을 가지지 않게 되어지는 윤리적 선한 열매를 고통속에서도 선하게 맺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언급했던 것과 비교되어 받게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3-15)

귀고리와 패물 연예하는 자의 연락을 따르다가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유하여 거친들과 괴로움을 말하는 아골골짜기 그곳으로 소망의 문을 삼으셨다는 것, 현실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말씀이 진정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사실을 마음에 둘 때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적인 괴로움의 사실의 완성인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종노릇하여 하나님께 어리석게 다투는 자리에 서지 않는 비로소 거룩한 곳에 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리암의 죽음이 게데스에서 이루어진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등지고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진정한 경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경건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심에 있어서 예수님 안에서 현실을 구별하고 이 거친들 괴로움의 골짜기, 아골골짜기를 잘 구별하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진정한 현실적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을 구별하여 현실의 거룩함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임의적인 세상을 사랑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윤리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얻게 되는 현실은 세속인들이 의미를 두는 세상보다도 더욱 합당한 실제적인 현실적 사실이라는 점을 마음에 둘 때에 우리의 작은 삶 비록 그것이 거칠고 고난이고 그로인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강을 건너야할 즈음에서도 거룩함을 말하게 되며 우리의 삶을 주께 드리는 소망의 문이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거룩함의 사실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혜와 영광을 주께 돌리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주 안에서 많은 일을 했다고 하는 지위에 세워질 때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교만하지 않고 내 자신을 쳐서 주께 복종시킴으로 죄로 인한 교만의 사실성과 그 실재를 우리 삶속에 장사시키는, 주의 뜻하심에서 진정한 사실인식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의 귀함과 사실을 따르는 가운데 현실적인 측면으로 하나님께 다투는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의 부활하신 그 뜻하심이 내 속에 이루어지도록 주의 제사장적인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것을 내 삶에서 나타나도록 힘쓸 때에, 참된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수께서 구원의 소망이심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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