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6:14-29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
지금 예배드리는 이시간에 마치 90여년만에 가장 따뜻했다고하는 올해 가을날씨의 마지막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듯이 컴컴해지고 비가 퍼붓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내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마치 사람의 시셈이나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심리를 반영하는 듯한 모습에 비교되어지는 것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적 판단이라는 인식의 방법도 있지만 소위 '육감'이라는 몸의 느낌적인 개념의 인식적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철학들도 애매성의 철학이라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논의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여기서 이야기 하기 보다는 소위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평범하게 범죄한 어떤 한 심리의 인식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에 따라서 헤롯이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의 하나라고 하나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임에 대한 상황적 묘사가 나타나는 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와서 춤을 추어 함께한 자들을 기쁘게 한 것으로 인해 그 여아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주겠다면서 자신에서 청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고 그 여아이는 자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함에 결국 헤롯대왕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세례요한의 주검을 그의 제자들이 장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잡히심을 시점으로 시작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적 사역을 먼저 말씀하시고 있고 이어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헤롯의 범죄심리적인 표현을 통해서 의식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 표현의 순서적 기술을 달리하도록 영감하심의 뜻하심과 그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의 이해를 통한 증거를 받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 예수님의 공생애적 시점의 차이를 일반적인 기술을 통하지 않으시고 달리, 그 표현의 순서적 기술을 달리하도록 영감하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먼저 두게 되어지는 것은 다른 복음서와 절적인 차이의 이질성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예수님의 그 사역의 구약적 정당함을 취하시고 있고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의 강조적 표현으로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마가복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그리고 구약적 정당함을 취하심으로써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 헤롯의 범죄심리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헤롯'이라는 말과 '헤로디아'라는 말의 뜻은 '영웅, 또는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과 '영웅의, 영웅의 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구약시대의 기골이 장대함을 통해 힘의 제압을 말할 수 있는 네피림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그러한 네피림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헤롯왕과 그 관계되어진 자들의 모습을 의식하도록 하신 것은 바로 출애굽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12명의 정탐꾼이 그곳을 정탐하였는데 10명이 그곳의 좋음을 보고하면서도 그곳의 네피림과 같은 자들이 있어서 비교할 때에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는 피해의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여론화되어지는 가운데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심히 울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이 그러한 인과관계적인 측면으로 해석되어지지만 이미 하나님의 자존적 선하심에서 예정하신 뜻하심의 결과임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면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출애굽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기골이 장대한 네피림들과 같은 그시대의 영웅호걸과 맞선다고 하는 것이 그만큼 현실성의 사실의 판단에서 불리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적인 위협이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세례요한이 그와 같은 모습의 성례전적인 측면을 바르게 읽을 수있는 증거있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자라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세례를 배풀었으면서 비록 그 자신이 물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의 현실적인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그를 인정하셨음에 대한 실제적인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모습을 가진자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세례의 여러 뜻이 있지만 구별되어진 사랑받는자라는 뜻으로써 받게 되어지는데 이는 다윗과 같이 사랑받는자(beloved)라는 뜻이고 구별되었다고 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재가를 받은 자로서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존재적 증거자가 되는 것이며 그 앞서 출애굽한 구약 교회의 백성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모두 대표하게 되는 성례전적인 입장의 증거를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제압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시각에 따라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현실적인 실제의 사실을 비로소 받는 어리석음에서 울게 되어지는 모습과 같이 애통함이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출애굽을 이루었던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애굽와 바로에게 말하였던(출 3:14,출 5:1-2참고,) 근거로서 자존의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하심과 비교되어지는 사실로써 동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40일동안 주리시고 시험받으실 때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비로소 사실성을 말할 수 있다는 임의성으로 예수님 자신을 부정하도록 하며 그 사역을 막으려는 대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종말의 때에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하는 것과 세례요한이 엘리야로서 구약의 뜻하심을 이루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받들도록 하셨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고 축복하심을 막으려고 시대의 영웅 호걸을 통해 현실적으로 죽임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하고 구약과 동일한 것으로써의 계시적 전진과 완성을 비로소 부인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제 그러한 것을 보시고 공식적인 나서심으로써의 공생애를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그의 사역을 담지하는 그의 자녀들이 비록 죽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며 주의 택한 백성들은 어디서든지 부르시는 가운데서 주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음모적 죄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베드로를 보내심은 주위에 널리 있는 돌맹이들을 들어서 반석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전능성을 말씀하시며 또한 사단의 주의 사역의 한정을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는 역부족이라고 하는 것도 지적하시며 상대적인 측면에서 사단의 방해가 있다고 하여도 주의 뜻하심은 계속되어지며 그의 사역을 주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음의 사역을 재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가운데서의 죽고 사는 상대적인 존재의 시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으로 더욱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정당함의 근거'(고후 1:19)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미 세례요한을 보낸 자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시킨 자로서의 위상적 동등성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본문의 인식을 다른 본문과 동일한 순서를 전제로 하시면서 기록을 귀납적으로 나타내게 하시며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의 이해를 통한 증거를 받게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세례요한의 성례전적인 증거자의 의미를 전제로 볼 때에 예수님이 그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 엘리야는 구약의 디셉사람 엘리야의 재생적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규정적 차원에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디셉사람 엘리야가 아닌 가운데서 요한을 자존적 자신의 절대 합당한 정당함을 통해서 그를 그렇게 규정하심의 당연한 사실을 근거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그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그 존재적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로 가르쳐주신 주님'(마 6:9; 눅 11:2)께서는 그러한 신앙고백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존재적 정체성을 가지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로 분별하여 받게 된다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의 사실해석이 우리 인생의 실존적 정당한 사실인 것을 받을 때에 상대적인 판단에 비로소 의미를 두는 일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죽음이라고 하여도 말입니다.
이제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자유케하신 주님'(히 2:15)을 온전히 따르게 하셔서 사단의 가장 큰 무기로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성도는 두지 않고 상대적인 판단의 평가절하라고 하는 개념에 비로소 의미를 두어 대성통곡을 하는 어리석음을 취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웅 호걸이라고 하는 자들도 감당치 못하는 자들로서의 성도들'(히 11:38)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스코틀랜드 보편상식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에 영향을 주었고 그러한 것이 미국을 통하여서 우리 한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한 거창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실 신앙도 모두 어떤 상대적인 판단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공감되어지는 아픈 모습을 본다고 하겠습니다.
즉 교회 성장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교회의 본질이 판단받는 경향이 너무나 많이 자연스러워져서 이제는 교회의 개척이 작으면 인정되지않고 상대적으로 교회의 개척이 위축되고 고사되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자든 공감하고 있는 것들과 또 하나님께 드림이 상대적으로 외형적인 어떤 특징적인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 섬김의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교회에서의 섬김. 주일학교 봉사 식당봉사 서로 다투다시피되어질 수도 있는 재정관계등 여러 모습들에서 그 작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받으신바가 된다고 하는 것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못하는 현실적 인식 강요라고 하는 것이 또한 그러한 앞선 지적과도 재고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것이라도 그 실존적 귀하고 합당하다는 것을 마음에 둘 수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둘 때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작은 것에서도 실제로 '감사로 제사적 섬김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시 50:23) 이루며 나타내는 종들로서의 영광을 주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의 이해에서 비롯되어지는 증거를 바르게 받으시는 가운데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막6:14-29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
지금 예배드리는 이시간에 마치 90여년만에 가장 따뜻했다고하는 올해 가을날씨의 마지막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듯이 컴컴해지고 비가 퍼붓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내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마치 사람의 시셈이나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심리를 반영하는 듯한 모습에 비교되어지는 것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적 판단이라는 인식의 방법도 있지만 소위 '육감'이라는 몸의 느낌적인 개념의 인식적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철학들도 애매성의 철학이라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논의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여기서 이야기 하기 보다는 소위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평범하게 범죄한 어떤 한 심리의 인식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에 따라서 헤롯이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의 하나라고 하나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임에 대한 상황적 묘사가 나타나는 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와서 춤을 추어 함께한 자들을 기쁘게 한 것으로 인해 그 여아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주겠다면서 자신에서 청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고 그 여아이는 자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함에 결국 헤롯대왕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세례요한의 주검을 그의 제자들이 장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잡히심을 시점으로 시작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적 사역을 먼저 말씀하시고 있고 이어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헤롯의 범죄심리적인 표현을 통해서 의식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 표현의 순서적 기술을 달리하도록 영감하심의 뜻하심과 그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의 이해를 통한 증거를 받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 예수님의 공생애적 시점의 차이를 일반적인 기술을 통하지 않으시고 달리, 그 표현의 순서적 기술을 달리하도록 영감하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먼저 두게 되어지는 것은 다른 복음서와 절적인 차이의 이질성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예수님의 그 사역의 구약적 정당함을 취하시고 있고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의 강조적 표현으로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마가복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그리고 구약적 정당함을 취하심으로써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 헤롯의 범죄심리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헤롯'이라는 말과 '헤로디아'라는 말의 뜻은 '영웅, 또는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과 '영웅의, 영웅의 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구약시대의 기골이 장대함을 통해 힘의 제압을 말할 수 있는 네피림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그러한 네피림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헤롯왕과 그 관계되어진 자들의 모습을 의식하도록 하신 것은 바로 출애굽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12명의 정탐꾼이 그곳을 정탐하였는데 10명이 그곳의 좋음을 보고하면서도 그곳의 네피림과 같은 자들이 있어서 비교할 때에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는 피해의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여론화되어지는 가운데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심히 울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이 그러한 인과관계적인 측면으로 해석되어지지만 이미 하나님의 자존적 선하심에서 예정하신 뜻하심의 결과임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면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출애굽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기골이 장대한 네피림들과 같은 그시대의 영웅호걸과 맞선다고 하는 것이 그만큼 현실성의 사실의 판단에서 불리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적인 위협이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세례요한이 그와 같은 모습의 성례전적인 측면을 바르게 읽을 수있는 증거있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자라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세례를 배풀었으면서 비록 그 자신이 물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의 현실적인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그를 인정하셨음에 대한 실제적인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모습을 가진자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세례의 여러 뜻이 있지만 구별되어진 사랑받는자라는 뜻으로써 받게 되어지는데 이는 다윗과 같이 사랑받는자(beloved)라는 뜻이고 구별되었다고 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재가를 받은 자로서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존재적 증거자가 되는 것이며 그 앞서 출애굽한 구약 교회의 백성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모두 대표하게 되는 성례전적인 입장의 증거를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제압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시각에 따라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현실적인 실제의 사실을 비로소 받는 어리석음에서 울게 되어지는 모습과 같이 애통함이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출애굽을 이루었던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애굽와 바로에게 말하였던(출 3:14,출 5:1-2참고,) 근거로서 자존의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하심과 비교되어지는 사실로써 동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40일동안 주리시고 시험받으실 때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비로소 사실성을 말할 수 있다는 임의성으로 예수님 자신을 부정하도록 하며 그 사역을 막으려는 대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종말의 때에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하는 것과 세례요한이 엘리야로서 구약의 뜻하심을 이루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받들도록 하셨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고 축복하심을 막으려고 시대의 영웅 호걸을 통해 현실적으로 죽임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하고 구약과 동일한 것으로써의 계시적 전진과 완성을 비로소 부인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제 그러한 것을 보시고 공식적인 나서심으로써의 공생애를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그의 사역을 담지하는 그의 자녀들이 비록 죽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며 주의 택한 백성들은 어디서든지 부르시는 가운데서 주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음모적 죄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베드로를 보내심은 주위에 널리 있는 돌맹이들을 들어서 반석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전능성을 말씀하시며 또한 사단의 주의 사역의 한정을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는 역부족이라고 하는 것도 지적하시며 상대적인 측면에서 사단의 방해가 있다고 하여도 주의 뜻하심은 계속되어지며 그의 사역을 주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음의 사역을 재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가운데서의 죽고 사는 상대적인 존재의 시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으로 더욱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정당함의 근거'(고후 1:19)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미 세례요한을 보낸 자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시킨 자로서의 위상적 동등성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본문의 인식을 다른 본문과 동일한 순서를 전제로 하시면서 기록을 귀납적으로 나타내게 하시며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의 이해를 통한 증거를 받게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세례요한의 성례전적인 증거자의 의미를 전제로 볼 때에 예수님이 그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 엘리야는 구약의 디셉사람 엘리야의 재생적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규정적 차원에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디셉사람 엘리야가 아닌 가운데서 요한을 자존적 자신의 절대 합당한 정당함을 통해서 그를 그렇게 규정하심의 당연한 사실을 근거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그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그 존재적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로 가르쳐주신 주님'(마 6:9; 눅 11:2)께서는 그러한 신앙고백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존재적 정체성을 가지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로 분별하여 받게 된다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의 사실해석이 우리 인생의 실존적 정당한 사실인 것을 받을 때에 상대적인 판단에 비로소 의미를 두는 일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죽음이라고 하여도 말입니다.
이제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자유케하신 주님'(히 2:15)을 온전히 따르게 하셔서 사단의 가장 큰 무기로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성도는 두지 않고 상대적인 판단의 평가절하라고 하는 개념에 비로소 의미를 두어 대성통곡을 하는 어리석음을 취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웅 호걸이라고 하는 자들도 감당치 못하는 자들로서의 성도들'(히 11:38)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스코틀랜드 보편상식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에 영향을 주었고 그러한 것이 미국을 통하여서 우리 한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한 거창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실 신앙도 모두 어떤 상대적인 판단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공감되어지는 아픈 모습을 본다고 하겠습니다.
즉 교회 성장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교회의 본질이 판단받는 경향이 너무나 많이 자연스러워져서 이제는 교회의 개척이 작으면 인정되지않고 상대적으로 교회의 개척이 위축되고 고사되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자든 공감하고 있는 것들과 또 하나님께 드림이 상대적으로 외형적인 어떤 특징적인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 섬김의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교회에서의 섬김. 주일학교 봉사 식당봉사 서로 다투다시피되어질 수도 있는 재정관계등 여러 모습들에서 그 작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받으신바가 된다고 하는 것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못하는 현실적 인식 강요라고 하는 것이 또한 그러한 앞선 지적과도 재고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것이라도 그 실존적 귀하고 합당하다는 것을 마음에 둘 수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둘 때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작은 것에서도 실제로 '감사로 제사적 섬김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시 50:23) 이루며 나타내는 종들로서의 영광을 주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의 이해에서 비롯되어지는 증거를 바르게 받으시는 가운데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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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