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2월 26, 2004

예수의 이름의 권세

2004년2월2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4:1-31
예수의 이름의 권세

상대적 가치관을 표명하는 그러한 사회에서 한 가지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이 있다고 할 때에 이러한 점도 생각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즉 사람이 보기에 옳은 말이라고 하여도 항상 납득되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알면서도 용납되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악이라고 하는 구조적인 측면의 병폐를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의 인식의 자체적 온전치 못함을 나타내는 것에 기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적 개념에서 기원이라고 하는 것을 자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면서도 자체적 정당함이 있는 기독교적 입장의 인식규정에 대하여서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의 허사라고 함에 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의 근거라고 함 즉 옳고 그름에 대한 당위성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 성도들의 중심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함을 싫어함과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다가 이튿날에 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병이 난 자를 고치신 권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부활하는 도를 전함에 대한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당시에서는 다 경험한 바가 되어지고 또한 현실적으로 그러한 권세가 있음에 대한 객관적 증거라고 하는 것으로 병이 나은 자의 모습이 있으니 반박하지 못하고 다시는 그러한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며 놓아주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따르는 것을 택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이 그러한 자리에서 놓이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이루어졌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서 29절이하 31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들에게 질문되어진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들 족속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에도 질문되어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질문은 권위에서 파생되어지는 그 행함의 당위성 옳다고 납득되어질 정당함이 있는가에 따른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성경에 대하여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놓고 힐문하기 위한 것이지 객관성이 있는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비웃는 자리에서의 사도들을 판단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 때 당시에 있었던 제사장들과 성전맡은 이들과 사두개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납득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싫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그러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성이 있다는 것과 또한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받아들이기를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주님이 오심에 따른 구약적인 성전의 개념이 이미 건물자체가 대행하게 되어지는 실재로써의 실제적 당위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참 성전이기 때문에 그러한 장소적 개념의 성전은 구별적인 것일뿐 실재적인 장소적 거룩함이 예수님과 동일시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에는 성전에 나와야만 한다 또는 그곳에서 구약대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적 당위성이 없게 되어지며 제사장의 직분도 전혀 달라지는 가운데서 그 제사장과 성전맡은 자들의 받게 되어지는 세상적 수입자체가 줄어들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서 그 실재를 말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싫었던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의 권위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함과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음에 대한 증거를 함에 대하여서 그들이 더 이상 힐문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도들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였음을 인용하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 인용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진정으로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시는데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누가 상대적이지 않다고 임의로 규정함에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며 또한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이름의 증거적 차원에서 파생되어진 이름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기뻐하심에서 나타내신 이름입니다.

그렇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예수의 이름은 자존의 절대자 상대적인 판단에서부터 상관없이 자존하시는 자로서 절대의 권위로 기름부으신 메시아이심의 자체적 정당함을 취하신 이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해주시기를 구하며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구함과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잠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8)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라고 함이 예수님의 세례 받으실 때에 또한 변화산에서 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 안에서 화목의 실제를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그 원수와도 화목케 하며 하나님의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받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증거가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들의 기쁨의 증거였으며 그 증거의 힘이었음을 주목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죄악 가운데서 세상의 상대성을 취하는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서 선하게만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또한 그러한 것의 당위성이 부인되어질 수 있다는 여러 가지 상황적 강요에 우리 성도들이 놓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리에 나가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원수라도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것의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부여하는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믿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예수님의 마음에 꼭드는 종들의 자리를 사모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지며 힘 있게 주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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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2월 24, 2004

예수님의 별세

2004년2월2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9:28-36
예수님의 별세

우리 인생의 신앙에 대한 의식들은 다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것은 미신적 요소로서 사람들의 의식의 정도적 차이가 있을뿐 모두 있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자신을 아는 마음과 동연적으로 하나님을 알며 스스로 알아가도록 이미 같이 창조해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인류가 죄 가운데서 진정한 그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허망한 것을 찾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신이 아닌 진정한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서 배척적인 죄악에서 벗어나게 되어지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견해를 가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그 분명이라 함은 어떤 기준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주님 자신의 별세에 대하여서 증거하심에서 읽게 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8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32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누구냐는 그러한 대중들의 판단들과 주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따른 베드로의 고백으로써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눅 8:20)을 나타내었던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8일 만에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이후 변화산으로 불림)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체가 나타나며 그곳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있음과 그 영광 중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봄과 그는 두 사람이 떠날 때에 초막 셋을 짓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것은 베드로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구름이 저희를 덮는데 제자들이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곧 택함을 입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고 소리가 그치매 예수만 보임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 일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심을 의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별세’입니다. 이것은 졸던 베드로도 잠이 아주 깨어지는 가운데서 주목하도록 하시의 은혜를 입었던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별세라는 이 말은 죽음(decease)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해되어지고 또한 영역본에서는 어떤 출발(departure)을 의미하는 것이나 퇴장(withdrawal)되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별세라는 말은 엑소도스(e[xodo")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말로 해석되어짐보다도 실제적인 자기 계시적인 그러면서도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에서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증거의 말씀으로 나타남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별세 즉 주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별세 자신의 엑소도스라는 말은 출애굽과 관련되어진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증거자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모세의 증거와 같이 이후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있을 것에 대한 예언과 그 예언의 실재가 바로 주님 자신이심에 대한 것을 의식하시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구약에 증거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율법에서의 증거는 두 사람이상 있어야 할 것에 의거해서 두명이 나타나고 있고 그 모세와 또한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던 것과 같이 그러한 사역을 예언한 말라기의 엘리야의 예언과 그의 증거에 따른 자가 바로 예수님이심에 대한 것을 변화산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과 문맥속에서 주님의 엑소더스를 말씀하심은 출애굽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과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 즉 엑소더스를 하실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은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주의 몸된 교회가 공식적으로 세워지게 됨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사도가 아니면서도 주의 제자인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글로써 그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읽게 되어진다는 점에서 교회의 성립이 바로 주께서 말씀하시는 별세의 진정한 실제의 증거가 되어진다는 것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누가가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데오빌로에게 미루어 증거해야 할 때를 분별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함은 앞서 변화산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심을 받들어 오는데 그 때가 지나 이제 말하여야 한다는 그러한 증거로서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증거를 기록하며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나 어떤 신비적 개념으로써 그 때 당시에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면서도 그러한 실제들은 사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즉 메시아 즉 그리스도 주님 앞에서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종교적 성별을 의미하는 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9장 20절에서 예수님에 대하여서 베드로의 고백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증거와 같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즉 메시아 안에서의 성별적 정당함을 입은 자들이 주의 제자들이라고 함과 자신의 교회를 세우심에 대한 외적 증거를 나타내셨는데 이것은 그것을 보는 자들도 하나님의 크신 일이라고 함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주의 구원의 실제를 담아내며 증거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등짐이라고 하는 이별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니라 또한 세상의 존재를 전적으로 무의 상태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인도하시는 그러한 목가적인 주의 양들을 치는 교회의 시대 예수님의 세우신 교회의 시대가 종말의 때임을 말씀하시며 이것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서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들의 증거의 시대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를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데려가시지만 주의 구원을 이루심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보존하시기를 위함임을 주의 기도에서 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요17:15~17)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등진 가운데서 어떤 특정단체로서의 생활을 하거나 세상에 세속화되어져서 주의 빛을 잃어버리는 자들의 모습으로 있게 되어짐은 옳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구별과 그러한 증거들의 실제적인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설 때에 참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는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자들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별세하심 주님의 엑소더스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그 정당함을 실제를 증거하는 가운데 세상에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구원을 증거하는 종들로 서야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 없이도 세상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과 평화의 실제를 부여하시는 그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의 진정한 구원과 화평이 있음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구원하심과 화평케 하심을 증거하는 그 종들의 모습으로 온전히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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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참새의 저주

2004년2월20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0:1-29
떠도는 참새의 저주

고사성어 중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르게 돌아온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에 상대적인 경우의 여러 가지 억울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그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때를 말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의거해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소위 ‘하늘이 무섭다는 것을 알라’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범신론적인 개념에서 사필귀정이라는 개념의 의미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두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당위성을 느끼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국한시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도 주 안에서 상대적인 측면의 판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존재를 판단한다는 것은 까닭없는 저주로서 오히려 그 자신의 심판이라고 함을 자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소발이라고 하는 자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의 입장이 이러한 것으로 욥에게 성립되어질 수 없는 말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자신에게 적용되어지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20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발은 욥이 하나님의 허용하심 안에서 성도로서의 고난의 의미와 실제가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 세상이 있어옴으로부터라는 세상의 인식되어진 보편적인 생각을 의지하여서 쓸데없는 똥철학을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말의 합리성을 인정하지만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판단이 자신들 보다 어린 사람으로서 누린 시간들이 잠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기골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울 것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욥의 모습을 판단하며 정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발은 욥의 잘못을 감추는 합리성이 있다고 함을 지적하면서 그의 재물이 많았음이라고 하는 것이 불법적인 재물이었음에 대한 추측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받는 자의 모습이라고 하더니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거한다고 하는 그러한 언약에 대한 비하로써 엉킨 젖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대충적인 입장의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0절에서 29절에서는 소발의 욥에 대한 부당한 판단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욥이 배를 불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로를 내리심과 그로 인해 철병기를 피할 때에 놋 활을 당김으로 그의 몸의 중심에서 그러한 놋이 나옴에 대한 묘사로 욥의 고난이라고 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발은 말하기를 27절에 하늘이 그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칠 것이라고 함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갈 것이라고 함과 그것이 욥과 같은 자들의 정하신 산업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소발이라고 하는 자의 모습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이라고 함이 범신적인 개념이며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모습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소발이 인용하고 있는 하나님이란 말은 엘로힘과 엘이란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앞서 하늘이라는 말은 역시 사마임이라는 글자 그대로 하늘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범신적인 신앙이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엘로힘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미 그의 이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소발이라는 말은 ‘참새’라는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주목할 때에 성경에서는 참새라는 말을 여기 욥기서를 제외하고 7번 나오고 있는데 이 참새는 의미없는 말을 하는 존재와 하찮은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에 대한 칭호가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윗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만(시 102:7) 형태적인 초라함과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자의 동일한 표현이지 실재적으로는 그 존재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고 하는 그러한 존재적 정당함을 예정하신 가운데서 다윗이 이미 얻고 있는 가운데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행13:22참고)

그것과는 달리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 26:2)

우리가 욥기서에 첫 부분에서 욥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의 순전함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그러한 가운데서 허용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욥이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것이 아니라는 정당하지 못한 그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의미 없는 저주라고 하는 것이 소발의 모습인데 그 소발이라는 이름이 참새라고 할 때에 그의 존재적 혼신의 욥을 저주함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주목한 잠언서의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2)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는 것은 그 존재와 그 증거의 실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핑계할 수 없어도 상대적이라는 우기는 그러한 모습들로써 저주하는 자들의 모습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러한 많은 참새들보다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그 판단하심과 신원하심에서 그 예정하신 그 뜻하심을 나타내실 것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그것을 받지 못하여서 까닭 없이 저주하는 인생들의 모습에 낙심하지 않고 참으로 주 앞에서 기뻐 받으시는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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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2월 19, 2004

솔로몬 행각에 모이거늘

2004년2월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3:1-26
솔로몬 행각에 모이거늘

우리가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할 때에 어떤 일에 맹목적이라는 입장을 취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그 확고함을 말할 수 있는 형식과 모습을 말하면서도 사실 맹목적이라는 그 말에 자신의 판단이라고 함과 주권적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이것은 외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습과 같은 것이 전형적인 모습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그러한 자들의 행함에 믿음 안에서의 주권적 의지를 가진 가운데서 행한 자들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신앙의 경건이라고 함을 행함으로 표현하는 것의 완성적 입장을 나타낼 수 있는 성전에 올라가는 그 도중에서 생각하여야 할 것을 마음에 가지도록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데 그곳이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행각(行閣)(Portico)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기본적인 표현과 신앙고백인 성전에 나아감에 대한 그 실제적 기본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또한 증거하고 있음을 받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체적인 시간이 정해진 가운데서 경건의 습관적 행함에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금도 없고 은도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함에 증거를 받은 자가 걸으면서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것과 그것을 본 자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고 놀람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어서 주목함에 베드로는 자신들의 경건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님에 대하여서 말하며 의로운 자 예수 생명의 주를 죽였음에 대하여 지적하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음에 대한 증인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행하였음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도 그것은 이해의 문제라고 함보다도 하나님의 앞서 증거한 선지자들의 증거의 정당함에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에 대하여서 인용적인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구성의 특이한 점은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이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구체적인 복음의 증거가 되어지고 둘째와 셋째의 본문은 동일한 한 부분으로써 귀납적인 측면에서의 예수님의 구주이심과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으로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가 앞서 앉은뱅이를 낫게 한 실재적인 증거임에 대한 것으로 증거와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먼저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은 후자의 증거 즉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주이심에 대한 증거라고 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앞서 하나의 이벤트성의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주목하였던 것과 또한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으로 그들의 경건에서 비롯되어진 치유가 아님에 대한 언급들이 그러한 것을 반증한다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앉은뱅이가 일어남에 대한 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의구심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답변할 때에 있었던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이 증거 됨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봄에 대한 증거가 예수로 하여금 되어짐에 대한 것으로 확신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벤트성의 또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인위적인 행위들이 아니라 실제적인 주의 복음이라고 함이 현실적인 형태로 증거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실제로 인증하게 되어지는 그 증거가 바로 후에 베드로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가 솔로몬의 행각에 있었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였다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솔로몬 때에 있었던 기둥들이 있고 벽이 없는 그러한 통로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당시 보수되어서 그대로 이름하여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둥만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강조되어지는 솔로몬과 관련되어진 기둥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솔로몬이 성전의 현관에 비교되어지는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야긴이라는 말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라는 그러한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솔로몬 성전에 들어갈 때에 그 현관의 그 문의 정당함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는 그 정당함의 실재를 말함을 믿는 가운데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이 많이 있지만 여호와께서 세우셨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의 중심적 실재를 믿는 판단과 기쁨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자신들의 필요라는 것의 실재를 중심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으니 그것은 핑계할 수 없는 주님을 부인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그 표적이 되어지는 앉은뱅이의 모습과 동일시되어진 가운데서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 중에서도 이제 주의 구원하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자가 있을 것에 대한 증거도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주님이 생명의 주요 구원의 주이심을 믿는 것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오늘 본문에서 앉은뱅이는 사실 하나님의 실재적인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님이 구주이심과 그의 증거의 실재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모습을 표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러한 자리에서 나와 구원의 기쁨으로 주 앞에서 그 행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 솔로몬 행각에 모이는 자들의 모습과 같이 하나님 그가 자신으로서의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심에 대한 그 정당함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서 그 절대의 정당함 속에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증거가 진정한 하나님의 증거자들로서의 증거의 실재가 된다는 것을 믿고 주의 구주이심을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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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

2003년12월1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요일5:1-12
우리의 믿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말을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사상이나 개인적인 신념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다의어적(多意語的)인 측면의 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한정되면서도 보편적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우리 ‘성도들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엉뚱한 그러한 신관을 가진 자들도 있고 아예 윤리적 신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신앙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으로 잘못 생각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 요한이 말하는 성도들의 믿음의 실재와 그 내용이라고 함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함과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 자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에 대한 증거에 대하여서 좀더 분명한 증거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증거하시는 이, 셋이면서 한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아들 안에 생명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대적인 것의 반대는 ‘절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과의 상관성에서 규정되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앞서 말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하게 됩니다.

즉 상대적인 언어로 절대자 하나님을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의 속성을 기억할 때에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또한 옳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보편적 생각에서 비롯되어지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모든 말들은 이미 그 합리성의 정당함은 모두 부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세상이라고 함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그러한 규정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절대의 속성에서는 거짓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의 속성적인 정당함을 얻은 그러한 믿음을 가진다면 세상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규정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러한 절대의 속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는 상대적으로 판단을 받지 않는 그러한 증거가 되어지는 것이며 그 동일한 증거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에 그 상대적인 비합리성이라는 판단이 있을 수 있으면서도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절대의 자기 정당함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상대적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음에 대한 비판적인 가능성이 있으나 하나님의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합리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며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증거를 가진 자라고 함도 역시 그 합리적 정당함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에서 파생된 정당함을 의지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기에 세상에서의 상대적 보편으로 인한 비합리성의 논쟁으로 인한 정당성 판단에서 우리 성도들이 이긴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로서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자신이 그 증거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합리성에 따른 그 정당함을 부인하려고 하는 세상의 모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계시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으로서 말씀하시는 그 합리성은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정당성 시비를 기각시키심으로서 자신의 계시의 증거로서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을 이김에 대한 그 증거를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사랑의 사도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잘 증거하시는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보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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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마을

2003년12월2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7:1-10
위로의 마을

사람들은 환경과 관계되어진 영향력을 중시하는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 마을’과 같은 그러한 것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관련된 것을 말하는 자료들이 국내외적으로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 사람들의 찾을 위로가 있다. 또는 그러한 위로가 있는 마을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곳이 있다는 그러한 판단의 수용이 어렵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유토피아’는 공상적인 개념에서만 것이라고 하면서 현실성이 없는 것같이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함에 있어서 존재함에 대한 것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위로의 마을’에서 되어진 일들을 증거하시고 있음과 그 실제상황을 증거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과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신 것과 어떤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장로 몇을 보내어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함의 칭찬이 있게 되어지며 그 백부장의 종이 나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가버나움에 주님이 들어가신 것과 그곳에서 되어지는 백부장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앞서 주님이 들어가신 이 가버나움은 그 뜻이 ‘위로의 마을’ "village of comfort" 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적인 그러한 위로의 마을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거룩하심과 그 상관성을 가지는 가운데 그 실제적인 ‘위로의 마을’로서의 정체성적인 증거를 하도록 하시며 그곳에서의 증거가 그 마을에 속한 자들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절대자의 권위와 그 질서적 정당함을 잘 이해하고 또한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겸손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어진 자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규정되어지는 헬라인으로서 유대의 지도자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종된 자로서 유대의 장로들을 통하여서 그를 만나고자 하는 모습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구약의 증거로서 탄생하게 되어지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증거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함을 말씀하심에서는 어떤 과찬적인 개념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게 증거하는 종을 기뻐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구약에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지는 욥을 기억합니다. 그는 순전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던 자입니다. 구약에서 욥을 능가하는 자의 모습은 다윗과 비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외에 달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또한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욥은 그러한 순전함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고난 받고 있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정당함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베푸시는 그 뜻하심에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지는 자신의 초라함을 변명할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을 잠시 하는 가운데서 시험에 넘어졌던 것입니다.

즉 흙으로 만든 피조물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 질서적인 정당함을 잃은 것인데 여기 백부장은 그러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자랑되어지는 자들에 비견되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분명한 존재의 다름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상관성이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백부장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할 때에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진 것으로서의 거룩하심에서의 그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교회가 새롭게 나타난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심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만으로 본다면 여기 세상에 어느 곳도 거룩한 곳으로써 위로를 줄 수 있는 곳은 진정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정당함을 부여하심에 따라서 인생의 피곤함을 잠시 쉴 수 있는 그러한 기쁨으로서의 분복이 사람들의 삶에 주어진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그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진정 주의 구원하심의 위로가 있는 위로의 마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성도들로서의 모임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모임의 현실적 실제의 지역교회의 모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창조주의 절대자로서의 주권을 생각하고 주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생각하고 존경하며 위로하고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주의 이름으로 영생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그 명부에 그 이름이 흐리지 않고 기록되어지는 위로가 또한 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집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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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월 16, 2004

지팡이와 안위

2004년2월1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7:1-25
지팡이와 안위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산에서 내려올 때에 마침 그곳에서 상주하시는 분들이 물품을 지게로 져서 나르는데 사용하시는 지팡이를 빌려서 의지하여서 내려올 때 참 든든했다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이나 또는 산을 자주 다니시는 분들은 풀숲의 곤충이나 또는 해충들을 막기 위해서 막대기를 준비해서 지팡이로 사용할 겸 들고 다니는 것이 좋은 것임을 동의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가적인 생활을 하는 지방에서는 양이나 특정 동물을 기름에 있어서 그들의 소유된 동물들을 인도하는데는 그 지팡이라고 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주인의 손에 들려진 그 지팡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기르는 양들이나 동물들에게 있어서는 안심할 수 있는 표징과 같은 것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에서도 앞서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에 대한 증거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도 아론을 통한 지팡이로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고 있음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나타내시는 섭리와 그 증거를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그의 입술의 둔함에 대한 자기 겸손이라고 함을 받으시면서 그러한 실제적인 측면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적인 권위로 말을 잘하는 아론의 동역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실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낼 것에 대한 것과 그 때에 여호와를 애굽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적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기 거절한다는 것과 그에 따라 애굽에 내리는 열가지 재앙의 첫 재앙으로 알려지는 나일강 하수의 물들이 피가 되어지는 이적을 베풀라고 말씀하심과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주의 말씀대로 그러한 이적을 보면서도 애굽왕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는 모세와 아론이 그 섭리를 받들어 순종함에 있어서 그 주께서 허락하신 지팡이로 그 주의 섭리로서의 재앙을 나타내시도록 하심의 의미와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같이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시편 23편의 말씀이 되어집니다.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1~6)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서 그러한 목자의 심정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시고 그 애굽의 술사들이 만든 지팡이를 삼킨 것은 간교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세상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상대적 표현의 실제에 대립할 수 있는 것같이 나타난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함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것이며 또한 세상의 지혜라고 함을 거룩하게 구별하여서 사용하시는 가운데서 메시아의 거룩하게 하심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들과 그 증거자들의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젖줄이라고 까지 표현이 가능한 나일강 하수의 물을 피가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신원해주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애굽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자들을 모두 나일강에 빠져 죽게 함에 있어서 그 핏값을 찾으시는 분으로써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마치 가인과 아벨과 같이 가인이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자신의 상대적 정당함을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피가 소리지름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벨이라고 하는 자의 이름의 뜻은 ‘헛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또는 허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마음에 두셨고 그의 죽음에 대한 증거로서의 피 생명 값이 있음에 대한 가인에 대한 책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 수 많은 아기들이 나일강에 던져져서 죽음을 당했지만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의 생명의 값 핏값을 찾으시는 생명의 주로서 절대자로서의 신실함의 증거자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글한 것도 다 상대적인 이해해석이라는 입장으로써 일관할 수 있는 요소로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지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 대한 실제에 대한 분별이 없었던 것임을 지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주의 성도들에 대한 존재에 대한 축복과 안위하심의 뜻하심이 목가적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것이 목가적인 종말론을 말하고 있는 이사야와 미가서 4장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종말의 때 즉 예수님의 자기 증거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교회의 시대의 모습으로써의 실제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갈수록 바쁜 세상을 만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예언한 바와 같음을 또한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너무 바빠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이처럼 생존경쟁에 바쁜 세상 속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 우리의 생존을 위해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우리 성도들의 머리에 바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존경쟁이라고 함의 피곤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에 주 앞에서 바르게 행하고자 하는 가운데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을 부여해주시는 하나님 주의 말씀하심의 지팡이가 성도된 나를 안위하심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주의 복음을 위해 산을 넘는 자들로서의 중심을 가지며 그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또한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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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를 찾을 수 없구나

2004년2월1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17:1-16
지혜자를 찾을 수 없구나

인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러한 성장과 쇠퇴라는 개념의 상관성에서 가장 완성적이고 힘이 있어 보이는 때를 예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예가 젊음에 대한 예찬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그 완전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여야 한다는 그러한 정황 속에서 생각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젊음이라고 하는 것의 예찬만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오히려 인생예찬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존이라는 것에 있어서 객관성을 잊고 가장 젊은 때만을 예찬하는 경우도 있지만 삶의 전반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면 아마도 인생예찬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경험한 나이가 되어지는 그러한 때가 된다면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인생에 대하여서 말하는 젊은이에게 그 경험적인 지혜로서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험이라고 하는 지혜가 진정으로 실제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둘 수 있는 것도 백발의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욥의 조문객으로 온 자들이 그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말함에 대하여서 욥이 한마디 언급하면서 종으로서의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서 자신은 알지 못하면서도 몸에 악창이 나서 터지고 상처가 굳어졌다가 또 터지는 것과 같은 반복되어진 가운데서 심리적으로도 많은 왜곡되어진 말들을 들으며 고통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 자신의 기력이 쇠하여져서 죽음을 의식하게 되어진 상태인데 욥의 조문객으로 온 자들의 언급하는 말들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나타나는 그들의 중심과 모습들이 마치 격동함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고 있음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주께 청하고 있는 내용과 그러한 중심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주께 청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주’가 되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즉 보주라는 말은 보호하시는 주님이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아라브’라는 말인데 보증인이 되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주로써 나타나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이 눈이 멀 것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6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욥을 이야기꺼리로 만드심에 대하여서 욥이 종으로써의 증거와 소망이라고 함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의 증거함 중에 지혜자가 없다고 함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것은 자신만이 지혜를 가진 것이라는 그러한 오해를 받는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증거의 실존에 대하여서 분명한 견해를 가짐에 대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 증거하여야 할 중심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욥의 조문객으로 온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욥 15:7~9)

이러한 언급에 대하여서 욥은 앞서 너희는 나를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고 함을 말하고 있으며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지혜가 없다고 함에 대한 단정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상대적인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상대적인 우리의 인식이라는 그러한 점에서 파생되어진 무한 즉 상대적 무한이라는 것이 우리 인생의 한계적인 범위의 설정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적 무한이라는 것은 절대의 무한과 비교되어질 수 있거나 상관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과 그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부여한 것에 상대적으로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이 자체적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증인이 되시기를 구하고 있다는 것 본문에서는 ‘아라브’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존재의 자신의 존재적 증거와 입술의 증거의 실재라고 함을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자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라고 함을 받지 않은 그러한 상대적인 것만의 경험적 산물로서의 인생의 하나님에 대한 내재적 성찰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말하고 있는 지혜자가 없다고 함을 지적함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윗도 고백한 바임을 기억하게 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증거인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구주이심을 증거함에 사람들이 헌화하며 많은 말들로 말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자존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데 이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의 모습이여 그 기름부음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대적하여서 자신들이 상대적인 존재임을 부인하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다윗이 이미 예견하고 증거한 바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의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한 예언하심의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어떠한 실존에 대하여서 말을 하지 못하며 진실이라고 하는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임의로 부인하려고 하고 노력하는 것은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에 외적인 힘이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격동하고 있지만 그러한 것은 지혜가 없는 자들로서의 의가 없는 불의한 자들로서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종된 성도들은 그러한 것을 증거하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충족하게 다 말하지 못하고 우리가 주 앞에 부름을 받게 되어지는 경우라고 하여도 주의 부활하심 안에서도 그 뜻하심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종들의 마지막 소원을 가짐이 옳은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참된 구원의 지혜를 증거하는 성도들로서의 합당한 증거로 우리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가시는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섭리하신 뜻하심 안에서 소망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은혜와 영광을 세세토록 주께 돌리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금요일, 2월 13, 2004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2004년2월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6:10-30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현대의 사회에서는 종이라는 개념이 사실 용인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있다고 한다면 인격적인 개념이라고 하는 것의 종속적 개념을 말하기 보다는 다만 어떤 일이라고 함을 행함을 위한 질서적 개념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질서적인 개념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이라는 범위 안에서도 인격적인 모독이라는 개념에서 종과 같은 입장을 요구하는 그러한 옳지 못한 모습이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주권이라고 함을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절대자로서의 자기 정당함으로 인생들의 존재적 질서와 판단이 종과 자녀들로서의 모습으로 규정되어진다는 것과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의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함이 마치 군대에 비교되어지는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종과 군대라는 개념이 우리 인류에 어떻게 실제적으로 판단되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주 예수님의 증거자들로서의 선한 종들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4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들어가서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모세는 자신의 민족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들을 것으로 생각되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말씀드리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그렇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게 하심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와 아론에 대한 혈통적 계보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애굽왕 바로에게 다 고하라고 하심과 모세가 자신이 입이 둔함에 대한 것과 바로가 어찌 자신을 들을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주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음에 대한 것과 애굽의 왕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하심에 대한 것과 그것에 수종들게 되어지는 모세의 모습을 주목하도록 반복적 입장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의 바로 왕에게 말씀하심에 대한 것을 우리가 먼저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앞서 있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언약하심의 배경적 고찰이 필요합니다.

애굽이라고 하는 말은 ‘미즈라임’이라는 히브리어 음의 영역적 음입니다. 즉 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인명적 지명과 나라의 이름이라고 하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애굽은 미즈라임이라고 하는 자 즉 노아의 세 자녀 중, 함의 자손의 자손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 이미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존재와 언약적인 정당함을 입지 못하는 자들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이것은 종들의 문제로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함은 셈과 야벳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4~27참고)고 하심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종으로서의 애굽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말씀하실 때에 그 종들이라고 함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종들 그 하나님을 주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불의함과 그들의 자신들의 기업을 부당하게 주의 합당한 종들을 핍박하게 하고 빼앗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이 비교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통하여서 애굽 즉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애굽에 주의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군대를 이끌어 내시고자 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을 마음에 받게 되어지는 사도들은 주의 군사 된 자들의 모습에 대한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주의 군사로서의 군대로서 불러낼 때에 주의 성도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모세의 모습에서 읽게 하시는데 그것은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들을 부르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반복적인 측면에서 세 번째 본문에서는 상대적인 합리성의 충족성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로 주의 군대 주의 백성 된 자들을 불러내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어떤 말의 합리성 그 자체만을 따라서 다른 사람을 설복시키는 것으로 주의 군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주 앞에서 합당한 그 정당한 뜻하심을 받들도록 힘써 행하는 가운데 주의 택한 백성들을 오게 하시는 그 사역을 감당해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2004년2월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14-36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우리가 어떤 표현을 할 때나 그러한 표현의 한 수단으로써의 말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 말에 의미를 담아서 말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의미 없는 말을 하는 경우도 때에 따라서는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름이라고 하는 것도 의미를 담아서 지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소리가 예뻐서 또는 글자가 예뻐서 의미 없이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생각되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름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가 항상 없는 것과 같이 일관하는 것도 그렇게 지혜롭지 못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적 의미에서는 사람들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뜻과 또한 그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하여도 그 이름이라고 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러한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족분류상 셈족에 속한다고 말을 하는데..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주께서 선택하신 셈족계통과 일반적인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인식이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를 사도 베드로는 증거하고 있는데 그 증거의 내용을 받으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의 성령이 강림하심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기도하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술 취하였다고 비난하는 자들에 대하여서 사도 베드로가 이는 상식적으로도 술마실 때가 아니라는 것과 이것은 하나님의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할 때에 이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어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과 그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다윗의 증거라고 함이 이루어진 것으로 정녕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로써 믿는 자의 중심과 증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식되어지는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은 술 취한 것으로 해석될 뿐 지나친 강조라는 것으로 받을 만한 상대적 보편적 입장이 아니라는 그러한 반응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적 판단을 받는다고 하여도 주의 증거를 하는 성도들의 합당함은 주의 증인들이라고 함에서 이미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가 상대적인 판단과는 상관관계를 갖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을 취할 때에 또는 표현하고 증거하실 때에 그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절대적으로 말씀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그 증거와 증인들의 모습은 형태적인 측면에서 상대적 표현의 확실성의 여지를 남겨두면서도 본질적인 실제적인 증거의 확실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 그 이름은 저의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이름의 뜻과 함께 어원적인 측면을 본다면 여호와의 구원이라고 하는 그러한 뜻에서 파생되어진 것으로도 받게 되어지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에 대한 자기 증거로서 받음에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는 구주로서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나 아무 뜻 없이 반복적 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구주이심과 그 구원하심의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이루실 신실하신 분으로서의 중심을 가지고 의지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행하는 자가 진정으로 형식적인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자신이신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구원에 이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심으로 주의 구원을 받으며 받은 자로서 주의 증인들로서의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2004년2월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8:22-39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요즘에는 인터넷이라고 하는 사이버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반영하기도하고 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말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사이버 공간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이 그 역사적인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아직 미숙함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그 준비된 자료라고 하는 것의 신빙성과 권위라고 하는 것이 객관적인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여론적인입장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단편적 현실적 사실의 공유와 전달의 표현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혁명적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실제의 삶을 위한 것으로써의 간접적인 것으로써의 실제성을 가질 뿐 현실과 혼동되어질 수 있는 것이나 대체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분별하지 못할 때에 많은 피해사례가 있게 되어진다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 즉 중요시 되어지는 전달의 편리성과 정확성을 말하면서도 사실 전자우편의 주소가 잘못 기재되어서 잘못 전달되어지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산물로서 총아적인 입장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상대적인 것이요 그 자체적 정체성의 주소도 역시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함이 우리의 삶을 바로 보는 시각의 하나가 되어질 것입니다.

즉 ‘정체성의 주소’라고 함을 말할 때에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정체성의 주소’라고 하는 것도 살펴보는 것이 주의 뜻하심의 한 부분이며 지혜로서 받게 되어진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 배를 타고 가시는 도중에 주무심에 있어서 광풍으로 인해 배에 물이 차고 죽게 되어짐에 주께 구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바다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심과 그들이 그렇게 행하시는 주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의문을 묻고 있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하셨음에 대하여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거라사인의 땅에서 있게 되어지는 귀신들린 자와의 담화와 그를 고치심과 예수님에 대한 배척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두 부분으로 주목하게 되어지는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주목하게 되어지며 비교되어지는 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믿음과 그 믿음의 주소라고 함의 불확실한 모습이라고 하는 판단과 거라사에 귀신들린 자의 주님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상대적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들로서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의 증거되어지며 예언되어진 구주이심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라사인의 말에서 읽게 되어지는 귀신들린 자로서의 언급은 귀신이 얼마나 상대적으로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즉 귀신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들이 무저갱에 갇힐 것에 대하여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위적인 자위성 즉 부정되어지고 정당함을 얻지 못한 가운데서 그들의 행위가 존속할 것에 대한 것을 의지하며 여전히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돼지 떼에게 귀신 자신들이 들어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후에 주님을 떠나도록 배척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그러한 의도적 발상과 주께 제안하는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강한 자를 결박하셨고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함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단의 주체성이 이미 주께 있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이미 결박되어진 자들이요 그들의 삐뚤어진 자의성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도 부정의 존재로서 허락되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주의 뜻하심이 온전히 세워짐을 사단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훼방하고자 하는 상대적 뜻함이 허용되어지고 오히려 그것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주의 구원하심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에 있어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로서 주의 성도들과 형제로서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좋으신 우리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의 실제적인 모습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주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심을 믿는 그 자체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사단도 이러한 것을 알고 있지만 주께서 그들의 그러한 알고 있다는 것에 정당함을 결코 부여하지 않으심에 있어서 사단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정당성의 실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도 인정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과 자신들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절대자이심과 자신의 절대의 정당함으로서 우리 성도들에게 구주이심에 대한 믿음을 주셨으니 상대적이라는 불확실성을 넘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이심과 구주이심에 대한 실제적인 확신을 가지는 자리에 서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진정한 현주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참된 믿음으로 주 앞에서 주의 뜻하심을 드러내며 증거하시는 귀한 주의 제자들로서의 합당히 받으심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나의 변명 나의 변론

2004년1월30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13:1-28
나의 변명 나의 변론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하여서 변호하다는 개념이 필요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어떤 사실들이라고 함을 말함에 그 구체성과 실제를 드러내기 위한 노력으로 필요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변호한다는 것의 실재를 말할 수 없다는 사상 때문에 변호라는 것이 사실 되지 않지만 되는 것같이 동정을 구하는 것처럼 구차한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과 달리 실제를 말할 수 있는 자라고 하면 변론이라고 하는 것 변명이라고 하는 것은 구차한 것이 아니라 진정 실제적인 중요성과 그 합당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욥의 변론, 그의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 후자의 경우로서 정체성을 가지는 것에 대한 시비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욥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기술한 경험적 측면에서의 신앙에 대한 인식적 판단이라고 함으로 일관한 나아마 사람 소발의 답변에 대하여 경험적인 개념을 말할 때에 그만 못한 욥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함과 소발을 비롯한 빌닷과 엘리바스들이 거짓말 지어내는 자들이요 쓸데없는 의원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으며 욥은 자신의 신실함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구원이 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주 하나님께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구하는 바는 자신이 주의 위엄으로 두려워지는 자리에 서지 않기를 구하고 있고 주께서 자신에게 대적하심에 대한 것에서 썩은 물건이요 후패함 같으니 좀먹은 의복 같은 자로써 상대하실만한 존재가 아님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고 절대자와 피조물의 그 상관성으로 주님이 판단 받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의 변명과 변론이라고 함이 실제적인 사실과 그 증거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함이 있어서 멸망에 이르지 않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 자신이 있다고 함을 말하고 있고 그 지식이라고 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주 앞에서 그 실제적인 것에 자신의 존재와 관련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씀하신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고 말하는 욥인 것입니다.

여기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확실성이 없는 가운데 사람에게 유익이라고 하는 것에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 지식에 자신의 실존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이 욥을 대적하는 자들의 모습이며 또한 오늘날의 사람들의 지식관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욥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실재로서의 사실을 말하는 하나님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 진정한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에 대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알고 계신 것과 같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로 지음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의 존재라는 것은 순서적인 개념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연적으로 같이 창조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의 존재라는 것이 같이 있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과의 우리의 존재는 동일하게 정당함을 입게 되어진다고 함을 말할 때에 욥은 그것이 자신의 구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인친 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함을 증거함을 하나님께 아뢰어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가운데서의 그 영광을 드러내는, 스스로 의로움과 구원을 이루게 되어지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욥이 표현하기를 그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는 것과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욥은 원한다는 자의 이름을 뜻을 가지고 있고 그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자와 같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르기 원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주를 의지하여서 상대적인 불확실성에서도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기를 기도하는 성도의 길을 걷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모두 가진 자이기 때문에 말하거나 하나님을 다 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은 아니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부분적인 것이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확실성에서 증거의 진정한 실제를 가지고 그 증거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의 뜻하심을 실제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은 인식의 충족성의 시비를 걸며 하나님이 없다는 것과 도덕적 완성으로써의 신관으로 비판하게 되어진다고 하는 환경 속에 성도들이 피곤한 발걸음을 걷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곳에서 평안을 욥과 같이 구하며 주의 진정한 증거의 말씀 안에서 즐거워하며 주의 구원의 실제를 받으며 증거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리시고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내 백성을 보내라

2004년1월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5:1-23
내 백성을 보내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권위라고 함이 상당히 중요한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권위라고 하는 것도 인증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는 가운데서 그 실재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라는 개념을 그러한 판단 가운데서 인정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야말로 잘못된 전근대적인 권위주의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권위에 대한 판단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이 사회적 통념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통념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상대적이라는 개념에서 그 제한적이면서도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둠이 좀더 보편적인 입장이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절대자가 말씀하심도 형태적 상대적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 실재적인 실제적인 증거로써 상대적 판단에 의한 본성적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심에 대한 증거를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22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함께 애굽왕 바로를 찾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씀하셨음과 그들이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함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바로는 여호와는 누구관대 그 말을 들을 수 있는가 라는 반문과 함께 알지 못한다면서 보내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히브리 백성들이 게으르다는 것으로 임의적 규정을 하고 고역을 통해 거짓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도를 표현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바로의 의사표명은 그대로 애굽국정에 반영되어져서 히브리인들의 고역을 더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원인을 알고자 히브리인들의 패장이 알고자 했음에 그것은 모세와 아론이라고 함의 증거에 따른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괴로움으로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기를 원함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온전한 순종이라고 함이 나타나지 않음에 대하여서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이름으로 증거함에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심에 대하여서 아뢰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마디로 권위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이는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에서만 국한되어지느냐 아니면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체적 중심에서 비로소 성립되어지는 것이냐의 이견의 모습과 그 고통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자기 합리화의 기본과 자기 권한이라고 함의 정당함은 기득권적인 즉 ‘취득시효’적인 개념의 법적 근거를 따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이미 자신의 노예로 전락한 백성이라고 함에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은 바로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의 그러한 법적인 개념에 이의를 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모세와 아론의 증거에서 찾는다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자신은 히브리인들의 인식적 종속을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신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노예들의 판단이라고 할 때에 자신이 굳이 따라야 할 필요성과 또 그에 따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바로의 생각이라고 하는 상대적 보편인식의 판단과 상관을 가지지 않는 자존의 절대의 권위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에 자신의 존재에 정직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더욱 그는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하심을 이루시기 위함이 출애굽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노아를 통하여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7)

셈이라는 뜻은 ‘이름’이란 뜻이요.. 셈의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의 장막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에서의 정당함을 얻는 자들의 장막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그의 장막 즉 미시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주하신다’라는 그 성소에 이스라엘이 머물게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마누엘을 말하며 이것은 또한 참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그 존재적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장막에 주의 택한 백성들이 모이며 목가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의 시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 계시를 믿지 못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증거하는 것 그것을 배척하며 또한 어리석게도 오히려 하나님의 판단을 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면서 우리의 삶에 주의 이름의 정당함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기를 사모할 때에 주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축복이 함께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좋은 땅을 사수하기

2004년1월2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8:1-21
좋은 땅을 사수하기

제국을 호령했던 알렉산더대왕도 한 평의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한 역사가들의 판단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땅을 소유한다는 것과 그것이 진정 기업이라고 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주관할 수 있는 것으로써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존재와 의미라고 함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질적 기업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힘써 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로서 마땅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셨음에 대한 달란트 의식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을 물질적 기업을 통해서도 나타내며 증거할 수 있는 것에서 실제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동산으로써 기업으로써 땅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비유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다고 함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주목하며 한마디로 우리 인생의, 우리 성도의 ‘마음 지키기’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그러한 것에 답변하시는 주의 말씀하심임을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 4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심의 말씀에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고 열 두 제자들이 함께하며 은혜 받은 자들과 여러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김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께서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과 제자들의 비유의 뜻을 구함에 그 해석을 보이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왔음에 대한 것을 혹이 고함에 따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주의 모친과 주의 동생들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주의 판단과 그러한 것을 읽을 수 있는 은혜를 주의 성도들에게 허락하셔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선 본문이 되어지는 누가복음 7장 36절 이하에서의 내용은 바리새인 시몬과 용서받은 여인의 대조적인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그 마음의 중심들이 분별있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며 우리 성도들이 용서받은 여인과 같은 중심을 가지게 되어지는 은혜라고 함이 좋은 땅에 백배의 결실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처음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심에 함께하는 주의 제자들은 그 용서받은 여인으로 판단되어지는 여인을 비롯하여 주의 말씀하심이 그들의 중심에 평안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결실되어지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행함이라는 것으로써의 결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밝히 말씀하시면서 주의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의 중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의 그 신앙의 확실성을 가지며 결실하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에게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으며 또한 말씀하신다는 것을 받을 때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며 그 말씀이 지배하며 그 말씀을 따라 생활할 수 있는 열매가 맺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정황적으로 예수님을 초대한다고 하여도 영접한다는 형식만 갖출뿐 진정한 결실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 가에 바위에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강퍅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로써 누가복음 7장 48절과 49절에서는 바리새인과 그와 함께하는 자들의 인식이 예수님이 죄사하심에 대한 것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받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초대하였으면서도 뿌리가 없음에 의심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그들의 결실적인 모습의 밭의 모습이 말라졌음에 대한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8장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의 정당함을 생각할 때에 상대적인 측면에서 의심이라고 하는 것의 강요라고 하는 것의 실제를 부인하며 진정으로 믿음으로 스스로 행하는 것의 정당함을 따라서 주의 말씀하심을 받고자 하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판단되어지는 것의 실제적 정당을 따르고자 하는 그 스스로 행함의 정당함을 따르는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찾는다는 점에서 착하다는 그러한 표현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낸 종들의 신실성을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착한 종의 인내는 인위적인 스스로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그러한 스스로의 의지적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욥의 고통속에서도 말하고 있는 품군의 날(욥 7:1; 욥 14:6)과 같음에 대한 것을 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킨다는 개념은 어떤 도덕적 의미에서의 순결을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진정한 실재와 실제라는 것을 찾아서 행하고자 하는 그러한 중심이 바로 마음을 지킨다는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에 있게 되어지는 자들로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좋은 땅과 같이 주의 말씀을 받으며 합당한 인내하며 결실하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귀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지혜는 어디 있는가

2004년1월2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12:1-25
지혜는 어디 있는가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하여도 생각 외로 지혜를 추구하는 일이 많이 있고 그러한 것은 어떤 일에 있어서도 그러한 일을 잘 할 수 있는 그러한 판단들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그 지혜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판단으로서의 지혜를 생각하고 한 가지를 선택하기 마련인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항상 그 지혜라고 함의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함 또는 지금의 지혜라고 함의 확실함을 항상 인정할 수 있는 가운데서 선택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그러한 지혜를 말한다면 그것도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의 성도들의 증거와 지혜라고 함을 판단하고자 하는 세상의 입장에 대하여서 주의 성도들이 취할 모습으로써의 중심이 욥을 통하여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3절까지의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 대한 증거라고 함에 대하여서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그 지혜를 베풀어서 비난함에 대하여 그 조문객들로 온 소발을 비롯한 사람들에게만 지혜가 있는 것과 그들의 죽음과 함께 지혜의 존재도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함에 대한 잘못됨이라고 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진노케 하는 자의 평안이 있다고 할 때에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짐승들과 새들에게 물어보라고 함을 말함으로써 그러한 생물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를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입이 식물의 맛을 분별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귀가 분별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며 늙은 자에게 장수하는 자에게 지혜와 명철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본문 13절의 말씀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13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과 같이 지혜와 권능이라고 함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증거로써 하나님께서 헐으신 즉 다시 세울 수 없음에 대한 것과 사람을 가두심에 대한 것에 놓지 못함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전혀 알 수 없는 가운데서 행하여야 하며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고 그를 증거하는 또한 의지하는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알 수 없는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판단을 나아마 사람 소발이 말함에 따라 그에 대한 욥의 답변이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대한 것의 증거라고 함이 경험이라고 하는 것에 지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한 것만 의지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따른 하나님의 판단하심에 따른 심판으로써 그들의 지혜라고 함의 출처를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그러한 지혜를 따르는 존재들은 바로 유리하는 자들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그 확실함을 말할 수 없는 어두운데서 가능성만 찾는 더듬는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가둔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읽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그의 뜻하심에서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형식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르는 자들도 그와 같은 주의 판단하심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진정한 지혜의 실재를 말하지 못함은 그 지혜의 실재의 정당함을 부여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고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심에 따라 부분적이면서도 진정한 지혜를 말씀하시고 주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자들이 속이는 자이며 또한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진정한 소속은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그러한 것이 바로 속은 자나 속이는 자 모두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각기 판단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참으로 지혜를 말씀하시고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절대자께서 주시는 상대적이면서도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를 주심에 따라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되어지는 큰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소발과 욥

2004년1월2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욥11:1-20
소발과 욥

어떤 것이든지 경험해보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이라고 함을 다 해보아야만 말을 할 수 있다고 함만을 고집할 수 없는 것도 상대적인 여지를 볼 때에 남겨두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작은 여지라고 함이 특별하게 전체를 주관하게 되어지는 그러한 것이 되어질 경우에는 전체라는 개념이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지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일반적인 전체의 견해가 받아들여지는 그러한 경우가 인지상정적인 입장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는 것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오늘 본문에서 판단의 여부와 그 중심적 증거가 된다는 점을 마음에 두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 대하여서 판단하며 언급하는 내용으로써 사람이 말이 많다고 하면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라는 말로써 욥의 앞서 진술한 내용을 일축하면서 주 앞에서 깨끗하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책망하고 있고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알기 원한다고 하며 그의 지식이 광대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온전히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가두시며 개정(開廷)하면 누가 능히 막을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각이 없는 자는 들나귀 새끼 같은 자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르게 정하면 누워도 두려워하게 할 자 없겠고 사람이 그러한 자에게 첨을 주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불가해성(不可解性)이라고 함의 그 차이를 이해함이 옳은 것임이 그것입니다.

욥에 하나님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알겠다고 함의 표현을 하고 있음에 대하여서 소발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한다는 그러한 점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서 그러한 점을 인정하여서 도덕적 완성이라고 함의 자리에 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동병상병적인 동적적 동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지론과 불가해성이라는 개념은 동일한 공통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온전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심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후자인 불가해성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철학자들은 불가지론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상 그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본성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의 확실성과 생각할 수 있고 인간적인 동의할 수 있는 것의 확실성은 제한적이면서도 확실하다는 것이 불가지론에서 말하는 인식의 확실성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 기본적인 이성적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소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는 주제에 판단하고 있는 욥의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욥은 불가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 알지 못하여서 무슨 연고로 하나님께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욥 10:2) 그러면서도 욥은 말하기를 ‘이 뜻이 주께 있은 줄 내가 아나이다’(욥 10:13)

전능한 하나님을 인간의 이해로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능자이시기에 상대적인 인간의 이해로도 말씀하심에 따른 이해가 있게 하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부분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말하는 가운데서 본문에서 소발의 판단과 같이 들나귀 새끼와 같이 세상물정 모르는 존재가 경험의 지각이 없는 존재가 위험한 허망한 삶의 자리에서의 죄악의 표현이 됨에 대한 판단을 받게 되어짐 심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소발의 판단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즐거움의 참새적인 지절거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의미적 실제의 판단을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서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심에 따라 부분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음에 대한 정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에 있음에 대한 판단으로써의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함을 담아내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써의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잘 인용하지 못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판단한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아마 사람 소발 그의 이름의 뜻을 보면 즐거움의 사람 그리고 참새라는 뜻과 거만한 이라는 뜻을 가진 자입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찌 아는가 하는 그러한 것으로 언어의 유희적 개념으로 나서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이러한 것은 성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러한 것은 그들 자신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 판단을 담아내는 슬픈 말쟁이들의 받을 심판이라고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것을 보며 즐거워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남의 잘못과 실수라는 개념에서 우리의 기득권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증거라고 함에 대한 확실성이 없음에 대한 판단에서 자유하며 또한 부분적인 지식이면서도 하나님의 실제적인 계시의 증거자로 세우셨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작은 입과 중심으로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받으신 바 되어지는 귀한 은혜가 하나님의 자랑이었던 욥과 같은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죄인이 받은 평안

2004년1월1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7:36-50
죄인이 받은 평안

어떤 일이나 그러한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그 일하는 방법에 있어서 ‘무작정 따라하기’라는 그러한 측면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 함이 좀더 보편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소위 열린 중심의 마음과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드롬(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쓸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증후군'으로 순화. 스타 신드롬 또는 신드롬이 나타나다 또는 신드롬을 몰고 오다 또는 신드롬에 빠지다. 등의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습을 규정하는 것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표현적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이해함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진다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이 평안함을 받게 되어짐이라는 그 뜻하심이 그러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미 주신 평안가운데서 평안을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합니다. 본문 36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과 40절에서 4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48절에서 5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6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였는데 그곳에서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음을 보고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의 인식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이 여자에 대하여서 죄인인줄 알았을 것이라는 마음이 그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0절에서 47절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에게 할 말씀이 있다고 하시면서 빚진 자의 탕감의 여부와 그들의 중심적 표현이라고 함이 차이가 있음과 바리새인과 이 여인의 비교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48절에서 5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죄인인 그 여인에게 평안이 가라고 말씀하심과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함이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평안’이라고 하는 것, 그 실재에 대하여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좋으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으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믿음과 인식이라고 함이 첫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에 대한 그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때에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선한 선생으로 인식되어지는 사회적 정황이라고 할 때에 도덕적 완성이라고 함을 추구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사회적 인식의 확산이라고 함을 의식하여서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함의 인식도 있지만 그러한 것의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에 확실성을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바리새인의 고통이었고 또한 평안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만일 선지자라면’(눅 7:39) 이라는 측면의 확실성의 여부를 묻는 모습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곳에 왔던 죄인인 한 여인의 신앙의 표현을 보면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자에서 한마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여기서 사랑의 많고 적음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 차이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의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많고 적다는 개념의 기준도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 확신적인 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많고 적음이라고 함이 상대적이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적 재가가 있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 그 상대적 표현이면서도 실제적인 분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행한 것의 실제적 용납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며 또한 실제적인 현실 속에서의 평안의 실제를 주장할 수 있는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8절에서는 예수님이 죄사함을 얻었다고 함을 그 여인에게 말씀하심에 그곳에 있던 함께 앉은 자들이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하나님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지 않은가 라는 그러한 생각에서 반문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의 그러한 표현은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아니하시는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있는 합리적이며 합당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것을 증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를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에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과 상관없이 자존하는 자기 정체성을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주기도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성도들이 그 확실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정황에 따라서 그러한 것에 편승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그러한 신드롬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평안의 실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평안으로써의 실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가운데 주어진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면서 타성에 젖은 자리에서 나와서 진정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그 긍휼하심 가운데 주시는 평안을 받아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의 실재는 현실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고난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평안의 실재가 없는 것같이 생각하거나 사라지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이해와 판단을 넘어서도 절대 합당하십니다. 그렇기에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고통과 고민 속에서도 우겨쌈을 당할 수 있는 가운데서도 그 평안의 실재는 그 믿는 자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며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써, ‘평안이 가라’ 말씀하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기억하며 의지하여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귀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욥이 구하는 평안의 기도

2004년1월1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10:1-22
욥이 구하는 평안의 기도

어떤 일에 있어서나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 그러한 것에 확실성을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상당한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고 많은 어려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상식이하의 일들이 정당한 것과 같이 왜곡되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인륜이라고 하는 것의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함의 인식들이라고 함도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하면서 성적인 타락이라든지 그러한 악을 범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음란하고 악한 세대의 기본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일과 성도를 시험하는 일들도 마찬가지로 부당한 대우와 그러한 가운데서의 정죄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때에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힘들게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며 주의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4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 자신이 살기 곤비한 가운데서 자신의 원통함이라고 하는 것을 발설하고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는 것의 중심적 표현이면서도 자신의 절제의 은혜의 자리에 설 수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사람이 보는 것과 달리 하나님의 선하심의 뜻하심이 공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어찌 모함하는 자들의 말이라고 함이 사실로써 됨에 대한 것을 허락하시는지 알기를 구하면서 욥 그 자신이 알지 못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안다고 함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고백한 욥 자신이 고난당하여서 살기 곤비한 가운데서도 이러한 것의 뜻하심이 주께 있음이라고 함의 내용이 고백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고 의로울 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고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열매 맺기를 기뻐하심을 마음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곤비한 때가 지날 수 있도록 돌아오지 못할 땅으로 가기 전에 평안하게 하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욥이 참으로 살기 곤비한 가운데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중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자리에 서기를 힘쓰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 3:3)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기록한 내용으로써 참으로 하나님께 범죄한 자로써 죄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자로서의 자신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자신이라고 함에 대한 고백이 있는 것과 같이 욥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가운데서 그 주시는 평안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이라고 함이 세워져야 할 것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며 머리를 숙여 경배하는 자리에 서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 교회에서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이스라엘이 모압산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이끌어내셨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식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에 바르게 가르치게 되고 머리를 숙여 경배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출 12:27)

이처럼 욥의 모습도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절대 선하심에 따른 상대적 표현이라고 함의 신실성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자신의 곤고함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에 담을 수 있기를 원하는 그러한 자로서의 주의 몸된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를 원하는 자들로서의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행함에서의 곤고함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뜻하심 안에서 상대적으로 왜곡되어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의 뜻하심이 주께 있음을 기억하고 주 안에서 평안을 구하며 주께서 머리를 들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기억하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세를 통하여서 나타나는 광야세대의 믿음의 후손들에게 그들이 생활하는 것과 그 예식이 어떤 뜻인지 가르쳐주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머리 숙여 경배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임의대로 우리의 입장을 변호하기 보다는 주의 뜻하심 안에서 신실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의 머리를 들게 하심의 은혜를 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랑하시는 욥과 같은 자리에 서는 은혜의 자리에 서도록 함이 옳은 것입니다.

살기 곤비한 때에 자신의 입장이라고 함을 말해야 하는 그러한 곤고함 속에서도 다윗과 같이 머리를 드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판단을 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실제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의 평안 가운데 인내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이 일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뜻하심 안에서 주의 구원을 보이시며 하나님이 받으실 그 합당한 영광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곤비함으로 지칠 때가 있다고 하여도 주께로부터 평안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려가며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위해 고난이라고 함을 내게 채울 수 있는 주의 받으신 바가 되어지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믿음의 후손된 모든 이들에게와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흔들리는 갈대

2004년1월1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7:18-35
흔들리는 갈대

인증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상당한 공신력을 말하는 것으로 유념하고 주의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나 정체성에 있어서 그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이 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증(人證)이라는 말은 법률적인 측면에서 ‘인적 증거’라는 말을 줄여 이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인증(引證)이라는 말은 인용하여 증거를 삼음을 말하며, 인증(認證)이라는 말은 어떠한 문서나 행위가 정당한 절차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공적 기관과 같은 합당한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곳에서 정당함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번째 의미의 인증(認證)이라는 말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계시하심을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4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하심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으면서도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묻고 있음을 봅니다. 그에 대하여서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하심의 말씀을 증거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을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세례요한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음에 대하여서 예언된 선지자임에 대한 증거를 하시고 선지자보다 나은 자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큼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그 세례를 받지 않음에 대한 강퍅함이라고 하는 것을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어도 아무 반응이 없음에 대한 것으로 지적하시고 있고 세례요한과 그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행하심에 대한 상대적 차이라고 함의 이유를 가지고 자신들을 정당화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의롭다 옳다 여김에 그 지혜의 실존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바로 세례요한의 존재적 정당성과 그에 따른 그의 증거하는 자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의 정당성이라고 함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예언되어진 가운데 메시아가 오셨음에 대한 그 증거와 그 증거되어진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예수님은 세리와 같은 죄인의 친구가 되어짐에 대한 것과 도덕적 판단이라고 함에 있어서 부정한 사람들과의 상관성을 말할 때에 진정 메시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화려한 사람들 보다는 일반적인 사람들 더 나아가서 어쩜 초라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경향을 보고 그러한 부족하고 어려운 사람들이나 의지하는 예수님이라는 개념에서 자신들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이 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능력이나 위치를 고려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대자가 판단한 것과 인증하게 되어지는 그 존재에 정당함을 부여하는 것에 있어서는 상대적이면서도 진정한 존재적 정당함을 가진 하나님으로부터의 인증되어진 자들로서의 인적 자원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한 사람이 때로는 실족할 수 있는 경향에서 고민하며 주께 그 뜻하심을 묻게 되어지는 자의 모습으로써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보이지만 예수님이 그가 예언된 선지자요 또한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함의 그 존재적 정당성을 부여하시는 즉 하나님 절대자로부터의 인증되어진 자로서의 인적 자원의 형태 부르신 제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세례요한보다 작은 사람이 없다는 표현을 하시는 것은 세례요한의 종된 자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종과 아들을 생각할 때에는 그 구분선을 확실히 할수 있고 아들이 아무리 못났어도 종보다 못한 것이 아닌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요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당연히 하나님나라의 자녀된 자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지만 사역적인 측면에서의 종된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긴다는 사역적 차원에서 가장 낮은 자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증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상대적 완벽성이라고 함을 추구하는 도덕주의자로서의 율법적 완성에서의 권위와 정당함을 따른 인증을 원하는 자들로서는 인정하고 싶은 것이 아닌 것이어서 배척하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 그 자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의롭다고 함을 고백하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하며 증거하는 자리에 서는 것임을 지적하심을 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인증되어지지 않은 것은 그만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합당한 권위라고 함에서 파생되어지는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기본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상표라고 함도 ‘유명상표’라고 하는 그것이 그만한 물건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것과 비교할 수 있고 또한 어떤 공인이라고 할 때에 그만한 권세라고 함의 실제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들의 모습으로서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합당한 증거를 하는 자로서의 실제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의심이 때로는 들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택하심 안에서 그 은혜로 그 사역의 실제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구주로서의 선하심을 믿는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 주님 주시는 면류관을 받아쓰시며 그것으로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숨 막히는 괴로움 속에서

2004년1월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9:1-35
숨 막히는 괴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아지게 마련이라고 함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학문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나름대로의 공식적인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의 한계상황을 벗어나고 또 실제적으로 그러한 판단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함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임을 주목해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변론할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욥은 자신으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자신에게 채우심에 대한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함에 대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행하심으로 변론할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간구하였음에 대한 것을 전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자신의 날이 복을 볼 수 없음이라고 함이 시간의 빠름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전혀 복되지 못한 모습임을 독수리가 움킬 것을 위해 날아 내리는 것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주께서 막대기를 자기에게서 거두시기를 구하고 그러한 은혜를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신원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뇌의 호로몬적인 것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지는데 공포나 고통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고 또는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그러한 공포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적 발동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점차 성장하여서 그 벗어나려고 하는 것의 생각이라고 함을 조절할 수 있고 자기중심을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자리에 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한 것과 같이 일반적이면서도 신앙적인 측면에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느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회피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신앙인의 고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분별하는 가운데서 그 고통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의 성숙함의 자리에 서도록 사모하는 중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참 숨쉬기 어려운 고통이라고 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바르다고 생각하게 되어지는데 본의 아닌 것이라고 하여도 여러 가지 왜곡되어진 것으로 잘못된 판단으로 일관한다면 참으로 고통 속에서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종말에 때에 시험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시험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형제들을 알아주라는 말씀하심을 받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전 16:18)

그러나 그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형제들을 통하여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심의 선하심을 믿을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 사실들을 믿을 수 있을 때에 현실적인 자신에 대한 알아주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 자신의 부정되어진 자리에서도 주님의 뜻하심을 따라 기뻐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셨던 것과 같이 주의 택한 백성들도 어떻게 하면 넘어트리려고 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모습이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 성도들은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때로는 숨쉬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채워지는 육체의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볼 때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뜻하심이 아니면 허락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책망하심 즉 인생막대기로 징계하심을 거두실 때에 하나님께서 종들을 신원해주실 것에 대한 것을 기뻐하며 바라보며 그 믿음과 소망과 그리고 주를 향한 사랑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과 주님 안에서 사랑을 온전히 이루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심히 창대하리라

2004년1월5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욥8:1-22
심히 창대하리라

일반적인 측면에서 사람들 자신들에게는 소신(所信)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만한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없이 행한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당사자의 당면한 상대적인 경우에서는 그러한 소신도 여론적인 것이나 결과적 판단을 받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바르게 판단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이 치우친 가운데서의 판단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판단들의 상이한 경우에는 서로에게 고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좀더 본문에서의 접근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소신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할 때에는 그 시비를 판단 받을 때에는 그 고통이라고 함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신이라고 하는 것이 고통 받는 것보다도 또한 더 주목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중요함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이 한 말에 대하여서 그 입의 말이 광풍 같음에 대한 것으로 지적하며 하나님이 심판을 굽게 하시겠느냐는 반문에서 출발하여서 욥의 자녀들이 득죄하였기 때문에 주께서 그 죄에 붙이신 것이라고 하면서 욥도 회개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판단의 기본은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돌아보시고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음에 대한 것은 여전히 욥이 불의한 사람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수아 사람 빌닷은 욥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0절의 말씀에서는 욥에게 말하기를 옛 사람에게 물으라고 함을 말함과 같이 경험 있는 자의 말이라고 함과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개인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타당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말한 옛 사람들의 경험이라고 함의 예를 들어서 상대적 진리성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는 것과 갈대가 물없이 자라는 것과 같은 경험적 판단의 유용성과 확실성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모습이라고 함은 소망이 없어진다고 함과 그 의지하는 것이라고 함은 거미줄과 같이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이서 있었을지라도 뽑히고 나면 그 자리도 모른체하고 다른 것이 나는 것과 같이 욥이 잘못을 범하여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판단을 받고 있는데, 욥 자신이 순전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욥의 입에 웃음이 채워지고 미워하는 자는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을 들은 수아 사람 빌닷이 말을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욥의 고난이라고 함을 심히 창대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서 판단하고자 하는 빌닷의 모습과 그것의 분별이라고 함을 판단하며 증거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욥은 데만 사람과 빌닷 사람들에 대하여서 떼를 지은 객들로서 죽음의 이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고 함을 말하였던 것에 대하여서 그리고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기서 5장 27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연구하여서 말함에 있어서 유익을 생각하라고 함에 대하여서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금 이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수아 사람 빌닷의 중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내제적인 성찰이라고 하는 것 자체에서 비로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허용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것으로서 정당함을 입을 때에 내제적인 성찰이라고 하는 것이 학문적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있고 판단하는 엘리바스와 그를 잇고 있는 수아 사람 빌닷은 잘못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러한 말들을 통하여서 자신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에서는 전혀 잘못하심이 없으면서도 그 종된 자로서의 이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이라고 함을 품군의 날로 비교하며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전적으로 내놓고 있는 가운데서 심히 창대하리라는 개념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그들의 판단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시키는 자들로서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빌닷이라고 함은 ‘혼란스러운 사랑’, ‘뒤 섞여진 사랑’으로써 순수한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자의 존재적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심히 창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결과만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품군과 같이 보이며 고난 속에 있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 거하는 자로서의 그 창대함을 이미 예정하신 가운데서 누리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판단을 의지하는 자들로서의 진정한 창대함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심히 창대케 하시는 참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호렙산의 모세

2004년1월4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3:1-22
호렙산의 모세

사회 심리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다른 곳에서 새로운 상대적인 발상들을 구상할 수 있고 또한 쉼이라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소외되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자기의 유익으로 바꿀 수 있는 자리에 나감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고난이나 생각밖에 있는 뜻하지 않는 고난도 허락하심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자들을 권면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장소로써의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 가운데서 되어지는 일들 주의 뜻하심의 증거를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게 되며 그곳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타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시고 있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대로 기억할 것과 구체적으로 애굽에서 모세가 행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게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모세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의 바름과 하나님 앞에서 성도와 보내심을 입은 종의 정체성 그리고 애굽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게 하실 것에 대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에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심의 말씀을 듣고 그 음성을 듣고 얼굴을 가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신을 신겨주시기 위해서 지금까지 착용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을 벗음은 모든 기업이라고 함을 무르는 것으로 말하게 됩니다.

룻기에서 읽게 되어지는 ‘보아스’가 ‘룻’을 취하기 전에 더 가까운 친척으로서 결혼상대자를 구할 때에 그 기업을 무를 의사가 없는 가운데서 표현한 신을 벗는 것과 같은 모습은 이미 모세의 모습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기업으로 세우시는 가운데 순종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로서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안력으로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기를 구하는 자의 모습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그 실재적 구분에 대한 고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세는 자신이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라는 말씀을 감당함에 자신의 종으로서의 존재적 정당함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자신이 누구관대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하라’고 하시면서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을 통한 종의 실재적 정당함을 부여하셨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사람들로 은혜를 입게 하실 것이라고 함과 그곳에서 빈손으로 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일반은총적인 지혜와 학문과 물질과 생의 전반이라고 함을 취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주 앞에서 구별하여 현실적인 실재라고 함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공부도 물질도 지혜도 모두 구별하여 취할 수 있는 그 풍성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풍요로움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즐거울 때나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억할 때에 때로는 황량한 사막을 걷고 있는 느낌과 실제로 고통스럽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바라보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모습이라고 함을 분명히 하면서 마땅히 품어야 할 생각과 판단 안에서 즐거워함이 옳은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했던 줄로 재어준 자신의 구역이 심히 아름답다고 하심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보내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종된 자로서의 정당함과 사역의 정당함을 따라서 우리의 작은 입술로도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의 실제를 증거하여야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세상의 지혜와 학문 그리고 세상의 보화라고 하는 것들도 구별하여서 취함에 따라 광야 같은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그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도록 하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때로는 나그네 된 자리에 선다고 하여도 주의 뜻하심을 잘 받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모세와 같이 잘 감당하는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2004년 1월 4일 소망교회 신년감사주일낮예배설교
사43:14-21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새해가 되면 여러 사람들의 시무식이라고 함에 있어서 연설이 있기 마련이고 방송매체에서 진행하는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으로서 새해를 맞이하는 소감한마디 정도 들을 수 있고 또 스타들의 새해에 있어서 인터뷰를 시도할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새해가 되어 드리는 첫 주일 낮 예배입니다. 우리 성도의 새벽별로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어떤지 그 말씀하심 앞에 나옴도 새해를 맞이하는 자들로서의 기본적인 합당한 모습이라고 함을 말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주의 말씀하심을 들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며 왕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바다 가운데 길을 첩경을 내고 병거와 말을 일시에 엎드려지게 하신 분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전 것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심과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새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정녕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자신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과 자신이 지었음과 그들로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하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속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속하심 그 새롭게 하심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음이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어진 가운데서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가운데서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 중에 한 부분입니다. 이사야서 32장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들은 이사야가 이인칭의 말을 쓰지 않고 일인칭의 말 즉 하나님 자신의 동격화가 되어지는 그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형태로서 말씀하시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구속자로서 모세를 통한 홍해를 가르셨던 자로서의 자신을 나타내시고 있음을 주목하도록 하시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새 일을 자신이 행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새롭다고 함과 구별의 의미는 기름부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거룩한 성별을 의미하며 그 부음받은 자의 존재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증거해왔습니다. 이러한 것은 기름붓다는 뜻의 메시아의 사상적 증거를 계속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메시아 안에서 구별되어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게 되어질 자들이 그 새롭게 되어짐으로 표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본문의 예언을 하는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이 은혜로써 구원하셨는데 자신의 내탕고에 있게되어지는 것을 바벨론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음을 인한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즉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라는 그 뜻함의 존재가 정당함을 입지 못하게 되었고 그의 후손이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강하게 하심에 따라 존재적 정당함을 얻는 자로서의 강함인데 그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능력을 상실하고 바벨론 즉 혼돈이라고 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을 말씀하심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에 대한 예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적의 그러한 죄를 다시 기억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서 그들을 지었음과 그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며 또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 사실들을 증거함이 그 노래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 그 이름의 뜻이 바로 ‘여호수아’ 이름의 어원적 기원을 말할 수 있는 예수님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증거를 존재적으로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혼돈의 바벨론이라고 함의 실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예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대속하심에서 새롭다 칭하심을 받게 되어지며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새로운 법적 질서를 통하여서 그의 백성들의 구원을 말씀하실 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심을 얻게 하심의 ‘새로운 법적질서’.. 전에는 그 ‘죄악’과 ‘혼돈’이라고 함에서 실제를 분별하지 못하고 새롭다는 것을 행위 자체에서만 생각하여왔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로서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새롭게 하심이라고 함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올해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서 믿음으로 행한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의 새 일을 감당하는 자들로서의 합당한 일이라고 함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묵상하시는 가운데 주시는 믿음으로 행할 때에 올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하시는 그 사역을 잘 수종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들로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모세의 영광

2003년12월2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2:11-25
모세의 영광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 중에 이러한 말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집 떠나면 고생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물론 여행이라고 하는 어떤 적극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러한 것은 주관적 판단에서 고생이라고 함을 즐긴다는 개념에서 고생 자체의 의미를 많이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도 익숙해진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고 때로는 자신의 실존의 안전이라고 함에 불확실함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어려움과 고생이라는 것보다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 동기적인 측면에서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개연적인 실리적 표현이 되어질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믿음이 되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며 그 믿음의 내용적 증거를 또한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의 믿음이라고 함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인한 은혜와 영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주목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장성하여서 히브리 사람을 애굽사람이 치는 것을 보고 살인하게 되었고 또한 히브리인 사람들이 또한 다투게 되어짐에 있어서 히브리인이 모세가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또한 애굽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가 났고 또한 애굽왕 바로가 죽이려고 함에 그 낯을 피하여서 미디안으로 도망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도망친 곳 미디안 땅에서 미디안 족속 이드로의 딸을 도와주고 또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또한 모세가 나온 애굽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 즉 애굽왕이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는 소리와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권념하심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모세가 결혼한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영적 실재적 의미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도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을 도망쳐서 미디안으로 간 것에 대하여서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망명이라고 함보다도 믿음으로 그 망명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의 이때 당시의 그의 인식에 나타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히 11:24~27)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모세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 이방인으로서의 미디안의 사람과 화목하게 하시고 그 자신의 영광으로서의 아내를 얻게 되어지는데 그가 이드로의 맏딸 ‘십보라’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이처럼 아내를 취한 자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잠 18:22)라고 함을 말씀하심과 같이 그 복된 자리에서의 그 영광을 취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하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외국인이다. 또는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것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함께하며 그들과 고난받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중심을 가질 수 있는 은혜를 잊지 않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세는 한 때 애굽의 왕자로서 모든 학문을 접한 자로서 자기에 대한 변명이라고 함을 할 수 있고 또한 여러 가지 정황적인 것을 사용하여서 애굽에 남아서 애굽의 왕위를 계승할 수도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를 기뻐하였고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 받으심의 자리를 사모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진정 주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이라고 함에 굳이 참여하여야 하는가 하는 그러한 자리에서 정도껏 행하는 모습보다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올해도 그리고 내년에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때에 힘써 일하는 귀한 주의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 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나인성에 가신 예수님

2003년12월2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7:11-17
나인성에 가신 예수님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는 기쁨과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같이 있기 마련이고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심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주목한다고 함을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의 구성과 내용은 예수께서 나인성으로 가심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행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신 나인성에서는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는데 과부된 자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관에 손을 대니 사람들이 멈추고 예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으로 나인성 그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주의 기적이라고 함이 이루어진 나인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곳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나인’이라는 말은 나아(ha;n:)라는 말로써, 본래 의미는 '편하다', 즉 (함축적으로) '즐겁다'(혹은, 적당하다), 즉 '아름다운':- 아름답다, ~답다, 예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목초지, 거처, 목자의 거처, 거주, 초원”이라는 말이 나왔고 이러한 히브리어 기원에서 오늘 본문의 성의 이름으로서의 나인(Nai?n)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인성에서의 한 과부된 자의 아들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즐겁고 아름다워 보이는 목초지에 죽음이라고 하는 슬픔이 기숙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에덴 동산에 두셨는데 범죄하여 정녕 죽음을 당한 것에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이것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고통과 고난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양육되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15)

사람이 죽고 사는 그러한 문제에 해답이 풀리지 않게 되어짐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또한 자신들의 존재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고민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기쁨이 있다고 하는 삶에 슬픔이 기숙하는 인생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의 답변이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시며 사람들을 멈추게 하시고 예수 자신이 말씀하신다는 그 자신의 절대자로서의 절대 정당함으로 생명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주님의, 생명의 주 창조주로서의 주권적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죽음이 두려워 종노릇하는 것에서 풀어주시는 주님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장래에 알지 못한 일을 주님의 구원하심에서 알게 하시는 새 생명의 질서를 선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하심에서 고통과 그에 따른 죽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울음이 기숙하게 되어지지만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이 오심으로 주님 오시는 날에는 기쁨이 오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사아서 2장과 미가서 4장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종말의 때에는 주님의 목자적인 양들로서의 무리를 지은 목양의 시대 교회의 시대가 있을 것인데, 그러한 가운데서 주의 복음으로 낳아 길러내는 믿음의 후손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 이름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그 이름에서 비롯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 자신의 절대 정당함 속에서 행하시는 구원으로써, 그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심에 다른, 자신의 자녀들을 돌아보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인성과 같은 이 세대에서의 주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돌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면서, 독수리 날개치듯 새 힘을 주심의 은혜를 받아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사역을 잘 수종들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Preacher

이명신
강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계명대학교 자연대학 수학과 졸업
고려신학대학원 신학과 졸업

I am a preacher in Christianity
Keimyung University
korea Theological seminary i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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