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월 16, 2004

지혜자를 찾을 수 없구나

2004년2월1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17:1-16
지혜자를 찾을 수 없구나

인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러한 성장과 쇠퇴라는 개념의 상관성에서 가장 완성적이고 힘이 있어 보이는 때를 예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예가 젊음에 대한 예찬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그 완전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여야 한다는 그러한 정황 속에서 생각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젊음이라고 하는 것의 예찬만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오히려 인생예찬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존이라는 것에 있어서 객관성을 잊고 가장 젊은 때만을 예찬하는 경우도 있지만 삶의 전반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면 아마도 인생예찬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경험한 나이가 되어지는 그러한 때가 된다면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인생에 대하여서 말하는 젊은이에게 그 경험적인 지혜로서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험이라고 하는 지혜가 진정으로 실제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둘 수 있는 것도 백발의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욥의 조문객으로 온 자들이 그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말함에 대하여서 욥이 한마디 언급하면서 종으로서의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서 자신은 알지 못하면서도 몸에 악창이 나서 터지고 상처가 굳어졌다가 또 터지는 것과 같은 반복되어진 가운데서 심리적으로도 많은 왜곡되어진 말들을 들으며 고통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 자신의 기력이 쇠하여져서 죽음을 의식하게 되어진 상태인데 욥의 조문객으로 온 자들의 언급하는 말들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나타나는 그들의 중심과 모습들이 마치 격동함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고 있음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주께 청하고 있는 내용과 그러한 중심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주께 청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주’가 되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즉 보주라는 말은 보호하시는 주님이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아라브’라는 말인데 보증인이 되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주로써 나타나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이 눈이 멀 것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6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욥을 이야기꺼리로 만드심에 대하여서 욥이 종으로써의 증거와 소망이라고 함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의 증거함 중에 지혜자가 없다고 함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것은 자신만이 지혜를 가진 것이라는 그러한 오해를 받는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증거의 실존에 대하여서 분명한 견해를 가짐에 대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 증거하여야 할 중심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욥의 조문객으로 온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욥 15:7~9)

이러한 언급에 대하여서 욥은 앞서 너희는 나를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고 함을 말하고 있으며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지혜가 없다고 함에 대한 단정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상대적인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상대적인 우리의 인식이라는 그러한 점에서 파생되어진 무한 즉 상대적 무한이라는 것이 우리 인생의 한계적인 범위의 설정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적 무한이라는 것은 절대의 무한과 비교되어질 수 있거나 상관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과 그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부여한 것에 상대적으로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이 자체적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증인이 되시기를 구하고 있다는 것 본문에서는 ‘아라브’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존재의 자신의 존재적 증거와 입술의 증거의 실재라고 함을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자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라고 함을 받지 않은 그러한 상대적인 것만의 경험적 산물로서의 인생의 하나님에 대한 내재적 성찰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말하고 있는 지혜자가 없다고 함을 지적함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윗도 고백한 바임을 기억하게 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증거인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구주이심을 증거함에 사람들이 헌화하며 많은 말들로 말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자존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데 이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의 모습이여 그 기름부음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대적하여서 자신들이 상대적인 존재임을 부인하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다윗이 이미 예견하고 증거한 바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의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한 예언하심의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어떠한 실존에 대하여서 말을 하지 못하며 진실이라고 하는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임의로 부인하려고 하고 노력하는 것은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에 외적인 힘이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격동하고 있지만 그러한 것은 지혜가 없는 자들로서의 의가 없는 불의한 자들로서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종된 성도들은 그러한 것을 증거하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충족하게 다 말하지 못하고 우리가 주 앞에 부름을 받게 되어지는 경우라고 하여도 주의 부활하심 안에서도 그 뜻하심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종들의 마지막 소원을 가짐이 옳은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참된 구원의 지혜를 증거하는 성도들로서의 합당한 증거로 우리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가시는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섭리하신 뜻하심 안에서 소망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은혜와 영광을 세세토록 주께 돌리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