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2월 19, 2004

위로의 마을

2003년12월2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7:1-10
위로의 마을

사람들은 환경과 관계되어진 영향력을 중시하는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 마을’과 같은 그러한 것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관련된 것을 말하는 자료들이 국내외적으로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 사람들의 찾을 위로가 있다. 또는 그러한 위로가 있는 마을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곳이 있다는 그러한 판단의 수용이 어렵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유토피아’는 공상적인 개념에서만 것이라고 하면서 현실성이 없는 것같이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함에 있어서 존재함에 대한 것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위로의 마을’에서 되어진 일들을 증거하시고 있음과 그 실제상황을 증거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과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신 것과 어떤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장로 몇을 보내어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함의 칭찬이 있게 되어지며 그 백부장의 종이 나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가버나움에 주님이 들어가신 것과 그곳에서 되어지는 백부장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앞서 주님이 들어가신 이 가버나움은 그 뜻이 ‘위로의 마을’ "village of comfort" 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적인 그러한 위로의 마을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거룩하심과 그 상관성을 가지는 가운데 그 실제적인 ‘위로의 마을’로서의 정체성적인 증거를 하도록 하시며 그곳에서의 증거가 그 마을에 속한 자들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절대자의 권위와 그 질서적 정당함을 잘 이해하고 또한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겸손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어진 자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규정되어지는 헬라인으로서 유대의 지도자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종된 자로서 유대의 장로들을 통하여서 그를 만나고자 하는 모습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구약의 증거로서 탄생하게 되어지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증거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함을 말씀하심에서는 어떤 과찬적인 개념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게 증거하는 종을 기뻐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구약에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지는 욥을 기억합니다. 그는 순전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던 자입니다. 구약에서 욥을 능가하는 자의 모습은 다윗과 비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외에 달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또한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욥은 그러한 순전함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고난 받고 있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정당함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베푸시는 그 뜻하심에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지는 자신의 초라함을 변명할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을 잠시 하는 가운데서 시험에 넘어졌던 것입니다.

즉 흙으로 만든 피조물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 질서적인 정당함을 잃은 것인데 여기 백부장은 그러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자랑되어지는 자들에 비견되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분명한 존재의 다름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상관성이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백부장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할 때에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진 것으로서의 거룩하심에서의 그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교회가 새롭게 나타난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심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만으로 본다면 여기 세상에 어느 곳도 거룩한 곳으로써 위로를 줄 수 있는 곳은 진정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정당함을 부여하심에 따라서 인생의 피곤함을 잠시 쉴 수 있는 그러한 기쁨으로서의 분복이 사람들의 삶에 주어진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그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진정 주의 구원하심의 위로가 있는 위로의 마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성도들로서의 모임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모임의 현실적 실제의 지역교회의 모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창조주의 절대자로서의 주권을 생각하고 주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생각하고 존경하며 위로하고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주의 이름으로 영생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그 명부에 그 이름이 흐리지 않고 기록되어지는 위로가 또한 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집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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