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2월 19, 2004

솔로몬 행각에 모이거늘

2004년2월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3:1-26
솔로몬 행각에 모이거늘

우리가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할 때에 어떤 일에 맹목적이라는 입장을 취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그 확고함을 말할 수 있는 형식과 모습을 말하면서도 사실 맹목적이라는 그 말에 자신의 판단이라고 함과 주권적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이것은 외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습과 같은 것이 전형적인 모습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그러한 자들의 행함에 믿음 안에서의 주권적 의지를 가진 가운데서 행한 자들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신앙의 경건이라고 함을 행함으로 표현하는 것의 완성적 입장을 나타낼 수 있는 성전에 올라가는 그 도중에서 생각하여야 할 것을 마음에 가지도록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데 그곳이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행각(行閣)(Portico)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기본적인 표현과 신앙고백인 성전에 나아감에 대한 그 실제적 기본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또한 증거하고 있음을 받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체적인 시간이 정해진 가운데서 경건의 습관적 행함에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금도 없고 은도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함에 증거를 받은 자가 걸으면서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것과 그것을 본 자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고 놀람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어서 주목함에 베드로는 자신들의 경건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님에 대하여서 말하며 의로운 자 예수 생명의 주를 죽였음에 대하여 지적하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음에 대한 증인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행하였음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도 그것은 이해의 문제라고 함보다도 하나님의 앞서 증거한 선지자들의 증거의 정당함에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에 대하여서 인용적인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구성의 특이한 점은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이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구체적인 복음의 증거가 되어지고 둘째와 셋째의 본문은 동일한 한 부분으로써 귀납적인 측면에서의 예수님의 구주이심과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으로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가 앞서 앉은뱅이를 낫게 한 실재적인 증거임에 대한 것으로 증거와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먼저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은 후자의 증거 즉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주이심에 대한 증거라고 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앞서 하나의 이벤트성의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주목하였던 것과 또한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으로 그들의 경건에서 비롯되어진 치유가 아님에 대한 언급들이 그러한 것을 반증한다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앉은뱅이가 일어남에 대한 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의구심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답변할 때에 있었던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이 증거 됨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봄에 대한 증거가 예수로 하여금 되어짐에 대한 것으로 확신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벤트성의 또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인위적인 행위들이 아니라 실제적인 주의 복음이라고 함이 현실적인 형태로 증거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실제로 인증하게 되어지는 그 증거가 바로 후에 베드로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가 솔로몬의 행각에 있었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였다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솔로몬 때에 있었던 기둥들이 있고 벽이 없는 그러한 통로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당시 보수되어서 그대로 이름하여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둥만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강조되어지는 솔로몬과 관련되어진 기둥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솔로몬이 성전의 현관에 비교되어지는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야긴이라는 말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라는 그러한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솔로몬 성전에 들어갈 때에 그 현관의 그 문의 정당함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는 그 정당함의 실재를 말함을 믿는 가운데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이 많이 있지만 여호와께서 세우셨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의 중심적 실재를 믿는 판단과 기쁨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자신들의 필요라는 것의 실재를 중심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으니 그것은 핑계할 수 없는 주님을 부인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그 표적이 되어지는 앉은뱅이의 모습과 동일시되어진 가운데서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 중에서도 이제 주의 구원하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자가 있을 것에 대한 증거도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주님이 생명의 주요 구원의 주이심을 믿는 것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오늘 본문에서 앉은뱅이는 사실 하나님의 실재적인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님이 구주이심과 그의 증거의 실재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모습을 표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러한 자리에서 나와 구원의 기쁨으로 주 앞에서 그 행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 솔로몬 행각에 모이는 자들의 모습과 같이 하나님 그가 자신으로서의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심에 대한 그 정당함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서 그 절대의 정당함 속에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증거가 진정한 하나님의 증거자들로서의 증거의 실재가 된다는 것을 믿고 주의 구주이심을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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