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2월20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0:1-29
떠도는 참새의 저주
고사성어 중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르게 돌아온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에 상대적인 경우의 여러 가지 억울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그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때를 말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의거해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소위 ‘하늘이 무섭다는 것을 알라’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범신론적인 개념에서 사필귀정이라는 개념의 의미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두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당위성을 느끼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국한시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도 주 안에서 상대적인 측면의 판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존재를 판단한다는 것은 까닭없는 저주로서 오히려 그 자신의 심판이라고 함을 자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소발이라고 하는 자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의 입장이 이러한 것으로 욥에게 성립되어질 수 없는 말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자신에게 적용되어지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20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발은 욥이 하나님의 허용하심 안에서 성도로서의 고난의 의미와 실제가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 세상이 있어옴으로부터라는 세상의 인식되어진 보편적인 생각을 의지하여서 쓸데없는 똥철학을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말의 합리성을 인정하지만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판단이 자신들 보다 어린 사람으로서 누린 시간들이 잠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기골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울 것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욥의 모습을 판단하며 정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발은 욥의 잘못을 감추는 합리성이 있다고 함을 지적하면서 그의 재물이 많았음이라고 하는 것이 불법적인 재물이었음에 대한 추측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받는 자의 모습이라고 하더니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거한다고 하는 그러한 언약에 대한 비하로써 엉킨 젖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대충적인 입장의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0절에서 29절에서는 소발의 욥에 대한 부당한 판단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욥이 배를 불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로를 내리심과 그로 인해 철병기를 피할 때에 놋 활을 당김으로 그의 몸의 중심에서 그러한 놋이 나옴에 대한 묘사로 욥의 고난이라고 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발은 말하기를 27절에 하늘이 그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칠 것이라고 함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갈 것이라고 함과 그것이 욥과 같은 자들의 정하신 산업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소발이라고 하는 자의 모습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이라고 함이 범신적인 개념이며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모습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소발이 인용하고 있는 하나님이란 말은 엘로힘과 엘이란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앞서 하늘이라는 말은 역시 사마임이라는 글자 그대로 하늘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범신적인 신앙이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엘로힘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미 그의 이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소발이라는 말은 ‘참새’라는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주목할 때에 성경에서는 참새라는 말을 여기 욥기서를 제외하고 7번 나오고 있는데 이 참새는 의미없는 말을 하는 존재와 하찮은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에 대한 칭호가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윗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만(시 102:7) 형태적인 초라함과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자의 동일한 표현이지 실재적으로는 그 존재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고 하는 그러한 존재적 정당함을 예정하신 가운데서 다윗이 이미 얻고 있는 가운데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행13:22참고)
그것과는 달리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 26:2)
우리가 욥기서에 첫 부분에서 욥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의 순전함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그러한 가운데서 허용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욥이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것이 아니라는 정당하지 못한 그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의미 없는 저주라고 하는 것이 소발의 모습인데 그 소발이라는 이름이 참새라고 할 때에 그의 존재적 혼신의 욥을 저주함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주목한 잠언서의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2)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는 것은 그 존재와 그 증거의 실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핑계할 수 없어도 상대적이라는 우기는 그러한 모습들로써 저주하는 자들의 모습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러한 많은 참새들보다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그 판단하심과 신원하심에서 그 예정하신 그 뜻하심을 나타내실 것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그것을 받지 못하여서 까닭 없이 저주하는 인생들의 모습에 낙심하지 않고 참으로 주 앞에서 기뻐 받으시는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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