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2월 26, 2005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2005년 12월 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8:1-9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만왕의 왕 예수께서 탄생하심을 기념하는 성탄절 저녁에 인간의 나라의 왕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사사시대의 장로들에 대하여서 기록된 말씀을 상고한다는 것은 또한 큰 은혜를 베푸심으로 받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의 왕되심에 대한 분명한 견해라고 하는 것을 사실로써 주목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심의 인도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면서 좀더 주목하게 됨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방법과 과정에 대한 분별력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를 믿음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또는 그 앞서 기획하는 가운데 있어서 그 결과를 예상하는 목적과 그것을 위한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며 사람들의 생각은 목적우선이냐 아니면 과정 우선이냐는 그러한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 되어짐에 있어서 그것으로 위안을 임의적으로 받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즉 목적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니까.. 또는 과정이라고 해도 결과가 중요한 것이야 지금은 실증주의적 좀더 현실적으로 표현해서 실적주의적인 사회이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사회적인 인식의 조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늙으매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음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사무엘의 아들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함에 있어서 열방과 같이 자신들에게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언급함에 사무엘이 기뻐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오래된 그러한 신앙적 옳지 못한 반목의 죄악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며 그들에게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왕을 구하는 모습과 절차적 개념의 판단과 행동에서는 그 정당함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과는 달리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은 이미 그 정당하지 못한 합목적성으로 부정되어진 것이라고함을 지적하심에서 그 절차적 방법적 정당함과 그 인식되어지는 신앙의 정당함이 이분되어질 수 있음을 유의하여야 함이 참되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자의 자리에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인위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본다면 아마도 합리적인 개념의 입장이 아주 매끄럽게 해석되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들의 행함의 옳지 못함을 따라서 그 사사적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께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무엘은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다는 점과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 참으로 스스로를 돕는 가운데 이스라엘 왕정을 열 수 있었다는 그러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인본주의적 개념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개념의 합리적 도입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정당하게 먼저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서 그 되어질 일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된 시각이라고 하는 것이 미봉(彌縫)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자신들을 결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정당하게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자존적 판단이라고 하심을 나타내보여주시고 있는데 그것은 7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섭리라고 함의 범주를 말하게 되는 것은 9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무엘에게 그들의 악함이라고 함을 말함과 그 왕의 제도를 허락함과 그 제도를 알게 하라고 하심에 있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가운데서 그 일들을 수행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심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기뻐하지 않음과 같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지 않고자 하는 그러한 악함과 그것의 미봉되어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왜곡하는 가운데서 어렴풋이 보게 되는 그래서 그들의 고통을 자초하게 되어지는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처럼 기뻐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왕정 나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실 것이고 그것의 시점을 나타내셨는데 사무엘은 늙은 가운데서 그러한 것에 대한 깨어 있음과 분별함에 있어서는 한발 늦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이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지목하기 전에 그들을 책망하거나 하나님께 그것을 고하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그러한 모습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시점을 적극적으로 분별하지 못하였음에 대한 것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의 그 사역적인 기간이 끝나가고 그것을 느끼고 있는 시대적 감각정도는 앞서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옳지 못한 인식의 미봉적 절차의 정당함을 나타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왕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원하는 왕의 정체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하나의 부정적 개념의 왕의 제도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사의 좀더 신실하게 깨어 있음과 이스라엘 장로들의 신실한 인식에 관여되어서 주목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그들의 사태라고 하는 것 즉 사사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울 때에 그 질서적 당위성이 세워지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심을 먼저 물어보았어야 함이 옳은 것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왕의 제도를 세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뜻하심을 구하는 것이 또한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었다면 이미 하나님께서도 하나님께 대한 옳은 인식이라고 하는 것과 올바른 절차적 정당함을 모두 갖추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국시대를 더 축복되게 시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들으심이라고 함이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자는 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식이라고 함의 정당함도 같이 나타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신약에서의 그 증거는 스가와의 아들들이 사도 바울의 전하는 예수를 빙자하는 가운데 귀신들이 그들에게 주장하여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행 19:14~16)

절차적 개념으로 나타나는 방법론적 정당함을 찾음에 있어서 한번 더 유의하게 되는 것은 그 절차라는 개념에서 읽게 되어지는 과정 즉 시간을 전제로 한 방법적 존재라는 것과 같은 의미를 읽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과연 오늘날 과정신학이니 역사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외곡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로소 아주 철학적일뿐이지 신학과 신앙적인 개념은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신앙과 신학 그리고 진보적인 신앙에서는 과정신학과 같이 시간이라고 함에서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그 풍성함을 소위 보수 또는 개혁신앙 보다 먼저 누리고 있지만 그 인식의 정당함의 사실은 전혀 모호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현대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종교개혁신학을 부끄러워하고 중세에 종속되어지는 현상을 말해야만 하는 당위성에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는 고통이며 왕되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질서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재와 실제가 없는 고통의 번민의 신앙의 모습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시간의 풍성함에서 분별이 필요함을 기억하게 되는데 이것은 시간에 대한 분병한 논리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인식적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가운데서 사실로써 받고 규정할 수 있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기획하고 나타내는 우리의 생활에서 그 되어짐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논리에서 비로소 인위적 구별을 하는 가운데서 고통의 문을 여는 자리에 서지 않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절차와 방법과 합목적성을 규정하고 따르는 가운데 그 가운데 왕되신 주님의 다스리심이 나타나도록 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우리의 삶에 예수께서 왕되심을 선포하는 귀한 자리에 서시는 은혜를 구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옛날에는 상대적인 초 자연주의적 관념론적 잘못된 신앙에 대하여서 보수적인 신앙적 입장에서 역사적 신앙을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주관화 시킴으로써 역사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인 생각으로 합당하지 못하게 논리적인 타락을 말하게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혼탁한 신학계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혼돈이라고 하는 것도 초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사사의 때와 같이 오늘날도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의 그 풍성한 선한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을 보수적 개념에서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현대신학에서 먼저 알고 누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데,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그 규정적 실제로 그것들을 새롭게 구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풍성한 신앙의 깊이와 은혜의 깊이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신앙의 혼돈으로 그 세상왕의 제도적 고통을 초래하는 경향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세월 그 시간에 대한 개념없이 그것을 아낀다는 것은 그 방법적인 면에서나 그 인식적인 면에서 그 정당함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참으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잘 분별해서 주 예수님안에서 구별되어진 그러한 것으로써 바르게 또한 풍성하게 그 뜻하심을 받들 때에 주께서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왕으로서 그 질서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정당하게 구별하여서 비로소 가능성에 따른 것으로써의 세상왕의 제도적 굴레에서 벗어나 주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그러한 천국의 기쁨과 그 질서적 제도를 알고 바르게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되게 우리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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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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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가 나셨도다

2005년 12월 25일 소망교회 성탄축하주일예배설교
눅2:8-20
구주가 나셨도다

이번 주일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와 감사드리는 성탄예배로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성탄절과 주일이 겹치는 되는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데, 주님을 증거함에 더욱 마음깊이 두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초로 하는 주일과 주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축하하는 성탄을 같이 드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의미는 또한 깊게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주가 나셨음을 기뻐하고 증거함에 있어서 유의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아기가 나심과 함께 그것이 우리에게 표적이라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나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있으련만 주의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은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가 찬 그 때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영광이 저희를 비취매 그들이 두려워함과 천사의 증거로 두려워말라는 말과 함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음과 그리스도 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함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허다한 천군천사들의 찬송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감에 목자들이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찾아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하고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목자들에게 증거되어진 그 내용과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찬송하며 돌아감에 대한 것을 기억하며 그 주의 천사의 전한 내용과 그로인한 주께 합당한 영광을 돌림의 은혜의 자리가 그것입니다.

구주가 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기쁨과 그것이 표적이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신 증거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표적’(세메이온)을 말씀하심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읽도록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없는 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없다는 것의 내용적 사실이 있는 것과 같이 본문에서 말씀하심의 그 표적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읽어내고 있는데 그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지 주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잘못된 성탄에 대한 이해 즉 표적을 잘못 읽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 중에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도 사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표적을 잘못 읽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현대적인 신앙에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진정으로 경배할 수 있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고민하기도 하고 신앙을 인본적으로 돌리는 잘못된 타당성을 말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이며 철학자는 하나님을 자연의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자연의 자기 표현의 취상이 바로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우주 또는 자연의 자기표현의 최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아실현정도의 모습이 가장 귀한 것이다는 잘못된 주장을 내놓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신격화한 인생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신이 아닌 신격화된 존재로서 동의해줄 수도 있다는 식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성인으로 세계의 성인으로 말할 수 있다는 식에서 비로소 머물고 마는 입장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의 가장 잘못된 기반은 하나님을 자연으로 가정한 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주장할 뿐 그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동의적인 차원이 아닌 자체적 차원에서는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다른 진정한 성경에서의 아기의 나심이라고 함을 바르게 읽은 표적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의 증거입니다. 더욱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계시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정당하게 취하시는 분으로서 상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시는 분으로 사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 그렇게 말하는 것도 상대적인 인식에서 해석된 표적에 대한 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합리성 자체에서 말할 것이 아니라 그 합리성의 진실함을 따른다면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계시를 말씀하심에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아기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 이심을 자기가 드러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면서도, 그러나 그 판단가능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판단한 것을 실제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기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스스로 상대적인 표현을 하신 자신이심을 받음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을 사실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고 또 편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자존의 절대의 보편적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진정한 누구나 받아 마땅한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대의 보편성에 따라서 상대적인 모든 이들의 구주이심의 사실을 정당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무엇이 정당한 사실로 받을 수 있는가 살피면서 야곱과 같이 돌배개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사실화시킬 수 있는 제사장적 권세도 있게 되어진 것임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이단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의 태양신의 생일을 빼앗아 왔다는 것으로 그 정당함이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과 기독교가 그러한 이방종교로 타락했다는 어리석은 또한 잘못된 생각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교의 교주가 태어난 날과 동일한 사람은 그 생일을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하여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하신 날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고 정확한 날을 알 수 없다면 최선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성도에게 주신 제사장적 권세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거룩하신 제사장적 권세를 성도들에게 부여하심과 그러한 것의 순종으로 우리의 상대적인 새로운 것이나 삶을 사실화하여 받을 수 있는 것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그의 사역적 형상을 우리 성도들의 삶에 나타낼때에 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가운데서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림은 적극적인 그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그 사역적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제사장적 입장에서 믿음으로 합당하게 새롭게 구별하여 사실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그와 같은 점에서 합당하게 구별하여 축하하며 경배함이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써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상대적으로도 자신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는 것이 그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기예수 나심에서의 그 증거를 받은 목자들은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진실로 받을 수 있었고 또한 마음에 둘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 증거의 사실의 확실성을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더욱 확실하게 받게 하심의 은혜가 열려진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롭다고 하는 잘못된 지성들과 일그러진 이성들이 그 정당함의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아니 알지 않고자 하는 가운데서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에 혼란을 가져다주며 평안이 없는 혼돈 속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기 예수의 나심의 표적을 바르게 바라보면서 주의 주신 평화가 함께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주의 구주나심의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기뻐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사 52:7)을 재촉하시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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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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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2월 19, 2005

사무엘과 미스바

2005년 12월 1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7:1-17
사무엘과 미스바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12월 달입니다. 이맘때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또 내년의 계획을 위한 것도 점검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으로서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는 것과 신앙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이질적(異質的)인 개념은 아니면서도 다른 개념으로 말할 수 있음을 유념함이 옳은 것입니다.

이질적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신앙이 삶이라고 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고 실제적으로는 구별되어지는 것으로써의 차이로서 다른 개념임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것은 현실 속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의식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가를 분별함을 말하는 것인데 그 분별의 기준이라고 함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궤가 기럇여아림에 와서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여졌고 그 아들 엘리아살이 궤를 지키게 되었음과 그날부터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온 족속들이 여호와를 사모함에 대한 것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는 것과 그들이 그렇게 행하였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의 내용이 되어지는 것으로서의 한 상황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고 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리라는 것을 말하매 이스라엘들이 모여 그곳에서 금식하며 회개하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함에 따라서 사무엘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응답하심이 있어서 큰 우뢰를 발하심으로써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고 이스라엘 앞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패하게 하심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센 사이에 돌을 취하여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였음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것도 탈환하게 하시고 평화가 있게 하셨음과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음과 라마 자기 집으로 돌아옴에 그는 또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무엘이 다스리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이는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자신을 돌아봄과 거룩함의 경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의미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주목할 때에 우리의 삶에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적 자리에 세우심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스바의 뜻은 ‘망대 파수하다 감찰하다’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회집을 생각할 때에는 모두가 알 수 있는 곳이나 또는 잘 알려진 곳이나 또는 회집의 성격상 용이한 곳을 찾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그러한 곳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시적인 것이 그러한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가운데서 성경으로 특별영감적 구별되어짐을 말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구별되어진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의 존재 여부와 그것의 존재할 경우 그것의 합당한 실제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망대가 아니라,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그 섭리'(삼상 3:19)를 따라서 그가 명령하였음을 기억할 때에 더욱 그 미스바라는 곳과 관련된 뜻하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의 이름에서 그의 존재와 사역적인 증거가 있는 자로서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뜻인 것과 같이,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 그 망대를 지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들으심과 그로 인한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회집과 회집장소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교회를 예표적으로 읽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세우신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뜻하심을 따라 행함이 기본인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부분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기도'(마 6:9; 눅 12:2)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입술의 언급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우리 인생의 생각과 판단과 행함의 총체적인 방향이라고 함에서도 그 뜻하심을 읽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삶의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사실을 찾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을 규정하는 것이 그 정당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이 바로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의 진리의 말씀임을 받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도 그 방법을 취하심에 있어서도 자존의 정당함으로 선택하실 수 있는데 그 취하신 방법으로는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하신다는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진리라고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진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받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함에 있어서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세워진 질서로서의 교회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 사실을 분별하여 받는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와 윤리적 행함이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삶과 이질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도덕적 반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물론 도덕적 반성이라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범함에 있어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사상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이주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기업의 이방인들로서 형태적인 측면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에 대한 소송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들의 신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가운데서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그들의 기업이 자신들의 것임을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삼상6장참고)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법궤로 인한 그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법궤를 돌려주었는데,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법궤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지 않다는 점과 전에 그러한 상황에서 이겼음에 대한 기억들이 한번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다시 재압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이 인식하고 이스라엘의 기업에 대한 논쟁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을 법궤라고 하는 것에 한정되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의 모습을 축소하며 그 상황적 판단을 상대적인 것으로 비로소 인식하는 것인데 이것은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는 자의 모습으로 마땅히 그들은 범죄하여 죄값을 치루게 되었고 그들은 그 기업소송에서 오히려 불법적인 기업을 돌려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이방인들로써 주의 다스리시는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의 모습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에서는 군웅활거와 같이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정체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그 정당함에서 사실화 되어질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중세의 개념과는 다른 교회의 승리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몸된 교회를 판단할 수 없는 이방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읽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신앙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벧엘을 말함은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들로써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 천국을 소유한 자들로서 길갈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성취한 자들로서 할례를 행함으로써에 비교되어지는 믿음의 세례에 따른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선 자의 모습을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스바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반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현실을 판단해 나가는 경건의 사실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상황에서 비로소 판단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또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다고 하는 것의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로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없는 비극의 사실을 강요받아야 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무엘과 미스바, 주의 말씀에서 합당한 종들과 성도들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 상대적이면서도 주께서 말씀하심을 따라 사실을 규정하고 그 가운데서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자신의 죄악의 사실을 인하여서 회개하는 참된 사실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심을 이루는 자들로서의 합당한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예수님의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들로서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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