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2월 26, 2005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2005년 12월 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8:1-9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만왕의 왕 예수께서 탄생하심을 기념하는 성탄절 저녁에 인간의 나라의 왕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사사시대의 장로들에 대하여서 기록된 말씀을 상고한다는 것은 또한 큰 은혜를 베푸심으로 받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의 왕되심에 대한 분명한 견해라고 하는 것을 사실로써 주목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심의 인도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면서 좀더 주목하게 됨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방법과 과정에 대한 분별력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를 믿음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또는 그 앞서 기획하는 가운데 있어서 그 결과를 예상하는 목적과 그것을 위한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며 사람들의 생각은 목적우선이냐 아니면 과정 우선이냐는 그러한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 되어짐에 있어서 그것으로 위안을 임의적으로 받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즉 목적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니까.. 또는 과정이라고 해도 결과가 중요한 것이야 지금은 실증주의적 좀더 현실적으로 표현해서 실적주의적인 사회이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사회적인 인식의 조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늙으매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음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사무엘의 아들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함에 있어서 열방과 같이 자신들에게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언급함에 사무엘이 기뻐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오래된 그러한 신앙적 옳지 못한 반목의 죄악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며 그들에게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왕을 구하는 모습과 절차적 개념의 판단과 행동에서는 그 정당함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과는 달리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은 이미 그 정당하지 못한 합목적성으로 부정되어진 것이라고함을 지적하심에서 그 절차적 방법적 정당함과 그 인식되어지는 신앙의 정당함이 이분되어질 수 있음을 유의하여야 함이 참되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자의 자리에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인위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본다면 아마도 합리적인 개념의 입장이 아주 매끄럽게 해석되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들의 행함의 옳지 못함을 따라서 그 사사적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께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무엘은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다는 점과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 참으로 스스로를 돕는 가운데 이스라엘 왕정을 열 수 있었다는 그러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인본주의적 개념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개념의 합리적 도입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정당하게 먼저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서 그 되어질 일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된 시각이라고 하는 것이 미봉(彌縫)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자신들을 결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정당하게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자존적 판단이라고 하심을 나타내보여주시고 있는데 그것은 7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섭리라고 함의 범주를 말하게 되는 것은 9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무엘에게 그들의 악함이라고 함을 말함과 그 왕의 제도를 허락함과 그 제도를 알게 하라고 하심에 있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가운데서 그 일들을 수행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심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기뻐하지 않음과 같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지 않고자 하는 그러한 악함과 그것의 미봉되어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왜곡하는 가운데서 어렴풋이 보게 되는 그래서 그들의 고통을 자초하게 되어지는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처럼 기뻐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왕정 나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실 것이고 그것의 시점을 나타내셨는데 사무엘은 늙은 가운데서 그러한 것에 대한 깨어 있음과 분별함에 있어서는 한발 늦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이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지목하기 전에 그들을 책망하거나 하나님께 그것을 고하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그러한 모습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시점을 적극적으로 분별하지 못하였음에 대한 것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의 그 사역적인 기간이 끝나가고 그것을 느끼고 있는 시대적 감각정도는 앞서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옳지 못한 인식의 미봉적 절차의 정당함을 나타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왕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원하는 왕의 정체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하나의 부정적 개념의 왕의 제도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사의 좀더 신실하게 깨어 있음과 이스라엘 장로들의 신실한 인식에 관여되어서 주목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그들의 사태라고 하는 것 즉 사사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울 때에 그 질서적 당위성이 세워지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심을 먼저 물어보았어야 함이 옳은 것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왕의 제도를 세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뜻하심을 구하는 것이 또한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었다면 이미 하나님께서도 하나님께 대한 옳은 인식이라고 하는 것과 올바른 절차적 정당함을 모두 갖추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국시대를 더 축복되게 시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들으심이라고 함이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자는 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식이라고 함의 정당함도 같이 나타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신약에서의 그 증거는 스가와의 아들들이 사도 바울의 전하는 예수를 빙자하는 가운데 귀신들이 그들에게 주장하여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행 19:14~16)

절차적 개념으로 나타나는 방법론적 정당함을 찾음에 있어서 한번 더 유의하게 되는 것은 그 절차라는 개념에서 읽게 되어지는 과정 즉 시간을 전제로 한 방법적 존재라는 것과 같은 의미를 읽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과연 오늘날 과정신학이니 역사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외곡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로소 아주 철학적일뿐이지 신학과 신앙적인 개념은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신앙과 신학 그리고 진보적인 신앙에서는 과정신학과 같이 시간이라고 함에서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그 풍성함을 소위 보수 또는 개혁신앙 보다 먼저 누리고 있지만 그 인식의 정당함의 사실은 전혀 모호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현대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종교개혁신학을 부끄러워하고 중세에 종속되어지는 현상을 말해야만 하는 당위성에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는 고통이며 왕되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질서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재와 실제가 없는 고통의 번민의 신앙의 모습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시간의 풍성함에서 분별이 필요함을 기억하게 되는데 이것은 시간에 대한 분병한 논리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인식적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가운데서 사실로써 받고 규정할 수 있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기획하고 나타내는 우리의 생활에서 그 되어짐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논리에서 비로소 인위적 구별을 하는 가운데서 고통의 문을 여는 자리에 서지 않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절차와 방법과 합목적성을 규정하고 따르는 가운데 그 가운데 왕되신 주님의 다스리심이 나타나도록 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우리의 삶에 예수께서 왕되심을 선포하는 귀한 자리에 서시는 은혜를 구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옛날에는 상대적인 초 자연주의적 관념론적 잘못된 신앙에 대하여서 보수적인 신앙적 입장에서 역사적 신앙을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주관화 시킴으로써 역사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인 생각으로 합당하지 못하게 논리적인 타락을 말하게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혼탁한 신학계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혼돈이라고 하는 것도 초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사사의 때와 같이 오늘날도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의 그 풍성한 선한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을 보수적 개념에서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현대신학에서 먼저 알고 누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데,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그 규정적 실제로 그것들을 새롭게 구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풍성한 신앙의 깊이와 은혜의 깊이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신앙의 혼돈으로 그 세상왕의 제도적 고통을 초래하는 경향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세월 그 시간에 대한 개념없이 그것을 아낀다는 것은 그 방법적인 면에서나 그 인식적인 면에서 그 정당함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참으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잘 분별해서 주 예수님안에서 구별되어진 그러한 것으로써 바르게 또한 풍성하게 그 뜻하심을 받들 때에 주께서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왕으로서 그 질서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정당하게 구별하여서 비로소 가능성에 따른 것으로써의 세상왕의 제도적 굴레에서 벗어나 주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그러한 천국의 기쁨과 그 질서적 제도를 알고 바르게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되게 우리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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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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