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26, 2006

온 세상의 구주 예수

2006년 12월25일 소망교회 성탄축하예배설교
눅 2:1-21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거룩한 이의 탄생,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온 세상이 기뻐해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실제적인 기쁨이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이 상대적인 모순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합당한 진리로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보도에 따르면, 그 보여지는 화면에서 산사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장식이 있음을 주목하면서 상생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했는데, 사실 그러한 것도 옳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라고 하는 그 뜻하심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과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오셨다고 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인류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구주이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음을 인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임을 인하여서 유대를 항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올라가는데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거기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는데 그것은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을 인함이라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기 예수님이 나신 그 지역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 천사가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는 것을 증거하고, 이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들이 자신들에게 알려진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하며 빨리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함으로 인해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지만 마리아는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게 되는 것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그 모든 것을 인하여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며 돌아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쁨과 평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주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는 가운데 분별되어지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기 예수님을 사관에 있을 곳이 없는 모습으로 영접하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주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간략하게 주목하게 된다면, 가아사 아구스도 때에 나타난 호적하도록 명한 시대적 상황과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 그리고 목자와 마리아의 사태에 대한 이해와 중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호적하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이것은 통치자 자신의 통치를 위한 인구조사에 해당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다윗의 잘못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써의 세상적 모습이면서도 주 안에서 구별되어진 주의 백성을 돌아보시며 헤아리심의 일반적인 자기계시로서의 구별되어진 증거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구조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민수기를 중심으로 보면 모세가 처음에 시내산에서 그 광야교회로서의 출발하기 전에 그 백성들을 계수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의 백성들을 계수한다는 것이 그 헤아림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약교회로서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앞두고 있는 이들을 돌아보시고 자기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마음에 두도록하시는 하나님의 헤아리심의 증거를 그 인구조사에서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으로서 발락의 저주를 위한 발람을 통한 축복이 있고 난 바로 다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으로 염병이 있어 죽게 되어지고 그 가운데서도 비느하스와 같은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하는 가운데서 평화의 언약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시험이 올 때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분별하여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받들도록하시는 것으로써의 인구조사가 행하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주의 백성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도록 그의 백성을 헤아림으로써의 본질적 성격에 따른 인구조사와 악을 선으로 이기게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위한 가운데서 그 백성을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의 정당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러한 인구조사에서는 그러한 성격의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통치자로서의 자기의 유익적 개념으로써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은 가운데서 인구조사를 행하는 가운데 그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적인 입장인데 그와 같은 세상적 입장으로써의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이 통치자의 안목과 필요에 따른 것을 위한 호적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관리되어지고 헤아리게 되는 의도와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시행하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나실 아기 예수는 그리스도 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그러한 시대라고 하는 것을 구별하여서 자신의 백성들을 헤아리신다는 증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있고 그 백성들과 같이 됨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자기 계시이시며 또한 자기 백성들을 그 시대적 악함에서도 그것에 국한되어지지 않고 그들을 헤아리시는 주님으로 오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인데,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음에 대한 증거와 그 찬송으로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그 내용입니다.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다는 것의 그 당시 그리고 오늘날의 증거적 사실에 앞서 그것에 대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주목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언이 그 당시 이후에 이루어져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정황적 사태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며 그것에 대한 정당함까지도 예언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5장에서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미 5:2~6)

본문의 예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 예수님의 나심의 장소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것과 그 아기에 대하여서 예언한 것을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시기 전부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바로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자존의 절대의 권위와 그에 따른 합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가운데서 그의 양무리를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에 가르쳐주신 주기도(마 6:9~13)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주장하시는 가운데서 사실규정을 절대 정당하게 말씀하심에 따라 구주 예수님 안에서 정당한 사실을 비로소 말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 보편을 상대적인 보편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며 그들의 중심에 주의 탄생하심 그들의 중심에 예수님의 오심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구교에서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할수 있는 한 예로써, 모 방송사 오늘 인터뷰에서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사상을 초월하여서..'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월' 또는 '초월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보편 자체나, 보편으로의 행보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서 비롯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신적인 입장을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는 경향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Catholic이란 말은 '보편'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신경에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도 동일한 기술적표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상대적인 보편 상대적인 무한개념의 임의적 설정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보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불교도들과의 연합도 취하고 있는 것이 구교의 입장입니다, 불교의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의 '다르마'라는 것은 역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보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규정을 넘어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개념이 비로소 합당한 정당함을 항상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편을 지향하기 때문에 종교를 규정하는 그러한 사상적 보편의 개체적 특성을 넘어선다는 것이 구 가톨릭교와 불교의 연합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으로 같이 활동하고 같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으로서의 제스처로써, 열린다는, 틀을 깬 보편을 지향함으로써 상식적인 보편적 입장의 인식에서는 인정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원적으로 종교라는 어떤 실재자와 연결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써의 규정되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이 그 실재자라고 하는 자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다 신을 의식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미가서 5장에 나타난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는 주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보편의 재가를 통해 사실을 규정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항상 예만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의적 보편이라는 개념과 그 틀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써의 보편을 의지하는 구교 즉 가톨릭교의 입장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의 뜻하심을 비로소 받들지 못한다는 실제적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도 마찬가지로 그 열림이라는 개념의 틀을 넘어서 다르마라는 보편을 상정하지만 그것도 임의적인 보편이요 절대의 보편의 판단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마리아의 사태인식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변경에 머물러 양을 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의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에서 당위성을 비로소 받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 온 백성에게 증거되어지는 기쁜 소식과 땅위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배경적 예언이 되어지는 것은 미가서 5장에서 주목하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미 5:8)

주의 택한 백성들이 열국중과 여러 백성들 중에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세상의 여러 민족 여러 나라에서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들을 권면하시는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이 예언의 내용이며, 그것은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의 '호적'이라는 것을 통해 아주 자연스러운 증거를 구별하셔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러한 '주 예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고후 1:19)을 읽게 되는 종들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룩함의 사실로서의 존재적 무리가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화한 사람들의 보편인식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통용되어질 수 있는 정당함이 있는 관계들과는 달리, 주의 헤아리심의 사실은 편협하다고 할 수 있는 몇몇 목자들과 마리아와 요셉들에게 온 백성에서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는 사실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의 증인적 증거를 몸소 증거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또한 우리에게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전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류와 또한 실제적인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합당한 증거를 받게되는 종들을 의미하며, 후자는 미가서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미 5:4 中)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함'(마 6:9)의 중심이 있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어서'(고후 1:19) 그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 규명을 합당하게 받으며 행하는 사람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중심적 인식과 그 표현은 보편이라고 함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의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종교의 보편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임의적인 상대적 보편의 개념의 변종인 틀을 해체시킨다는 개념에서의 열림이라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과 그 재가 있는 상대적인 보편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개념의 보편성이라고 함을 위해서 상대방의 종교적 입장에 대한 관용의 재스처를 취함으로 사람들의 인식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구걸하는 개념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눅 16:1~9)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온세상의 구주이시면서 주의 택한 백성을 실제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이해의 결핍과 정직하지 못한 모습에서는 모순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그 합리성의 정당함은 임의적인 것이요 절대적이지 못할 때에 그러한 주장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서 주 앞에서 부끄러움의 사실의 판단을 비로소 받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서에서는 그러한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가운데서도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러한 표현과 사실로서 절대적 사실을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음이 이미 예언되어진 성경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미 5:4)

온 세상의 구주이시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생들과 그들에게 주신 바된 것들이 모두 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실존적 구원과 일반적인 잘됨의 구원으로서 그들의 모든 영향력의 실존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관용의 사실도 어디까지냐는 정도적인 규범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실제적 주의 심판하실 때까지 내버려두도록 말씀하심과 또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데로 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적이지 못한 것인데 그러한 것이 마치 실존적인 신이라고 하는 전제로 상관할 사실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측면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불의한 청지기들로서의 예수님의 나심에 대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제스처로 에큐메니칼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서 나와서 오히려 들녁에 머문다고 하여도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라고 하심의 소리를 전해들은 이들 목자와 마리아와 요셉과 같이 주의 나심의 뜻하심과 증거하심을 찬양하고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시는 가운데 그 믿음대로 이 땅에서와 주의 나라 임하실 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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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2월 16, 2006

왕을 부르는 소리

2006년 12월1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23:13-26
왕을 부르는 소리

조금은 오래된 영화입니다만,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 라스트 신(the last scene) 중에 마차경주에 대한 장면이 아주 인상깊은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교적 개념의 월계수를 구별하여서 면류관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하여서 비판하기 위해서 글을 쓰다가 그 연구중에 결국 회심하여서 이 작품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신약성경을 배경하여서 쓰게된 문학작품이면서도, 이러한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오히려 영감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는 부분으로써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람이 저주하기 위해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구약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을 주목할 때에 축복하게 되는 그 모습을 통해서 복음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 핑계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한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두번째로 발락이 발람더러 다른 곳에서 저주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림이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과 그의 신하들을 기다리게 해놓고 여호와를 만나고자 하는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는 말을 받고 그것을 묻고 있는 발락과 신하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노래를 지어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다는 것과 축복의 명을 받았기 때문에 발람 자신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의 힘이 들소같다는 것과 야곱과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크냐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고 그들을 또 사자에 비교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러한 것을 본 발락은 발람을 보고 축복도 저주도 하지 말라고 하자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복음을 바르게 바라보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에서는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근거는 그들의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왕을 부르는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증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문맥적 입장에서 주목하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말에 그 행보를 세차례하게 되어지고 그 다음에 오히려 발락과 함께한 자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첫번째 축복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두번째 저주를 위해 소빔들 비스가에 이르렀지만 앞서 '그들과 같이 되기를 소원하는 자의 중심'(민 23:10)에 이어서 하나님의 식언치 않으시는 신실하심과 함께 그들이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음에 대한 근거로 더욱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회에서의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은 관점을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 것의 중요성은 말할필요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관점이라고 하는 기준이 진정으로 타당한가에 대하여서는 세상에서는 동의적 차원에서 말할뿐 '본래적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 정황적이나마, 본래성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에 그 정당함이 타당함에서도 인정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어떤 저작권이나 로열티와 같은 것 또는 인증에 대한 개념들이 바로 그러한 것을 의식하는 상식으로 우리 주위에서 읽게 되는 개념들과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락 즉 그 이름의 뜻은 '유린하는 자' 즉 '파괴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하는 가운데서 그 행보를 마음에 둘 때에 발람을 초청하게 되는데 그 발람의 뜻은 '백성이 아닌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모사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믿는 구약의 성도들의 존재적 정체성을 부정하도록 하는 합리적인 당위성을 세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속된 표현으로 '절대로 아니다, 또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등등의 절대성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반영되어지는 것입니다. 죄악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핑계할 수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죄악으로 인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의 사실을 미련하게 그와 같은 방법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발람의 저주라는 것 신의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그 확실성을 위한 노력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락이 발람을 통해 저주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자의적 인식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객관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적 정당함을 부인했다고 하는 인식의 확실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학자들의 시끄러움(pannic voices)도 바로 이러한 몸부림의 어설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발락과 발람이 이른 곳인 '소빔'이라고 하는 곳은 '파수꾼' '살펴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현상적 이해에서의 가장 높은 곳으로써의 위치를 선점하는 기득권을 유도하는 곳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장소에서 '비스가'라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절벽, 쪼개진 틈(cleft)'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의 융기나 지각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높은 낭떨어지나 구렁과 같이 벌어진 경계를 말하는 곳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와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그 백성들의 존재와 행보를 주목해서 해석한다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목한 내용중에서는 그들에게는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고 그를 부르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이 있음을 읽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즉 '임마누엘' 사상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마 6:9~13),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다는 것'(살전 2:4)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자기계시와 그것을 근거로한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성도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람은 멀리서 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왕을 부르다'라는 히브리 본문은 '터루야 멜렉흐'라고 말하고 있는데, 부르다는 말인 '터루야'라는 말은 '소리치다', 특히 '깨어지다'라는 뜻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이것은 시끄러워보이는 가운데서도 인식의 납득당위성이 비로소 없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왕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의 그들의 실존이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의 옳게 여김을 받는 그러한 가운데서의 부르다는 말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경우를 볼 수 있고 또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모습에서 주목할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어떤 놀람이라고 하는 것 당황함이라고 함에서의 묘사라고 하면 그 내용적인 것은 후자의 경우 옥합을 깨뜨림에서 읽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 그 여인이 잘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말씀하신 바로서의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여인에게는 모든 자신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새롭게 말하는 기준임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는다 산다는 그러한 상대적 개념과 판단에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주권적 정당한 자신의 증거가 자신의 기준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의 옳음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던 것인데 이것은 바로 그의 행위라고 하는 것 주님을 위해 자신의 깨트림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로부터 정당함을 입는것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정황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그 파생적 당위성을 가지고 본래성을 주장하는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엉둥한 신의 속성적 개념으로써의 임의적 절대의식을 추구한다고 하여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라고 하는 메시야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본래성의 정당함의 실존을 임의적 스스로 취하여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 22, 23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힘이 들소와 같고 그들을 해할 사술과 복술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술법들의 합리성은 있다고 하여도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현상적인 모습으로만 본다면, 여러가지 판단 가능성과 또한 속된 표현으로 만만히 볼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들소들과 같이 힘은 있지만, 다소 조절이나 어떤 이성적 개념의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판단이 있을 수 있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주님가르쳐주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삶이라고 할 때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권세와 당위성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왕을 부르는 중심이 있다고 하면 그 말씀하심 안에서 더욱 신실성의 재가를 받도록 그 말씀을 사모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고백과 같은 자리에 서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세상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현상적으로나마 받지 않도록 노력함도 갖추게 된다는 사실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만왕의 왕 내주깨서 왜 고초당했나..라는 찬송을 마음에 두게 되면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중심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되어지는 왕을 부르는 기도로서의 삶을 영위해나가면서 특히 12월 성탄의 기쁨과 감사로 오늘도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들 속에 함께하며 주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 그리고 다시 오심을 오실때까지 전하고자 하는 중심을 나누기 원합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옳게 여기심에 마음을 두며, 왕을 부르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셔서 주님의 영광을 받들어내는 담지자들로서 세상의 빛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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