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3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6:1-13
한 여인의 증거
사람들의 인식을 나타내는 말들 중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즉 ‘대중(大衆)의 힘’ 또는 ‘민중의 정의실현’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대중의 무지’ 또는 ‘다수(多數)의 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적절한 표현과 납득이 되어짐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우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논란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시비(是非)를 가려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삶이라고 함의 신앙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오해되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신앙만이 옹호되어야 한다는 소위 ‘약한 자 편들기’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에 대한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써의 존재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나타내시고 있는데 좀 더 주목하며 그 말씀하신 바를 들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에 따른 영생과 영벌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써, 제자들에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는 것을 말씀하심과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는 모의가 진행 중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음에 제자들은 무슨 의사로 향유를 허비하는가라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잘못된 질책을 여인에게 말하매 예수께서는 저희에게 그 여인이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주의 장사를 위한 것임을 지적하시면서 진실로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과 그 때에 있게 되어지는 대중적인 인식의 악함이 믿음의 증거로서의 한 여인의 증거를 왜곡함에 있어서 주께서는 그것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시며 그 증거적 내용을 기념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 그것이 주목함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문맥적으로 볼 때에 본문에 앞서는 25장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는 인자되신 예수 자신께서 임금으로 오심에 대한 것과 의인과 저주받은 자들을 구별하여 말씀하심과 영생과 영벌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고 그 기준이 그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하지 않음이라고 함의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더 언급한다면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함이 어떤 한특정 개인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교회의 특징적인 것을 인격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는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눅 14:13,21) 하나님의 순애보적인 사랑,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자임에 대한 것에서 부터 정당함을 얻을 때에는 그 지극히 작은 자로서의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한다면,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로써 생각이 없어 보이거나 또 생각과 마음이 곱지 못하고 소위 삐딱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적 입장에서 정상적이다고 판단받을 수 없어 보이는 현상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단체도 이러한 판단을 받게 되지만 윤리적 도덕적 개념에서는 이러한 판단으로 낙인 또한 심판하고자 하는 판단을 하려는 자들이 교회 밖에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인식의 판단이 강요받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믿는 그들을 의롭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지극히 작아 보이는 형제도 주님 안에서 형제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며 주님이름으로 구별된 거룩한 성도로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자가 그 순애보적인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의 주리심과 목마르심을 채우는 자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그러한 것을 받지 못하는 대제사장들의 아문에서는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합리성으로 왜곡되어진 것으로써 주님을 죽이기로 주장하고 있음이 대세적인 그 당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예정하신 뜻하심에서 허용되어진 것이고 또한 주님의 뜻하심이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 뜻하심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께서 그러한 모사들을 앞서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울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주의 제자들의 일부 중에서도 영향력을 받은 것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한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어 주님 머리에 부음에 대하여서 그것을 허비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순수하게 의미를 알지 못하는 실증적인 측면에서 아까움을 말하는 경우도 생각하게 되지만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는 사람 사형선고를 암묵적으로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입장도 있었다고 함을 말함이 정황에 더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의 대중의 판단의 보편성은 기각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말씀하시는데 어찌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있어서 상황적 정황에 따라서 약한 자의 판단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에서 임의적으로 단순하게 한 여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분명 주께서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 신앙고백적인 증거를 교회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하는 도덕적 개념에서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기꺼이 헌신했다.. 귀한 것을 바쳤다는 개념만으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해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전제되어진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되고 그리스도인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함은 그 당시 증인들의 역사적 증거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증거로서의 정당함이 있기에 역사적 보편성과 상대성으로 비로소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의 증거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한 여인의 모습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로 인하여 종노릇하는 존재를 다시 살리시고 종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가치를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녀는 그 자신의 전재산과 같은 향유옥합의 가치로 향기로써 주의 죽으심의 거룩함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적인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자신으로서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주 예수님 안에서는 항상 예만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고후 1:19,20)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6,27)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주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고전 2:16)주의 가르침을 말함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오실때까지 증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신앙의 노선에서 증거되어짐을 읽게 되며 이것은 주의 받으신 바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증거는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과 그래서 본보기적으로 우리도 좋은 것을 드리자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지 못할 때에는 임의적인 좋은 것이 되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죽음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여인의 드림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셨음에 그가 자존자로서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아서 그의 말씀하심에서 삶의 가치와 삶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사실을 상대적이라고 하여도 진실된 사실로 받는 것이 이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믿음과 동일한 중심으로 하나님의 받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진정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심의 그 말씀하심이 그리고 그 주님 안에서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 진정한 사실임을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진정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는 은혜'(눅 7:38)를 주님나라 임하실 때에 받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어지는데 이와 같은 은혜(계 7:17)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마26:1-13
한 여인의 증거
사람들의 인식을 나타내는 말들 중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즉 ‘대중(大衆)의 힘’ 또는 ‘민중의 정의실현’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대중의 무지’ 또는 ‘다수(多數)의 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적절한 표현과 납득이 되어짐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우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논란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시비(是非)를 가려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삶이라고 함의 신앙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오해되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신앙만이 옹호되어야 한다는 소위 ‘약한 자 편들기’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에 대한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써의 존재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나타내시고 있는데 좀 더 주목하며 그 말씀하신 바를 들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에 따른 영생과 영벌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써, 제자들에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는 것을 말씀하심과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는 모의가 진행 중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음에 제자들은 무슨 의사로 향유를 허비하는가라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잘못된 질책을 여인에게 말하매 예수께서는 저희에게 그 여인이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주의 장사를 위한 것임을 지적하시면서 진실로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과 그 때에 있게 되어지는 대중적인 인식의 악함이 믿음의 증거로서의 한 여인의 증거를 왜곡함에 있어서 주께서는 그것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시며 그 증거적 내용을 기념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 그것이 주목함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문맥적으로 볼 때에 본문에 앞서는 25장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는 인자되신 예수 자신께서 임금으로 오심에 대한 것과 의인과 저주받은 자들을 구별하여 말씀하심과 영생과 영벌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고 그 기준이 그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하지 않음이라고 함의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더 언급한다면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함이 어떤 한특정 개인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교회의 특징적인 것을 인격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는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눅 14:13,21) 하나님의 순애보적인 사랑,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자임에 대한 것에서 부터 정당함을 얻을 때에는 그 지극히 작은 자로서의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한다면,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로써 생각이 없어 보이거나 또 생각과 마음이 곱지 못하고 소위 삐딱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적 입장에서 정상적이다고 판단받을 수 없어 보이는 현상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단체도 이러한 판단을 받게 되지만 윤리적 도덕적 개념에서는 이러한 판단으로 낙인 또한 심판하고자 하는 판단을 하려는 자들이 교회 밖에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인식의 판단이 강요받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믿는 그들을 의롭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지극히 작아 보이는 형제도 주님 안에서 형제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며 주님이름으로 구별된 거룩한 성도로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자가 그 순애보적인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의 주리심과 목마르심을 채우는 자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그러한 것을 받지 못하는 대제사장들의 아문에서는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합리성으로 왜곡되어진 것으로써 주님을 죽이기로 주장하고 있음이 대세적인 그 당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예정하신 뜻하심에서 허용되어진 것이고 또한 주님의 뜻하심이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 뜻하심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께서 그러한 모사들을 앞서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울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주의 제자들의 일부 중에서도 영향력을 받은 것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한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어 주님 머리에 부음에 대하여서 그것을 허비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순수하게 의미를 알지 못하는 실증적인 측면에서 아까움을 말하는 경우도 생각하게 되지만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는 사람 사형선고를 암묵적으로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입장도 있었다고 함을 말함이 정황에 더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의 대중의 판단의 보편성은 기각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말씀하시는데 어찌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있어서 상황적 정황에 따라서 약한 자의 판단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에서 임의적으로 단순하게 한 여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분명 주께서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 신앙고백적인 증거를 교회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하는 도덕적 개념에서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기꺼이 헌신했다.. 귀한 것을 바쳤다는 개념만으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해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전제되어진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되고 그리스도인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함은 그 당시 증인들의 역사적 증거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증거로서의 정당함이 있기에 역사적 보편성과 상대성으로 비로소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의 증거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한 여인의 모습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로 인하여 종노릇하는 존재를 다시 살리시고 종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가치를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녀는 그 자신의 전재산과 같은 향유옥합의 가치로 향기로써 주의 죽으심의 거룩함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적인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자신으로서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주 예수님 안에서는 항상 예만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고후 1:19,20)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6,27)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주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고전 2:16)주의 가르침을 말함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오실때까지 증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신앙의 노선에서 증거되어짐을 읽게 되며 이것은 주의 받으신 바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증거는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과 그래서 본보기적으로 우리도 좋은 것을 드리자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지 못할 때에는 임의적인 좋은 것이 되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죽음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여인의 드림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셨음에 그가 자존자로서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아서 그의 말씀하심에서 삶의 가치와 삶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사실을 상대적이라고 하여도 진실된 사실로 받는 것이 이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믿음과 동일한 중심으로 하나님의 받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진정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심의 그 말씀하심이 그리고 그 주님 안에서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 진정한 사실임을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진정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는 은혜'(눅 7:38)를 주님나라 임하실 때에 받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어지는데 이와 같은 은혜(계 7:17)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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