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4월 23, 2006

삶의 이유에 대하여

2006년4월23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레6:1-7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 나라에 한 옛정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수박서리' 또는 '참외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때당시에서는 어른들의 책망이 있으면서도 용인되던 한 문화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박이나 참외의 수확기가 되면 또 감자나 여러 가지 곡식들의 수확기가 되면, 아이들이 일부를 어른들몰래 얼마를 가져다가 그 또래들끼리 먹는 행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잘못된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에게 묵시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런 정서라고 함으로 당연시 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으로 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각박해졌음을 말하기 보다는 분명한 가치관에 따른 문화의 한 모습을 찾음을 말할 수 있을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형식상으로나마 이러한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레위기의 말씀을 주목하며 삶을 위한 변명이 진정한 증거적 사실임을 마음에 두게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나 거짓 맹세를 하는 것으로 범죄했을 때에 그 거짓 맹세한 것은 돌려보내고 오분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과 그는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와서 제사장에게 끌어오고 제사장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이 도덕개념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는 것 특히 소유에 대한 물건을 불법적으로 취득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대한 회개가 그리고 속죄가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을 하심은 모세를 부르신 가운데서 제사법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광야에서의 모습이니.. 사막과 같은 곳으로 그 기온차이와 주위 환경은 그만한 최악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는 한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는 아이들 나이가 드신 어른들의 힘듬 위생이 없는 것, 갈곳도 언제까지도 모르고 기약이 없는 그러한 것을 주야장차 가야하는 그러한 가운데서의 모습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애굽에서 그나마 조금 챙겨온 것을 도적질 당했다고 하는 것, 그것은 그의 존재적인 문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풍요로울 때에 어떤 것을 가져간다고 하면 그래도 그쯤이야 또는 다 아는 사이인데 그냥 줄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 되겠지만, 단랑 한개 있는 생활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는 것을 불법적으로 가져갈 때에는 그 피해자는 존재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존재를 존재할 수 있도록 힘쓰고 노력함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즉 속된 표현으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그 자체가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그 영광을 위한 자신들의 노력에 제동을 건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겠다는 것이며 그 인생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을 임의적으로 막는 것과 나타내지 못하는 것으로써의 존재적 자리매김을 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은 상식적인 측면의 인륜적 범죄보다도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고통속에서도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냄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 피해를 본 자에게 나타내시고 위로하심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경영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게 하셨고 또 오분의 일이라고 함으로 상대적으로 조금 무거운 판단을 받게 하심 가운데서의 교육적 가르침으로 그 시벌을 당하는 자의 고통도 마음에 두시는 선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 말씀에서는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을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모든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예수님안에서 사실의 규정과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전케 하심에 대한 사실을 오히려 부정하는 것으로 죄가 되지만 허용되어졌던 그 때에는 실제의 사실로서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만이 그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셨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살려고 노력하는 기본적인 의지의 영광이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서는 제사법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레위기 첫말(일반적으로 책의 이름이 됨)이 '카라'라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의 그 화목제로 자신을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는 가운데 드리심을 바르게 아는 자들이 그 부르심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가운데서의 증거되어지는 말씀임을 기억할 때에 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과 또한 그의 지으심을 받은 자들의 마땅히 주목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그러한 말을 했던 유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에는 사람이 산다는 것에 있어서 실증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사는 것인가 하는 그러한 판단으로 죽음에 대한 판단을 말하게 되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실증적 판단이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믿고 그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인생임을 깨달아서 열심히 스스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변명이면서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내 삶에 판단을 실증적으로나 여러가지 상황적 상대적인 것으로 비로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는 중심으로 삶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에 주께서는 주시며 그 신실하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신다고 하셔도 주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찬송함에 당연함을 마음에 둘 때에 나사로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 아브라함의 품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눅 16:25)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삶을 위한 노력을 할 때에 그 삶의 변명에 나서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위해' 주께서 내 목숨을 취하시기를 기뻐하심을 나타내시기를 바라보기 전까지'는 힘써 노력하시는 가운데 자존의 아바 하나님아버지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는 귀한 신실한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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