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갈5:1-12
자유를 주셨으니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어떤 일에 대한 부담이 있을 때에 그 일을 다 했다는 상황에 처할 때에 하나의 해방감과 그에 따른 해방감을 느낄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자유롭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온전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라고 하는 것 정도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단순함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을 배경으로 나타날 때에는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와 실제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다가는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밑도 끝도 없이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일을 다 행했다고, 다 했다 또는 그로 인해서 해방과 자유라고 함을 말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실제적인 의미도 아무 생각도 없이 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한 것에 그 일의 '잘 됨'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식하게 된다면 그 자유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없고 여전히 멍에 아래 기만되어진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도록 자유를 주셨음을 말씀하심에서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서의 의미와 실제를 믿고 아는 가운데서 자유로운 언약의 종이 되어질 것으로 우리 삶에 더욱 풍부함으로 주 앞에 충성할 수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함을 말하면서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과 오히려 율법을 전부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자며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니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랑하는 역사하는 믿음 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누가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는 말과 함께 그들의 권면이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님에 대한 정당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짐을 언급하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줄을 확신함을 말하고 있고 그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자신이 할례를 전하는 것이면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을 말하면서 성도들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는데 그러한 것에 종노릇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에게 그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심으로 증거하는 내용이 할례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사실과 그 의미라고 하는 것임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한 전반적인 전 후의 문맥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본문을 이해함이 좀더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좀더 주목해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초등학문과 같이 해와 달의 절기라는 개념에서 읽을 수 있는 임의적인 시간에 따른 인식들로서 정당함의 기본이 되어지지 않은 그것을 가리지 못하는 합리성을 다루는 학문으로 그 권위적 개념으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여 왜곡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로움'(창 15:6)으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그 인식의 정당함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그러한 믿음의 조상들로써의 언약이 같이 혈통적으로 나타나는 뜻하심이 있을 때에 이삭과 같은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혈통이라고 하는개념에 하나님의 언약이 종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읽게 되어지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음을 전제로 한 혈통적 계보임을 읽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할례에 관한 것과 십자가에 대한 인식의 비교에 따른 것임을 지적하고 분별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오늘 본문 이후에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주께서 보내신 성령의 열매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간접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성령세례에 대한 인식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와 십자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할례와 세례에 대한 그 상관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고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종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하심의 자유주심의 실제가 되어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할례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 17장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이 할례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신 말씀하심에서 그 행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으로 부터의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는 가운데서 그것의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지 오늘날 소위 위생관념으로 행하는 그와 유사한 개념은 의미를 이미 비교할 수 있는 사실적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할례와 주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논란이 되어지고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믿음의 오시기 전과 후에 대한 이해로 유대인 성도와 헬라인 성도들이 한 교회에서 아직도 구분하고 신앙의 정통성과 사실에 대한 논쟁적 모습이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한 교회의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도록 자유를 주셨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 주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가르침에서 비로소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으로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 사실은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20)고 하는 것으로써 예수님 안에서의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의 사실의 정당함이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 합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의 실존과 그 정당함이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의미를 찾게 되어지고 그 할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죽으심과 구원하심의 뜻하심이 있을 것을 예표적 실제로 증거하는 것에 의미와 실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앞서 말하였던 것과 같이 할례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정당함을 입는다고 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실 규정을 받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해석의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할례를 행함의 특징을 주목하면 남자의 성기의 양피를 베는 것과 같은 것에 언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사실화할 것을 말씀하심에서 하나님의 언약하심이 혈통적 개념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하나님의 정당함에 따른 혈통적 의미를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이삭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억되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혈통적 의미에 존재적 사실을 부여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함에 대한 예표적 사실이 되어지며 그리스도로부터 정당함을 입은 그 새언약의 계보가 있을 것을 또한 할례에서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 할례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와 결코 거치는 것이 아닌 것이며 오히려 그 가운데서 그 실제적 의미와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할례를 행하기만 한다는 것으로 신앙의 정통성을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 생각없이 행동하고 그것의 완성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통한 합리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임의적인 시간관의 절기를 따라서 합리적인 당위성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정통성을 세우려고 하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인데 이들이 바로 적은 누룩과 같이 퍼지게 되어지는 것이 있다고 함을 사도는 마음에 두며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조심하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후에 사도의 반열에 세움을 받은 가운데서도 마음에 두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16:6,11,12; 눅 12:1; 막 8:15)
그래서 할례냐 무할례냐는 개념에서 사실논의를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철학이니 세상의 초등학문이니 그러한 것에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인 배척을 말하면서 임의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하지 못한 것임에 대한 것을 바르게 말하고 구별하여서 핑계치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으신바가 되었음을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유되어 그 정당함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의 해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그 신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의 그 당시의 작금의 모습에서 비난의 모습이 있고 신뢰할 수 없다는 판단의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기억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을 취하지 않을 줄을 안다는 진정한 사실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적 이해 즉 갈라디아 교인들의 연약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실제적으로 넘어질 줄을 알고 또한 그러한 것으로 자신에게 봉사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려는 그러한 지도자들은 그 정당함의 사실을 보지도 못하고 취할 수도 없는 가운데서 심판의 사실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심판을 자초하는 것에서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베어버리도록 사도는 말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에 대한 사실 분별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며 할례는 더 이상 십자가와 거치는 것이 아니면서 이제는 계시적 실존의 완성이 되어졌을 뿐이며 실제를 이해함에 대한 조력적 사실뿐이며 계시로서 행하여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할례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모든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의 이해의 총체로 이해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진 종교적 윤리의 기본적인 태제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일반 사람들의 윤리와 그 최상의 신의 윤리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고 하여도 그 도덕적 완성이라는 개념 선하게 생활한다는 개념이 비로소 더 이상 의로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행함의 완성을 가지고 어떤 신앙의 연륜이나 행함으로 내가 하나님께 할만큼 했다고 하거나 그것으로 비로소 기준이 되어서 형제들의 연약함을 넘어지게 한다면 역시 그는 그 행함의 사실과 의미의 개념이 없는 바라새인들과 동일한 판단을 받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완성되어지지 못한다고 하여도 보리떡과 같이 찌든 생선 두 마리와 같이 볼품이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주께서 받으심의 사실을 말할수 있는지 또 주의 허락하심의 사실을 바라볼 때에 우리 성도들은 순종함으로써 내 모습 이대로 받으셔서 들어쓰시는 참된 자유한 자의 자녀로서의 능력을 담아내어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결코 그 볼품없음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크고 작고 그러한 달란트의 모습이 다양하고 그것으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현실적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주께서 기뻐하시고 정당하게 받으심의 사실을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된 자유한 종들로서, 그리스도 주께서 자유케 하심의 축복을 받은 자들로서, 주 앞에서 능력을 담아내며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갈5:1-12
자유를 주셨으니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어떤 일에 대한 부담이 있을 때에 그 일을 다 했다는 상황에 처할 때에 하나의 해방감과 그에 따른 해방감을 느낄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자유롭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온전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라고 하는 것 정도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단순함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을 배경으로 나타날 때에는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와 실제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다가는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밑도 끝도 없이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일을 다 행했다고, 다 했다 또는 그로 인해서 해방과 자유라고 함을 말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실제적인 의미도 아무 생각도 없이 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한 것에 그 일의 '잘 됨'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식하게 된다면 그 자유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없고 여전히 멍에 아래 기만되어진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도록 자유를 주셨음을 말씀하심에서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서의 의미와 실제를 믿고 아는 가운데서 자유로운 언약의 종이 되어질 것으로 우리 삶에 더욱 풍부함으로 주 앞에 충성할 수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함을 말하면서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과 오히려 율법을 전부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자며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니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랑하는 역사하는 믿음 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누가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는 말과 함께 그들의 권면이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님에 대한 정당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짐을 언급하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줄을 확신함을 말하고 있고 그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자신이 할례를 전하는 것이면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을 말하면서 성도들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는데 그러한 것에 종노릇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에게 그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심으로 증거하는 내용이 할례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사실과 그 의미라고 하는 것임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한 전반적인 전 후의 문맥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본문을 이해함이 좀더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좀더 주목해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초등학문과 같이 해와 달의 절기라는 개념에서 읽을 수 있는 임의적인 시간에 따른 인식들로서 정당함의 기본이 되어지지 않은 그것을 가리지 못하는 합리성을 다루는 학문으로 그 권위적 개념으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여 왜곡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로움'(창 15:6)으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그 인식의 정당함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그러한 믿음의 조상들로써의 언약이 같이 혈통적으로 나타나는 뜻하심이 있을 때에 이삭과 같은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혈통이라고 하는개념에 하나님의 언약이 종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읽게 되어지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음을 전제로 한 혈통적 계보임을 읽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할례에 관한 것과 십자가에 대한 인식의 비교에 따른 것임을 지적하고 분별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오늘 본문 이후에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주께서 보내신 성령의 열매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간접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성령세례에 대한 인식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와 십자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할례와 세례에 대한 그 상관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고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종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하심의 자유주심의 실제가 되어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할례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 17장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이 할례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신 말씀하심에서 그 행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으로 부터의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는 가운데서 그것의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지 오늘날 소위 위생관념으로 행하는 그와 유사한 개념은 의미를 이미 비교할 수 있는 사실적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할례와 주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논란이 되어지고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믿음의 오시기 전과 후에 대한 이해로 유대인 성도와 헬라인 성도들이 한 교회에서 아직도 구분하고 신앙의 정통성과 사실에 대한 논쟁적 모습이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한 교회의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도록 자유를 주셨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 주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가르침에서 비로소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으로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 사실은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20)고 하는 것으로써 예수님 안에서의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의 사실의 정당함이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 합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의 실존과 그 정당함이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의미를 찾게 되어지고 그 할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죽으심과 구원하심의 뜻하심이 있을 것을 예표적 실제로 증거하는 것에 의미와 실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앞서 말하였던 것과 같이 할례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정당함을 입는다고 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실 규정을 받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해석의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할례를 행함의 특징을 주목하면 남자의 성기의 양피를 베는 것과 같은 것에 언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사실화할 것을 말씀하심에서 하나님의 언약하심이 혈통적 개념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하나님의 정당함에 따른 혈통적 의미를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이삭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억되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혈통적 의미에 존재적 사실을 부여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함에 대한 예표적 사실이 되어지며 그리스도로부터 정당함을 입은 그 새언약의 계보가 있을 것을 또한 할례에서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 할례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와 결코 거치는 것이 아닌 것이며 오히려 그 가운데서 그 실제적 의미와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할례를 행하기만 한다는 것으로 신앙의 정통성을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 생각없이 행동하고 그것의 완성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통한 합리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임의적인 시간관의 절기를 따라서 합리적인 당위성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정통성을 세우려고 하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인데 이들이 바로 적은 누룩과 같이 퍼지게 되어지는 것이 있다고 함을 사도는 마음에 두며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조심하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후에 사도의 반열에 세움을 받은 가운데서도 마음에 두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16:6,11,12; 눅 12:1; 막 8:15)
그래서 할례냐 무할례냐는 개념에서 사실논의를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철학이니 세상의 초등학문이니 그러한 것에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인 배척을 말하면서 임의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하지 못한 것임에 대한 것을 바르게 말하고 구별하여서 핑계치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으신바가 되었음을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유되어 그 정당함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의 해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그 신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의 그 당시의 작금의 모습에서 비난의 모습이 있고 신뢰할 수 없다는 판단의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기억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을 취하지 않을 줄을 안다는 진정한 사실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적 이해 즉 갈라디아 교인들의 연약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실제적으로 넘어질 줄을 알고 또한 그러한 것으로 자신에게 봉사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려는 그러한 지도자들은 그 정당함의 사실을 보지도 못하고 취할 수도 없는 가운데서 심판의 사실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심판을 자초하는 것에서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베어버리도록 사도는 말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에 대한 사실 분별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며 할례는 더 이상 십자가와 거치는 것이 아니면서 이제는 계시적 실존의 완성이 되어졌을 뿐이며 실제를 이해함에 대한 조력적 사실뿐이며 계시로서 행하여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할례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모든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의 이해의 총체로 이해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진 종교적 윤리의 기본적인 태제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일반 사람들의 윤리와 그 최상의 신의 윤리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고 하여도 그 도덕적 완성이라는 개념 선하게 생활한다는 개념이 비로소 더 이상 의로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행함의 완성을 가지고 어떤 신앙의 연륜이나 행함으로 내가 하나님께 할만큼 했다고 하거나 그것으로 비로소 기준이 되어서 형제들의 연약함을 넘어지게 한다면 역시 그는 그 행함의 사실과 의미의 개념이 없는 바라새인들과 동일한 판단을 받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완성되어지지 못한다고 하여도 보리떡과 같이 찌든 생선 두 마리와 같이 볼품이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주께서 받으심의 사실을 말할수 있는지 또 주의 허락하심의 사실을 바라볼 때에 우리 성도들은 순종함으로써 내 모습 이대로 받으셔서 들어쓰시는 참된 자유한 자의 자녀로서의 능력을 담아내어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결코 그 볼품없음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크고 작고 그러한 달란트의 모습이 다양하고 그것으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현실적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주께서 기뻐하시고 정당하게 받으심의 사실을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된 자유한 종들로서, 그리스도 주께서 자유케 하심의 축복을 받은 자들로서, 주 앞에서 능력을 담아내며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