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3월 27, 2006

천국, 열 처녀 비유

2006년 3월 2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5:1-13
천국, 열 처녀 비유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미리 미리 준비해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것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미련함이나 약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본다는’ 것에 대한 관점을 생각해보면,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매일 직접적인 필요성도 없는 ‘비상식량’이라는 것을 집에 쌓아놓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일상적인 판단에서는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 행하는 자가 위기의식이나 비상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지난 역사에서도 주목할 수 있는 ‘오일쇼크(The 'Oil Shock')’와 같은 것이 있어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기름을 비축하는 그러한 노력들이 있었고 그러한 것은 그 당시 사회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각 나라가 비상시를 대비해서 석유를 수입해서 쓰기도 하고 나름대로 비축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원고갈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일쇼크’와 같은 그러한 상태를 생각해서 각 집안마다 나름대로의 필요한 것을 구입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것보다도 그러한 석유만을 비축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의 당위성이 없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성적인 판단에 있어서 그 기준으로서의 상식선에서 용납의 여부와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말이라고 함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할 때에는,오늘 본문에서 기름을 준비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상식선이라는 기준에서 비로소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에서 그 기준을 기억하고 상식이라고 함도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천국에 대한 세상의 이해하지 못함과 종말의 때에 대한 합당한 사실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그 종말의 때를 그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와 같다고 하심의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부분으로써 미련한 자들은 등은 가지고 나갔으나 기름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나갔음에 대한 것과 그들이 다 신랑이 더디옴으로 인해 졸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밤중에 신랑이라는 소리와 함께 나와 맞으라고 할 때에 그 처녀들이 다 준비하는데, 미련한 자들은 슬기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구했으나 슬기 있는 자들은 둘다 모자를 수 있으니 기름을 파는 자에게 가서 구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저들이 기름을 사러 간후에 신랑이 와서 예비되었던 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문을 열어주기를 구할 때에 그 신랑의 목소리로 보이는 말씀이 그들을 모른다는 말씀을 하심을 기록하고 있고 그날과 그시는 처녀들로 비유된 성도들이 모른다는 말씀과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천국에 대한 인식'인데,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종말에 대한 인식과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자는 깨어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은혜로써 바른 천국에 대한 인식으로 믿음으로써 지혜로운 처녀와 같이 기름을 준비한 자로서 주 앞에 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문맥을 살펴보게 되는데, 그것은 본문 1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 때라고 말씀하심이 바로 종말의 때를 전제로 하고 있고 종말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마 24장의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마태복음 23장의 내용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적절하고 정당하게 문맥적인 것을 살핀다면, 마태복음 23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이라고 함과 그것의 화를 말씀하시고 있고 24장에서는 그 종말의 때에 성도가 사람들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오늘 본문의 말씀인 25장에서는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 천국에 대한 인식이 믿음으로써 나타나는가 그 여부에 따른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의 모습으로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등은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의 모습을 미련한 자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바리새인들을 의식하게 하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 나타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이 없어 그의 신랑을 보지 못하는 모습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문맥적으로 비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일상적이고 신앙적인 것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바리새인들은 그 기준이 불가지론적인 입장이었고 임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 당시 성전세를 내기 위해 예물로 가리켜 맹세한 자는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측면으로 잘못되게 가르쳤고 비교되어지는 성전과 제단과 같은 것으로 가리킨다는 그 가치관적인 기준의 모호함을 보였던 것입니다.(마 23:16~24참고)

이러한 신앙의 가치관과 실제관을 가진 자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찬송에 구체적 내용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기본적 첫번째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마태복음 23장 39절과 마태복음 6:9절의 말씀을 비교할 때에 진정 일관성이 있는 말씀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구체적인 내용으로써 언급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라는 그 이름의 증거적 내용을 기억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도록 힘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스스로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며 그것을 자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기정 사실화 시키심과 그것의 정당함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20)고 하심이 그것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의 본문에서 주목함과 주의 가르치심의 전제적 의도하심을 기억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거룩함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을 믿고 그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함의 사실을 생각하여,임의적으로 행하지 않고, 신앙의 진정한 의미와 사실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거룩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중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다는 것은 그냥 참되게 믿는다는 임의적 의지적 표현만으로 비로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라고 하는 예수의 그 계시적 뜻하심을 기억하고 그것을 우리 삶에 나타내기를 소원하는 신실함을 나타낼 때에 기름을 준비한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스스로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며 그것을 자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기정 사실화 시키심과 그것의 정당함을 받는 것을 기름을 준비함으로 그 거룩함의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그러한 것의 한 예가 사무엘 상 3장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목이 부러져 죽게 되는 신실하지 못했던 엘리의 섬김 속에서도, 그 질서적 정당함을 직접적으로 부인하시지 않는 한에서도,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잘 성장한 예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들으심'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대한 존재적 사역적 인물'임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말씀하심을 읽도록 하심이 등불을 준비하는 처녀들의 중심에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삼상 3:2~4)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종말을 증거하고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며 그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말함에 있어서 '독선'이라는 말을 하고 있고 아주 편협한 것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무지함과 그 독선을 상대적으로 가리고자 할뿐 지혜없는 미련함을 지닌 자라고 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고해야 할 것이고 그러한 특수성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것이라고 할 때에 상대적인 측면에서 편협을 비로소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천국의 사실과 그곳에 들어가는 지혜로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비로소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은 진정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상식적으로도 그들의 말이 편협함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임의적인 신앙의 가치관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임마누엘의 이름으로 오심을 기억하지 못하고 소경된 자로 미련하게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핑계치 못하는 복음이라고 함은 자존의 하나님의 그 이름에 나타나는 그 계시적 정당함에 따른 사실을 믿고 '자존의 하나님이 우리의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 예수의 이름인 것을 기억할 때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우리의 삶을 그 정당히 분별하여 받으시는 가운데서 참으로 그 거룩함이 함께하시는 주의 거룩하심의 재가를 입는 자들로서 슬기로운 자들로서 기름을 준비한 자들로서 주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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