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3월 29, 2004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2004년3월2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1:1-13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기도한다는 말, 이러한 말은 우리 주위에서도 자주 접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교에서 타 종교에서도 기도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주관적으로 받는 가운데서 그렇게 이질적인 용어로 사용되어지지 않는 것으로도 인식되어질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도한다고 할 때에 기도한다는 그러한 방법론이나 임의적인 기도라는 내용의 규정적인 입장을 따르면서 그러한 기도에 대한 정체성과 그 실재성을 이방종교 타종교 그리고 무속종교에서는 말하지 않고 있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방종교 및 무속신앙에서는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데 그 기도의 실재를 현상적 개념으로, 느낌으로, 개연적으로, 말할 뿐 진정한 기도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빙자하는 것일 뿐 기도하는 행위는 갖추면서도 진정한 기도를 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기도의 실재와 그 기도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하여서 제자중에 하나가 주님께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시매 한 제자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과 같이 기도를 가르쳐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우리가 죄를 용서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벗과의 상관성과 아비와 자식의 상관성을 예로 들어 말씀하시며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 하늘의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실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기도라고 함의 실재와 그리고 그 기도라고 하는 것이 생활 자체라는 것과 그리고 그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입술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실재성 기도의 존재의 정당한 실체는 어떻게 규정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님의 첫 번째 기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함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에서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자기 정당함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이 실재와 정당함을 얻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106:8)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생활의 중심과 방향과 그를 위한 노력과 그것을 주 앞에 생활로 입술의 열매로 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그가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함에 대한 상대적 편협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며 자신의 구원하시는 자들이 자신,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실재와 그 정체성의 실재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행위라는 것에서 비로소 기도의 실재와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요즘의 이방종교에서 말하고 행하여지고 있는 기도의 행위는 현상적인 인식의 산물로서 규정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임의적인 것으로 그 행위에서 인식되어지고 비롯된 기도로써의 그것은 실재가 없는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구주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의 실제적인 특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그 기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부여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기도행위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삶의 존재방식과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두 번째에서는 삶이라고 함에서 주께 구한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예로서 친구의 경우 벗의 경우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친구라면 강청하는 것을 할 수도 있고 상대방에서는 친구라면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그 귀찮은 가운데서라도 강청을 들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이 현실적인 사실이 될 수 있음을 주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일뿐 이것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동일한 관계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실제의 의미를 따르는 현실적인 사람들의 중심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객관적인 사실이며 객관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을 때에 객관적 사실로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따르는 진정한 실제적 입장을 취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의 중심에서는 원래 아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적으로 가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자체적이라는 스스로 가지게 되어지는 그 본능적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의 반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의 마음에서 비롯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일반적인 정당함 속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록하신 증거를 기억하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요즘에는 이단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같이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실제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자들이 가증스럽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과 달리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인 것을 찾는 가운데서 기도의 실재성을 받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받으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가운데서 주님의 기도를 이루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서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힘쓰는 자리에 서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나타내며 증거하시는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로서 기도의 사람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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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2004년3월2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9:1-25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사람이 심리적으로 위축되어지거나 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지면 지난날의 좋은 회상에 따른 기억들을 더듬으면서 위로받고 싶은 자리에 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옛날에는 참 좋았는데..’와 같은 진술적 표현이 그러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지난날의 회상이라고 하는 것을 한다고 사람들이 그러한 심리적 압박이나 위축에서 안주하는 것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러한 가운데서 앞으로의 계획들을 모색해내는 그러한 진취적 발판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양면을 생각할 수 있는 지난날의 회상에 대하여서 우리 신앙인의 모습에서는 어떤 한계적인 절제와 분별이 필요한 것인가 그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는 말씀을 받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오늘 본문의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특히 2절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욥의 장막에 있던 때를 회상하면서 말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위에 따른 그의 위엄과 그 증거라고 함에 상대적인 연륜 있는 가운데서의 권위자들로서의 연로한 분들도 귀인들도 말을 하기를 주저하였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욥의 권위와 증거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로 직접적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욥의 선행과 바르게 함에 대한 것으로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 대한 것을, 그가 그와 같이 공론되어지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서 스스로 행할 수 있는 판단으로써 언약이 그와 함께 함에 따라서 그 언약의 말씀의 증거를 사람들이 사모하였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그의 증거에 대하여서 그의 얼굴을 무색하게 하지 않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의 회상이라고 하는 것이 심리적 판단에서 긍정적인 판단이 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모습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두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2절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같이 되었으면-’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 한마디는 전반적인 욥의 두 번째 비사의 중심적이며 실제적인 판단을 받는 부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욥 자신을 보호사시던 날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날이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불연속적인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신실함을 따르며 그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찾기를 구하던 욥의 순전한 모습에서 떠난 모습으로 일시적인 시험에 들은 모습이라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언급이 31장까지 이어지고 32장에서는 성경에서 욥이 자신이 스스로 의롭게 여김에 대하여서 변론의 형식적인 상대적인 실제의 완성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데 욥의 넘어짐과 변론자들의 입이 다물어 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의 형태적인 현실적인 실제, 객관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은 그러한 것을 집요하게 말하고 강요하는 그러한 정황과 소리들에서 성도들의 순전함을 잃게 하는 자리에 유도하며 유혹하며 시험에 들도록 하고 있다는 점을 오늘 본문의 욥의 모습에서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우리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은 절대의 신실함과 그 사랑으로 상대평가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마음에 담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연약해서 그러한 자리에 들 수도 있지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와 같이 우리를 그러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는 날이 따로 있고 나를 보호하시지 않는 날이 따로 있다는 식의 발상은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도된 우리, 나를 보호하시는 날에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은 우리의 정황적 판단에서 비롯되어지는 실제상황으로 판단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그러한 성도들의 반열 속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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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3월 25, 2004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2004년3월2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6:1-15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람이 살아가는 가운데 있어서, 여러 가지 상황(狀況) 또는 정황(情況)이라고 하는 환경을 만나게 되어지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삶을 경영하는 가운데서 적응의 문제라고 함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적응을 위한 노력으로 가지는 중심이 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달라질 수 있는 중심이라고 하는 것의 표현이 사람의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눈을 비롯하여 얼굴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한 것은 그 사람의 얼굴의 다양성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처세적인 측면에서 지혜이면서도 도덕적 비난을 초래할 때에는 이중인격자로서 판단받는 경우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들이 가능한 그러한 사람의 중심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의 얼굴인지 가장한 아름다움의 얼굴인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삶에 대한 지혜가 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성도로서의 우리의 중심의 표현으로서의 얼굴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중심을 말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의 증거와 함께 제자들이 많아져서 구제하는 일로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원망하게 됨에 따라서 직분을 세우도록 하여서 일곱 집사를 세움과 사도들은 전적으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서 사도들이 안수하여서 집사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서 제자의 수가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들도 복종함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집사로 안수받은 스데반의 증거로 인하여서 많은 변론이 나타나고 있는데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에 따라서 사람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서 피상적인 증거로 인해 고소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공회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니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교회의 질서라고 하는 것이 구제라는 필요에 따라서 새워지고 그러한 직분의 차이와 실제를 구별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구분적 직분의 실제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사역적인 증거의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받으심 안에서의 귀함의 실재를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에 대하여서는 에베소서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지고 있으면서도 교회가 공적으로 세워지고 있는 이 때에 누가에 따른 기록인 본문에서는 필요에 따라 구별되어진 구분적 직분임을 말하게 됩니다.

그렇게 말함은 상대적 차이라는 개념에서 별개의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스데반이 주의 말씀을 증거하고 또한 증거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교회의 질서적인 차원의 정당함을 부인하고 아무나 말씀의 강도권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과 질서를 따라서 강도권을 가진 자의 입장을 부인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세상에 빛이 되어지고 소금이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주의 증인들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스데반의 증거가 언급되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음을 주목하는데 이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이라고 함에서 보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하는 즉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정당함이 그에게 있게 되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자로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증거자로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가운데서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고 그가 그곳을 떠날 때에 하나님의 얼굴 앞을 지나는 것이 기록되어짐을 보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이 바로 브니엘이라는 뜻으로 그 지명의 이름이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개인적인 경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우리 성도들의 모든 모습이 되어지며 상대적일뿐인 정황적 미소를 가지고 꾸며내는 외식에서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하는 가장된 천사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자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자들이 천사의 얼굴로서의 진정한 중심을 나타내며 주의 증거를 온전히 신실히 나타내는 자로서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서는 고운 것도 헛되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일반적인 정당함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아름다움의 실제적 정당함이 일반적인 것에 머물게 되어지는 것으로 헛되다는 것을 말하며 오히려 그 자신의 중심과 의지와 상관없이 가장되어진 얼굴이며 실체를 말할 수 없는 모습으로 헛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행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진정한 주의 보내신 자들로서의 중심과 그 표현의 하나로서 천사의 얼굴과 같은 중심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상대적인 아름다움의 얼굴로 가장하는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내 존재의 정당함을 찾는 자들로서 스데반과 같이 그의 증거가 사도 바울을 세움에 큰 증거자로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귀한 증거자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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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3월 22, 2004

마리아와 마르다의 선택

2004년3월2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0:38-42
마리아와 마르다의 선택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 어떤 문제나 사실에 대하여서 판단할 때에 여러 가지 사실로 구분하여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고 비록 구분되어지면서도 구분하지 않고 같이 생각해야 할 사실판단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나무를 생각한다고 할 때에 그 나무의 잎과 뿌리는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음과 그러한 특징들이 구분되어져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에 화재가 남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는 그 잎이나 뿌리에 대한 것을 구분하여서 기술하고 판단하는 것보다는 그 나무라고 하는 전체를 생각하여서 판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잎이 잘 마르고 떨어지는 그러한 종류의 나무라고 하면 화재에 더욱 심각성과 긴급성을 더 인식하도록 하는 강요를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리아와 마르다의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의 판단이 나타나며 또한 증거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그 뜻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8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1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8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는데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여자가 자기 집으로 인도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주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기를 힘써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기를 돕지 않는 마리아에게 마르다 자신을 돕도록 예수님께 말씀드렸던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1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따른 주님의 말씀하심이 기록되었는데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나 한 가지 일로도 족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마리아가 좋은 편을 선택하였음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주목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문맥상의 배경적 의미에서 파생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정황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문맥적인 해석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의식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주의 비유의 말씀이며 또한 이것은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의 주님의 직접적인 측면의 말씀은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심의 말씀을 행하라고 하심의 뜻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비유에서 증거의 실제적 가르침은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선한 이웃이며 주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 강도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어지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을 치료할 이웃으로 받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경우를 더 생각해야 하는데 선한 이웃으로 오신 주님께 대하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두 여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주님을 섬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여인의 섬김은 두 형태의 섬김으로 구분 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듣는 자의 예배적 삶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섬김이라고 하는 그러한 부대적인 상황적 섬김이라고 하는 것들을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님 예수께서는 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의 예배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에 이 좋은 것을 선택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앞서, 서론적으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이 두 여인은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 반정립 되어질 수 있는 구분적 입장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그 말씀의 역동적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서 하나님 앞에서 더욱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그러한 중심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빌리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중심이 있음을 주께서 의도하시면서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온전히 한 지체로서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나무와 같음을 의미하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냐 행함이냐 이것은 이분적인 개념으로 다툼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말씀하심 안에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또는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의 은혜가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특별하신 뜻하심이 있을 수는 가운데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뜻하심 안에서 성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에 믿음과 행함은 같이 언급되어지고 그 상관성을 나누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같이 행함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믿음을 판단하게 된다면 그 말씀하심에 대한 정당함을 찾는 것보다도 그렇게 행한다고 하면 현실적인 실제라는 판단 하에서 하나님의 실재판단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악함에 나갈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생각되어질 수 있는 믿음과 행함으로써의 봉사로서 주님을 섬기는 선한 이웃으로 구주로 오신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주의 말씀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 서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이 좋은 편을 선택하였음의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우물가에서 주님의 식사를 준비하려고 갔다 온 제자들에게 그 여인에게 증거하게 되어지는 그 복음을 인하여서 알지 못하는 음식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을 봅니다.(요 4:32) 이러한 것은 육신적 음식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반적인 음식의 정체성만으로 주님의 받으시는 섬김의 정체성을 전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오늘 본문에서의 마르다의 입장보다도 마리아의 입장의 좋은 것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심의 의미를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같이 좋은 편을 선택하여서 주의 말씀하심에서 우리의 존재와 삶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가운데서 진정한 구주 예수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며 주의 이름으로 받으신 바가 되어지며 주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 세상에 선한 이웃이 되어 주의 구원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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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

2004년3월1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7:1-23
어찌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

우리 일반적인 측면에서 서로 상대방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서 의견이 맞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는 비판이라든지 그에 따른 비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마음에 두어야할 만한 것은 비판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당위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하는 극한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 또한 상대적인 사회에서의 있을 수도 있는, 그러면서도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일이 신앙과 일상생활의 이분적 개념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신앙에 있어서도 상대방이 넘어지는 그러한 자리에 이르는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며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지나침의 판단을 받았을 때에 성도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데 욥의 증거를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인데 여기서는 욥이 잠언적 즉 비사를 들어 말함에 대한 것을 언급함의 첫 부분인데 자신은 자신의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조문객으로 온 세 친구들의 입장이라고 함이 옳은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욥이 그들에게 가르칠 것이고 숨기지 아니할 것을 말하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그것을 보고도 어찌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허탄한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게 되어지는 문맥에서 악인이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에 대하여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번성과 남은 것에 대한 것이 의인의 위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함과 하나님의 그들에게 살을 쏘심과 사람들의 동의적인 차원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판단을 받게 될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첫 번째 비사에 대하여서 즉 잠언과 같은 비유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의 배경이 되어지는 것은 치명적인 인격모독과 신성모독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한 그 악함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고 그 옳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고 하면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한 욥기 25장 5~6절까지의 말씀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이라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 인생이랴”라는 말에 상당히 욥이 충격을 받게 되어짐과 지나침까지 나타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의 모양을 그 몰골이 흉하다고 하는 말, 그것도 그 인격을 벌레에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인륜적으로도 합당함을 말할 수 없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기기 위한 상대적 비난이라고 하는 것이 인륜을 저버리고 더욱 그러한 인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저버리는 사람이라고 할 때에 그 사람의 존재라는 것은 허탄한 인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이 말하고 있는 허탄한 인생이라고 함의 내용적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욥은 또 다시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에 대한 것을 알게 하리라는 것과 또한 하나님 앞에서 현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의롭지 못한 것에서 비로소 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바르게 하나님 앞에 하려고 하는 그 순전함을 잃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증거되어지는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허사를 경영하는 자들의 반론에서는 결국 인격적인 모독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우격다짐을 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범하는 자들의 모습이 그 정체성을 잃은 자로서의 허탄한 자리에 서는 것임에 대한 증거를 하며 하나님 앞에서와 하나님 안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그 순전함을 지키고자 하는 자리에 서도록 노력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원해주시는 가운데서 진정한 우리 성도로서의 합당함을 나타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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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3월 18, 2004

백성에게 말하라

2004년3월17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5:12-42
백성에게 말하라

패역하다는 말, 그러한 것은 여러 가지로 묘사되어질 수 있으면서도 상당한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순종이라는 개념을 상실한 것으로도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진정한 실제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게 느낄 수 있게 말할 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최선의 것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다는 입장에 항상 열려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는 어떤 이야기도 실제적으로 받을 수 없다는 가운데서 윤리적 의식과 순종의 의미에 실제를 부여하지 않기를 원하는 자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죄악된 결과의 한 단면과 또한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실제의식이 결여된 자들에게 말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은 사도들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16절의 말씀과 17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3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남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며 병을 고치고 그 사도들의 행함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능력이라고 함을 덧입기를 구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을 시기하여서 잡아 옥에 가두었으나 주의 사자가 사도들을 초자연적으로 감옥에서 사도들을 나오게 하시며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하심과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렇게 된 것을 놓고 놀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선 본문과는 달리 육체적으로 사도들을 결박하고 강제하려고 함에 대한 것을 행하지 못하였음에 비하여서 인식적인 측면에서도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실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에서 그들에게 죽이는 자리에 서지 못하고 다만 능욕만 보이고 보내는데 사도들은 주의 이름의 합당한 능욕을 기뻐하며 그들의 삶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증거에 힘씀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솔로몬 행각이라고 하는 곳에 모여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믿고 실제적으로 성전에서의 구약적 제사의 의미보다도 더 합당함을 믿고 따름에 대하여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시기를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에 실제적인 강제적 방해라고 하는 것을 행동적으로 또는 인식적으로도 배척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삶의 실제를 분별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증거되어지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그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 메시아 구주이시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증거적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시는 그 증거를 백성들에게 다 전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러한 증거가 진정한 실제적인 것임을 마음에 두도록 하며 패역한 세대에서 나와 주 앞에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메시아 구주라는 사실이 온전히 증거되어질 때에 주 안에서 믿음으로 구별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 실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 참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을 따라서 복음의 실제를 말하는 가운데 실제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 패역한 세대에서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께로 나오도록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구주이심을 다 말하시는 다 증거하시는 가운데 잘했다 칭찬받으시는 자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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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3월 15, 2004

장자죽음의 재앙

2004년3월14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11:1-10
장자죽음의 재앙

오늘 본문은 애굽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열 가지 재앙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와 초태생의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취하여지고 있는데 이러한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의 증거로써도 나타나고 있는데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한 가지 재앙을 내릴 것인데 그 때에 모두 쫓아내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의 사람들에게서 은 금 패물을 구하도록 권고하시고 또한 바로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세를 심히 크게 보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는 말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이는 애굽에 밤에 여호와께서 들어가심과 바로의 아들을 비롯하여 여종의 장자까지 그리고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 것이라고 함을 예언하고 이스라엘 자손에는 사람에게나 생축에게 그러한 일이 없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구별하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바로가 듣지 않음과 그대로 주 하나님의 기사를 더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이러한 것은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을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않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장자를 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의 구체적인 표현이 애굽에 밤에 들어가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같은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처음난 자로써의 증거를 하시는데 그러한 것에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자들의 모습에서 하나님께 대적되어질 수 있는 자들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고 그러한 자들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그러한 죄를 인하여서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하심의 그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신의 아들이라는 개념에서 자신들의 영적 능력을 나타내게 되어지며 어두운 즉 불확실성의 시대에 빛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이 행하며 심지어 상대적으로 자신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그러한 거짓의 밤에 진정한 의로움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진정한 구원을 이루심은 그들이 거짓되어진 자들로서 신의 이름을 빙자하며 말하는 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때를 증거하는 것으로써 종말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과 같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심에 대한 것인데 이 예수님이 오심은 세상에 구주로 빛으로 오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부활의 첫 열매로써 오시는 분이시기에 그것을 상대적으로 완화하며 말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거짓된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기력의 시작들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종말적인 뜻하심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의 있는 은 금 패물을 구하게 하였고 얻게 하심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자는 원수라도 화목하게 하신다는 그 뜻하심을 삶에서 증거를 받도록 하시기 위해 그 애굽에서의 은 금 패물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애굽에서의 것들을 구별하여서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그 구별하는 성별하는 것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구별되어지는 하나님께 드림이 있을 것을 말하며 이것은 신약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별과 구별하여 드림의 삶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이라고 함과 같이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기쁘게 하시는 것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재앙은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으로 예수 안에서 있게 되어지는 교회의 시대 그 모습에 대한 증거를 받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현대에서는 어떤 작가가 쓴 책의 재목과 같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실제인지 합리성에서 보편적인 합리성에서의 실제를 찾으려고 하나 그러한 보편이라고 하는 판단 기준도 역시 그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참으로 흑암재앙의 연결선상에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의 의로우심과 그 실재는 우리 성도들의 존재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의 실제적인 기준을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실제와 삶의 실제적 증거를 통하여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 많은 보편적인 생각들 신비적인 생각들 신비적인 능력들이 거짓되게 세상에 빛처럼 말하고 있는 어두운 이 세상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세상이지만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서 빛이 되시며 구원이 되시는 것을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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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이 누구이니까

2004년3월14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0:25-37
행함과 영원한 생명

생활 속에서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 중에 우선시 되어질 수도 있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그 행함의 방법적인 측면 그것을 알아보는 것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교육에서도 무엇을 배우느냐 보다는 어떻게 배우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자들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들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 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함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세상에 어떤 것이 무엇이라고 함의 실재를 알지 못한다고 할 때에 그 교육의 목표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없다는 불가지적인 입장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서의 실재를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하고 진리의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라는 방법이라는 개념만으로 접근하는 것에 메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지는 것에 대하여서 그 방법에 대하여서 어떤 율법사가 질문함에 대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5절에서 28절의 말씀과 29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율법에 말한 대로 행하라고 하심의 말씀하심과 그 율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음에 대한 것을 율법사가 말하니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같은 주제 즉 영생을 얻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주의 비유적인 말씀하심으로 자비를 베푼 자에 대한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면 이 율법사는 아들의 소원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고 하심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실 때에 그의 규정하기 원하는 것으로써의 영생을 얻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그러한 의구심과 또한 비판적 입장에서의 논제를 설정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패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시려고 오심에 대한 중심에서 구별되어지는 그 율법적인 행함을 행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하나님과 그 이웃에 대한 실재를 분별하게 하도록 하심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제사장도 그대로 지나가고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가는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돌봐주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상처를 싸매고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그 사람을 돌아보아 주기를 바라고 다시 돌아올 때에 부비를 지불하겠다는 것을 말함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라고 함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라고 함은 주의 가르침이며 그 율법사가 인식한 것입니다.

이웃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며 이는 예수님 자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행함이라고 하는 도덕적 완성의 개념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재가를 받게 되어지는 정당함에 따른 구별되어지는 그러한 실재를 말하지 않고 행하기에 그들에게는 치료할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러한 것을 행함을 원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강도를 만난 사람들을 피하여 가고 있음을 지적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재가를 생각한다면 이제 구약적인 개념의 제사장의 직분적 완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외형적인 그러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기득권적인 측면의 모든 것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사실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부음으로 표현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을 따른 재가를 따라서 그 강도만난 자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름붓는다는 것은 구약적 언어로써는 메시아라는 말의 뜻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사마리아인인데 이는 사마리아 인들은 그 당시 유대지역에서 이방인취급을 당하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배척받게 되어지는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써의 인물 설정이 되어진 가운데서 주의 비유에 가르침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자비를 베푸는 자 그는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로서의 기름을 부어 치료하는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성령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의 그 정당함에 따른 분별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이 세상에 상대적인 기만에서 자신의 영혼의 실재를 유린당하는 자들에게 치료하는 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이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이웃은 상대적 합리성의 개연성으로 그럴듯하게 하여 영혼들을 해치는 삯군들이 거짓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되게 말하고 있지만 진정으로 주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통하여서 이웃으로 오심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들이 세상에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고 유린당하는 영혼들의 이웃이라고 함과 또한 주 안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을 자들로서의 이웃으로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사실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절대의 자존의 정당함을 가지고 비유에 실제를 부여하신다고 할 때에 그러한 비판은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참된 이웃은 구주로 오신 예수님이시며 주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들의 모습이며 또한 그들이 주 안에서 사랑해야 할 세상의 영혼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율법을 온전히 이루며 영원한 생명을 주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로서 주의 이러한 뜻하심을 잘 감당해내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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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2004년3월1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6:1-14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사람들은 ‘상식 없는 학문은 위험하다’라는 말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함과 그에 따른 행함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편견과 아집이라는 개념 때문에 일을 좀더 바른 모양으로 좀더 납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납득되어질 수 있는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실제라는 것, 객관적인 사태라는 것의 받아들일 수 있는 당위성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 좀더 보편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러한 보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절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이러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오늘 욥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이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수아 사람 빌닷의 상식적인 보편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욥의 모습이 구더기 인생이라는 측면에서의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러한 말에 대하여서 욥은 그것에 대한 반론적 입장에서 그 보편이라고 함이 이미 판단되었다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신적인 보편을 말한다고 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 하지 않는 그러한 신이라고 하면 그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그렇다고 할 때에 그들이 연약한 자를 잘 도왔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소적 의미에서 반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음령들 즉 정당함을 입은 존재들로서의 영들이 아닌 그러한 영들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존재의 부정되어짐을 부인할 수 없는 가운데서 떨게 되어지는 것과 그들이 보편적인 측면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함정이라고 하는 것 그 멸망의 웅덩이라도 주 앞에서 가리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하늘과 땅과 그러한 것의 지탱되어지는 기둥이라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경외를 나타낸다는 것으로 떪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좌 앞을 가리심에 대한 것과 구름으로 가리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광대하심이라고 함이 상대적으로 인식적 충족성을 자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씀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빛과 어두움의 한계를 설정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모세를 통하여서 애굽에 내리셨던 그러한 어둠의 재앙과 고센 땅에 있었던 광명과 같은 실제적인 주의 구원하심이라고 함에서 나중에 나타나실 메시아 안에서의 구원하심에 대한 그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합을 파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라합이라고 하는 것의 말의 뜻은 ‘넓다’(wide)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넓음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상대적 보편이라고 함이 절대 보편과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 보편의 존재적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이 부인되어질 것에 대한 주의 심판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편에 따른 실제적 증거를 상식적으로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꼬불꼬불한 간교한 합리성으로 행하지만 그러한 것을 주의 권능으로 판단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상대적인 표현의 실제를 말씀하시면서도 그의 절대 보편이라고 함은 다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세미한 음성에 비교되어지는 큰 능력의 우뢰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면서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은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재가를 얻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예비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그렇지 않은 가운데서는 그가 파함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리고성의 라합은 여러 보편적인 측면에서는 여호수아 장군의 보낸 자들을 밀고하는 편이 더 보편적인 구체적인 자신의 유익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판단이 되지만 하나님의 절대보편적인 재가를 생각할 때에는 여호수아 장군의 보낸 자들의 편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받으신 바의 증거자로서 예수님의 족보에서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리고의 여인 라합과는 달리 하나님께 재가를 얻지 못하는 그러한 판단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존재가 파하여진 바가 되어지는 실제적인 모습속에서 그것을 의지하는 합리성의 간교함이라고 하는 것이 그 세력의 치명상으로 그 존재가 부정되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보편이라고 함의 그 하나님의 속성에서 재가를 얻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실제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것은 상대적이면서도 진정한 보편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보편적인 의식이라고 함이 여리고의 기생으로 나타나고 있는 라합과 같이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된다는 것을 성도들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의 절대 신실하심의 판단 안에서 실제를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의식을 잘 받을 수 있는 자들로서 여리고의 여인 라합과 같이, 또한 세상의 다니엘의 세친구와 같은 풀무불 속에서의 강요되어진 실제의 판단에서 벗어남과 같이, 주의 길을 예비하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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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3월 11, 2004

심판의 영광

2004년3월1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5:1-11
심판의 영광

상대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의 불행이라고 하는 것과 상관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자신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이나 또는 영광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행복이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을 암암리에 추구하는 그러한 경향이 세상에 많이 있음을 봅니다. 즉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사회 구조악’이라는 개념으로 사실상 방치적인 의미를 둔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하심 안에서 그러한 실제적인 판단이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습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 보편적인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노력들의 선함이라고 하는 것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실제의 그러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상대적인 측면에서 판단하는 것이 실제인 것같이 생각하는 악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것이 잘못되었음과 그것은 그 심판하심의 자리에서 그러한 인식과 존재가 영광 가운데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음과 그로 인하여서 베드로로부터 책망을 받고 죽음을 당하게 되어지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세시간쯤 지나서 그의 아내 삽비라가 베드로에게 알면서도 거짓되게 자신들의 소유를 얼마 감추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음에 대한 것을 고함에 따라 그 남편을 따라 죽음을 당하고 그 남편 곁에 장사되어짐을 기록하고 있고 오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나니아는 하나님께 안위를 받지 못한 자로서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출애굽기 24장과 관련되어진 본문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서는 모세가 장로들과 함께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 때의 하나님의 영광을 기술하고 있는 것을 주목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이처럼 하나님의 발 아래에 나타나고 있는 그 영광, ‘청옥을 편듯함’에 대한 언급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청옥이라는 것은 사파이어 보석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아나니아의 아내의 이름 삽비라와 같은 음인 것입니다.

삽비라, 사파이어라는 보석, 그 이름은 청옥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약 5회 정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출애굽기 24장에서는 주의 하나님의 발 아래 나타난다는 점에서 심판의 영광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하게 되어지며(출24:10) 또한 이것은 아가서에서는 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절제되어진 가운데서 금하는 접근하여 범하면 심판을 받을 만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으며(아 5:14) 이사야에서는 안위를 받지 못한 자로서의 어리석게 심판을 자초한 자의 모습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사 54:11)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서에서는 그러한 범할 수 없는 권위로서의 청옥이라고 함이 언급되어졌는데 어찌 그러한 죄악으로 인해 그 권위가 실추되었는지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애 4:7)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서는 열두 문을 나타내는 보석 가운데서 열한번째가 이 청옥으로 나타나고 있는데(계 21:20) 이것은 역시 하나님나라의 합당한 경로가 아닌 가운데서 범하는 자들의 받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목할 수 있음을 말하게 됩니다.

이처럼 삽비라의 모습을 통하여서 아나니아의 그 판단받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교제하는 자들로서의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하는 개념에 나타나는 합당한 재물에 대한 권위를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1:7) 그래서 아내된 자가 어떠한 자인가 하는 것으로 남편을 알아볼 수 있고 또한 남자를 영화롭게 하는 자도 아내된 자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안위를 받지 못한 자는 청옥으로 세움을 받아야 할 것에 대한 말씀도 하시는데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담아서 그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어지는 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되어진 것을 상대적으로 인위적으로 규정하는 그러한 죄에 벗어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재물드림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구원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신앙고백의 기본적인 생활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평가절하하는 죄악된 생활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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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3월 08, 2004

성령으로 기뻐하시는 예수님

2004년3월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0:1-24
성령으로 기뻐하시는 예수님

여러나라 각국에는 그 나라에 수교한 나라들의 대사들이 머무는 대사관들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한 대사들이 머물게 되어지는 그 상관성은 균등한 협의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겠고 불평등한 조약에 따른 대사들이 머물게 되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한 식민지적인 통치를 위한 대사관적인 측면의 대사들이 머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들은 그 나라의 주관적 판단에서 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경우와 외적인 경우에서 역사적 정황에 따른 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과 역사에 대한 주권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인간에게 그러한 자신의 전권을 가지고 자신이 오신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러한 자신의 기뻐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1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께서 칠십인을 파송하심에 대한 것과 사도들에게 주의 하도록 하심에 대한 동일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도록 하심과 받지 않는 자들이 소돔보다도 두로와 시돈보다도 더 심판에 이르게 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70인의 사역에 대한 보고와 그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고 특히 귀신을 제어하는 그러한 것의 기쁨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진 것을 인하여서 기뻐하라고 하심의 말씀하심을 받게 하셨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심으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선지자들이 보기 원하던 바라고 함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절대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자로서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70인의 전도하는 그러한 모습 그리고 앞서 보내진 열 두 제자들의 증거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과 복음을 들고 전하는 자들이 산을 넘는데 그 기쁨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성령하나님의 기뻐하시게 하심에 따른 자신의 기쁨으로 주님이 기뻐하시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기쁨의 증거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사들의 기쁨의 소식을 증거한 그 증거로써 예수께서 구주로 나심에 대한 증거임을 또한 말씀하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소유된 자들의 주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진 것을 말씀하시고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소돔의 악함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세상이 불사름으로 심판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며 그 상관성으로 판단받는 세상이라고 함을 의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며 또한 두로와 시돈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세상의 중심으로 두셨는데 여호와 하나님께 책망받음에 대하여서 박장대소하고 그들이 죽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겠다고 하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자들입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이 비유하셨던 악한 종들이 주인의 아들을 해하고 그 기업을 차지하려고 하였던 그러한 악함에 대한 판단이 있을 것을 지적하셨던 것과 같이 두로와 시돈을 판단하심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 주 앞에 나오게 되어지는 것을 막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소유권적인 행함과 하나님이 없다고 함에 대한 허사를 경영함에 대하여서 주께서 보내신 종들의 기쁨의 소식 구주 예수님을 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나라가 전파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하심도 있다고 함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는 가운데서의 성령 자신의 거룩함에 따른 정당한 예수님 자신의 기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출애굽에 대한 것도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을 보내라고 함에 대하여서 세상의 기득권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서고자 했던 것과 그것에 대한 주의 심판하심이 세상에 10가지 재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께서는 주의 열두제자 및 70인이라는 주의 종들을 보내시며 예수의 구주이심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정체성의 정당함을 의지 하지 않고는 상대적 비합리성이라고 함의 판단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 있다고 하나 그 지혜의 실재를 말할 수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감추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 정당함에 따른 실재를 받을 수 있게 하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함을 말씀하시며 기뻐하심을 봅니다.

이처럼 주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예수님이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를 하는 가운데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가운데 주의 기쁨이 되어지는 성도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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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길로 행치 못하리라

2004년3월5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4:1-25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하리라

악한 사람은 자신이 서야 할 곳이라고 하는 그 곳을 모르거나 또는 의도성 있게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인지상정적인 측면에서도 판단되어지며 그것의 근원이 되어지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의 판단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이 아닌 이상 어떤 밭에서 일용되어 일하는 사람이나 지나는 사람들이 그 소출에 대한 것에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다시는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악한 종들의 모습에 대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러한 것은 주의 비유의 말씀과 구약에 가나안이 형제들의 종이 될 것에 대한 것과의 상관성에서 말을 하게 되어지는데 욥은 그러한 점을 들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증거합니다. 물론 주의 비유는 직접 듣지 않았지만 그러한 주 앞에서의 성도로써의 기본적인 인식이라고 함과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담아내는 가운데서 그러한 주의 비유의 말씀의 실제적인 증거를 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셨음과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볼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언급으로는 악한 사람들이 지계표를 옮기는 일 가난한 자들이 길에서 내어 몰리는 일 악인의 남겨둔 포도를 따는 사람들, 많은 사람이 있는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심이라고 함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문적으로 보신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도 침묵하심에 대한 간절한 중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광명을 배반한 사람들의 특징을 말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악을 범하는 가운데서의 밤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5절가지의 말씀에서는 한마디로 악한 이들이 포도원 길로 행하지 못할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해산하지 못한 여인을 학대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는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해를 입은 여인으로서의 비유인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의 모습을 주장하면서 용과 같이 말하는 자들의 모습처럼 높아지지만 잠시 후에는 낮아져서 범인처럼 제함을 당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그 정하신 때를 주의 종된 자들이 분별하여 보게 된다는 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 본문의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 기도할 때에 주 하나님께서 그 성에 의인 열이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하심에 대한 것과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인구가 많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의 정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과 그러한 것을 주의 종들이 분별한다고 할 때에 욥의 조문객들과 같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주의 뜻하신 바를 다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서 판단받게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의 때로서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진정 핑계할 수 없는 복음과 같이 광명의 때 의로운 태양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 앞에서 어두움의 권세에 대한 유익이라는 자의적 판단에 의미와 실제를 부여하는 자들이 광명을 떠난 자들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의 종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순전함의 열매라고 하는 것에 대한 평가를 자신들이 가로챌 수 있는 것과 같이 상대적으로 비난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케 되어질 것이라고 하는 점을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주의 속히 오리라고 하신 말씀하심 안에서 그 존재적 정당함을 부정당하게 되어지는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자신의 삶에 대한 결과를 내놓고 그 행함에 대한 절대의 판단을 받아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생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판단에서 자존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다는 그러한 자신들의 열매라고 함을 정당화하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주의 종들의 증거의 부당함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악한 종들의 모습인데 이는 그들의 존재의 평가와 그 주어지는 복이라고 함을 받게 되어지는 주의 포도원에는 다니지 못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이라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 단순한 증거로서의 비판을 받지만 그러면서도 진정 인생의 포도원에서 인생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은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즉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의 자녀의 권세를 입게 되어지는 그 자리밖에는 없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외에는 다른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을 기억하고 힘들고 고난의 자리에 서며 애통하는 가운데서도 주의 복음을 전하는 그 종된 자로서의 아름다운 자리에서 주의 영광의 나라에 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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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3월 04, 2004

발 앞에 둔 재물(財物)

2004년3월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4:32-37
발 앞에 둔 재물(財物)

요즘은 사회적으로 여러 방면으로 볼 때에 탈 권위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새로운 권위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창출하는 그러한 진통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러한 진통들이 객관성을 항상 가지는 것은 아닌 가운데서 여러 가지 주관적 권위 해석과 그러한 경험적 판단이라고 하는 자체가 재평가를 받는 그러한 형태를 띤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정립되어지지 않은 형태로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라고 함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경향도 동반하게 됩니다. 굳이 포스트 모던과 같은 그러한 시각에서 주목하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 이전에도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러한 진통이 있어 왔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고 더욱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며 더욱 실제적인 분별이 필요한 권위와 상관된 말씀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6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의 사도들이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잡혔다가 놓임을 받고 담대히 주의 말씀을 증거하기를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모인 곳에 진동으로 나타나심과 그러한 하나님의 인증적인 측면에서의 실제를 받아들이게 되어진 주의 성도들은 재물을 주의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줌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6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요셉에 대하여서 그리고 그의 헌물에 대한 것을 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의 뜻에 대한 언급도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재물에 대하여서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한다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권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정치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납세의 의무를 지닌 국민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도 언급 가능한 것이며 또한 소비자의 권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열려진 서비스체계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러한 표현이 가능한 권위의 이동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은 방향에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진 재물’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별적 의미로써 하나님의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께 드린 재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권적 주장이 성도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다만 청지기로써의 대행적인 측면에서의 권세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어떤 것의 사실규명이라고 하는 것, 무엇이 실제적인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사람들의 인식에 맡는 것이라고 함에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노력과 인위적이라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공인되어진 인식에서 받아들여질 때에 그 사실규정의 당위성이 있음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적인 것은 그러한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지만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허락되어지거나 허용되어지는 일상적 정당함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왜곡되어진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구별된 실제로서의 상식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상식의 본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은 것으로써의 드려지는 구별적인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28장에 나타나고 있는 야곱의 서원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무사히 돌아가면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겠다고 함을 말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의 자녀들로서의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 아바아버지의 집에 이미 왔음에 대한 증거로 한 장소를 구별하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드려지는 것으로써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드림에 대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것이라는 점에서 이미 자신이 주장할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중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함을 하지 않는다는 본문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바나바라고 하는 요셉 레위인의 헌물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는 그 이름의 뜻이 권위자라는 뜻으로써 그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재물드림에서 주 앞에 재물을 드림이라고 하는 것에 합당한 주의 받으심의 권위가 있다는 것과 그 권위가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실제적으로 세워짐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동방박사들의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아기 예수께 드리는 모습과 상관성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며 이러한 것이 예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증거로 교회가 받음에 대한 합당한 권위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그러한 권위에서 파생된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도덕적 차원에서 재물드림에 대한 것이 다음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들 발 앞에 둔 재물.. 오늘날에는 사도는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들의 증거에 합당한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교회의 질서에서 당위성을 입은 자들이 이러한 하나님께 드려진 재물을 관리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하여서 헌금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실제의식이 없이 행하는 가운데서 그 드려진 헌물의 규모로 자신들의 위치나 섬김에서 권세적 개념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모르고 그것을 취하는 자들도 자신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것(롬 12:20)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아바 아버지의 집에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 왔습니다.’라는 구원의 고백과 증거로써 십일조와 헌물을 주의 질서를 따른 자 앞에 두며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 받으심의 증거를 온전히 나타내시는 가운데 전혀 낯설지 않는 주 아바 아버지의 품에서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들게 되어지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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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3월 01, 2004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라

2004년3월1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욥22:1-30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라

우리가 욥기의 말씀을 대할 때에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욥을 대적하는 자의 모습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자들의 언급되어진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오묘함의 뜻하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임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의 영감, 영적인 감동이라고 하는 것은 사단이 한 말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그러한 논란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와 실제적 의미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귀가 말하도록 하심으로 그 뜻하심을 이루심과 같이 사단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선히 주장하실 수 있으시며 자신의 기뻐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내실 수 있음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사단의 주장 속에서 허용되어지는 고난 받는 욥의 조문객들로써의 거짓되어진 증거로써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내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면서도 상관이 있는 것과 같이 핍박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또한 세상을 심판하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21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악인들의 위로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가운데 실재가 없는 것이며 또한 거짓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답변이 되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한마디로 욥은 자기 임의대로 즉 자기 스스로 유익을 말할 뿐 그것은 합리적일뿐 상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보기에는 욥이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로써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않고 과부를 공수로 보내고 고아의 팔을 꺾는 것과 같이 이러한 올무들이 둘러 있고 두려움이 너를 침범하여 어두움이 욥 자신에게 임한 것이 아니냐 그것이 상식적으로도 지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시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하나의 패러디와 같은 모습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으냐 그 높으신 하나님이 볼 때에 흑암 중에 어찌 아시며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는 말로써 욥이 자신의 합리화로 가린다고 심판을 못하신다는 것은 그 악함을 말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욥기서 21장 16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패러디 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도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것에 대한 것을 지적하면서 욥이 전에 부귀하였음에 대한 것을 임의적으로 계속해서 판단하며 오빌의 금을 내어버리고 보배를 내어 버릴 때에 다시 흥하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을 보면서 엘리바스는 겸손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그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욥이 범신론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에 앞에서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상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공의라고 할 때에, 그러한 욥 자신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에 있어서 종교는 아편이라는 개념으로 사람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존재하는 자구책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과 같이 욥이 하나님 앞에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소망을 두는 것을 상대적으로 볼 때에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반박하며 욥이 악인이 자신과 전혀 다르다고 할 때에 데만사람 엘리바스도 똑같이 모방하여 말하기를 악인과 자신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는 것이 은혜의 공의로서 자신이 우리 성도들에게 의로움을 주시며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중심이라고 하는 것에 실제를 부여하신다는 점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상대적인 보편적 생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의라고 하는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러면서도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 즉 상대적으로도 하나님의 공의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도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며 자랑하시는 자들을 통하여서 증거되어지는 실제를 보게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과 같이 주의 보내신 사도들의 전한 복음은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그 주님의 판단하심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존재적 정당함을 입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이 엘리바스의 판단은 여전히 그들의 머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서 충분히 말할 수 있고 패러디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도 하나님의 판단을 모방하여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하는 자 자신의 존재를 포함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에 이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임의로 스스로 유익을 위해서 말하지만 그 스스로 위하는 유익이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의 재가가 없기에 그것은 여전히 실제적인 것이 아닌 심판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증거가 상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스스로 위로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그러한 임의적 유익을 말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 진정한 유익과 실재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지는 실제의 구원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적인 주의 구원과 그 복음의 유익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며 누리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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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종의 재앙

2004년2월29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9:1-35
독종의 재앙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한 애굽에 내리시는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다섯째 재앙에서 일곱째 재앙으로써 악질과 독종과 우박의 재앙에 대한 본문의 말씀입니다.

각각의 성격과 또한 본문에서는 우박에 대한 재앙에 대하여서 더 상세히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러한 재앙의 독함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 그 독종의 재앙이라고 함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는 재앙의 성격과 그 뜻하심을 읽게 하시는 것으로 중심에 세워진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로 하여금 바로에게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백성을 보내라고 하심에 대한 것을 전함과 그러한 것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심한 악질이 있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풀무의 재 두 움큼을 하늘로 날리도록 하심과 그로 인하여서 독종이 술객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과 짐승에게 발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게 하심으로 애굽 전역에 개국이래로 있어본 적이 없는 우박이 내려 들에 있는 짐승과 사람과 채소에 해를 입게 하심에 대한 예언과 그 이루어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께서 애굽에 내리시는 재앙이라고 하는 것 이 열 가지 재앙의 특징은 그들의 존재부정에 있습니다. 즉 그들이 살았다고 하나 죽은 자임에 대한 깨닫게 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존재부정이며 그들의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위에 대한 공의의 판단으로써 심판으로써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피의 재앙과 개구리, 이, 파리와 같은 재앙들은 무덤 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불에 사르는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악한 악질이라고 하는 것도 피부병과 같은 것으로 화학적인 변화가 몸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독종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는 더욱 풀무라고 하는 쇠나 철과 같은 것도 녹이는 그러한 용기와 같은 것으로써 그것에서 나온 재를 공중에 뿌림과 그것이 사람과 그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살아있다고 하나 그 재와 같은 존재의 규정은 불에 타죽을 인생으로서의 예표와 실제적인 판단이 그들에게 주어지며 고통이 현실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박의 재앙에서 보는 것에서는 역시 우박과 함께 불이 내리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불로 심판하실 것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러한 것에서 특히 우박이 그 주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미 장자를 치는 마지막 재앙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구별되어지는 자들도 있다는 것 심지어 바로의 사람들도 부인할 수 없는 그러한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모습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진정한 경건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나 핑계할 수 없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인 절대의 판단을 고집하고 있는 바로의 마음에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좀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와 같은 자가 없음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과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고 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증거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실재의 증거도 있게 되어짐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셈의 장막에 야벳의 창대케 하심의 주의 몸된 교회가 거하게 되어지며 반석에 세워질 것에 대한 것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써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증거와 같이 이후에는 불사르기 위하여 세상이 예비되었음에 대한 증거가 이미 모세를 통한 재앙에서 나타나는 증거로 받게 하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핑계할 수 없는 복음과 그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가운데서 주의 몸된 보편교회 주의 택한 백성들의 교제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복음의 말씀하심 안에서 핑계할 수 없는 복음에 대한 실제적은 증거를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주의 구원하심과 주의 심판하심에 대한 증인들로서의 그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이루는 귀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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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귀에 담아두라

2004년2월2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9:37-62
이 말을 귀에 담아두라

정보화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하는 것과 그러한 것들 중에서도 그러한 정보를 선별하는 기술과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것들 자료를 보존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보존되어지는 그러한 정보들 중에서도 ‘필수’라는 그러한 의미의 정보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산더미 같은 정보의 바다에서도 그 하나를 위해 정보의 전체를 뒤져야 하는 그러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애석하게도 간과되어지는 모습 속에서의 고통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은 현대인들의 동의적인 차원을 말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정보라는 것과 객관적 사실이라는 개념이 달리 나타날 수 있지만 그 기본적인 중요성에서 같이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는 사실들이라고 하는 것 그 증거들이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귀에 담아두어야 할 것으로 말씀하신 것에 더욱 예민해진다는 것은 그 자체적 실제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7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9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7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변화산에서 주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후에 산에서 내려오심과 그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외아들의 귀신들림에 대한 고쳐주심을 구함과 주께서 고쳐주심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귀담아 둘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울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서 제자들의 누가 높은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에 대한 것과 주께서 아이를 세워 가르쳐주심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9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금하였음에 대하여서 주께는 반대하는 자가 아니면 위하는 자임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승천 기약이 차감에 따라서 예루살렘에 사람을 보냄과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음과 그에 따른 제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릴 것에 대한 제안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어디로 가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그러한 여정이라고 함에 있어서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부친의 장사에 대한 질문과 가족을 돌아볼 기회를 구하는 자들에게 쟁기를 잡은 자로서 뒤로 돌아봄에 대한 책망에 대한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께서 귀담아 두라고 하심에 대한 것과 그러한 것에 인식되어지지 않는 행동을 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러한 것에서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하심으로써 그 증거됨에 대한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외아들의 귀신들림에 대한 아비의 고통에 대하여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함과 예수께서 고침에 대한 것은 예수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의 타락한 천사들로써의 귀신들의 주장함에 따른 예수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예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의 뜻하심 안에서 예수님의 고난받으심에 대한 것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제자들이 고친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계시적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고치신다고 하는 것과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목자로서의 예견되어진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심이 그 아이를 고치심과 주의 주권적인 사역이라고 하는 것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동역적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 것임을 주목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별세하심에 대한 것을 이미 말씀하심을 마음에 두라고 하시는 것과 그것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으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같은 주의 역사하심에서 분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신 주님의 뜻하심과 그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이 알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높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 안에서 주 앞에서 정체성을 받게 되어지는 그러한 것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높아져야만 어떤 일을 한다는 상대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의지하고 있음에 그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야 할 것을 어린아이의 부모에 대한 순종에 대한 의미로서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의 모습은 배척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또한 그러한 것마져도 주의 뜻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기억하도록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따른 우리를 의롭다 하신 가운데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과 같이 거룩하게 하는 그러한 믿음의 권세가 있고 분별하여 실제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의 권세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실제를 말할 수 있는 은혜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일일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를 찾겠다는 그러한 개념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뜻하심을 빙자하는 그러한 형식적인 것만 갖춘 자들의 모습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에 대한 책망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음에 대한 책망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귀담아 두어야 할 주의 말씀하심은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서의 동일하게 나타나게 되어지는 주의 부활이 분리되어 나누어진 다른 하나님의 뜻하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말씀과 같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과 그러한 의롭다 하신 이의 형상을 덧입고 회복되었기에 믿음으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여 그 정당한 뜻하심을 따를 때에 땅에서 메이면 하늘에서도 메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교회의 권세와 성도의 권세의 실제를 나타내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주의 말씀하심을 우리의 귀에 담아두며 주의 뜻하심을 잘 감당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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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이 받는 위로와 악인의 대답

2004년2월27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1:1-34
악인이 받는 위로와 악인의 대답

상대적인 사회에서 살면서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정도면의 차이일뿐 전혀 걱정이 없는 그러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 인생의 ‘시름’이라고 하는 것 즉, 마음에 걸려 풀리지 않고 항상 남아 있는 근심과 걱정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레저 문화나 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풀어나가게 되어지는데 사실 그러한 것에 궁극적인 것처럼 위로를 주는 무신론자로서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입장은 ‘삶에 있어서 불안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안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하다고하면 그럼 왜 불안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하는 그러한 자체적 합당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절대적으로 말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말의 합리성을 찾을 수 있고 그에 따른 납득할만한 당위성을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절대적인가에 대한 판단에서는 여전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이 악인들이 위로받는 것과 같은 현상에 대하여서 실제적인, 객관적 사실인 것같이 말함에 대하여서 그러한 것은 거짓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이 욥의 증거가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7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소발이라고 하는 욥의 조문객으로 와서 그에게 변론하는 자에게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욥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 즉 육체 밖에서도 부활의 몸으로써도 주님을 만나 뵐 위로를 말함에 상대적으로 의롭지 못하다고 소발이 반발하였던 것에 대하여서 다시 욥은 그 조문객으로 와서 논쟁하는 자들의 악함과 그러한 자로서의 받는 위로에 대하여서 기술하겠다고 함과 그러한 것을 상대적 여지를 통하여서 말할 수 있음에 대한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첫 번째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악인의 계획과 자신은 판이하다고 하는 것을 말한 것에 대하여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에서는 악인들의 죄악이 쌓였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그 쌓였음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그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의롭다고만 생각하는 일변도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위로받고자 하면서도 절대자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함을 깨닫게 해주셔야 그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을 조문 왔던 자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고 악한 동기로 인한 궤휼이라고 하는 것도 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반박하려고 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것의 확실성을 묻는 것이 아니냐는 것에 대하여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즉 상식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에 다 상대적이라고 하면 그러한 소위 ‘남들도 다 그렇다고 할 때 뭐 대수냐’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의 확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마저도 상대적으로 생각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상의 노선들 즉 하나님이 아닌 일반적인 생각들 상대적 여지가 있는 것을 강조하며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말에 힘주며 고수해나가고 있지만 그것은 그 존재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골자기에 흙덩이를 달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즉 실재가 없는 그러한 것으로 헛되이 자신의 실존의 책임도지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 그들의 위로의 객관적 사실이며 또한 그러한 것들에 대한 변명들은 실제가 성립되어지지 않는 거짓뿐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주목하면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남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그러한 판단의 보편과 하나님의 절대 보편을 견주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바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위로가 될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러한 말의 객관적 사실의 성립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빈 소리 즉 거짓뿐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악한 사람에게 징벌하심에 대한 것으로 나타남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섭리가 그러한 나타내심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 판단 받는 것은 또한 다른 문제라고 하는 사실도 마음에 두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하심의 자기 정당함의 신비를 찬양하는 합당한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소위 ‘권선징악’이라는 개념이나 ‘사필귀정’이라는 것을 말하는 중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체적 상대적 정당함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그러한 증거들입니다.

그러한 증거로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의 섭리를 그러한 것으로 판단하며 상대적 판단 속에 하나님을 인위적으로 규정하는 자들의 모습들 이러한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한 지적인 바로 본문에서는 욥이 말한 22절의 말씀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 가운데서 심판에 이르게 됨에 대한 증거가 되어짐과 그러한 판단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로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리에 서는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분별하지 않고 평가절하하며 상식적인 보편으로 하나님의 절대보편적인 재가를 얻은 증거를 받지 못하고 판단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는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악인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받을 위로가 되어질 것임과 또한 그 변명들 그 대답들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거짓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더욱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현상적인 실제로서의 삶과 고난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체적 정당하심의 증거를 따라서 판단하는 것이 합당한 것을 깨닫는 가운데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복 있는 자(시 1:2)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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