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3월1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6:1-14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사람들은 ‘상식 없는 학문은 위험하다’라는 말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함과 그에 따른 행함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편견과 아집이라는 개념 때문에 일을 좀더 바른 모양으로 좀더 납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납득되어질 수 있는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실제라는 것, 객관적인 사태라는 것의 받아들일 수 있는 당위성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 좀더 보편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러한 보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절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이러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오늘 욥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이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수아 사람 빌닷의 상식적인 보편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욥의 모습이 구더기 인생이라는 측면에서의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러한 말에 대하여서 욥은 그것에 대한 반론적 입장에서 그 보편이라고 함이 이미 판단되었다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신적인 보편을 말한다고 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 하지 않는 그러한 신이라고 하면 그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그렇다고 할 때에 그들이 연약한 자를 잘 도왔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소적 의미에서 반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음령들 즉 정당함을 입은 존재들로서의 영들이 아닌 그러한 영들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존재의 부정되어짐을 부인할 수 없는 가운데서 떨게 되어지는 것과 그들이 보편적인 측면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함정이라고 하는 것 그 멸망의 웅덩이라도 주 앞에서 가리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하늘과 땅과 그러한 것의 지탱되어지는 기둥이라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경외를 나타낸다는 것으로 떪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좌 앞을 가리심에 대한 것과 구름으로 가리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광대하심이라고 함이 상대적으로 인식적 충족성을 자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씀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빛과 어두움의 한계를 설정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모세를 통하여서 애굽에 내리셨던 그러한 어둠의 재앙과 고센 땅에 있었던 광명과 같은 실제적인 주의 구원하심이라고 함에서 나중에 나타나실 메시아 안에서의 구원하심에 대한 그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합을 파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라합이라고 하는 것의 말의 뜻은 ‘넓다’(wide)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넓음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상대적 보편이라고 함이 절대 보편과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 보편의 존재적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이 부인되어질 것에 대한 주의 심판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편에 따른 실제적 증거를 상식적으로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꼬불꼬불한 간교한 합리성으로 행하지만 그러한 것을 주의 권능으로 판단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상대적인 표현의 실제를 말씀하시면서도 그의 절대 보편이라고 함은 다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세미한 음성에 비교되어지는 큰 능력의 우뢰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면서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은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재가를 얻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예비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그렇지 않은 가운데서는 그가 파함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리고성의 라합은 여러 보편적인 측면에서는 여호수아 장군의 보낸 자들을 밀고하는 편이 더 보편적인 구체적인 자신의 유익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판단이 되지만 하나님의 절대보편적인 재가를 생각할 때에는 여호수아 장군의 보낸 자들의 편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받으신 바의 증거자로서 예수님의 족보에서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리고의 여인 라합과는 달리 하나님께 재가를 얻지 못하는 그러한 판단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존재가 파하여진 바가 되어지는 실제적인 모습속에서 그것을 의지하는 합리성의 간교함이라고 하는 것이 그 세력의 치명상으로 그 존재가 부정되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보편이라고 함의 그 하나님의 속성에서 재가를 얻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실제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것은 상대적이면서도 진정한 보편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보편적인 의식이라고 함이 여리고의 기생으로 나타나고 있는 라합과 같이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된다는 것을 성도들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의 절대 신실하심의 판단 안에서 실제를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의식을 잘 받을 수 있는 자들로서 여리고의 여인 라합과 같이, 또한 세상의 다니엘의 세친구와 같은 풀무불 속에서의 강요되어진 실제의 판단에서 벗어남과 같이, 주의 길을 예비하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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