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3월 01, 2004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라

2004년3월1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욥22:1-30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라

우리가 욥기의 말씀을 대할 때에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욥을 대적하는 자의 모습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자들의 언급되어진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오묘함의 뜻하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임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의 영감, 영적인 감동이라고 하는 것은 사단이 한 말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그러한 논란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와 실제적 의미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귀가 말하도록 하심으로 그 뜻하심을 이루심과 같이 사단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선히 주장하실 수 있으시며 자신의 기뻐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내실 수 있음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사단의 주장 속에서 허용되어지는 고난 받는 욥의 조문객들로써의 거짓되어진 증거로써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내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면서도 상관이 있는 것과 같이 핍박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또한 세상을 심판하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21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악인들의 위로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가운데 실재가 없는 것이며 또한 거짓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답변이 되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한마디로 욥은 자기 임의대로 즉 자기 스스로 유익을 말할 뿐 그것은 합리적일뿐 상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보기에는 욥이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로써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않고 과부를 공수로 보내고 고아의 팔을 꺾는 것과 같이 이러한 올무들이 둘러 있고 두려움이 너를 침범하여 어두움이 욥 자신에게 임한 것이 아니냐 그것이 상식적으로도 지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시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하나의 패러디와 같은 모습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으냐 그 높으신 하나님이 볼 때에 흑암 중에 어찌 아시며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는 말로써 욥이 자신의 합리화로 가린다고 심판을 못하신다는 것은 그 악함을 말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욥기서 21장 16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패러디 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도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것에 대한 것을 지적하면서 욥이 전에 부귀하였음에 대한 것을 임의적으로 계속해서 판단하며 오빌의 금을 내어버리고 보배를 내어 버릴 때에 다시 흥하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을 보면서 엘리바스는 겸손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그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욥이 범신론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에 앞에서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상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공의라고 할 때에, 그러한 욥 자신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에 있어서 종교는 아편이라는 개념으로 사람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존재하는 자구책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과 같이 욥이 하나님 앞에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소망을 두는 것을 상대적으로 볼 때에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반박하며 욥이 악인이 자신과 전혀 다르다고 할 때에 데만사람 엘리바스도 똑같이 모방하여 말하기를 악인과 자신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는 것이 은혜의 공의로서 자신이 우리 성도들에게 의로움을 주시며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중심이라고 하는 것에 실제를 부여하신다는 점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상대적인 보편적 생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의라고 하는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러면서도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 즉 상대적으로도 하나님의 공의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도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며 자랑하시는 자들을 통하여서 증거되어지는 실제를 보게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과 같이 주의 보내신 사도들의 전한 복음은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그 주님의 판단하심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존재적 정당함을 입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이 엘리바스의 판단은 여전히 그들의 머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서 충분히 말할 수 있고 패러디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도 하나님의 판단을 모방하여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하는 자 자신의 존재를 포함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에 이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임의로 스스로 유익을 위해서 말하지만 그 스스로 위하는 유익이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의 재가가 없기에 그것은 여전히 실제적인 것이 아닌 심판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증거가 상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스스로 위로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그러한 임의적 유익을 말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 진정한 유익과 실재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지는 실제의 구원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적인 주의 구원과 그 복음의 유익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며 누리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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