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3월14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0:25-37
행함과 영원한 생명
생활 속에서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 중에 우선시 되어질 수도 있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그 행함의 방법적인 측면 그것을 알아보는 것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교육에서도 무엇을 배우느냐 보다는 어떻게 배우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자들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들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 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함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세상에 어떤 것이 무엇이라고 함의 실재를 알지 못한다고 할 때에 그 교육의 목표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없다는 불가지적인 입장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서의 실재를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하고 진리의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라는 방법이라는 개념만으로 접근하는 것에 메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지는 것에 대하여서 그 방법에 대하여서 어떤 율법사가 질문함에 대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5절에서 28절의 말씀과 29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율법에 말한 대로 행하라고 하심의 말씀하심과 그 율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음에 대한 것을 율법사가 말하니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같은 주제 즉 영생을 얻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주의 비유적인 말씀하심으로 자비를 베푼 자에 대한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면 이 율법사는 아들의 소원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고 하심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실 때에 그의 규정하기 원하는 것으로써의 영생을 얻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그러한 의구심과 또한 비판적 입장에서의 논제를 설정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패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시려고 오심에 대한 중심에서 구별되어지는 그 율법적인 행함을 행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하나님과 그 이웃에 대한 실재를 분별하게 하도록 하심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제사장도 그대로 지나가고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가는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돌봐주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상처를 싸매고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그 사람을 돌아보아 주기를 바라고 다시 돌아올 때에 부비를 지불하겠다는 것을 말함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라고 함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라고 함은 주의 가르침이며 그 율법사가 인식한 것입니다.
이웃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며 이는 예수님 자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행함이라고 하는 도덕적 완성의 개념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재가를 받게 되어지는 정당함에 따른 구별되어지는 그러한 실재를 말하지 않고 행하기에 그들에게는 치료할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러한 것을 행함을 원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강도를 만난 사람들을 피하여 가고 있음을 지적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재가를 생각한다면 이제 구약적인 개념의 제사장의 직분적 완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외형적인 그러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기득권적인 측면의 모든 것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사실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부음으로 표현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을 따른 재가를 따라서 그 강도만난 자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름붓는다는 것은 구약적 언어로써는 메시아라는 말의 뜻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사마리아인인데 이는 사마리아 인들은 그 당시 유대지역에서 이방인취급을 당하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배척받게 되어지는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써의 인물 설정이 되어진 가운데서 주의 비유에 가르침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자비를 베푸는 자 그는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로서의 기름을 부어 치료하는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성령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의 그 정당함에 따른 분별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이 세상에 상대적인 기만에서 자신의 영혼의 실재를 유린당하는 자들에게 치료하는 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이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이웃은 상대적 합리성의 개연성으로 그럴듯하게 하여 영혼들을 해치는 삯군들이 거짓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되게 말하고 있지만 진정으로 주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통하여서 이웃으로 오심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들이 세상에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고 유린당하는 영혼들의 이웃이라고 함과 또한 주 안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을 자들로서의 이웃으로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사실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절대의 자존의 정당함을 가지고 비유에 실제를 부여하신다고 할 때에 그러한 비판은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참된 이웃은 구주로 오신 예수님이시며 주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들의 모습이며 또한 그들이 주 안에서 사랑해야 할 세상의 영혼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율법을 온전히 이루며 영원한 생명을 주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로서 주의 이러한 뜻하심을 잘 감당해내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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