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3월 01, 2004

악인이 받는 위로와 악인의 대답

2004년2월27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1:1-34
악인이 받는 위로와 악인의 대답

상대적인 사회에서 살면서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정도면의 차이일뿐 전혀 걱정이 없는 그러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 인생의 ‘시름’이라고 하는 것 즉, 마음에 걸려 풀리지 않고 항상 남아 있는 근심과 걱정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레저 문화나 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풀어나가게 되어지는데 사실 그러한 것에 궁극적인 것처럼 위로를 주는 무신론자로서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입장은 ‘삶에 있어서 불안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안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하다고하면 그럼 왜 불안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하는 그러한 자체적 합당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절대적으로 말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말의 합리성을 찾을 수 있고 그에 따른 납득할만한 당위성을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절대적인가에 대한 판단에서는 여전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이 악인들이 위로받는 것과 같은 현상에 대하여서 실제적인, 객관적 사실인 것같이 말함에 대하여서 그러한 것은 거짓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이 욥의 증거가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7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소발이라고 하는 욥의 조문객으로 와서 그에게 변론하는 자에게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욥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 즉 육체 밖에서도 부활의 몸으로써도 주님을 만나 뵐 위로를 말함에 상대적으로 의롭지 못하다고 소발이 반발하였던 것에 대하여서 다시 욥은 그 조문객으로 와서 논쟁하는 자들의 악함과 그러한 자로서의 받는 위로에 대하여서 기술하겠다고 함과 그러한 것을 상대적 여지를 통하여서 말할 수 있음에 대한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첫 번째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악인의 계획과 자신은 판이하다고 하는 것을 말한 것에 대하여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에서는 악인들의 죄악이 쌓였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그 쌓였음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그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의롭다고만 생각하는 일변도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위로받고자 하면서도 절대자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함을 깨닫게 해주셔야 그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을 조문 왔던 자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고 악한 동기로 인한 궤휼이라고 하는 것도 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반박하려고 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것의 확실성을 묻는 것이 아니냐는 것에 대하여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즉 상식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에 다 상대적이라고 하면 그러한 소위 ‘남들도 다 그렇다고 할 때 뭐 대수냐’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의 확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마저도 상대적으로 생각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상의 노선들 즉 하나님이 아닌 일반적인 생각들 상대적 여지가 있는 것을 강조하며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말에 힘주며 고수해나가고 있지만 그것은 그 존재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골자기에 흙덩이를 달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즉 실재가 없는 그러한 것으로 헛되이 자신의 실존의 책임도지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 그들의 위로의 객관적 사실이며 또한 그러한 것들에 대한 변명들은 실제가 성립되어지지 않는 거짓뿐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주목하면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남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그러한 판단의 보편과 하나님의 절대 보편을 견주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바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위로가 될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러한 말의 객관적 사실의 성립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빈 소리 즉 거짓뿐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악한 사람에게 징벌하심에 대한 것으로 나타남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섭리가 그러한 나타내심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 판단 받는 것은 또한 다른 문제라고 하는 사실도 마음에 두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하심의 자기 정당함의 신비를 찬양하는 합당한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소위 ‘권선징악’이라는 개념이나 ‘사필귀정’이라는 것을 말하는 중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체적 상대적 정당함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그러한 증거들입니다.

그러한 증거로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의 섭리를 그러한 것으로 판단하며 상대적 판단 속에 하나님을 인위적으로 규정하는 자들의 모습들 이러한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한 지적인 바로 본문에서는 욥이 말한 22절의 말씀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 가운데서 심판에 이르게 됨에 대한 증거가 되어짐과 그러한 판단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로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리에 서는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분별하지 않고 평가절하하며 상식적인 보편으로 하나님의 절대보편적인 재가를 얻은 증거를 받지 못하고 판단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는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악인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받을 위로가 되어질 것임과 또한 그 변명들 그 대답들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거짓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더욱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현상적인 실제로서의 삶과 고난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체적 정당하심의 증거를 따라서 판단하는 것이 합당한 것을 깨닫는 가운데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복 있는 자(시 1:2)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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