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3월2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1:1-13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기도한다는 말, 이러한 말은 우리 주위에서도 자주 접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교에서 타 종교에서도 기도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주관적으로 받는 가운데서 그렇게 이질적인 용어로 사용되어지지 않는 것으로도 인식되어질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도한다고 할 때에 기도한다는 그러한 방법론이나 임의적인 기도라는 내용의 규정적인 입장을 따르면서 그러한 기도에 대한 정체성과 그 실재성을 이방종교 타종교 그리고 무속종교에서는 말하지 않고 있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방종교 및 무속신앙에서는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데 그 기도의 실재를 현상적 개념으로, 느낌으로, 개연적으로, 말할 뿐 진정한 기도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빙자하는 것일 뿐 기도하는 행위는 갖추면서도 진정한 기도를 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기도의 실재와 그 기도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하여서 제자중에 하나가 주님께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시매 한 제자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과 같이 기도를 가르쳐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우리가 죄를 용서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벗과의 상관성과 아비와 자식의 상관성을 예로 들어 말씀하시며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 하늘의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실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기도라고 함의 실재와 그리고 그 기도라고 하는 것이 생활 자체라는 것과 그리고 그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입술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실재성 기도의 존재의 정당한 실체는 어떻게 규정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님의 첫 번째 기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함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에서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자기 정당함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이 실재와 정당함을 얻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106:8)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생활의 중심과 방향과 그를 위한 노력과 그것을 주 앞에 생활로 입술의 열매로 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그가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함에 대한 상대적 편협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며 자신의 구원하시는 자들이 자신,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실재와 그 정체성의 실재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행위라는 것에서 비로소 기도의 실재와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요즘의 이방종교에서 말하고 행하여지고 있는 기도의 행위는 현상적인 인식의 산물로서 규정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임의적인 것으로 그 행위에서 인식되어지고 비롯된 기도로써의 그것은 실재가 없는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구주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의 실제적인 특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그 기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부여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기도행위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삶의 존재방식과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두 번째에서는 삶이라고 함에서 주께 구한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예로서 친구의 경우 벗의 경우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친구라면 강청하는 것을 할 수도 있고 상대방에서는 친구라면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그 귀찮은 가운데서라도 강청을 들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이 현실적인 사실이 될 수 있음을 주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일뿐 이것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동일한 관계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실제의 의미를 따르는 현실적인 사람들의 중심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객관적인 사실이며 객관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을 때에 객관적 사실로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따르는 진정한 실제적 입장을 취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의 중심에서는 원래 아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적으로 가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자체적이라는 스스로 가지게 되어지는 그 본능적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의 반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의 마음에서 비롯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일반적인 정당함 속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록하신 증거를 기억하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요즘에는 이단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같이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실제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자들이 가증스럽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과 달리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인 것을 찾는 가운데서 기도의 실재성을 받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받으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가운데서 주님의 기도를 이루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서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힘쓰는 자리에 서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나타내며 증거하시는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로서 기도의 사람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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