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4월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0:1-31
욥이 넘어진 시험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했다든지 아니면 피해를 당했다든지 하는 소리를 들을 때에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경우는 그 사람은 그럴만한 소질과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을 받아 마땅하다고 함을 말하는가 하면 또 한 경우는 그 당사자가 그럴 만한 소질과 경향이라고 함이 의심되어질 때에는 상당히 의아해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기서 전체에 있어서도 상당히 주목되어지는 부분으로써 욥이 시험에 든 모습에 대한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존재적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성례전적인 입장이 되어질 수 있다는 증거적 인물이라고 함을 유념하게 되어지는 것과 또한 하나님이 그의 순전함이라고 함을 자랑하심에 있어서 그러한 모습을 잃고 시험에 들게 되어지는 모습이라고 할 때에 욥의 넘어짐은 상당한 주목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성도들이 유념하여 둘 만한 것이라고 함도 마음에 가지게 하시는 말씀으로 증거되어지고 있음을 또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29장에 이어서 하나님의 보호하시던 날에 있었던 은혜와는 달리 느껴지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욥 자신보다 젊은 자들이 자신을 기롱하고 있음에 그들이 자기 의 양떼를 지키는 개중에도 둘만한 자가 못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그러한 행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으로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 고토에서 쫓겨난 자로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규정한 그들의 조롱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서 비판적 입장으로 하나님이 욥 그 자신의 줄을 늘어나게 하심으로 그들이 벗어남에 대한 것으로 취득시효(取得時效)적인 개념에서 그들의 주제권이라고 함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말함으로서 그들의 존재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되어진 자들로 인해서 부당하게 자신의 영광이 바람같이 몰리고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구름같이 지나간 자신의 영광이라고 함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 연민의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고 또한 이것은 자신의 연민에서 하나님께 인지상정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서 분별함에 그 한계와 바른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당한 시험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이는 오랜 세월 속에서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이러한 류의 시험에 대한 것을 의식하도록 하는 권고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또한 더욱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욥은 29장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던 날이 따로 있다는 그러한 생각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시지 않는 상대적인 그러한 공백기가 있다는 차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이 보호하시던 날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그렇지 않은 날에 있어서 자기 연민에 대한 판단으로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의 순전한 자리에서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을 이해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차이에서 욥의 정직함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그 순전함을 이해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그의 시험에 들게 한 그러한 정황적 모습까지도 이해하지만 시험에 들고 있는 그 중심을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욥은 처음에는 이 자신의 조문객으로 온 자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자신에 대한 핍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들은 개중에 둘 수 없는 자들이며 고토에서 쫓겨난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짐승과 같이 쫓겨나서 이슬을 맞으며 그의 지혜가 하늘로서 그에게 돌아오는 때까지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였음과 같은 것을 마음에 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이 조문객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의 실존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세상의 시험하는 자들의 모습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욥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라고 함을 의지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과 신실함을 의지하지 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이 인식하고 있는 조문객들의 실체는 죄악 가운데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실체가 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세상의 시험의 전형적인 모습을 욥이 지적하고 있는 것 또한 그를 통하여 읽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시험적인 정체성을 볼 때에 그것이 성도들을 잡았을 때에 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이 시험에 들고 있는 가운데서의 그의 모습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 대한 실재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의 소유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위반되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적인 측면의 예를 든다면 나르시즘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체성을 알고 세상에서 더욱 내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없이 자신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의 판단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갖춘다고 하여도 시험에 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주님이 이러한 말씀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하며 보호하며 잘 경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이라고 하는 가운데서 주어진 형태만으로써 자신의 소유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객관성을 잃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어진 나의 삶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내가 내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 주권은 부여되어진 주권이지 자신의 임의적으로 취하는 판단적인 주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위험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정적인 판단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실존을 잊어버리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이라고 함을 잃게 되어지는 시험으로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그러한 객관적인 사고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실제의식을 가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은혜를 입는 가운데서 악으로 좇아 나는 시험이라고 하는 것에 넘어지지 않는 온전한 은혜의 영광을 주께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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