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4월 19, 2004

내가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004년4월1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2:1-22
내가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 때 그 시대에 사람들이 받아들여지는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로서 인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의를 구할 수 있고 합의된 사실로써 어떤 일을 마무리 하게 되어지는 것도 있게 되어지는 것이 다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러한 어떤 특정인들의 쌍방간의 어떤 합의가 되어진 가운데서 사실을 말한다고 하여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것, 그들이 처해있는 공동체에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는 그러한 합의되어진,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써 전체의 납득 사유가 되어질 수 없다고 판단을 받게 되어진다 하겠습니다.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는 주의 말씀하심에서 합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인데 어떤 상대적 합의의 개념으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은 분명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모습이 시험 들어 넘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그 조문객들의 욥의 입장을 이해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로서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에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서 주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그의 곤고함 속에서 고통하는 가운데 그의 조문객으로 왔던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공의만을 내세우며 범신적 개념으로 일관하는 가운데서, 욥이 자신의 연민에 따른 흐려진 판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이 아닌 가운데, 임의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판단함으로써, 하나님보다 자신의 판단의 우위를 말함으로써, 더욱 자신을 스스로 허용되어지지 않는 영역으로서의 스스로의 입장을 정함으로써, 불순종의 죄악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문객으로 온 세 사람이 그러한 것에 대답함이 없는 가운데서 그 죄를 용인하는 모습에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욥의 조문객으로 온 자보다도 연소한 까닭에 그 질서적 권위라고 함을 합당히 여겼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인해 노를 발한 것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후의 그러한 말에 그들이 답변 없음에 대하여서 말을 잇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자신이 말하여야 하는 소명감으로써의 믿음에 대한 것임을 묘사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 봉한 포도주 새 가죽부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의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은혜의 강권하심이라는 인도하심을 마음에 두고 순종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나 일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은 동의적인 합의적 개념에서 사태수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러한 수습되어지는 것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객관성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합리적인 측면의 상관성에서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적 개념에서의 실제를 임의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판단하고 행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정 책망을 받아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였던 다윗도 합리적으로 죄와 타협하려고 하였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를 이미 취하고 아내로써 취하려고 그의 남편된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전사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자기 정당화라는 합리적인 사태수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단 선지자가 그를 책망함에 있어서 다윗은 시편 51편에 눈물로써 침상을 띄우는 회개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이 욥이 자신을 스스로 연민(憐憫)하며 허용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스스로 의롭게 판단하고 있는 주권행사와 그 합리성을 말하고 있을 때에 그의 증거적 사태는 사실로서 나타나면서도 실제로는 욥의 모습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합리성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조문객으로 온 세 친구들은 책망을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합리성만 생각하느라고 그 정당함의 시비(是非)를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증거적인 대답을 하지 못함은 또한 책망을 받아야 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처럼 하나님께서 소원을 두시고 우리에게 행하도록 하심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그냥 어떤 분별력도 없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는 그의 연소함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연장자의 권위라고 함과 그 질서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여야 함의 믿음의 권고를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한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 행하며 우리의 존재와 삶의 기준과 합당함을 찾는 삶을 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정당함의 질서를 따라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뜻하심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또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주의 말씀하심의 권면하심의 소원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속에 주어질 때에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는 부인될 수 있는 것과 같이 억측을 부리며 하나님을 잘못되게 증거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경건의 유익으로 대하고 있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 성도들은 이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와 같이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온유함으로 대답할 것을 준비하여서 세상에 증거하는 종들의 모습으로 세우심을 받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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