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4월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1:1-40
욥의 서명(mark)
사람들의 건강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 온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것의 한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은 보약이나 보양식과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한 음식문화에 곁들여지는 그러한 것들로써 많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잘 익은 호박에 속을 긁어내고 그곳에 여러 가지 고기나 또는 다른 약재를 넣어서 달이게 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호박 자체의 영양가보다는 호박의 좋은 성분이라고 하는 것이 보조적인 차원에서 역할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의 호박은 그 음식에서 필수적인 측면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되어질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한 가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욥의 표현이 되어지는 자신의 서명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뜻하심이 자신을 포장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하게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판단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있음과 그것이 그의 넘어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처녀에게 상관성이 있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두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강조적 의미로써 경건에 있어서 음란적인 측면의 판단을 받지 않는 자였음에 대한 것을 역설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16절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지 않았음에 대한 것과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지 않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자신이 금으로 소망을 삼지 않았으며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또한 재판을 굽게 한 것이 없었음에 대한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욥은 자신이 사인하여 내놓은 서명하여 내놓은 것이 이러한 것인데 그것에 대한 소송장을 내놓아 보라는 것과 그렇지 못함에 대한 조소적 표현도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의 행함과 그의 언급의 상대적 진실성이라고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합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또한 상대적으로 치우치게 되어지는 것을 주목하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의 절제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는 모습으로 여전히 시험에 넘어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의 고난 받음과 핍박받음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의 실상을 이미 기억하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장과 2장 중반 앞까지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욥의 상대적인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이 하나님의 자랑이었으며 그러한 것의 시비를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단의 의도성이라고 하는 실제의 표현을 허용하심에서 하나님의 자랑으로서의 성도들의 모습을 증거하는 욥의 모습과 서명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찾다가 그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연민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 주권을 자신이 취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그러한 자기 연민에서 기도하고 있는 욥은 그 기도의 내용적 연속성으로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자신의 경건의 열매를 내놓으며 자신의 서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들에게는 주인을 위한 변론과 주인의 뜻이라고 하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종이 종 자신의 것을 위해 주인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도용하는 것은 주인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주의 종들 주의 종들이며 주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금기(禁忌)라기보다는 절제가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자신에 대하여서 말하는 것에 있어서는 좀더 분별하고 한정된 가운데서의 자유의 실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서 변명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합당한 합목적적인 정당성의 한정적 허용에 따른 자신에 대한 언급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욥은 전혀 그러한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변명으로 그것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의 요소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참된 경건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행실이면서도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절제의 영역을 넘어서는 가운데서 실제로는 자신에게 적용되어질 수 있는 실제의 증거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을 나타내어야만 하는 당위성은 언제나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절제가 필요한 것과 같이 그러한 것의 기본적인 근원의 문제로써 하나님 앞에서의 절제의 열매를 맺는 가운데서 종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별함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금기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구별적인 실제를 따른 판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허용되어질 수 있는 한정적 의미에서의 자신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는 종들의 모습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야 함을 주의하도록 권고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주 안에서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은혜가 있어서 넘어지는 욥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시는 욥의 모습과 같은 정체성으로 세움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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