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4월2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3:1-33
시비(是非)를 바꾸는 세대
시비(是非)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이 일반적으로 와전되어진 가운데서 사용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괴롭게 하거나 또는 선하지 못한 의도로 접근하는 것을 시비(是非)건다는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표현을 한다면 ‘시비를 건다’는 말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시비를 가린다,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말이 그 분명한 객관적 사실이 없는 가운데서는 의도성이 있는 가운데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으로 악한 표현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가치관의 혼탁으로 이러한 선한 뜻이 와전되어지고 있는데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객관성이 있는 실제의 증거를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그것의 분명함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분명치 못하면 전쟁에 임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면 그래서 시비를 분명히 하지 않고 바꾼다면 그것의 책망은 마땅히 받게 되어지며 성도로서는 시험에 들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고난의 자리에 서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세대에 대하여서 엘리후를 통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말하게 하심에 따른 증거임에 대한 것을 표현하면서 상대적으로는 엘리후가 자신의 위엄으로는 욥을 두렵게 못하며 자기의 권세로는 욥을 누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진술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은 깨끗하여도 하나님이 그에게서 불의를 찾으심이라고 하는 것의 편벽되어짐을 나타내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계속해서 엘리후가 욥에 대한 잘못을 합당하게 책망하고 있는데 욥이 하나님과 변쟁하겠다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꿈이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심으로 그러한 것으로 인치는 즉 정당한 실제의 교훈으로 말씀하심에 대하여 합리성의 상대적인 것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변론이라고 하는 것의 무익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불순종과 교만함에 넘어지지 않도록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병상의 고통과 죽음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징계에 대하여서 천사들의 해석자로서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 것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속물과 그 당사자의 의의 회복과 시비를 바꿈에 대한 무익함을 고백하며 자기의 생명이 빛을 볼 것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에 재삼 보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상대적 변쟁이 성립된다면 답변하라고 하심과 지혜로 가르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엘리후를 통한 주의 말씀하심은 상대적 합리성의 충족성을 따른 그러한 변론적 개념의 범주적인 측면을 인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상대적인 합리성의 무한함을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절대의 무한을 판단할 수 있는 당위성은 절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면서 욥의 상대적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인정되어지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의 상대적 측면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대적인 의로움이라고 함에 따른 정당함으로 시비(是非)를 바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보다 크심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완전의 충족성을 말 못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자의 절대의 지혜의 충족성을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상대적으로도 용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은 것과 같이 상대적인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공감되어진다고 하여도 그러한 의로움과 절대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상대적 비교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욥의 불의를 상대적으로 지적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셋째 본문에서는 욥의 고난이라고 함이 죽음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과 또한 천사의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 정당히 행할 것을 보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서 죽는 것이 두려워 종노릇하는 자들(히 2:15)에게 천사의 전한 복음, 주의 나심에 대한 천사의 복음(눅 2:15)과 대속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주의 대속하심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진정한 실제를 말할 수 있음에 따라서 그 사람들이 옳고 그름 그 시비를 하나님께 두지 않음에 대한 무익함에 대하여서 회개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복음의 시대를 욥의 고난과 주의 욥의 교만을 고쳐주심에서 지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네 번째 본문의 말씀에서의 인치는 듯한 말씀으로 말씀을 맺고 있습니다. 네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고 함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직면한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의 실존적 정당함을 위해 자기 본위적 당위성을 허락되어질 수 있는 범위를 생각하지 않고 규정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을 주관적으로 편협하게 말하는 경향이 많고 그것을 많은 이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때에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계시로써의 말씀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 옳고 그름의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읽어 내기 보다는 그 상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규정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상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인동형적인 표현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인식하도록 표현한 것을 보고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그러한 근거를 말함으로 주재권이 사람에게 있다고 말하는 악함을 봅니다.
그래서 신을 버릴 수 있는 주재권도 사람들에게 있다고 하는 인본적인 상대적인 인식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변쟁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합리성의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의 절대의 판단하심과 표현하심의 실제가 본질적 실제적 차원에서는 판단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가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이제는 언약적인 측면의 실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중심의 실제적 판단으로 그 정당함을 따를 때에는 인간 중심의 합리성의 시비를 말하는 것이 무익함에 대한 그 정당함의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게 되어지며 이것이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지혜임을 본문에서는 욥을 가르치는 지혜로써 말씀하심에 내포적인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학을 인간학이라고 하며 신앙과 신학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며 종교학이라고 말하는 자리에 서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적인 변쟁으로 하나님이 의롭다 한 증거적 실제를 부인할 수 있다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시비를 바꾼 세대의 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의 계시적 증거의 옳고 그름을 바꾸는 세대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욥을 지혜로 가르치시고 회개케 하시며 세우시며 여전히 하나님의 자랑으로 세우실 것을 이미 예정하신 가운데서 그 뜻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신실하심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바꾸는 그러한 세대에서 주의 은혜로 주의 주시는 지혜로 회개하는 자리에 서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성도로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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