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6월 18, 2007

겟세마네의 고통 이해

2007년 6월1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14:32-42
머물러 깨어 있으라

요즘은 사람들의 인식에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같습니다.

매년 우리나라를 비롯한 특히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국에서 있게 되어지는 '입시전쟁' '삶을 위한 투쟁', 시간을 비롯한 적당한 또는 최소한의 물적 심적 노력 투자에 따른 최대의 기대효과와 그것의 내용이 되어질 수도 있는 경쟁에 대한 것은 삶을 위한 변명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작금의 삶에 대한 인식일 수 있고, 또 시대의 변천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진일보할 것이라는 것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을 것같다는 인식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인식 그 삶의 여정의 배경으로서의 시간투자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이라고 할 때에 입시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을 아끼려는 마음에 각성제도 먹어보는 입시생들의 심정은 분야가 다를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시대에 민감하다는 것 그것이 하나의 '깨어있다'는 '분별력을 위한 또한 분별력이 있다'는 개념으로 이야기 되어질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신앙적으로 또는 그 가운데서 해석되어지는 삶에 있어서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지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합당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생들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은혜로서의 사리 분별이 되어질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32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으로서 구성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세번 기도하심과 제자들의 깨어 있지 못함에 대한 모습과 그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하심인데, 내용은 예수의 자기 계시로서의 증거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이라는 실제적 증거로서 말씀하심을 읽게하는 것과 그들의 연약함을 받으시며 그들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심과 예수님 자신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하심은 그 내용적 계시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제자들이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서의 그들의 깨어있지 못함에 대한 연약성이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 내용적 계시그들의 연약성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는 어떻게 나타나며 상황적 세상의 모습은 성례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맥적인 측면에서 주목해보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마지막 일주일간의 사역을 묘사하고 증거하는 내용으로서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감람산 겟세마네라는 동산에 가셨는데, 그 때에 주의 성자로서의 성부께 기도하심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내용적 계시에 대하여서

본문 32절과 34절 말씀에서는 제자들에게 그 한 곳에 '앉아 있으라' 그리고 '머물러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고민하시며 죽게 되었다고 하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고뇌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처형이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 도망치기 위한 개념으로 상식선에서 규정함은 옳지 않습니다. 정당성 시비에서 이미 죄악된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규정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개념적 정리에서 파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규정적 인식은 가능하나 정당한 규정적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인간적인 고뇌로 나타나는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흩어짐의 사실이 없을 것이나, 결코 구원이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일시적이라고 해도, 예수님 자신의 제자들, 그들의 받을 현상적 실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을 덜어줄 수 없음에 대한 것으로서의 실존적 비참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식적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심이 메시아로서의 인식적 차원에서 합당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히 4:15 참고 사 53: 질고를 아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아)

그러한 연민은 상식적인 차원의 가능성이라는 개념에서는 모든 것을 구별하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성부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께 구해서 그 제자들과 함께한다는 것의 현상적 개념을 구별하여서 사실화 시키는 즉 십자가를 지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있어주는 가운데서도 그 뜻하심을 이룰 수 있는 것을 마음에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인성적 뜻하심 보다도 성부하나님의 신성적 뜻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얻는 것이 본문에서는 이렇게 기도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16)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개념없이 상식적인 개념에서 시간적 보편성에 따라서 볼 때에는 상황에 따른 예수님의 인식의 변화와 고뇌 메시아로서의 자기 인식의 변화 즉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비로소 자기 신뢰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그 때에 비로소 있었다는 기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자로서의 그 복음을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죽고 사는 문제'(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이 자존적 합당함에 따라 전제되어 있다고 할 때에, 시간에 따른 인식의 변화로서 메시아적 자기 인식의 변화와 자기 쇄뇌라는 말은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이며 옳은 본문 해석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해석의 정당성 시비에서 옳다 하는 그러한 사실적 판단을 내리고 진리로서의 실존적 정당함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것을 비로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상식적인 해석 가능성에 의한 실존적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서 본문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로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11:12)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의 이름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자기 계시를 하시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들이 질서를 찾아 실존하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해하고 되어질 일들에 있어서 그 연민의 정과 그렇게 행하실 수 있는 자이지만 성부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인식과 행함의 사실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실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실체, 삶의 전 방향과 실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낸다는 것이 합당한 기도임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가장 중요한 시간에 그것을 마음에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함으로 인해서 더욱 깊이 잠들게 되어지는 자리에 있게되어지며 앞으로 되어지는 그들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로서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상황적 판단을 해야 했기 때문에 또 상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당되어지는 현실적 조짐들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 머물라고 하신 곳에서 평안을 취하려고 하는데 깨어 있어야하는 그 부담감이라고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개념을 바르게 마음에 두었더라면 그것이 합당하게 가능했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적인 이해가 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연약성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제자들은 바리세인들과 서기관과 그 당시 성전과 관련되어진 자들의 인식과 그 행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것으로 합목적적인 방향을 잡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과 언약을 맺고 동행하고 있는 가운데서 인식적으로 또는 몸으로도 상당히 지쳐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고 계시니 별 탈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긴장이 풀려질 수 있고 아주 좋은 휴식시간으로서의 예수님의 기도시간에 눈이 감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상황적 그들의 인식의 추이를 이해하는 것이고, 좀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함이 죄악으로 나아가는 즉 '머물러 깨어 있으라'는 말씀에 불순종하게되어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계시적인 증거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눅 9:44,4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시고 변화산상에서 보여주신 계시에 따른 '예수님의 별세'(막 9:31)를 말씀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문맥을 볼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은 아직 알지 못했으며 깨닫지도 못했다는 말씀이며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을 본 여인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음'(요 20:9)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과 달리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 부활의 해석적 근거를 말씀하심이 이렇게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6,27)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서 자주 언급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소리의 내용은 알고 있지만 그것의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 잘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2장에서 사두개인들과 대화속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부활이라는 것의 사실적 근거는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마음에 두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즉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성경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개념적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사도개인과 같이 부활의 실존을 믿을 수 없으며 믿는다는 중심을 가져도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여서 부활신앙에서 잠들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두지 않으면 많은 가능성의 성경해석이 오해의 사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상황적으로 제자들이 지칠 수밖에 없는 그 연약함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졸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하여도 깨어있을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실 수 있음의 정당함을 따라서, 깨어있기를 실제적으로 주 하나님께 예수님처럼 주 하나님의 마음에 원대로 되기를 기도했더라면, 깨어 있었을 수 있는 사실적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처녀의 비유에서 열처녀 모두 졸았지만 지혜로운 처녀들로서의 다섯처녀의 실존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25:5, 1~10)

그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통해 사실 규정을 함이라는 왕같은 제사장적 입장의 행보로서의 순종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반석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두는 것에서 멀리하여지는 당위성에서 속수무책의 고통의 현실을 맞보아야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슬프고 고통스러우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은혜의 실제는 어떻게 나타나며 상황적 세상의 모습은 성례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어나 같이 가자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택하심은 그들의 연약함에서 비롯되어지는 부활의 개념이 비록 확실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주의 자존적 택하심이 있을 때에, 그러한 사실에서 비롯되어지는 은혜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함에 대한 사실적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같이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세상은 이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거와 그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그 사실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여러 시험이 있고 결국 예수님을 돈벌이식으로 이용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을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확실하지 않다, 또는 예수님의 실존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부활의 상대적 증거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맹목적이다, 예수외에 다른 예수가 가능하다. 즉 '예수 후 예수' 또는 '예수로 예수를 뛰어 넘기' 등, 성립되지도 않는 말들이 그 합리적 당위성을 가지고 말할 때에 답변하지 못하고 자기기 가진 신앙에 확신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고통의 밤에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름을 짜는 듯한 개인적인 고통이 되어질 것입니다. 즉 갯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비로소 왔던 곳이 아니고 그곳 주민들은 다 알고 있는 곳이고 또 왔을 수 있는 곳으로서 세상의 사람들의 고통의 장소로서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에서 성경에서 기록되어진 것으로써 구별되어진 그 기름짜는 곳으로서의 이름을 가진 겟세마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가운데서 쉼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깨어있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이 주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로서의 겟세마네의 증거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실제적 평안과 사실은 예수님안에 있으며'(마 11:28~30) 예수님의 증거로서 가르쳐주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 참 주의 말씀과 같이 '갈수록 사람들의 왕래가 빨라진다고 하신 것'(단 12:4)과 같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에 생존의 발을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식과 그 흐름으로써의 신경씀이라고 하는 것은 고도의 노력을 요구하는 가운데 피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오면 되지' 뭐 또 '성경공부를 하고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옳고 그르고 시비를 가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을 상대적으로 강요받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말못할 고민이 되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에서 현실의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사실화하고 기뻐하고 그것을 받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합당한 필요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뜻하심과 섭리를 따라 순종하기 위한 노력들의 기본으로서 성경공부가 필요한 것이며 그 자체가 그러한 삶 자체가 주님의 기도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과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자존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취하시기 때문에 그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안에서 내 실존의 정체성을 스스로 배워나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성도들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서의 삶의 기도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주일 내내 신경쓸일 많고 쉬지 못하고 예배드리고 출석하는 것까지 했는데 좀 쉬고 싶은데, 성경공부와 섬김이라는 것에 메인다는 것은 어쩜 '기름을 짜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송이꿀 같아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의 핑계치 못하는 복음의 사실을 마음에 둘 때에 그 위로의 말씀은 그 위로의 쉼으로서의 사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적 차이로 현상적 일률적 단정적인 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느낌의 판단과 달리 실제적으로 주어짐에 있어서는 동일한 은혜의 사실로 기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임의적 개연적 당위성만 갖추어서 사실시비를 가리는 고통의 밤에 답변할 것을 온유함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강조되어지는 증거들이 일시적인 각성제 역활을 해서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이 속쓰림으로 나타나 이제는 더 죽도 못먹는 단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각성제도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마음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비판의 목소리들 속쓰린 소리들을 내밷고 있는 것은 임의적 각성제만으로 부흥만을 말하려고 하는 모습에 식상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그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우리 성도의 존재적 정당함과 개연적 모습의 상대적 증거라도 주의 말씀의 재가에 따라 사실화시키고 증거하는 가운데 합당한 진리임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하여 증거하시는 가운데 이제 단단한 것도 먹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며 성장하며 진정으로 이 세상에 머물라고 하신 주의 말씀대로 허락하신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 있어, 사실을 분별하고 세상의 불가지론적 입장의 여지에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 온유함으로 내세의 소망을 증거해 그들을 주예수께서로, 옳은데로, 인도하시는 자들로서 하늘의 별과 같은 영광을 받으며 그 영광으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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