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0월 31, 2005

마음이 슬픈 여자라

2005년 10월 3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1:1-28
마음이 슬픈 여자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서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말하게 되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쁠때가 있고, 화가 날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고 즐김의 낙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인식적 삶의 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말한다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인식 중에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하여서 오히려 두렵게 여기고 상황적 어려움 때문에 의도적인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아이를 낳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사람의 기업으로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치의 상대성에서 그 불확실성에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자들과 아이를 낳고자 소망하는 것이 고통인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에, 가치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주의 말씀의 사실 규정에 따라 축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시 127:3)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 여인을 통하여 주의 계시의 말씀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데 주목하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었고 그는 두 아내 브닌나와 한나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제사장 엘리가 시무할 때에 성전에 올라가는데 엘가나가 브닌나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면서도 한나에게 갑절을 주는 그러한 분깃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하였던 것입니다. 열아들 부럽지 않은 남편이 있음을 호소하였으나 한나의 슬픈 마음은 이어졌던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 아기를 주시면 그를 평생에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고함의 서원함과 기도하는 한나가 기도함을 보는 엘리가 술취함으로 보는 오해가 있을 때에 한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함을 말하고 엘리의 축복으로 다시 그는 집으로 돌아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이어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께 경배하고 집에 돌아갔다가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사무엘을 낳았음을 기록하고 있고, 사무엘이란 이름한 아이를,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를 지나, 믿음으로 젖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가 서원을 이행하고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를 낳은 여인과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는 여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여인의 슬픔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주께서는 일반적인 상황의 전개를 취하시고 주장하셔서 계시적 뜻하심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먼저 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들으심이라고 함의 정당함을 찾아내는 자들로서의 모습으로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산지의 사람 엘가나의 가정에 한 일인데, 이것은 에브라임 즉 ‘열매가 풍부한’이라는 그 뜻함의 족속에서 그 열매의 재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을 위해 여호와께서 그의 아내 중 한나의 태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뜻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의 기본적인 것은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의 시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매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취할만한 당위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일상적인 개념에서는 그 때까지 되어오던 상식적 입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먹는 열매라고 하는 것이면 매일 먹어오는 것으로써 그것이 오히려 그렇게 행해왔다는 것의 당위성으로 별반 의심 없이 취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그 열매의 풍부함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써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태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중심을 알 수 있도록 고통도 허락하셨으니 그것은 브닌나라고 하는 같은 아내 된 자의 성태되어짐 즉 태의 기업으로써의 아들을 낳음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핍박을 받는 자리까지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나는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둘 수 없었다가 하나님의 뜻하심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그러한 아들의 출생을 주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믿을 수 있었던 것과 그것을 위해 주 하나님께 서원하게 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이를 낳겠다는 인간적인 신념의 도출로서 한나의 서원을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까지 부끄럽고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야 하는 당위성을 느껴야 하는 자리까지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그의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뜻하심의 증거적 실재를 주목할 수 있게 하심의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해를 입은 여인이 아이를 낳으려고 고통하는데 그곳에 사단으로 지칭될 수 있는 뱀이 기다리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날개를 허락해주셔서 광야로 가서 양육하게 되어지는 것에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요 12:1~6)

물론 이것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 되어지면서도 주의 몸 된 교회의 모습과 양육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의 동일선상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받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한 한나의 말을 읽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마 5:4, 1~12)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한나’라는 이름이 바로 ‘은혜’(grace)라는 듯입니다. 세상은 기뻐하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애통하는 자들의 모습이 그 은혜의 사실 속에서 주어지는 현상적 모습인 것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함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인 분복의 잘됨들을 말하는 것도 포함하면서 중요한 것은 그것에 비로소 판단 받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정당함을 따른 형통은 현실적인 고통과 슬픔이라고 하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자리에 나가게 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사무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얻게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들으심’, ‘그의 이름은 엘이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이 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써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절대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그러한 것으로써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아이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 사무엘을 한나가 하나님께 그의 생애를 드리는 서원을 이행하는 것은 복음으로 낳은 자들이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자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오늘날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그 말씀으로 양육되어진 종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자녀된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일반적으로 한나의 아이를 낳고자 하는 중심의 모습이 현실적인 욕망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나처럼 그러한 중심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따라하기 정도의 모습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지 않으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받들기 위한 뜻하심이 있다고 하면 그 믿음의 분량은 다르나 동일한 표현으로 아기를 위한 동일한 표현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의 그 슬픈 여자의 모습은 은혜를 받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정당함에서 형통의 사실을 믿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움을 받게 되어지는 은혜의 사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가운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애통하는 가운데서 마음이 슬픈 여자의 모습의 은혜의 여인 한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들으심의 축복받은 실제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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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2005년 10월 30일 소망교회 종교개혁주일낮예배
롬1:8-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전해진 신앙은 중요하게 받고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전통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 전통의 사실과 실제를 말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옳다는 것과 같은 것은 다 각기 다른 개념이면서도 같이 나타나는 현상적인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를 모두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이런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르면서도 옳게, 틀리면서도 옳게’, 또는 ‘다름을 인하여 거짓되게, 틀림을 인하여 거짓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로써 ‘다르면서 옳게, 틀리면서 옳게’라는 것은 하나의 통일성을 말할 수 있고 그러한 것은 믿음의 분량을 말할 수 있는 그야말로 통일성과 다양성이 조화되어진 교회의 모습으로 받을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다름을 인하여 거짓되게, 틀림을 인하여 거짓되게’ 나타남은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개혁의 사실을 말할 때에 분리적 입장의 사실을 취하여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31일에 루터의 면죄부 사건에 대한 토론을 위한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 ‘캐슬교회당’ 문에 붙임으로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그 종교개혁에 대한 분명하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증거로써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적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서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기본이 되어지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쉬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과 만나보기를 심히 원하였는데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견고케 하려 함과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는 길이 막혔지만 빚진 자로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심과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사도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로움이라고 함에 있어서 참된 종교개혁의 실재와 진정한 신앙의 모습의 자리에 나감에 대한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뵈뵈 집사를 통하여서 로마에 써보낸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서 정의하고 있고 그 가운데 첫 번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로마의 성도들의 신앙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감사하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과 그로 인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함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앞서, 먼저 복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롬 1:2)

이처럼 복음이라고 함이 그 아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서 어떤 중심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논쟁이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것입니다.

즉 믿음이라고 할 때에 그 믿음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신앙을 부끄러워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또한 참된 옳은 자리에 서지 못하는 거짓된 자리에 서는 모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할 때에 그 아들에 대한 바른 신앙과 그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가이사랴빌립보에서 고백한 그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

‘주님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며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모습과 현상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절대 정당한 자신의 거룩함으로 사람들이 살아 있는 형태로 사람들의 인식할 수 있는 형태의 모습과 인식적인 표현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써 오셨습니다.’ 라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은 육체로서 혈과 육이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것의 재가를 얻는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즉 그것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계신, 저를 자녀 삼으신, 구속의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식에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써 재가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상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유비적인 개념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표현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의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의 분별력이 없이 자신들의 상대적 입장을 상대적인 인식 가능성의 재가만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과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외에 전함에 따라 저주의 자리를 자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자존적으로 취하신 절대 정당함을 통하여 상대적으로도 하나님의 절대 의로우심을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내셨음에 대한 것을 사도 바울은 표현하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주 안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의 빚짐을 말하게 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사도로서의 마지막 전함의 대한 소명이 그의 빚짐의 먼저 증거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에 나타나는 그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에 있어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만으로 일관하거나 임의적인 내용으로 주님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옳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가 전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가 있던 그 신앙의 고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셔서 상대적인 모습으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써 우리 구주 예수님이심을 믿고 그의 의로우심과 의롭게 하심과 구원하심의 사실을 실제적으로 믿는 중심을 가지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개혁이라고 함을 사람들이 말하면서 어떤 분리 이탈만이 능사인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고 어떤 모자란 사람의 견해를 따라서 창조를 위해 기존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기존의 교회의 모습에 탈피를 말하는 새로움을 개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되고 악한 것입니다.

체제에 도전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개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다고 하여도 주께로부터 정당함을 찾는 중심이 있다고 하고 그리고 그것의 객관적인 것으로써 말할 수 있는 신실함이 나타난다고 하면 교회의 통일성의 한 개체적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의 신실성의 객관적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을 때에는 그러한 모습도 취할 수 있지만 그러한 형태만이 그리고 그러한 형태에서 비로소 개혁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참된 신앙의 자리에 서는 것인데 그것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로 인한 의로움의 실제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현실적인 실제에 나타나고 있음을 받으며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를 규정하고 받으며 누릴 수 있는 중심을 가질 때에 진정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이어가고 주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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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24, 2005

삼가해야할 바리새인의 교훈

2005년 10월 1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6:1-12
삼가해야할 바리새인의 교훈

어떤 일이나 임무를 행할 때에는 어떤 그 일이나 임무에 대한 것을 적극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기본적이고 또 주의 사항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주의하지 못하다가 실수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실수로 인해 지불해야할 책임이나 보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러한 작은 것이 큰 것을 주장하게 되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께서는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또한 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때에 떡 가져가기를 잊었음과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여 자신들이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시는 말씀과 함께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겨진 것이 얼마였는가를 상기하도록 말씀하시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떡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과 함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그제야 제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현실이 현실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관점에서 현실을 분별하여 받는가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현실의 가치의 중요함은 인식하면서도 그 중요함의 기원적인 잘못을 바르게 고침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만드신 것을 이끌어 그에게 주어 이름을 붙이도록 하셨는데(창 2:19) 그것은 그 이름을 부여하는 인식의 주권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식적 주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함과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사람들의 그러한 이름을 부여하는 주권행사라는 것과 그 앞서 그 인식이 주권의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행하는 그러한 악함이 있어서 자신이 행하지 않아야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자신들이 이름을 붙이고 주관하려고하는 그러한 잘못된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마태복음 16장은 마태복음 15장을 전제로 하는 내용을 이어서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과의 연속성에서 말씀하심이라는 것과 시간적으로도 제자들이 그 떡을 가져오지 않음에 대한 논의라는 그 배경에서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나타내심의 뜻하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책망하심과 고쳐주심이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하라는 말과 삼가라는 말씀이 동일한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프로스케테’,‘프로스케인’으로써 ‘프로세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의하다'는 말과 또 '배를 육지에 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떤 것에 단순하게 대다는 그러한 말까지 포함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의 가르침으로 그 목표되어질 수 있는 것에 접근해서 판단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할 때에 그들의 말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판단한다기 보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을 재고하고 판단하여 분별하고 주장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물론 배척이라고 함이 하나의 그러한 판단의 하나가 되어질 수 있지만 적극적인 측면에서 한 방법이고 일반적으로 그들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여 취사선택하는 주권적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곳 (누가복음 11:42)에서는 십일조를 행하는 여부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도 그들의 외식은 버리고 선히 합당하게 주께 드림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 그 한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러한 옥석을 가리는 주의라는 개념을 오늘 본문에서 시도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말과 주님의 답변하심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난데없는 그러한 질문은 아닌 것입니다. 즉 본문의 정황이라고 할 때에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과 관련되어진 것입니다. 즉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써 표현되어지는 그 기적은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질문하는,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인식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평범하게 나타나는 형태를 취함에 있어서 그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표적이 나타나든지 상식적인 이성이라고 하는 것의 이상하게 여길 그럴 형식의 기적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이 비로소 된다는 중심을 가지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예언과 분별이라고 하는 것도 하늘을 본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후에 대한 변화로 세속적인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으로 그들이 신앙적 분별이라고 하는 것이 천기를 분별한다는 그 표적을 분별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것과 관련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멍에씌우는 자로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것과 그들이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는 그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임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기적이라고 하는 것, 그 표적이라고 함을 인식함의 있어서 그것을 사실로써 규정함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개념에서의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도, 기적이라는 것을 그것에서 비로소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오해하며 또 조소하는 경우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져온 것을 일제히 풀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 어떻게 그렇게 일치되어지는 행동을 하였을까 그정도가 납득이 되어지지 않는 기적이라는 식의 인식을 하려는 경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서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사흘간 주님과 함께한 자들은 현상적인 개념에서는 그와 함께하였다는 의미로만 말할 수 있지만 주 예수께서 그의 구속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하는 자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 자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주의 성도들이 주의 제자들 사도들과 그들의 인정함을 받은 종들을 통해 주어지는 양식으로 그들의 존재적 건재함을 입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주시는 영생을 통해서 주의 구원하심에서 존재적 정당함을 입을 것을 말씀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 사실의 실제를 믿으며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친 바를 따라서 행하게 될 것을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적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주장하셔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초자연적이면서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식적 이변으로 생각하는 기적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알아볼 수 있는 인식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상식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측면만 생각할 때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소경된 자들과 같이 저주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사도들의 전한 바 다른 것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6-10)

이러한 것은 일관된 주의 중심을 사도들이 비로소 깨달았고 사도의 반열에 뒤에 들어선 바울도 분명히 알아서 말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일관되었다고 함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마 12:34)이라고 하심과 같이 책망을 하셨는데 이것은 기분적인 개념에서 주님의 실족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저주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 대한, 분명히 그들이 합당이 받아야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부분은 오늘 본문과 같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음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마 12:31~40 참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다스리도록 하시고 그 다스림의 기본적인 것으로 이름을 규정하도록 하셨는데 그러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었던 것으로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역시 뱀의 후손의 말을 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중심에서 현실을 규정하고 사실화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어 현실을 규정하며 다스리는 권세로서의 회복된 자의 권세를 행함은 바로 주의 말씀 즉 사도들의 전한 말씀 안에 한정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상대적인 그러한 한정적 편협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재가와 절대 보편성의 부여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시각을 가진 가운데서 현실을 규정하고 주장하며 판단하고 다스려나가는 것임을 믿을 수 있고 믿으며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인식의 주권적 행함으로 현실과 사실을 규정해야 했던 아담의 모습에서 이제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말미암는 사도들의 가르침의 따른 인식의 정당함을 의지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분별하고 주의하는 가운데서 삼가게 되어지는 참된 자리에 나가게 된다는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금기적 개념만으로 신앙을 말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분별하여 행한다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자의 증거로 믿음으로 재가 있는 스스로 행함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금기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믿음안에서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부터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현실규정과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현실은 현실이나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그러한 것을 비로소 의지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를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판단하며 사실화하려고 한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의지하는 자들로서 저주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말미암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의지하여서 참되게 신앙생활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합당한 주의 성도들의 길을 걸아가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힘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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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17, 2005

아멘 찬송

2005년 10월 1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12-24
아멘 찬송

하나님께서 가정을 돌아보도록 하시며 또 교회를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될 때에, 그 가정에 나타나는 자녀의 성장에서 주의 뜻하심이 얼마나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도 있음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아이가 막 태어나서 손이나 발에 ‘누구누구 아기’라는 이름을 달고 자기 이름을 가지고 누워서 칭얼거리는 가운데 몇 날을 잠 못 자게 하더니만 언젠가 밤과 낮을 가리고 뒤집기 한판.. 기어 다니고 일어서서 아빠에게 엄마에게 한 발짝씩 걸어 오가는 시도를 할 때에 얼마나 아름답고 예뻤었는지.. 그 때에 부모의 마음에서는 ‘아이고 내 새끼 다 컸네..’의 말이 울려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구만리 같은 인생여정이 길게 남아 있지만 아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에는 그러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마음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는 말로 고린도교회를 믿어주고 자랑하는 중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과 디모데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대하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증거하는 바라고 하면서 이것이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자랑이라고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강 사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을 아는 것과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자랑이 되고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자랑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이 그 확신을 가지고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이르려고 하였다가 일정을 바꾸어서 가지 않음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대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만 예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름 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함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고린도교회를 아끼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사도와 그 함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마음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고 함과 이는 고린도 교회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지 아니한 것에 대한 최종적인 이유로써 고린도교회가 믿음에 섰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를 위한 그러한 이유에 순종하게 되어진 것의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사도의 순종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후 1:20)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멘이라는 의미와 믿음에 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린도 전 후서에서 가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고려하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 사실인가라는 의문 속에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마치 하나의 기만적인 사실로써 세월속에 묻혀지는 것인 것과 같이 잘못 인식되고 있었고, 현실에서 비롯되는 실제적인 논리와 실증적 개념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에,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의 실재와 그 거룩성에, 그렇게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이 사람들의 역사적 상대적인 인식의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말하고 또한 부활하심에서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의 거룩함과 그 사실을 비로소 합당하게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안에서 그 증거되어지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의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절대의 진리로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상적인 상대적 형태의 주관적인 개념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부여됨에 따라 진정한 사실이 될 수 있기에 상대적인 정황적 형태의 판단과 정당함에서 비로소 비롯되는 여러 가지 정황적 좋은 것으로 아니요라는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진실로 아멘 즉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순종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과 형태로 기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그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의 부여와 재가로 아주 보편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게 되어지는 설교 말씀도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것임을 분별하여 받을 수 있을 때에 아멘이라고 주 앞에서 고백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에 섰다고 함을 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정을 바꾸게 되어진 가운데서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를 비방하는 아직 실제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의 임의적 인식에서는 사도 바울을 비난하며 그의 행함에 따른 신실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그리고 그의 가르침까지도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같이 이해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의식하면서 오늘 본문을 사도 바울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일정을 바꾸어 고린도교회에 오지 않음에 대한 의미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사도 방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실제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인도하심을 사실로 받아 일정을 주신 믿음에 따라 바꾸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적 직접적인 그 이유라는 것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고 또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섰다고 하는 것을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가 완벽한 성장을 했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부활의 사실을 상대적으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세월속에서 비로소 판단받는 것과 같이 바르게 생각하고 있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주의 부활의 사실은 역사적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주의 부활하심에서 그기준에서 진정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믿음에 기본이 되어진 점을 사도 바울이 마음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직접 사도를 대면해보기 원했고 그러한 가운데 그가 가르친 주의 말씀이라는 것보다도 사도 자신이 말한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사도 바울이 인식한 것으로 주목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다도 사도 바울으 더 연모하고 따르는 즉 바울파의 행동과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예루살렘의 교회에 연보하는 문제도 있는데 사도 바울을 보아서 억지 연보를 할 수 있는 여지도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두번째 고린도교회에 가는 것은 믿음으로 주 앞에서 정당함을 따라 사실로 받기를 원하는 그 믿음의 기본을 망칠 수도 있는 정황적 모습을 사도 바울은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한걸음씩 막 걸음마를 내딛는 성숙함을 위해 잘 걷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걷는 아이의 손을 잡아준다는 것은 오히려 방해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은 그 신앙의 기본이 되어진 것이 성숙함에 나갈 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의 인식이 이 마지막 말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아멘'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또 일부에서는 그러한 것을 훈련차원에서 권하는 모습을 보는데, 다소 지나친 모습을 취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습관을 따라서 나타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고백과 그 중심의 표현으로써 나타나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면서도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진실'로 '진리'로 주님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적 뜻함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과 형태로 기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그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의 부여와 재가로 아주 보편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멘이라는 뜻을 잘 분별하고 바르게 사용하며 나타내시는 가운데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주 앞에 드리는 향기로운 찬송이 되어지는 그러한 영광중에 주 앞에 드린바가 되어지는 믿음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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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0월 13, 2005

일곱 광주리의 떡과 물고기

2005년 10월 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5:29-39
일곱 광주리의 떡과 물고기

신앙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거나 또는 신앙생활에 대하여서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서 부정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나?’라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가장 기초적인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는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을 해결해주지도 못한다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현실적인 정당함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그러한 현실적 당위성을 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질문에 즉 '그들의 질문에 온유함으로 답변을 준비하라고 하심'(벧전 3:15; 골 4:6)에 따라서 그 말씀하심을 찾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2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곳 즉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바리와 불구자와 벙어리 소경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두매 고쳐주시매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함께한 무리들이 사흘이나 되었으매 굶겨 돌려보내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는 말씀하심에 제자들이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축사하시고 떼어주심에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어 배불리 먹게 하고 그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으니 먹은 자가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심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모으신 것이 일곱 광주리가 되었음에 대한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 신앙에 대하여서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현실성이 없다는 개념으로 그 당위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이 ‘신앙생활하면 그것이 밥 먹여주나’, ‘교회 나간다고 옷이 나와 밥이 나와’ 등등의 신앙에 대한 현실성이 없음에 대한 임의적 판단으로 그것을 반론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러한 기준에서 현실을 말하며 그것을 기준으로 당위성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지혜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떡을 가지고 사흘 동안 함께한 자들 그 큰 무리들에게 떡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심은 아주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현실적인 실제적인 것으로써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구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에서. 현실적이라면, 그럼 지금이라는 현실에서도 그러한 기적을 나타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하여서는 계시의 반복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당위성을 얻는다는 것에서 비로소 그 정당함을 얻는다면 가능한 것이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적의 반복의 여지를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의 부당함도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럼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동일한 형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그러한 반복이라고 함이 지금의 자신들의 반복의 요구를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배고픔이라고 하는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계시적 반복이 요구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반복이라고 하는 것이 여럿의 가능성을 위한 것으로 열려진 것이 아니라, 주의 증거로서 그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은 증인으로 세울 때에는 둘 이상 세우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반복적 의미는 바로 증거로서의 객관성을 가진 또한 율법의 가르침에 따른 둘 이상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인식하는 증인으로서의 모습으로써 모습들로서 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며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증거의 내용으로써 나타내시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구체적으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역사성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 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시는 것으로 도의적인 차원의 어떤 기적적 의미로서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당시 현실적인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즉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심을 나타내시는 삶의 연속성에서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을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사건으로써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증거와 사실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먼저 사흘동안 주님을 따라 다른 자들을 굶겨 보내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신 것은 주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현실적인 증거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지적 개념과 상관이 있음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동안 무덤에 머무실 때에 그와 함께한 자들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 안에서 부활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예표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증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굶겨보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생명의 떡이 되어주신다는 것으로써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해 진정한 영생이라고 함의 생명을 나타내시겠다는 자기 계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에서는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생명의 떡, 영원의 생명을 위한 떡으로써, 영생을 얻을 주의 말씀으로 존재의 생명의 정당함과 그 존재를 지탱하게 하는 말씀을 예표하는 그 현실적인 것으로써의 떡과 물고기는 '제자들'을 통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상식선에서도 주님의 일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당연한 자연스런 모습이지만 우리가 이미 합당하게 기억하고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사역 가운데서의 그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뜻하심의 실제를 현실적인 실제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이후에 아주 잘 표현하고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6~9)

즉 주님과 함께한 사도들과 그들의 신임을 입을 수 있는 자들이 그 사역을 돕고 그들을 통하여서 생명의 떡으로써 물고기와 떡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사도들의 전한 바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실재와 실제라는 생명 자체와 그 사실을 받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천명을 먹이신 사역과 아주 좋은 비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도들의 손에 의해 주님께 드려졌다는 것과 사도들과 그의 신임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서 그 영생의 말씀이 그 영생과 함께 그 사실의 누림의 축복이 아주 평범하게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말씀을 통하여서 주께서 받으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지며 주님을 믿어 주님과 법적으로 죽었으며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믿으며 찾는 자들이 주의 성도들이며 주의 먹여주시는 종들이심을 말씀하시길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오병이어를 통한 기적이나 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아주 현실적이라고 함을 말씀드렸던 것을 좀더 분명히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실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말하여 변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실재가 역사성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고 할 때에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방향이라고 함을 분명히 해야하며 역방향의 인식은 정당함을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위한 신앙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으로 현실의 실재를 주관하시고 나타내신다는 것과 그것에서 현실의 사실성을 말함이 형태적으로는 편협함을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에 있어서는 진정한 보편적 생각과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당위성에서 본다면 편협한 사고인 것으로 판단이 가능하지만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과 보편성이 재가되어지는 성경의 안목과 그 사실의 판단은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사실들이 재가를 받아 현실이 진정한 사실로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위해 신앙을 조작하거나 필요성에 따라 해석함은 그 정당함이 결여된 것으로 상식적으로도 하나님 앞에서도 편협한 사고와 비판되어질 수 있는 사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위해 하나님이 떡을 오늘날도 주지 않는다는 정황에서는 하나님의 자기의 기뻐하심이 판단받을 수 있다고 하는 '신앙이 밥먹여주나'는 말의 속에 담긴 당위성은 부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눅 22:35)

말씀을 맺습니다.

현실적인 실제에 대하여서 이해.. 본문 16절에서 오해의 소지를 지적 5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란 말씀을 기억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가운데서 그들이 필요한 현실적인 것도 챙겨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제자들이 떡 가져오지 못함을 놓고 아쉬워하고 고민하게 되는 가운데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실적인 실증적으로 나타나야 되며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요 진정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이 평생 먹을 것을 다 짊어지고 다니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주께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지냈던 것과 사르밧 여인의 한줌의 가루로 섬김을 받게 하셨던 것과 같이 초라하지만 그들은 다함이 없는 가운데 기근의 때를 면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과 같이 그 베풀어주시는 상을 기뻐하며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기신 일곱광주리의 고기와 떡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항상 예비해주시는 것이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실재적으로 실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진정으로 사실로써 고백하며 또한 사도들의 고백과 같이 동일한 고백속에 주님께 대답하며 우리의 치열한 삶 속에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고 마심으로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감당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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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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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10, 2005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2005년 10월 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1-11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사람들의 인식에 있어서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베풀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어떤 힘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베풀 힘이 없는데 무슨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힘을 기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생각해보겠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 가졌다고 하는 그 힘이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 있어야 남에게 베품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점에서는 분명히 말할 수 없고 또 다만 정도면에서 베풂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베풀기 인색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변명이 가능하고 또 베푼다는 것의 행위가 있어도 그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으로 그냥 식상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위로를 서로 베풂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식상해짐의 강요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안부 인사로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며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능히 환란 중에 있는 자를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심을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사도바울과 함께한 디모데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위로 하고 위로 받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구원과 그들 자신의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린도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음과 이는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었음을 알게 하셨다고 함을 증거하고 있고 또한 그와 같은 지금과 이후에도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줌으로 도울 것과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도 주께 감사할 수 있도록 사역을 위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전 1:4) 이 말씀의 실제적 의미라고 함의 증거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코가 석자나 빠진 주제..', '자기 발등에 불떨어진 줄도 모르고..'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삶의 완전하지 못해보이는 가운데서 남을 돕는다는 개념은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며 조소의 모습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 처지를 감안하지 않고 무분별한 도움이라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서 맹목적인 옹호를 말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당연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분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상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상대적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과 현실적인 당위성을 얻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번째 서신을 전제로 한 인식을 가진 교인들의 소식과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서 전에 보낸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서신을 전제로 한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옳은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가장 중심이 되어지는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에 관한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을 말하심의 정당함을 부여하는 기름부으심을 받은 주님의 부활에서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만물이 새롭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것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개연적으로 생각하고 개인적인 임의적 생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즉 성찬에 드려지는 포도주와 빵을 임의적으로 먹고 마시고 추태를 부린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부활의 실재와 실제의 합당함을 제대로 알지 못한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사실성이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하심 안에서 시간의 범위에서 비로소 판단 받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간 세월의 흐름 속에 판단되어지는 지워지는 상대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부활사실에서 읽게 되어지는 구속하심의 은혜의 풍부함과 그 사실은 우리의 현실의 크고 작음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 1:2)

사람들은 이러한 말이 아무 실재와 사실을 말하는 실제의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가공적 또는 형식적인 이야기로 인사하기 위한 합목적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냥 지나가고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고전 15장의 내용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 실제적인 증거와 위로와 인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고전 15장에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시비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명쾌히 답변하였는데 그러한 것 즉 그러한 질문과 회의가 일어나게 된 것은 상황적 정황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그 당시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볼 때에 그리고 고전 16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지역교회에 연보를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속된 표현으로 '고만 고만'한 자들 그렇게 유력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는 자들 연보하는 모습도 참 기만을 위한 것으로 읽혀질 수 있었던 정황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또 그 부활을 본 자들도 다 죽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렇게 성장한 지역교회의 모습도 아닌 교회들이 작은 가난한 교회에 연보한다고 하는 모습들은 그 부활이라고 하는 것에 기만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가능하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부활의 논의를 정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사람들의 말이 득세할 수 있는 정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세월속에 묻혀버릴 부활의 사실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으로 시간의 판단을 받지 않는 사실로써 세월속에 그 뜻하신 바를 나타내셨다는 것과 그것을 인하여서 그 말씀하심 안에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얻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고린도 후서 1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냥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진정한 사실을 의지하게 되는 은혜가 있으라는 축복의 실제적인 사실을 증거하며 동시에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실재와 실제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그의 사역속에 어떻게 나타난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의 실제라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사도 바울은 그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를 위로하시고 또한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비록 '제 코가 석자나 빠졌다..', '자기 발에 불이 떨어진줄도 모르고..'라는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인 판단과 그러한 인식의 강요를 받게 된다고 하여도 하나님 안에서 분별할 때에 그 섬김으로써 도움이 합당하다는 판단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식상할 수 있는 현실에서의 능히 남을 도울 수 있고 능히 위로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의 연합과 교제를 믿음으로 행할 수 있고(시 133:1)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받들 수 있는 것입니다.(사 40:1, 사 49:3)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하심으 받들 때에 그 사랑의 위로를 나타내며 교제를 행할 때에 어떤 무분별한 그러한 행함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별을 함에 있어서 상황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에서 비로소 그 판단의 사실을 말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의 뜻하심 안에서 행함에 당위성을 살피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의 작은 도움의 손길도 내밀어서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지는 종들의 증거와 위로로 협력하여 주의 뜻하심을 이루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의 작은 삶들.. 넉넉함과 빈곤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들이라고 할 때에, 비교판단하여서 할 수 있음의 여부를 비로소 판단하는 것에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믿음으로 잘 분별하여서 사르밧 여인의 한줌의 가루같은 것으로도, 벳세다 들녁의 사도를 통한 어린아이의 오병이어의 모습으로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참으로 능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귀한 주의 종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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