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3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1:1-28
마음이 슬픈 여자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서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말하게 되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쁠때가 있고, 화가 날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고 즐김의 낙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인식적 삶의 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말한다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인식 중에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하여서 오히려 두렵게 여기고 상황적 어려움 때문에 의도적인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아이를 낳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사람의 기업으로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치의 상대성에서 그 불확실성에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자들과 아이를 낳고자 소망하는 것이 고통인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에, 가치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주의 말씀의 사실 규정에 따라 축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시 127:3)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 여인을 통하여 주의 계시의 말씀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데 주목하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었고 그는 두 아내 브닌나와 한나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제사장 엘리가 시무할 때에 성전에 올라가는데 엘가나가 브닌나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면서도 한나에게 갑절을 주는 그러한 분깃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하였던 것입니다. 열아들 부럽지 않은 남편이 있음을 호소하였으나 한나의 슬픈 마음은 이어졌던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 아기를 주시면 그를 평생에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고함의 서원함과 기도하는 한나가 기도함을 보는 엘리가 술취함으로 보는 오해가 있을 때에 한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함을 말하고 엘리의 축복으로 다시 그는 집으로 돌아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이어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께 경배하고 집에 돌아갔다가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사무엘을 낳았음을 기록하고 있고, 사무엘이란 이름한 아이를,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를 지나, 믿음으로 젖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가 서원을 이행하고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를 낳은 여인과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는 여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여인의 슬픔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주께서는 일반적인 상황의 전개를 취하시고 주장하셔서 계시적 뜻하심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먼저 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들으심이라고 함의 정당함을 찾아내는 자들로서의 모습으로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산지의 사람 엘가나의 가정에 한 일인데, 이것은 에브라임 즉 ‘열매가 풍부한’이라는 그 뜻함의 족속에서 그 열매의 재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을 위해 여호와께서 그의 아내 중 한나의 태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뜻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의 기본적인 것은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의 시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매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취할만한 당위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일상적인 개념에서는 그 때까지 되어오던 상식적 입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먹는 열매라고 하는 것이면 매일 먹어오는 것으로써 그것이 오히려 그렇게 행해왔다는 것의 당위성으로 별반 의심 없이 취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그 열매의 풍부함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써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태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중심을 알 수 있도록 고통도 허락하셨으니 그것은 브닌나라고 하는 같은 아내 된 자의 성태되어짐 즉 태의 기업으로써의 아들을 낳음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핍박을 받는 자리까지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나는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둘 수 없었다가 하나님의 뜻하심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그러한 아들의 출생을 주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믿을 수 있었던 것과 그것을 위해 주 하나님께 서원하게 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이를 낳겠다는 인간적인 신념의 도출로서 한나의 서원을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까지 부끄럽고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야 하는 당위성을 느껴야 하는 자리까지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그의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뜻하심의 증거적 실재를 주목할 수 있게 하심의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해를 입은 여인이 아이를 낳으려고 고통하는데 그곳에 사단으로 지칭될 수 있는 뱀이 기다리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날개를 허락해주셔서 광야로 가서 양육하게 되어지는 것에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요 12:1~6)
물론 이것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 되어지면서도 주의 몸 된 교회의 모습과 양육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의 동일선상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받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한 한나의 말을 읽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마 5:4, 1~12)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한나’라는 이름이 바로 ‘은혜’(grace)라는 듯입니다. 세상은 기뻐하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애통하는 자들의 모습이 그 은혜의 사실 속에서 주어지는 현상적 모습인 것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함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인 분복의 잘됨들을 말하는 것도 포함하면서 중요한 것은 그것에 비로소 판단 받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정당함을 따른 형통은 현실적인 고통과 슬픔이라고 하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자리에 나가게 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사무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얻게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들으심’, ‘그의 이름은 엘이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이 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써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절대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그러한 것으로써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아이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 사무엘을 한나가 하나님께 그의 생애를 드리는 서원을 이행하는 것은 복음으로 낳은 자들이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자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오늘날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그 말씀으로 양육되어진 종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자녀된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일반적으로 한나의 아이를 낳고자 하는 중심의 모습이 현실적인 욕망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나처럼 그러한 중심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따라하기 정도의 모습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지 않으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받들기 위한 뜻하심이 있다고 하면 그 믿음의 분량은 다르나 동일한 표현으로 아기를 위한 동일한 표현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의 그 슬픈 여자의 모습은 은혜를 받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정당함에서 형통의 사실을 믿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움을 받게 되어지는 은혜의 사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가운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애통하는 가운데서 마음이 슬픈 여자의 모습의 은혜의 여인 한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들으심의 축복받은 실제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삼상1:1-28
마음이 슬픈 여자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서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말하게 되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쁠때가 있고, 화가 날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고 즐김의 낙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인식적 삶의 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말한다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인식 중에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하여서 오히려 두렵게 여기고 상황적 어려움 때문에 의도적인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아이를 낳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사람의 기업으로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치의 상대성에서 그 불확실성에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자들과 아이를 낳고자 소망하는 것이 고통인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에, 가치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주의 말씀의 사실 규정에 따라 축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시 127:3)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 여인을 통하여 주의 계시의 말씀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데 주목하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었고 그는 두 아내 브닌나와 한나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제사장 엘리가 시무할 때에 성전에 올라가는데 엘가나가 브닌나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면서도 한나에게 갑절을 주는 그러한 분깃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하였던 것입니다. 열아들 부럽지 않은 남편이 있음을 호소하였으나 한나의 슬픈 마음은 이어졌던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 아기를 주시면 그를 평생에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고함의 서원함과 기도하는 한나가 기도함을 보는 엘리가 술취함으로 보는 오해가 있을 때에 한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함을 말하고 엘리의 축복으로 다시 그는 집으로 돌아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이어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께 경배하고 집에 돌아갔다가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사무엘을 낳았음을 기록하고 있고, 사무엘이란 이름한 아이를,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를 지나, 믿음으로 젖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가 서원을 이행하고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를 낳은 여인과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는 여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여인의 슬픔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주께서는 일반적인 상황의 전개를 취하시고 주장하셔서 계시적 뜻하심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먼저 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들으심이라고 함의 정당함을 찾아내는 자들로서의 모습으로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산지의 사람 엘가나의 가정에 한 일인데, 이것은 에브라임 즉 ‘열매가 풍부한’이라는 그 뜻함의 족속에서 그 열매의 재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을 위해 여호와께서 그의 아내 중 한나의 태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뜻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의 기본적인 것은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의 시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매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취할만한 당위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일상적인 개념에서는 그 때까지 되어오던 상식적 입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먹는 열매라고 하는 것이면 매일 먹어오는 것으로써 그것이 오히려 그렇게 행해왔다는 것의 당위성으로 별반 의심 없이 취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그 열매의 풍부함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써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태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중심을 알 수 있도록 고통도 허락하셨으니 그것은 브닌나라고 하는 같은 아내 된 자의 성태되어짐 즉 태의 기업으로써의 아들을 낳음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핍박을 받는 자리까지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나는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둘 수 없었다가 하나님의 뜻하심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그러한 아들의 출생을 주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믿을 수 있었던 것과 그것을 위해 주 하나님께 서원하게 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이를 낳겠다는 인간적인 신념의 도출로서 한나의 서원을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까지 부끄럽고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야 하는 당위성을 느껴야 하는 자리까지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그의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뜻하심의 증거적 실재를 주목할 수 있게 하심의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해를 입은 여인이 아이를 낳으려고 고통하는데 그곳에 사단으로 지칭될 수 있는 뱀이 기다리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날개를 허락해주셔서 광야로 가서 양육하게 되어지는 것에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요 12:1~6)
물론 이것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 되어지면서도 주의 몸 된 교회의 모습과 양육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의 동일선상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받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한 한나의 말을 읽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마 5:4, 1~12)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한나’라는 이름이 바로 ‘은혜’(grace)라는 듯입니다. 세상은 기뻐하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애통하는 자들의 모습이 그 은혜의 사실 속에서 주어지는 현상적 모습인 것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함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인 분복의 잘됨들을 말하는 것도 포함하면서 중요한 것은 그것에 비로소 판단 받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정당함을 따른 형통은 현실적인 고통과 슬픔이라고 하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자리에 나가게 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사무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얻게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들으심’, ‘그의 이름은 엘이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이 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써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절대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그러한 것으로써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아이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 사무엘을 한나가 하나님께 그의 생애를 드리는 서원을 이행하는 것은 복음으로 낳은 자들이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자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오늘날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그 말씀으로 양육되어진 종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자녀된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일반적으로 한나의 아이를 낳고자 하는 중심의 모습이 현실적인 욕망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나처럼 그러한 중심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따라하기 정도의 모습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지 않으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받들기 위한 뜻하심이 있다고 하면 그 믿음의 분량은 다르나 동일한 표현으로 아기를 위한 동일한 표현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의 그 슬픈 여자의 모습은 은혜를 받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정당함에서 형통의 사실을 믿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움을 받게 되어지는 은혜의 사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가운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애통하는 가운데서 마음이 슬픈 여자의 모습의 은혜의 여인 한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들으심의 축복받은 실제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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