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1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6:1-12
삼가해야할 바리새인의 교훈
어떤 일이나 임무를 행할 때에는 어떤 그 일이나 임무에 대한 것을 적극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기본적이고 또 주의 사항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주의하지 못하다가 실수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실수로 인해 지불해야할 책임이나 보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러한 작은 것이 큰 것을 주장하게 되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께서는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또한 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때에 떡 가져가기를 잊었음과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여 자신들이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시는 말씀과 함께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겨진 것이 얼마였는가를 상기하도록 말씀하시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떡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과 함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그제야 제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현실이 현실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관점에서 현실을 분별하여 받는가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현실의 가치의 중요함은 인식하면서도 그 중요함의 기원적인 잘못을 바르게 고침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만드신 것을 이끌어 그에게 주어 이름을 붙이도록 하셨는데(창 2:19) 그것은 그 이름을 부여하는 인식의 주권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식적 주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함과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사람들의 그러한 이름을 부여하는 주권행사라는 것과 그 앞서 그 인식이 주권의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행하는 그러한 악함이 있어서 자신이 행하지 않아야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자신들이 이름을 붙이고 주관하려고하는 그러한 잘못된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마태복음 16장은 마태복음 15장을 전제로 하는 내용을 이어서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과의 연속성에서 말씀하심이라는 것과 시간적으로도 제자들이 그 떡을 가져오지 않음에 대한 논의라는 그 배경에서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나타내심의 뜻하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책망하심과 고쳐주심이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하라는 말과 삼가라는 말씀이 동일한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프로스케테’,‘프로스케인’으로써 ‘프로세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의하다'는 말과 또 '배를 육지에 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떤 것에 단순하게 대다는 그러한 말까지 포함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의 가르침으로 그 목표되어질 수 있는 것에 접근해서 판단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할 때에 그들의 말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판단한다기 보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을 재고하고 판단하여 분별하고 주장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물론 배척이라고 함이 하나의 그러한 판단의 하나가 되어질 수 있지만 적극적인 측면에서 한 방법이고 일반적으로 그들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여 취사선택하는 주권적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곳 (누가복음 11:42)에서는 십일조를 행하는 여부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도 그들의 외식은 버리고 선히 합당하게 주께 드림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 그 한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러한 옥석을 가리는 주의라는 개념을 오늘 본문에서 시도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말과 주님의 답변하심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난데없는 그러한 질문은 아닌 것입니다. 즉 본문의 정황이라고 할 때에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과 관련되어진 것입니다. 즉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써 표현되어지는 그 기적은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질문하는,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인식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평범하게 나타나는 형태를 취함에 있어서 그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표적이 나타나든지 상식적인 이성이라고 하는 것의 이상하게 여길 그럴 형식의 기적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이 비로소 된다는 중심을 가지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예언과 분별이라고 하는 것도 하늘을 본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후에 대한 변화로 세속적인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으로 그들이 신앙적 분별이라고 하는 것이 천기를 분별한다는 그 표적을 분별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것과 관련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멍에씌우는 자로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것과 그들이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는 그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임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기적이라고 하는 것, 그 표적이라고 함을 인식함의 있어서 그것을 사실로써 규정함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개념에서의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도, 기적이라는 것을 그것에서 비로소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오해하며 또 조소하는 경우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져온 것을 일제히 풀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 어떻게 그렇게 일치되어지는 행동을 하였을까 그정도가 납득이 되어지지 않는 기적이라는 식의 인식을 하려는 경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서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사흘간 주님과 함께한 자들은 현상적인 개념에서는 그와 함께하였다는 의미로만 말할 수 있지만 주 예수께서 그의 구속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하는 자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 자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주의 성도들이 주의 제자들 사도들과 그들의 인정함을 받은 종들을 통해 주어지는 양식으로 그들의 존재적 건재함을 입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주시는 영생을 통해서 주의 구원하심에서 존재적 정당함을 입을 것을 말씀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 사실의 실제를 믿으며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친 바를 따라서 행하게 될 것을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적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주장하셔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초자연적이면서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식적 이변으로 생각하는 기적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알아볼 수 있는 인식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상식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측면만 생각할 때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소경된 자들과 같이 저주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사도들의 전한 바 다른 것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6-10)
이러한 것은 일관된 주의 중심을 사도들이 비로소 깨달았고 사도의 반열에 뒤에 들어선 바울도 분명히 알아서 말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일관되었다고 함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마 12:34)이라고 하심과 같이 책망을 하셨는데 이것은 기분적인 개념에서 주님의 실족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저주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 대한, 분명히 그들이 합당이 받아야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부분은 오늘 본문과 같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음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마 12:31~40 참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다스리도록 하시고 그 다스림의 기본적인 것으로 이름을 규정하도록 하셨는데 그러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었던 것으로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역시 뱀의 후손의 말을 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중심에서 현실을 규정하고 사실화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어 현실을 규정하며 다스리는 권세로서의 회복된 자의 권세를 행함은 바로 주의 말씀 즉 사도들의 전한 말씀 안에 한정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상대적인 그러한 한정적 편협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재가와 절대 보편성의 부여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시각을 가진 가운데서 현실을 규정하고 주장하며 판단하고 다스려나가는 것임을 믿을 수 있고 믿으며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인식의 주권적 행함으로 현실과 사실을 규정해야 했던 아담의 모습에서 이제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말미암는 사도들의 가르침의 따른 인식의 정당함을 의지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분별하고 주의하는 가운데서 삼가게 되어지는 참된 자리에 나가게 된다는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금기적 개념만으로 신앙을 말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분별하여 행한다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자의 증거로 믿음으로 재가 있는 스스로 행함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금기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믿음안에서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부터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현실규정과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현실은 현실이나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그러한 것을 비로소 의지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를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판단하며 사실화하려고 한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의지하는 자들로서 저주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말미암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의지하여서 참되게 신앙생활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합당한 주의 성도들의 길을 걸아가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힘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마16:1-12
삼가해야할 바리새인의 교훈
어떤 일이나 임무를 행할 때에는 어떤 그 일이나 임무에 대한 것을 적극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기본적이고 또 주의 사항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주의하지 못하다가 실수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실수로 인해 지불해야할 책임이나 보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러한 작은 것이 큰 것을 주장하게 되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께서는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또한 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때에 떡 가져가기를 잊었음과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여 자신들이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시는 말씀과 함께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겨진 것이 얼마였는가를 상기하도록 말씀하시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떡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과 함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그제야 제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현실이 현실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관점에서 현실을 분별하여 받는가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현실의 가치의 중요함은 인식하면서도 그 중요함의 기원적인 잘못을 바르게 고침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만드신 것을 이끌어 그에게 주어 이름을 붙이도록 하셨는데(창 2:19) 그것은 그 이름을 부여하는 인식의 주권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식적 주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함과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사람들의 그러한 이름을 부여하는 주권행사라는 것과 그 앞서 그 인식이 주권의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행하는 그러한 악함이 있어서 자신이 행하지 않아야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자신들이 이름을 붙이고 주관하려고하는 그러한 잘못된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마태복음 16장은 마태복음 15장을 전제로 하는 내용을 이어서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과의 연속성에서 말씀하심이라는 것과 시간적으로도 제자들이 그 떡을 가져오지 않음에 대한 논의라는 그 배경에서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나타내심의 뜻하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책망하심과 고쳐주심이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하라는 말과 삼가라는 말씀이 동일한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프로스케테’,‘프로스케인’으로써 ‘프로세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의하다'는 말과 또 '배를 육지에 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떤 것에 단순하게 대다는 그러한 말까지 포함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의 가르침으로 그 목표되어질 수 있는 것에 접근해서 판단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할 때에 그들의 말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판단한다기 보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을 재고하고 판단하여 분별하고 주장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물론 배척이라고 함이 하나의 그러한 판단의 하나가 되어질 수 있지만 적극적인 측면에서 한 방법이고 일반적으로 그들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여 취사선택하는 주권적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곳 (누가복음 11:42)에서는 십일조를 행하는 여부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도 그들의 외식은 버리고 선히 합당하게 주께 드림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 그 한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러한 옥석을 가리는 주의라는 개념을 오늘 본문에서 시도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말과 주님의 답변하심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난데없는 그러한 질문은 아닌 것입니다. 즉 본문의 정황이라고 할 때에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과 관련되어진 것입니다. 즉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써 표현되어지는 그 기적은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질문하는,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인식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평범하게 나타나는 형태를 취함에 있어서 그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표적이 나타나든지 상식적인 이성이라고 하는 것의 이상하게 여길 그럴 형식의 기적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이 비로소 된다는 중심을 가지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예언과 분별이라고 하는 것도 하늘을 본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후에 대한 변화로 세속적인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으로 그들이 신앙적 분별이라고 하는 것이 천기를 분별한다는 그 표적을 분별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것과 관련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멍에씌우는 자로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것과 그들이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는 그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임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기적이라고 하는 것, 그 표적이라고 함을 인식함의 있어서 그것을 사실로써 규정함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개념에서의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도, 기적이라는 것을 그것에서 비로소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오해하며 또 조소하는 경우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져온 것을 일제히 풀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 어떻게 그렇게 일치되어지는 행동을 하였을까 그정도가 납득이 되어지지 않는 기적이라는 식의 인식을 하려는 경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서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사흘간 주님과 함께한 자들은 현상적인 개념에서는 그와 함께하였다는 의미로만 말할 수 있지만 주 예수께서 그의 구속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하는 자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 자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주의 성도들이 주의 제자들 사도들과 그들의 인정함을 받은 종들을 통해 주어지는 양식으로 그들의 존재적 건재함을 입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주시는 영생을 통해서 주의 구원하심에서 존재적 정당함을 입을 것을 말씀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 사실의 실제를 믿으며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친 바를 따라서 행하게 될 것을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적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주장하셔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초자연적이면서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식적 이변으로 생각하는 기적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알아볼 수 있는 인식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상식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측면만 생각할 때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소경된 자들과 같이 저주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사도들의 전한 바 다른 것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6-10)
이러한 것은 일관된 주의 중심을 사도들이 비로소 깨달았고 사도의 반열에 뒤에 들어선 바울도 분명히 알아서 말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일관되었다고 함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마 12:34)이라고 하심과 같이 책망을 하셨는데 이것은 기분적인 개념에서 주님의 실족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저주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 대한, 분명히 그들이 합당이 받아야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부분은 오늘 본문과 같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음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마 12:31~40 참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다스리도록 하시고 그 다스림의 기본적인 것으로 이름을 규정하도록 하셨는데 그러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었던 것으로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역시 뱀의 후손의 말을 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중심에서 현실을 규정하고 사실화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어 현실을 규정하며 다스리는 권세로서의 회복된 자의 권세를 행함은 바로 주의 말씀 즉 사도들의 전한 말씀 안에 한정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상대적인 그러한 한정적 편협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재가와 절대 보편성의 부여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시각을 가진 가운데서 현실을 규정하고 주장하며 판단하고 다스려나가는 것임을 믿을 수 있고 믿으며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인식의 주권적 행함으로 현실과 사실을 규정해야 했던 아담의 모습에서 이제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말미암는 사도들의 가르침의 따른 인식의 정당함을 의지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분별하고 주의하는 가운데서 삼가게 되어지는 참된 자리에 나가게 된다는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금기적 개념만으로 신앙을 말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분별하여 행한다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자의 증거로 믿음으로 재가 있는 스스로 행함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금기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믿음안에서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부터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현실규정과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현실은 현실이나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그러한 것을 비로소 의지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를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판단하며 사실화하려고 한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의지하는 자들로서 저주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말미암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의지하여서 참되게 신앙생활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합당한 주의 성도들의 길을 걸아가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힘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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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