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30일 소망교회 종교개혁주일낮예배
롬1:8-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전해진 신앙은 중요하게 받고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전통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 전통의 사실과 실제를 말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옳다는 것과 같은 것은 다 각기 다른 개념이면서도 같이 나타나는 현상적인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를 모두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이런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르면서도 옳게, 틀리면서도 옳게’, 또는 ‘다름을 인하여 거짓되게, 틀림을 인하여 거짓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로써 ‘다르면서 옳게, 틀리면서 옳게’라는 것은 하나의 통일성을 말할 수 있고 그러한 것은 믿음의 분량을 말할 수 있는 그야말로 통일성과 다양성이 조화되어진 교회의 모습으로 받을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다름을 인하여 거짓되게, 틀림을 인하여 거짓되게’ 나타남은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개혁의 사실을 말할 때에 분리적 입장의 사실을 취하여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31일에 루터의 면죄부 사건에 대한 토론을 위한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 ‘캐슬교회당’ 문에 붙임으로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그 종교개혁에 대한 분명하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증거로써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적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서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기본이 되어지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쉬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과 만나보기를 심히 원하였는데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견고케 하려 함과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는 길이 막혔지만 빚진 자로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심과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사도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로움이라고 함에 있어서 참된 종교개혁의 실재와 진정한 신앙의 모습의 자리에 나감에 대한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뵈뵈 집사를 통하여서 로마에 써보낸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서 정의하고 있고 그 가운데 첫 번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로마의 성도들의 신앙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감사하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과 그로 인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함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앞서, 먼저 복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롬 1:2)
이처럼 복음이라고 함이 그 아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서 어떤 중심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논쟁이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것입니다.
즉 믿음이라고 할 때에 그 믿음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신앙을 부끄러워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또한 참된 옳은 자리에 서지 못하는 거짓된 자리에 서는 모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할 때에 그 아들에 대한 바른 신앙과 그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가이사랴빌립보에서 고백한 그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
‘주님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며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모습과 현상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절대 정당한 자신의 거룩함으로 사람들이 살아 있는 형태로 사람들의 인식할 수 있는 형태의 모습과 인식적인 표현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써 오셨습니다.’ 라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은 육체로서 혈과 육이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것의 재가를 얻는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즉 그것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계신, 저를 자녀 삼으신, 구속의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식에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써 재가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상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유비적인 개념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표현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의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의 분별력이 없이 자신들의 상대적 입장을 상대적인 인식 가능성의 재가만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과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외에 전함에 따라 저주의 자리를 자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자존적으로 취하신 절대 정당함을 통하여 상대적으로도 하나님의 절대 의로우심을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내셨음에 대한 것을 사도 바울은 표현하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주 안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의 빚짐을 말하게 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사도로서의 마지막 전함의 대한 소명이 그의 빚짐의 먼저 증거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에 나타나는 그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에 있어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만으로 일관하거나 임의적인 내용으로 주님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옳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가 전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가 있던 그 신앙의 고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셔서 상대적인 모습으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써 우리 구주 예수님이심을 믿고 그의 의로우심과 의롭게 하심과 구원하심의 사실을 실제적으로 믿는 중심을 가지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개혁이라고 함을 사람들이 말하면서 어떤 분리 이탈만이 능사인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고 어떤 모자란 사람의 견해를 따라서 창조를 위해 기존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기존의 교회의 모습에 탈피를 말하는 새로움을 개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되고 악한 것입니다.
체제에 도전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개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다고 하여도 주께로부터 정당함을 찾는 중심이 있다고 하고 그리고 그것의 객관적인 것으로써 말할 수 있는 신실함이 나타난다고 하면 교회의 통일성의 한 개체적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의 신실성의 객관적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을 때에는 그러한 모습도 취할 수 있지만 그러한 형태만이 그리고 그러한 형태에서 비로소 개혁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참된 신앙의 자리에 서는 것인데 그것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로 인한 의로움의 실제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현실적인 실제에 나타나고 있음을 받으며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를 규정하고 받으며 누릴 수 있는 중심을 가질 때에 진정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이어가고 주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1:8-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전해진 신앙은 중요하게 받고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전통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 전통의 사실과 실제를 말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옳다는 것과 같은 것은 다 각기 다른 개념이면서도 같이 나타나는 현상적인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를 모두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이런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르면서도 옳게, 틀리면서도 옳게’, 또는 ‘다름을 인하여 거짓되게, 틀림을 인하여 거짓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로써 ‘다르면서 옳게, 틀리면서 옳게’라는 것은 하나의 통일성을 말할 수 있고 그러한 것은 믿음의 분량을 말할 수 있는 그야말로 통일성과 다양성이 조화되어진 교회의 모습으로 받을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다름을 인하여 거짓되게, 틀림을 인하여 거짓되게’ 나타남은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개혁의 사실을 말할 때에 분리적 입장의 사실을 취하여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31일에 루터의 면죄부 사건에 대한 토론을 위한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 ‘캐슬교회당’ 문에 붙임으로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그 종교개혁에 대한 분명하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증거로써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적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서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기본이 되어지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쉬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과 만나보기를 심히 원하였는데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견고케 하려 함과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는 길이 막혔지만 빚진 자로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심과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사도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로움이라고 함에 있어서 참된 종교개혁의 실재와 진정한 신앙의 모습의 자리에 나감에 대한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뵈뵈 집사를 통하여서 로마에 써보낸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서 정의하고 있고 그 가운데 첫 번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로마의 성도들의 신앙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감사하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과 그로 인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함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앞서, 먼저 복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롬 1:2)
이처럼 복음이라고 함이 그 아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서 어떤 중심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논쟁이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것입니다.
즉 믿음이라고 할 때에 그 믿음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신앙을 부끄러워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또한 참된 옳은 자리에 서지 못하는 거짓된 자리에 서는 모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할 때에 그 아들에 대한 바른 신앙과 그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가이사랴빌립보에서 고백한 그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
‘주님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며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모습과 현상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절대 정당한 자신의 거룩함으로 사람들이 살아 있는 형태로 사람들의 인식할 수 있는 형태의 모습과 인식적인 표현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써 오셨습니다.’ 라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은 육체로서 혈과 육이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것의 재가를 얻는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즉 그것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계신, 저를 자녀 삼으신, 구속의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식에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써 재가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상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유비적인 개념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표현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의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의 분별력이 없이 자신들의 상대적 입장을 상대적인 인식 가능성의 재가만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과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외에 전함에 따라 저주의 자리를 자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자존적으로 취하신 절대 정당함을 통하여 상대적으로도 하나님의 절대 의로우심을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내셨음에 대한 것을 사도 바울은 표현하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주 안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의 빚짐을 말하게 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사도로서의 마지막 전함의 대한 소명이 그의 빚짐의 먼저 증거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에 나타나는 그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에 있어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만으로 일관하거나 임의적인 내용으로 주님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옳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가 전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가 있던 그 신앙의 고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셔서 상대적인 모습으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써 우리 구주 예수님이심을 믿고 그의 의로우심과 의롭게 하심과 구원하심의 사실을 실제적으로 믿는 중심을 가지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개혁이라고 함을 사람들이 말하면서 어떤 분리 이탈만이 능사인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고 어떤 모자란 사람의 견해를 따라서 창조를 위해 기존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기존의 교회의 모습에 탈피를 말하는 새로움을 개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되고 악한 것입니다.
체제에 도전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개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다고 하여도 주께로부터 정당함을 찾는 중심이 있다고 하고 그리고 그것의 객관적인 것으로써 말할 수 있는 신실함이 나타난다고 하면 교회의 통일성의 한 개체적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의 신실성의 객관적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을 때에는 그러한 모습도 취할 수 있지만 그러한 형태만이 그리고 그러한 형태에서 비로소 개혁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참된 신앙의 자리에 서는 것인데 그것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로 인한 의로움의 실제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현실적인 실제에 나타나고 있음을 받으며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를 규정하고 받으며 누릴 수 있는 중심을 가질 때에 진정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이어가고 주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