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0월 10, 2005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2005년 10월 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1-11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사람들의 인식에 있어서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베풀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어떤 힘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베풀 힘이 없는데 무슨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힘을 기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생각해보겠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 가졌다고 하는 그 힘이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 있어야 남에게 베품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점에서는 분명히 말할 수 없고 또 다만 정도면에서 베풂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베풀기 인색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변명이 가능하고 또 베푼다는 것의 행위가 있어도 그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으로 그냥 식상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위로를 서로 베풂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식상해짐의 강요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안부 인사로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며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능히 환란 중에 있는 자를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심을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사도바울과 함께한 디모데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위로 하고 위로 받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구원과 그들 자신의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린도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음과 이는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었음을 알게 하셨다고 함을 증거하고 있고 또한 그와 같은 지금과 이후에도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줌으로 도울 것과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도 주께 감사할 수 있도록 사역을 위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전 1:4) 이 말씀의 실제적 의미라고 함의 증거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코가 석자나 빠진 주제..', '자기 발등에 불떨어진 줄도 모르고..'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삶의 완전하지 못해보이는 가운데서 남을 돕는다는 개념은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며 조소의 모습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 처지를 감안하지 않고 무분별한 도움이라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서 맹목적인 옹호를 말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당연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분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상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상대적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과 현실적인 당위성을 얻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번째 서신을 전제로 한 인식을 가진 교인들의 소식과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서 전에 보낸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서신을 전제로 한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옳은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가장 중심이 되어지는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에 관한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을 말하심의 정당함을 부여하는 기름부으심을 받은 주님의 부활에서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만물이 새롭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것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개연적으로 생각하고 개인적인 임의적 생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즉 성찬에 드려지는 포도주와 빵을 임의적으로 먹고 마시고 추태를 부린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부활의 실재와 실제의 합당함을 제대로 알지 못한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사실성이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하심 안에서 시간의 범위에서 비로소 판단 받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간 세월의 흐름 속에 판단되어지는 지워지는 상대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부활사실에서 읽게 되어지는 구속하심의 은혜의 풍부함과 그 사실은 우리의 현실의 크고 작음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 1:2)

사람들은 이러한 말이 아무 실재와 사실을 말하는 실제의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가공적 또는 형식적인 이야기로 인사하기 위한 합목적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냥 지나가고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고전 15장의 내용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 실제적인 증거와 위로와 인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고전 15장에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시비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명쾌히 답변하였는데 그러한 것 즉 그러한 질문과 회의가 일어나게 된 것은 상황적 정황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그 당시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볼 때에 그리고 고전 16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지역교회에 연보를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속된 표현으로 '고만 고만'한 자들 그렇게 유력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는 자들 연보하는 모습도 참 기만을 위한 것으로 읽혀질 수 있었던 정황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또 그 부활을 본 자들도 다 죽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렇게 성장한 지역교회의 모습도 아닌 교회들이 작은 가난한 교회에 연보한다고 하는 모습들은 그 부활이라고 하는 것에 기만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가능하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부활의 논의를 정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사람들의 말이 득세할 수 있는 정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세월속에 묻혀버릴 부활의 사실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으로 시간의 판단을 받지 않는 사실로써 세월속에 그 뜻하신 바를 나타내셨다는 것과 그것을 인하여서 그 말씀하심 안에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얻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고린도 후서 1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냥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진정한 사실을 의지하게 되는 은혜가 있으라는 축복의 실제적인 사실을 증거하며 동시에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실재와 실제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그의 사역속에 어떻게 나타난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의 실제라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사도 바울은 그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를 위로하시고 또한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비록 '제 코가 석자나 빠졌다..', '자기 발에 불이 떨어진줄도 모르고..'라는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인 판단과 그러한 인식의 강요를 받게 된다고 하여도 하나님 안에서 분별할 때에 그 섬김으로써 도움이 합당하다는 판단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식상할 수 있는 현실에서의 능히 남을 도울 수 있고 능히 위로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의 연합과 교제를 믿음으로 행할 수 있고(시 133:1)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받들 수 있는 것입니다.(사 40:1, 사 49:3)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하심으 받들 때에 그 사랑의 위로를 나타내며 교제를 행할 때에 어떤 무분별한 그러한 행함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별을 함에 있어서 상황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에서 비로소 그 판단의 사실을 말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의 뜻하심 안에서 행함에 당위성을 살피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의 작은 도움의 손길도 내밀어서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지는 종들의 증거와 위로로 협력하여 주의 뜻하심을 이루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의 작은 삶들.. 넉넉함과 빈곤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들이라고 할 때에, 비교판단하여서 할 수 있음의 여부를 비로소 판단하는 것에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믿음으로 잘 분별하여서 사르밧 여인의 한줌의 가루같은 것으로도, 벳세다 들녁의 사도를 통한 어린아이의 오병이어의 모습으로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참으로 능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귀한 주의 종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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